가수 조영남의 <모란 동백>이라는 노래가 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경박함에다 아무 말이나 뽄새없이 내뱉는통에 싫어하는 가수인데, 그가 부른 <제비> <옛생각> <그대 그리고 나> <모란 동백> 등 몇 곡의 노래만큼은 좋아한다. 특히 <모란 동백>은 곡, 가사할 것없이 모두가 좋아 언제 들어도 느낌이 알싸하고, 정감이 넘쳐 지루하지가 않다.

연전에 한겨레신문에 시인 안도현이 쓴<모란 동백>이라는 글이 실렸다. 소설가 이제하 선생과 <모란 동백>에 얽힌 내용이었다. 이 글 보고 알았는데 <모란 동백>의 가사를 쓴 이가 다름아닌 이제하 선생이란다. 그렇잖아도 가사가 워낙 싯적이어서 대체 누가 썼지, 궁금했는데 이제야 답이 풀렸다.

안도현에 따르면, 1998년에 나온 시집 <빈 들판>(나무생각)의 초판에 덤으로 CD가 한 장 끼여있고, 여기에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노래였단다. 이 CD에 이제하 선생이 직접 기타 반주로 노래 하는데, 재미있는건 선생의 고향이 경상도다보니 안도현의 귀에는 경상도 억양으로 원래 가사와 다르게 들린단다. 가령 이런 식으로....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퍼라
나 어너 변방에 뜨돌다 뜨돌다
어느 나무 그널에~
고요히 고요히 잠던다 해도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

말 나온김에 이제하 선생과 관련한 짧은 에피소드 하나 소개한다. 80년대 중반,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오송회 간첩단사건> 여러분께서는 기억하실게다. 결국 조작으로 판명났지만 당시만해도 실제 간첩사건으로 오해한 이가 많았고, 워낙에 서슬퍼런 시절이라 조작이든 아니든 감히 입에 올리질 못했다.

어느날이던가 전주 카톨릭센터에서 사건의 핵심 주동자로 몰렸던 이광웅 선생의 시집 <대밭>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당시 이광웅 선생은 감옥에 구금된 상태라 동고등학교 미술 선생으로 재직하던 아내 김문자 선생이 대신 나오셨다.

강연장 밖은 무장한 경찰들이 삼엄하게 진을 쳤고, 아직 진행중인 간첩단사건이라 비록 출판기념회긴 했지만 사뭇 침묵이 감돌고 비장하기까지 했다. 때가 때인지라 참석한 이들도 시인 고은 선생, 소설가 황석영을 비롯해서 진보 인사가 대부분이었다. 기념회가 시작되자 고은 선생이 검정 싱글차림으로 축사를 했고, 몇몇 다른 이들의 축사가 이어졌다.

한동안 축사가 진행되던 중 사회자가 이제하 선생을 거명했다. 원래 선생께서 축사를 하기로됐는데, 불가피한 일이 생겨 사회자가 대독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하 선생의 불참의 변이 하도 특별해서 지금까지 뚜렷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선생의 자녀가 초등학교에 다니는데, 공교롭게도 출판기념회가 열리는 날 함께 놀러가기로 약속했단다. 아빠로서 약속을 어길 수 없기에 참석하지 못하고 대신 축사를 전한다고 했다.

사회자의 말이 마이크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나는 의아했다. 상식적으로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억울하게 간첩으로 내몰린 시인이 감옥에 있고 가정은 이미 풍비박산이 났으며, 어렵게, 참으로 어렵게 출판기념회를 열었지 않은가. 더구나 이광웅 선생의 아내는 이제하 선생과 같은 서라벌예대 동문이다. 그런데도 자녀 약속때문에 참석하지 못한다니 기막힐 노릇이었다.

