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문학비평의 애독자로 자처하는 나는 간혹 인상비평 수준의 글을 쓴다. 본격적으로 비평공부를 하지 않은 탓에 문학이론은 비껴가고 대신 작품의 본문만을 꼼꼼히 읽은 후 느낀바를 이렇게 저렇게 서술한다. 뭐 독후감 쓰기나 다를바 없는데 좀 자세히 말하면, 먼저 작품에 대한 소감을 간단히 서술한 후, 서술한 내용을 바탕으로 거기에 맞는 본문의 일부를 인용한다. 아울러 인용한 문장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피력하면서 앞서 거론한 소감에 부피를 더하는 식이다.

그런데 글을 쓸때마다 종종 경험하는 것은 과연 내가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고 쓴건지 내 스스로가 의아하거나 자신이 없을 때가 있다. 중언부언 그럴듯하게 써내긴하지만 과연 내가 쓴 글이 작품이 지닌 의미를 객관적으로 전달했을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물론 이해의 결과란 글쓰는 이의 주관적인 결과물이라지만 과연 작품이 지닌 의미를 객관적으로 타당하게 전달했는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무신론자인 나는 가끔 교회 다니는 이들을 만나면 성경을 인용하면서 교회에 나오라고 다그침을 받곤한다. 대개는 오래 교회에 나갔거나 신앙심이 깊다는 분일수록 더 그러는데, 그때마다 적당한 성경귀절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말을 이어 붙인다. 아마 이게 형식을 갖추고 발전하면 목회자의 설교문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저들이 말한 성경 인용이 과연 본문을 맞게 해석한것인지 따져보고싶지만 이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언제 성경을 가져다놓고 따질것이며, 성경 해석을 제대로 한것인지 별도로 주석을 참고해야할텐데 이 복잡한 일을 언제 한가하게 따질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러니 그들의 열변에 찬 말을 일방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교인들은 매 주일 목회자의 설교를 듣는다. 목회자는 설교 때 으레 성경의 일부 본문을 인용한 후 거기에 맞춰 설교를 하는데, 이때 신도들은 목회자의 설교를 일체 의심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누구 한 사람 목회자가 지금 성경 본문 해석을 제대로 한것인지, 잘 못 해석한것인지, 그래서 지금 하는 설교가 인용한 성경 내용과 맞는지, 맞지 않는지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다. 아니 감히 할 수가 없다. 무조건 아멘, 무사 패스다.

나는 개인적 호기심으로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발간한 60권짜리 성서주석을 구입한적이 있다. 나중에 안 것인데, 성서이해는 단순히 성서주석이 있다고해서 다 해결되는게 아니었다. 그에 앞서 목회자가 어떤 신학교 출신이며 거기서 어떤 신학을 공부 했는지, 다시 말해 보수적인 신학을 했는지 진보적인 신학을 했는지에 따라 성경 해석이 달라진다. 왜냐면 성서주석이 여러 가지고 이때 주석을 기술한 신학자가 진보적이냐 아니면 보수적이냐에 따라 그 성서해석의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오늘자 한겨레신문에 ‘책지성팀’ 김지훈 기자의 < 오늘의 기독교 묵상> 이라는 칼럼이 눈길을 끌었다. ‘기독교 묵상’이라고 하기에 어느 목회자거나 성서학자겠지 했는데 책지성팀 기자의 글이라 더욱 호기심이 갔던거다.

"오늘날 사탄은 부모에게서 청년을, 남편에게서 아내를, 주님에게서 교회를 독립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어느 지인으로부터 그가 다니는 교회 목사가 ‘오늘의 묵상’이라며 쓴 글을 받았는데, 이 목사의 ‘묵상’에서 인용한 성서 본문은 히브리 성서(구약) 중 <에스더서>의 서두에 나오는 와스디 왕후의 이야기였다고 한다. 다음은 칼럼의 일부 내용이다.

“주전 5세기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로 추정되는 아하수에로 왕 즉위 3년. 왕이 모든 귀족과 신하들을 불러모아 180일 동안 성대한 잔치를 열고, 그 잔치가 끝난 뒤 다시 7일간 도성에 있는 백성들을 왕궁 안뜰로 불러 잔치를 열었다. 잔치 마지막날 왕은 술을 마시고 기분이 좋아져 와스디 왕후를 불렀다. 왕후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왕후는 왕의 부름을 거절하고 왕에게 가지 않았다. 성서에서는 왕후가 이를 거절하는 이유를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성서에 왕후가 부인들끼리 잔치를 열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왕후 역시 술을 많이 마셔서 취한 상태로 배짱을 부렸다든지, 잔치를 오래 치르느라 피곤했다든지 추측만 해볼 뿐이다.

이 본문을 가지고 목사는 <와스디는 한 사람의 아내로서 왕이 춤추라고 하면 춤추고, 오라고 하면 순종하면 됩니다. 오늘날 ‘해방이다 자유다 민주화다'라는 말만 내걸면 나이든지 성별이든지 상관없이 그저 막무가내로 날뜁니다! 질서가 다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이 거대한 혼돈의 세력을 분별하려면 좌우에 날 선 검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쪼개 주어야 합니다!>고 설교를 했단다. 일간지 기자가 엔간한 성서학자보다 성서지식이 더 많은듯해서 놀라웠는데, 계속해서 칼럼을 쓴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에스더서>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은 신에게 선택받았다는 믿음과 타국에 포로로 끌려간 모순적인 상황에서 신앙과 민족적 동질감을 잃지 않기 위해 ‘정신 승리’를 목적으로 창작됐을 짧은 이야기다. <에스더서> 전체 이야기는 페르시아 땅에서 유대민족을 멸절하자는 한 신하의 청을 아하수에로가 승인하는데, 유대민족 출신의 새 왕후 에스더가 이를 저지해 대반전을 일으키는 내용이다.일 년 중 하루를 정해 유대민족을 죽이려 했던 이들의 일가족을 몰살하고 재산을 빼앗을 수 있게 했다는, 현대인의 관점에선 문제적인 대목도 있다. 이런 성서를 2000년간 섬세히 발전해온 기독교신학 체계의 도움 없이 읽고 해석하는 목사와 신도들의 태도는 무지하고 무모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한국 개신교의 특징 중 하나인 이런 반지성주의는 사회 전체적으로는 악영향을 끼치고, 자신들의 존립도 위태롭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떤 교회들은 교인들에게 박근혜 탄핵에 반대하는 맞불집회 참여를 독려했고, 어떤 목사들은 집회에 나와 대형 십자가를 이끌고 퍼레이드를 벌였다. 장로교회 중 세계 최대 규모인 명성교회의 김삼환 목사는 북한의 3대 세습을 비판하면서도 담임목사직을 아들 김하나 목사에게 세습해 일부 교인들마저 반발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와 반지성주의의 관계, 기독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관해서 다룬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미국의 반지성주의>와 존 셸비 스퐁의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를 권한다.“ 며 칼럼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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