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엘리스라는 미국의 신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 과거 '정의구현사제단'이 이른바 인권과 민주화, 민생을 위해 일했는데 정말 당신들이 뛰어서 교회가 변했느냐고 묻더라. 2000년 전에 예수님은 당시 정통 유대교에 맞서 싸우다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는데, 여러분이 예수를 따르는 진정한 사제라면 문제 많은 이 가톨릭교회를 떠날 것을 각오해야 한다고 했다. 당신들이 없으면 미성숙한 교회가 빨리 망할텐데 당신들이 자꾸 수혈해주니까 안 망한다고 질타했다. 또, 예수님은 브로커 없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는데 그동안 생겨난 것은 온통 브로커뿐이라고 하더라.

(...)우리 시대 교회는 자본주의와 손잡고 있지 않나. 조금 과한 표현으로 하자면 자본주의의 하수인이나 노예가 됐다. 교회가 자본주의를 정화시켜야 하는데 오히려 자본주의의 부스러기로 먹고 살고 있다.

(...) 가톨릭이 19세기 말의 사상가였던 칼 마르크스를 껴안았더라면 아름다워졌을 텐데 안타깝다. 가톨릭이 마르크스를 배척했던 이유로 내세운 것은 그가 무신론자라는 거였는데 명분만 그랬고 실제로는 공유(共有)사상 때문이었다. 만약 마르크스의 공유사상을 가톨릭이 껴안았더라면 세상은 많이 바뀌었을 거다. 이것은 여러 신학자들이 한 애기이기도 하다.

요즘 교회가 물신화되고 있을 뿐 아니라 성소수자나 이슬람, 여성 등 약자를 구박하고, 혐오하는데 앞장서기까지 한다. 그것은 기독교나 불교 등 종교의 신앙 수준이 아직도 좀 미숙한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나 부처님 모두 약자에 관심을 가진 분들인데 오늘의 종교 책임자들은 그 핵심을 놓치고 있다. 대신 종교 자체를 기업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교회세습까지 하고 있다. 공동체 원리를 망각하고, 상업적 논리만을 따라간다.      - 함세웅 신부 인터뷰(한겨레신문. 2018.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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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에 의하면, 종교개혁기에 기독교는 자본주의의 흥기에 유리한 여건을 마련했다기보다, 기독교 자체가 자본주의로 변형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순전히 제의로만 이루어진, 교리도 없는 종교라고 한다. 서구에서 자본주의는- 칼뱅주의에서뿐만 아니라 나머지 정통 기독교 교파들에서도 입증되어야겠지만 - 기독교에 기생하여, 끝내는 기독교의 역사가 그것의 기생충인 자본주의의 역사가 되는 형태로 발전해왔다는 거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자본주의 교리의 신자이고, 이 신자는 이윤창출이라는 제의를 신성하게 받들면서 돈벌이를 한다. 하지만 빚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일하는 만큼 돈을 받을 수 없고, 설령 받는다고 해도 소비의 양이 임금보다 많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소비체제는 수입보다 지출이 많도록 부추겨지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임금과 소비, 노동과 욕망 사이에는 메꿀 수 없는 간극이 자리한다. 바로 이 간극이 빚을 영원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문제는 자본주의의 종교적 성격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여 자본주의로 변형되어버린 기독교, 또는 기독교마저 흡수한 자본주의이고, 기독교화한 자본주의 신화다. 기독교의 근대적 역사는 자본주의의 발생의 역사다."  -  문광훈 <가면들의 병기창>(한길사) 304~3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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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근래 독서는 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먼저 발터 벤야민, 다른 하나는 조셉 콘라드, 마지막으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이다. 벤야민을 시작한건 세 달 전이다. 일단 세 단계로 진행할 계획인데, 첫 단계인 발터 벤야민 관련 강좌 수강은 대충 끝냈다. 계속해서 2차서와 평전읽기를 하는 중이다. 사진에서 보듯, 요즘은 베른트 비테의 <발터 벤야민> 전기와 문광훈 교수의 <가면들의 병기창>을 읽고 있다. 

왜 벤야민인가? 딱히 뚜렷한 이유는 없다. 다만 일전에 어느 글에서 말한대로 유물론과 신학을 결합한 독특한 발상이 호기심을 끌었던게 첫 번째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읽으면서 알았는데, 19세기 파리를 대상으로 한 그의 주저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구성 또한 워낙 특이한것 같다. 몽타주, 남의 글 인용으로 뒤범벅한 이 책이 풍기는 아우라가 예사롭지 않다. 그밖에도 이미지적 글쓰기를 비롯해서 문학, 철학, 사회, 역사, 사진, 신학, 매체학, 영상 등 전방위적인 관심과 글쓰기 또한 관심을 끈다. 뭐니뭐니해도 19세기 파리와 전혀 다를것 같지 않은 한국의 서울 역시 자본주의의 온갖 폐해가 고스란이 드러난 곳이기 때문에 그의 글과 사상은 이 시대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클것 같다.

조셉 콘라드는 우선 해양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쓴데다 직접 선장까지 한 이력이 호기심을 끌었다. 물론 허먼 멜빌이나 헤밍웨이도 바다를 소재로 한 바 있지만 비중으로 치면 조셉 콘라드가 단연 위다. <로드 짐>에서 알수 있듯 그의 뱃생활 경력은 그의 소설을 단순한 소재 차원으로 국한하지 않고, 바다와 배를 중심으로 한 고립된 인간들의 삶의 앙태를 묘사하는데 큰 강점으로 작용케 한다. 

