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를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신심을 잃지 않고, 내세를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현존의 초월적 가능성을 잊지 않는 길은 있는 것일까? 이른바 '내재적 초월'의 방식은 무엇인가? 이것은 큰 질문이다. 그러니 이렇게 다시 묻는 것은 어떤가? 오늘의 삶에서 이 삶의 깊이를 잊지 않고 사는 길은 과연 있는가? 이것이 생활 속에서 가능하다면, 그 형태는 어떠할까?" - 문광훈 <가면들의 병기창> 514쪽
실상 내가 발터 벤야민을 읽고자하는 것은 다름아닌 '내재적 초월'에 대한 관심때문이다. 하지만 신이 죽은, 혹은 종교가 점점 설득력을 잃어가는 사회에서 과연 내재적 초월이 가능할까? 최근 나의 문제의식은 전적으로 이점에 기울어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아가 이런 관심의 연장으로 유물론적 신학의 원조격인 벤야민, 이후 그의 영향을 받은 데리다, 바디우, 아감벤, 타우베스, 지젝, 이글턴의 저서까지 일별하려고 한다.
현제 세계적으로 종교인구는 감소하는 추세고, 특이하게도 종교열기가 식을줄 모르는 우리 역시 머지않아 퇴색되리라 짐작된다. 따라서 필 주커만의 <종교없는 삶>이나 <신 없는 삶>을 비롯, 유물론과 신학의 접점을 찾는 인문학자들의 작업이 당장은 시기 상조로 보이지만 장차 가야할 방향이 아닐까싶다.
신학적 시선은 역사의 어떤 유토피아적 내세가 아니라, 역사적이고 물질적이며 세속적인 현실충일성 안에 자리한 다른 가능성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격자세공, 하나의 직물- 이런 의미에서 하나의 텍스트인데- 을 드러내준다. 신학의 자리는 그럼으로써 환하게 빛나는, 그래서 근접할 수 없는 내세가 아니라 지상적 내재성이다. 난쟁이는(체스놀이) 장치의 내부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는, 비록 그것이 신학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해도, '직접 신학적 개념으로' 적혀야 하는 것이 아니다. - 잔느 마리에 가네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