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자 독서는 두 방향이다. 하나는 인문학서고 다른 하나는 세계문학이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런 패턴은 계속될게다. 인문학은 현재 3개월째 지속되고 있는 발터 벤야민 관련 2차서, 세계문학은 조셉 콘라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인데, 국내 번역이 그리 많지않은 조셉 콘라드는 전작을 읽을 예정이다. 현재 <암흑의 핵심> <로드 짐>을 끝냈고, <노스트로모>와 <비밀 요원>을 함께 읽고있다. 안타깝다! 시간은 제한적이고, 읽어야할 책은 무수하게 쌓여가니 마르케스는 <백 년의 고독>과 <콜레라 시대의 사랑> 정도로 만족해야겠다. 

세계문학은 주로 현대소설에 집중하려고한다. 우선 콘라드를 마치면 카프카, 사르트르, 버지니아 울프, 포크너, 카뮈, 헤밍웨이 등의 전작을 읽고, 과거 몇 차례 시도한바 있는 마르셀 프루스트와 제임스 조이스도 재도전해야겠다.

발터 벤야민을 어데까지 읽어야할까. 철학이든 문학이든 결국 원저를 읽어야 마땅하지만 아직 벤야민은 힘에 부친다. 이미 구입한 조효원의 <부서진 이름(들)>, 최문규의 <파편과 형세>, 하워드 아일런드 공저 <발터 벤야민 평전>을 마저 읽는게 순서일듯. 아쉽지만 바디우, 지젝, 이글턴, 타우베우스 등의 인문학으로서의 신학은 당분간 유보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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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 <신을 옹호하다>, 강주헌 역, 모멘토/ 출판사 리뷰 옮김  

21세기 들어 『만들어진 신』의 리처드 도킨스와 『신은 위대하지 않다』의 크리스토퍼 히친스 등 이른바 ‘새로운 무신론자들’에 의해 다시 지펴진 신에 관한 논쟁. 과학의 시대에 종교는 정말 무용지물인가? 이성은 믿음 없이 홀로 설 수 있을까? 이슬람 근본주의와 테러리즘은 왜 생겨났으며, 세계화된 자본주의하의 고달픈 삶에서 믿음은 어떤 의미를 지니나? 이 책은 이러한 의문에 대해 마르크스주이자의 시선으로 무신론을 비판하며 그 해답을 전개하고 있다.

박학한 좌파 이론가이자 탁월한 논쟁가인 테리 이글턴은 이 책에서 새로운 무신론자들, 이른바 자유주의적 합리주의자들의 세계관을 해부하고 반박하는 동시에, 우리 시대의 앎과 삶 전반에 관한 비판적 관점과 분석틀을 제시한다. (마르크스주의자가 무신론을 비판하는 특이한 경우다.)

예수 시대에서 중동의 최근 역사까지,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9.11까지, 에우리피데스에서 토마스 만과 살만 루슈디, 슬라보예 지젝까지, 시간과 공간을 거침없이 오가며 그는 과학과 신학, 합리성과 진보의 이데올로기, 자본주의와 인간해방, 문명과 문화와 야만에 관해 예리한 해석을 제시하고 우리가 이뤄내야 할 세상의 비전을 그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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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 조은경 역, 알마/ 출판사 리뷰 옮김  
<신의 죽음 그리고 문>는 신이 사라짐으로 인해 발생한 위기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저자는 어떻게 신이 18세기의 합리주의에서 살아남아 믿음이 실종된 것으로 여겨지는 우리 시대에 극적으로 재등장했는지를 묻는다. 계몽주의 시대의 이성에서부터 모더니스트의 예술까지 모든 현상이 한때 신이 있었던 곳의 빈 공간을 메우며 초월을 대체하는 형태를 띤다. 신의 대체자 역할을 하는 것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바로 문화다. 예술, 문화, 이성이 모두 나름대로 번성하고 있지만 그러면서 때때로 이념적 부담을 져야할 때가 있는데 이는 불공평한 처사다. 테리 이글턴은 이러한 것이 결코 신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고 본다.