과거 국내 소설가 중에 원양어선 선장생활을 했던 천금성이라는 이가 있었지만 전형적인 소재주의 작가에 불과했다. 하지만 조셉 콘라드는 단지 바다와 배를 소재로 했달뿐이지 그의 문학에서 바다와 육지는 전혀 다르지 않다. 즉 바다나 배는 인간군상이 살아가는 장소에 불과할뿐 육지나 다를바 없다는거다. 그래서 나의 계획은 다른 작가라면 몰라도 조셉 콘라드만큼은 전작 읽기를 시도할 작정이고, 나아가 평전, 2차서까지 모두 완독해볼까한다.

마르케스의 소설 <백 년의 고독>이야 굳이 거론하지 않아도 뛰어난 작품임은 자타가 공인하는바다. 나는 과거 문학사상사에서 출간한 안정효 번역판으로 읽은바 있지만, 그때만해도 이 소설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뛰어난 소설, 현대의 고전이라도 예찬했지만 도무지 왜 좋은 소설인지 알아보질 못한거다. 그만큼 나의 문학 이해력은 형편없었다. 최근 다시 도전한 마르케스의 소설은 역시 최고의 작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 절반쯤 읽은 상태인데, 이 정도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뛰어난 작가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단박 매력을 느꼈으니 이 한 편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칸투스 독서회 토론작으로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선정했다. 아무래도 독서회 회원들의 독해력으로는 <백 년의 고독>보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 좀 수월할 것 같아서다. 더욱이 마이크 뉴웰 감독의 동명 영화가 있어 함께 감상할 기회도 갖을겸 아쉽지만 이 책을 읽기로 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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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률 감독의 <경주>는 부조화에 관한 영화이다. 삶과 죽음, 현대도시와 무덤, 과거와 현재, 찻집의 춘화 등 전혀 조화될것 같지 않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그윽한 분위기의 찻집 속의 춘화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은 배치다. 스피디한 시대를 배경으로 찻집이 중심에 있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전혀 이질적인 요소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남녀의 사랑에서도 나타난다. 한 잔 마시고 하세. 느릿함, 여유랄까. 관조의 미학이랄까. 그것은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경주라는 한적한 소도시의 이미지하고도 부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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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능력은 한 분야에 제한되어선 곤란하다. 그것은 하나의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옮아가는 것이어야 하고, 자기 영역 이외의 분야에도 열려 있어야 한다. 주인공 크네히트(헤르만 헤세 <유리알 유희>)가 음악을 통해 모든 사물과 형상 사이에서 내적 일치를 추구하는 것은 이 같은 보편적인 욕구 때문이다. 참된 교양 능력은 다양한 현상계의 상호 모순된 모습을 하나로 수렴시키고자 하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보편적 형성력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자기 분야에만 틀어박힌 채 자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좁은 울타리를 부수고 더 넓고 깊은 영역들을 향해 나아가려고 애쓸 때, 나아가면서 이 영역들 사이의 통일성을 모색할 때, 우리는 참으로 교양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 문광훈 <조용한 삶의 정물화>, 184-1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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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애보 같은 사랑이 어데있겠냐고,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해 평생을 기다릴 사람이 어데있겠냐고. 영화나 소설이라면 모를까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다고. 그래서 남녀의 순진무구하고 절절한 사랑은 환상이거나 불가능한 일로 치부된다.  마이크 뉴웰 감독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이런 사랑의 의미를 영화를 통해 구현한다.  

사랑은 결국 결혼으로 지속되지만 안정을 담보로 한 행복에 불과하다. 착각하지 말자. 결혼은 사랑을 빙자한 안정이라는 것.  세상 사람 99프로가 그렇듯 페르미나 다사 역시 사랑의 환상을 믿지 않는다. 그러기에 불확실한 사랑이 아닌 생활의 안정을 택하지만 우르비노 박사와의 결혼생활은 세상 모든 부부가 그러듯 갈등의 연속이다. 그러면 순애보 같은 사랑은 정말 없단 말인가? 앞에서 말한바대로 그건 환상이고 픽션이기에 소설이나 영화 속에나 있을뿐이다.

우르비노 박사의 장례식이 끝나자 어느덧 70중반의 노인이 된 플로렌티노가 다사 앞에 나타난다. 오직 이 날을 위해 51년 6개월을 기다렸던 플로렌티노. 어떨까. 그들이 17세 처음 만났을때처럼 순애보 같은 사랑이 가능할까? 비록 파파 노인들이지만 순도 100프로의 사랑이 이뤄질까? 관객들은 설마, 설마하며 호기심과 설레임을 억누를 수 없다. 영화나 소설이라는 마술은 현실에서 아무리 불가능한 일도 상상력으로 포장해서 있음직하고, 그럴듯하게 만들어낸다. 
 
우리는 소설을 읽으면서 혹은 영화를 보면서 현실의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양 잠시 상상의 세계로 날아간다. 물론 우리는 극장에 들어서기 전, 혹은 책을 펴들기 전에 이건 허구라고 피차 약속했지만 어쩔 수 없이 상상의 세계, 픽션의 세계라는 점을 잠시 망각한다. 아니 망각하고자 한다. 팍팍한 세상, 이마저 없다면 어떻게 통과하리요!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유토피아에 관한 영화다. 실제로는 없지만, 간절히 소망하면 언젠가 가능한 세계, 그게 바로 유토피아다. 사랑 역시 마찬가지.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간절히 소망하면, 설사 나이들어도 언젠가 가능하리라는 기대. 비록 속절없는 꿈이지만 꿈 꿀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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