그후로 두고두고 이 일이 떠올랐다. 나는 당시 이제하 소설집 <초식>을 애독한 독자였기에 소설가로서의 이제하를 각별히 여겼던 터라 쉽게 이해가질 않았다. 이제하의 처신은 과연 옳은가 그른가.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나는 이제하를 이해하게 되었다. 보다시피 이제하라는 이름 앞에 소설가라는 직함이 붙었다. 그는 당시 어두운 시절을 함께 해야하는 지식인 이기 이전에 한 자녀의 아빠이며 예술을 창조하는 소설가이기도 하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자신이 아닌 타인, 즉 세상과 국가를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기에 앞서 가정이나 개인은 더욱 소중하다. 더욱이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관에 따라 삶의 가치관, 행동이 달라진다. 가령, 소설집 <초식>에서 보듯 소설가 이제하는 사회적 이슈를 주제화하는 사회파 소설가라기 보다 개인의 내면, 예술의 탐미적 세계를 천착하는 예술파 작가다. 그들은 자신의 예술관에 따라 아무리 거창한 국가, 사회적 문제가 대두되더라도 당장 눈앞의 시국문제를 천착하기 보다, 개인 혹은 개인의 내면이 우선시되고, 공익적이거나 사회에 유익한 이데올로기라도 거부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으로 이제하의 불참의 변을 이해하고보니 비록 당시는 야속했지만 수긍이 갔고, 평생 문학을 가까이 하는 나로서는 종종 개인과 사회라는 대립된 문제를 생각할때마다 이제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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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범위, 나아가 지적 탐구의 영역을 좀 좁힐 필요가 있다. 역량에비해 과도한 관심을 갖다보면 감당하기가 쉽지않고, 주마간산격이다보면 피상적으로 흐를 염려가 있다. 그러므로 지적호기심이 제아무리 왕성할지라도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적당한 수위조절이 필요하다. 일단 어느 한 가지 영역에 관심을 집중하되, 어느정도 마무리 된후 그 다음 관심으로 옮겨가야한다. 적당한 호기심은 필요하되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한법 아니겠는가? 그동안 해온 방식은 이렇다.

1) 어느 한 가지 주제에 관심을 갖는다
2) 그 방면의 책과 정보를 집중적으로 수집한다.
3) 공부하고 읽는다(여기까지는 애초에 시작한 한 가지 대상에 국한된다)
4) 그러다 다른 관련 주제가 나오면 슬며시 관심이 옮겨간다.
5) 앞에서 한것처럼 바뀐 주제 관련 책과 정보를 또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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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문학비평의 애독자로 자처하는 나는 간혹 인상비평 수준의 글을 쓴다. 본격적으로 비평공부를 하지 않은 탓에 문학이론은 비껴가고 대신 작품의 본문만을 꼼꼼히 읽은 후 느낀바를 이렇게 저렇게 서술한다. 뭐 독후감 쓰기나 다를바 없는데 좀 자세히 말하면, 먼저 작품에 대한 소감을 간단히 서술한 후, 서술한 내용을 바탕으로 거기에 맞는 본문의 일부를 인용한다. 아울러 인용한 문장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피력하면서 앞서 거론한 소감에 부피를 더하는 식이다.

그런데 글을 쓸때마다 종종 경험하는 것은 과연 내가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고 쓴건지 내 스스로가 의아하거나 자신이 없을 때가 있다. 중언부언 그럴듯하게 써내긴하지만 과연 내가 쓴 글이 작품이 지닌 의미를 객관적으로 전달했을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물론 이해의 결과란 글쓰는 이의 주관적인 결과물이라지만 과연 작품이 지닌 의미를 객관적으로 타당하게 전달했는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무신론자인 나는 가끔 교회 다니는 이들을 만나면 성경을 인용하면서 교회에 나오라고 다그침을 받곤한다. 대개는 오래 교회에 나갔거나 신앙심이 깊다는 분일수록 더 그러는데, 그때마다 적당한 성경귀절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말을 이어 붙인다. 아마 이게 형식을 갖추고 발전하면 목회자의 설교문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저들이 말한 성경 인용이 과연 본문을 맞게 해석한것인지 따져보고싶지만 이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언제 성경을 가져다놓고 따질것이며, 성경 해석을 제대로 한것인지 별도로 주석을 참고해야할텐데 이 복잡한 일을 언제 한가하게 따질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러니 그들의 열변에 찬 말을 일방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교인들은 매 주일 목회자의 설교를 듣는다. 목회자는 설교 때 으레 성경의 일부 본문을 인용한 후 거기에 맞춰 설교를 하는데, 이때 신도들은 목회자의 설교를 일체 의심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누구 한 사람 목회자가 지금 성경 본문 해석을 제대로 한것인지, 잘 못 해석한것인지, 그래서 지금 하는 설교가 인용한 성경 내용과 맞는지, 맞지 않는지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다. 아니 감히 할 수가 없다. 무조건 아멘, 무사 패스다.