이 책은 신에 대한 얘기가 아닌 신이 사라짐으로 인해 발생한 위기에 대한 이야기다. 이 논점을 개진하기 위해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는 계몽주의로 시작해 급진 이슬람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으로 끝을 맺는다. 저자 테리 이글턴은 어떻게 신이 18세기의 합리주의에서 살아남아 믿음이 실종된 것으로 여겨지는 우리 시대에 극적으로 재등장했는지 이야기한다.

신의 대리 역할을 했던 모든 지적 현상은 해결해야 할 당면 과제가 있다. 테리 이글턴은 종교, 예술, 이성, 문화 가운데 어떤 것도 신의 대체자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는 입장을 강력하게 표명하며 ‘전능한 신’이야말로 진정 없애버리기 힘든 존재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가 책을 통해서 전달하는 메시지 중 가장 특별한 부분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도래하기 전까지는 진정한 의미의 무신론이 없었다. 무신론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 반복되었을 뿐이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말하는 또다른 쟁점은 문화는 이론과 실제, 엘리트와 민중, 영혼과 감각을 통합하는 종교의 능력을 결코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특징은 종교야말로 가장 보편적이고 지속적인 형태의 민간 문화라는 점을 손쉽게 증명하는 몇 가지 이유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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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를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신심을 잃지 않고, 내세를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현존의 초월적 가능성을 잊지 않는 길은 있는 것일까? 이른바 '내재적 초월'의 방식은 무엇인가? 이것은 큰 질문이다. 그러니 이렇게 다시 묻는 것은 어떤가? 오늘의 삶에서 이 삶의 깊이를 잊지 않고 사는 길은 과연 있는가? 이것이 생활 속에서 가능하다면, 그 형태는 어떠할까?"    - 문광훈 <가면들의 병기창> 514쪽

실상 내가 발터 벤야민을 읽고자하는 것은 다름아닌 '내재적 초월'에 대한 관심때문이다. 하지만 신이 죽은, 혹은 종교가 점점 설득력을 잃어가는 사회에서 과연 내재적 초월이 가능할까? 최근 나의 문제의식은 전적으로 이점에 기울어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아가 이런 관심의 연장으로 유물론적 신학의 원조격인 벤야민, 이후 그의 영향을 받은 데리다, 바디우, 아감벤, 타우베스, 지젝, 이글턴의 저서까지 일별하려고 한다.  

현제 세계적으로 종교인구는 감소하는 추세고, 특이하게도 종교열기가 식을줄 모르는 우리 역시 머지않아 퇴색되리라 짐작된다. 따라서 필 주커만의 <종교없는 삶>이나 <신 없는 삶>을 비롯, 유물론과 신학의 접점을 찾는 인문학자들의 작업이 당장은 시기 상조로 보이지만 장차 가야할 방향이 아닐까싶다.

신학적 시선은 역사의 어떤 유토피아적 내세가 아니라, 역사적이고 물질적이며 세속적인 현실충일성 안에 자리한 다른 가능성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격자세공, 하나의 직물- 이런 의미에서 하나의 텍스트인데- 을 드러내준다. 신학의 자리는 그럼으로써 환하게 빛나는, 그래서 근접할 수 없는 내세가 아니라 지상적 내재성이다. 난쟁이는(체스놀이) 장치의 내부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는, 비록 그것이 신학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해도, '직접 신학적 개념으로' 적혀야 하는 것이 아니다.   - 잔느 마리에 가네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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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일상으로의 복귀다. 칸투스 정기연주회, 부친상, 모친묘 승화원 안치 등 보름가까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이제 겨우 한숨 돌리고, 트럼펫 연습부터 재개하였다. 하지만 아직 독서와 글쓰기는 엄두를 낼 수 없다. 머릿속이 산란해서 도무지 정신집중이 안 되고, 그동안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온다. 가능하다면 잠깐이라도 짬을 내 독서와 글쓰기, 트럼펫 연습만큼은 지속적으로 해야할 것 같다.

2
읽어야할 책, 읽고싶은 책은 차고 넘쳐나건만 점점 체력의 한계를 느낀다. 엔간한 일에도 쉬 피로감이 쌓이고, 몰입이 쉽지 않다. 덩달아 시력도 떨어진다. 열정이야 어찌해보겠는데, 문제는 체력이다. 과연 언제까지 읽을 수 있을지, 글쓰기는 또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하지만 이것저것 따질것 없이 오늘만 생각하자. 오늘 무엇을 읽을 것인가, 또 내일은 무엇을 읽을 것인가. 어떤 글을 써볼것인가. 그것만이 기쁨을 줄 수 있으니 나중에야 어찌되든 당장 눈앞만 생각하기로 하자.  

3
비록 잡글, 낙서에 불과할지라도 오늘 쓴 글, 오늘 생각한것. 오늘 어떤 책을 읽고 이해한 것. 내가 지금 알고 가진것, 이해력은 실상 이게 전부다. 더 이상 대단한것이 있을 까닭이 없다. 따라서 과도한 낭만적인 생각은 자제하자. 되도록 현실적으로 생각할것. 나이답지 않게 불가능한 꿈을 쫒는것도 보기좋은 일은 아니잖겠는가?   

4
가령 오늘날 한국기독교는 예수의 정신과 너무도 동떨어진채 현대판 샤머니즘으로 전락했다. 신은 결국 사랑이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길은 고난의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는 일이다. 고등종교란 기복적인것을 거부하고, 타자에 대한 사랑을 구현하는 일이다. 이렇게 말한 나는 무신론자다. 라는 식으로 내가 큰소리로 주장했다고 하자. 그런데 지금하고 있는 나의 행동, 나의 현재의 실상을 완벽히 배제한채 기독교를 향한 비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다 그만두고 비판 할 자격이 있는가? 정말 내 행동에 부끄러움은 없는가? 무신론자라고 큰소리치면 만사 형통인가? 무책임한 비판은 아닌가?  사실상 비판은 누구나 하기쉽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내가 이처럼 신랄하게 비판을 할 자격이 있는가, 라는 점이다. 행동이 없는 번지르한 말은 공허하다. 여하튼 중요한건 유신론자든 무신론자든 지금 하는 행동이 양심에 비춰 부끄러움이 없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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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자신이 차버린 정부(情婦)를 끔찍이 싫어하듯이 그는 바다를 끔찍이 싫어했다. 그는 얼어붙는 돌풍이 몰아치는 속에서 거대한 활대들과 물이 뚝뚝 떨어지는 삭구들을 가지고 몸부림쳐야 했던 사람이 바다 생활에 대해 갖게 되는 증오심으로 그렇게 바다를 싫어했다.

(...) 뭍에서 생의 반을 살았던 콘라드에게 바다 생활은 늘 무료한 것이었다. 그는 실제로 경험한 것보다 나중에 회고했을 때의 바다를 훨씬 더 좋아했다. 그가 매리엇 선장에 대해 한 말처럼, "그는 첫째로 조국을 사랑했고, 두 번째로 봉사하는 것을 사랑했으며, 그리고 어쩌면 바다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

콘라드는 너무나 다른 두 삶을 연결시키려 하면서 갑판(deck)과 책상(desk)을 비교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바다에 간 것과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모두 똑같이 알 수 없는 이유들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나를 그렇게 몰아간 것은 알 수 없는 어떤 막연한 필연성, 완전히 베일에 싸인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바다에서의 삶과 문학적 삶 모두, 무한하면서도 숨막힐 듯한, 그리고 참을 수 없는 고독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 제프리 마이어스 <조셉 콘라드>(책세상), 196~197쪽

17년간 바다생활을 한 조셉 콘라드 보다 두 배 더 바다에서 지내야했던 나 역시 왜 바다에 갔는지, 왜 그토록 오래 배를 탔는지, 그리고 나이든 지금까지 문학을 좋아하고, 이렇게 잡글들을 써야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또한 콘라드처럼 나도 바다를 너무 싫어했다. 10년간의 대서양 원양어선, 계속된 학교 실습선...선장이라는 막중한 책임감, 거칠고 힘든 생활, 고립감, 거기에 무료함까지 더한 바다생활은 단지 먹고 살기위한 수단일뿐이었다. 어느 한순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낯선 항구의 입항, 야간항해, 혹은 협수도항해, 무시로 푹풍우와 마주해야 하는 바다는 결코 로맨틱한 곳이 아니다. 그런 속에서도 유일한 위안이라면 아마 자유롭게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정도였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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