나는 개인적 호기심으로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발간한 60권짜리 성서주석을 구입한적이 있다. 나중에 안 것인데, 성서이해는 단순히 성서주석이 있다고해서 다 해결되는게 아니었다. 그에 앞서 목회자가 어떤 신학교 출신이며 거기서 어떤 신학을 공부 했는지, 다시 말해 보수적인 신학을 했는지 진보적인 신학을 했는지에 따라 성경 해석이 달라진다. 왜냐면 성서주석이 여러 가지고 이때 주석을 기술한 신학자가 진보적이냐 아니면 보수적이냐에 따라 그 성서해석의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오늘자 한겨레신문에 ‘책지성팀’ 김지훈 기자의 < 오늘의 기독교 묵상> 이라는 칼럼이 눈길을 끌었다. ‘기독교 묵상’이라고 하기에 어느 목회자거나 성서학자겠지 했는데 책지성팀 기자의 글이라 더욱 호기심이 갔던거다.

"오늘날 사탄은 부모에게서 청년을, 남편에게서 아내를, 주님에게서 교회를 독립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어느 지인으로부터 그가 다니는 교회 목사가 ‘오늘의 묵상’이라며 쓴 글을 받았는데, 이 목사의 ‘묵상’에서 인용한 성서 본문은 히브리 성서(구약) 중 <에스더서>의 서두에 나오는 와스디 왕후의 이야기였다고 한다. 다음은 칼럼의 일부 내용이다.

“주전 5세기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로 추정되는 아하수에로 왕 즉위 3년. 왕이 모든 귀족과 신하들을 불러모아 180일 동안 성대한 잔치를 열고, 그 잔치가 끝난 뒤 다시 7일간 도성에 있는 백성들을 왕궁 안뜰로 불러 잔치를 열었다. 잔치 마지막날 왕은 술을 마시고 기분이 좋아져 와스디 왕후를 불렀다. 왕후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왕후는 왕의 부름을 거절하고 왕에게 가지 않았다. 성서에서는 왕후가 이를 거절하는 이유를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성서에 왕후가 부인들끼리 잔치를 열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왕후 역시 술을 많이 마셔서 취한 상태로 배짱을 부렸다든지, 잔치를 오래 치르느라 피곤했다든지 추측만 해볼 뿐이다.

이 본문을 가지고 목사는 <와스디는 한 사람의 아내로서 왕이 춤추라고 하면 춤추고, 오라고 하면 순종하면 됩니다. 오늘날 ‘해방이다 자유다 민주화다'라는 말만 내걸면 나이든지 성별이든지 상관없이 그저 막무가내로 날뜁니다! 질서가 다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이 거대한 혼돈의 세력을 분별하려면 좌우에 날 선 검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쪼개 주어야 합니다!>고 설교를 했단다. 일간지 기자가 엔간한 성서학자보다 성서지식이 더 많은듯해서 놀라웠는데, 계속해서 칼럼을 쓴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에스더서>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은 신에게 선택받았다는 믿음과 타국에 포로로 끌려간 모순적인 상황에서 신앙과 민족적 동질감을 잃지 않기 위해 ‘정신 승리’를 목적으로 창작됐을 짧은 이야기다. <에스더서> 전체 이야기는 페르시아 땅에서 유대민족을 멸절하자는 한 신하의 청을 아하수에로가 승인하는데, 유대민족 출신의 새 왕후 에스더가 이를 저지해 대반전을 일으키는 내용이다.일 년 중 하루를 정해 유대민족을 죽이려 했던 이들의 일가족을 몰살하고 재산을 빼앗을 수 있게 했다는, 현대인의 관점에선 문제적인 대목도 있다. 이런 성서를 2000년간 섬세히 발전해온 기독교신학 체계의 도움 없이 읽고 해석하는 목사와 신도들의 태도는 무지하고 무모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한국 개신교의 특징 중 하나인 이런 반지성주의는 사회 전체적으로는 악영향을 끼치고, 자신들의 존립도 위태롭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떤 교회들은 교인들에게 박근혜 탄핵에 반대하는 맞불집회 참여를 독려했고, 어떤 목사들은 집회에 나와 대형 십자가를 이끌고 퍼레이드를 벌였다. 장로교회 중 세계 최대 규모인 명성교회의 김삼환 목사는 북한의 3대 세습을 비판하면서도 담임목사직을 아들 김하나 목사에게 세습해 일부 교인들마저 반발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와 반지성주의의 관계, 기독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관해서 다룬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미국의 반지성주의>와 존 셸비 스퐁의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를 권한다.“ 며 칼럼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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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글은 작가 자신이다. 특히 필자의 신변사가 자주 노출되는 에세이는 에세이스트의 체취, 성향, 가치관은 물론이고 심지어 그가 했을법한 몸짓 말짓까지 모두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황현산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난다, 2017)와 고종석 에세이 선집 <사소한 것의 거룩함>(알마, 2016), 박완서 에세이집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문학동네, 2015)를 교대로 읽고있다.

황현산의 에세이의 특징은 모랄의식, 예술적 심미안, 시적 산문, 비평적 관점, 철학적 사유, 하층민에 대한 따뜻한 관심 등으로 요약된다면, 고종석의 에세이는 저널리즘적 관점, 에로티시즘, 솔직성, 쾌락, 지적 다양성, 글로벌한 지식과 시각, 직설적 화법, 자유주의, 다양한 장르의 글을 쓴 이력을 반영하듯 재치발랄한 문장력이 돋보인다. 그렇다면 에세이스트로서 박완서는 어떤가.

앞에서 말한대로, 비단 박완서뿐 아니라 모든 에세이는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가 반영된다고 했는데, 이 말은 박완서의 에세이에 유독 두드러진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박완서 에세이가 이른바 미셀러니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신변잡기로 통하는 미셀러니는 한국 에세이의 특징- 아마추어 에세이는 100프로 미셀러니이고, 그들 자신조차 미셀러니를 에세이로 착각한다- 이랄 수 있는데, 이점은 박완서도 마찬가지다.

박완서의 에세이를 읽다보면 마치 점잔케 나이든 중년의 부인과 담소를 하는 느낌이다. 꽃을 사랑하고, 눈에 보일듯말듯 소소한것들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인간사 곡절들을 동짓달 기나긴 밤을 새듯 굽이굽이 펼쳐놓고, 어느것 하나 소홀함 없이 연민과 따스한 눈길이 곳곳에 배어있다. 나이든 누님, 마음씨 곱고 섬세한 어느 친척 어른에게서 듣는 인생담, 그게 박완서 에세이를 읽는 큰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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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방정인지 술이 문제인지 원~ 트럼펫 레슨 9개월째 벼르던 끝에 레슨 샘을 술자리에 모셨다. 오나가나 문제는 요놈의 주량인데 40대 한창 나이인 샘은 소주 세 병, 나는 스승님 기대 부응한답시고 한 병, 사단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아다지오, 알레그로, 프레스토 순으로 술잔은 돌고 돌고 또 돌고, 급기야 취기가 화악~

나의 큰소리가 시작됐다.

"샘~ 내 비록 아마추어지만 독주회를 기어이 열어야겠슴다. 이거 쉬운 일 아니겠죠? 아마 전국적으로도 뉴스꺼리일텐데 함 해봐야겠슴다. 꺼억~ "

스승님은 어이가 없는지 "3년후에나 가능합니다!" 한 마디로 쐐기를 박았지만 눈치코치없는 제자는 "한다면 합니다. 저는 원래 그런 사람입니다." 큰소리 열변을 토했더니 감동때문인지 제자 사기진작 차원인지 스승께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이때부터 스승과 제자는 뜬구름 같은 독주회를 앞두고 훔멜이 좋다. 아니다 하이든이다. 소품도 하나 넣어라 운운. 그러면서 소주 한 잔 또 꼴깍. 정말 문제는 이 지점부터였다.

언젠가부터 샘은 은근히 내 트럼펫을 못마땅해하는 눈치였다. 하기사 10년이 넘은 낡은 악기인데다 구입할 당시도 중고였으니 그럴만 했다. 조 샘 뭐 꼭 악기가 나쁘다는게 아니라, 소리가 어째 시원하게 빠지질 않네요. 원래 실력있는 사람은 연장 탓 하지 않는다지만 그래도....아~ 누군 바꾸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한 달 레슨비조차 만만치 않은 이즈음은 아내 눈치보기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악기를 바꾸라니!

술잔이 몇 순배 더 돌자 발동이 제대로 걸렸다. 제자의 호기어린 큰 소리는 계속되었으니. 저 오늘 기분 아주 좋슴다. 술맛 좋고 샘 모시고 정말 좋슴다. 어쩌고 저쩌고~ 그러다 해서는 안 될 말을 기어이 하고 말았다.

그동안 망설이던 중고악기 내던지고 새악기 구입하겠노라. 것도 직업연주자조차 꺼린다는 유럽형 로터리 트럼펫을 구입하겠노라. 비록 고가이고 다루기도 힘들지만 기왕할바에 악기라도 폼나야 하지 않겠냐. 그러자 샘은 제자가 기특했는지 "암만요. 그래야지요. 조샘 대단대단 합니다. 모험심 열정 모두 대단합니다. 파이팅!" 그러고는 또 소주 한 잔 꼴깍.

은파호수 모퉁이 족발집. 겨울밤 호수 위로 별빛은 찬란하고, 휘청휘청 걸으며 늦은밤 기분좋게 헤어지고... 이틑날 새벽 간밤 술자리를 떠올리니 한숨부터 나왔다. 아~ 큰일났다. 독주회는 무신 독주회. 이게 무슨 자다 봉창 뜯는 소리란 말인가. 700만원을 호가하는 로터리 트럼펫을 사겠다고? 로터리는커녕 300짜리 바하도 못 사면서? 게다가 당장 아내한테 10만원도 못 타내는 실정 아닌가. 하지만 스승님께 큰소리 쳤으니 이미 엎지러진 물이다.

그나저나 독주회는 어떻게 해야하나? 이 걱정 저 걱정으로 잠은 달아나고. 에라, 독주회는 나중 일이니 우선 트럼펫부터 바꾸자. 아침 준비하는 아내에게 슬며시 "저기 레슨 샘께서 트럼펫 바꾸라 하더라고. 실력은 좋은데 악기가 안 좋아서 코맹냉이 소리가 난대" 어쩌고 저쩌고....

그러자 아내 왈. "시끄러워욧! 시방 때가 어느땐데, 우리 집 살림살이가 얼마나 어려운데, 심판도 모르고 당신 제 정신이우? 당장 레슨부터 그만둬욧! " 쌩 날벼락을 맞고 한 마디 말도 못하고 속으로만 웅얼웅얼~ 아 독주회 말은 아직 꺼내지도 못했는데, 담주 레슨 샘 어떻게 만나지. 로터리 가격 알아봐 달라고 했는데, 나는 한번 한다고 하면 하는 사람이라고 큰소리 쳤는데, 아내는 내 손에 꽉 잡혀있고, 남편 하라는대로 하는 여자라고 했는데. 아~ 나는 이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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