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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ㅣ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평점 :
한동안 TV를 켤 수가 없었다. 뉴스 보기 싫어 인터넷도 하지 않았다. ‘근소한’이라는 말이 무색할 표차로 대선 결과가 엇갈리면서 패닉 상태였다는 이들의 토로다. 그런데 그 ‘한동안’이 오래 가지 않을 것 같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예측가능성 없는 당선자의 무리한 행보인데, 어떤 이들은 거두절미 ‘국방부 사건’이라고 부른다. 두 번째는 곧 이어질 지방선거다. 또 한 차례 표심으로 심판할 기회가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분노란 똑똑 떨어지는 꿀보다 달콤해서
인간의 가슴속에는 점점 커지는 법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2권 2장 ‘분노’)에서 『일리아스』(18권, 109~110행) 한 대목을 인용하고 “분노에는 (……) 즐거움이 수반된다.”며 ‘분노’라는 감정의 실체를 밝힌다. 분노에는 쾌감이 수반된다. 곧 분노는 욕구의 일종이라는 전제가 흥미롭다. [이거 뭐지?] 숱한 여론조사에서도 속내를 읽을 수 없던 2030여성들의 표심이 선거일에 임박해서야 한 후보 쪽으로 움직였고, 선거의 막판변수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진단은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석패하자마자 당일(2022.3.10.에 개설한 한 인터넷카페(네이버)에는 보름 정도에 15만 가입자를 넘길 만큼 문전성시다. 가장 핫(HOT)한 카페 1위로 떠오른 것. 필자도 며칠 후에 가입하여 가끔 눈팅하며 ‘좋아요’를 누르는 정도로 참여하고 있다. 2030여성들이 주도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 카페에 참여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들 중 한 명일지 모를 우리 딸의 생각이 궁금해서다. 카페 이용규칙에는 ‘페미니즘’ 관련 항목도 있는데, 1)관련 이야기를 금지하자. 2)다른 단어를 쓰자(예: 이퀄리즘) 등 네거티브를 지양하기 위한 노력이 신선하면서도 선배 세대로서 반성하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분노는 자신이나 자신의 친구가 까닭없이 명맥하게 멸시당한 것을 두고
복수하고 싶어하는, 고통이 따르는 욕구다.”
(만약 분노가 그런 것이라면) 분노하는 사람은 1)인류 전체가 아니라 특정 개인에게 화를 낸다. 2)특정 개인이 분노하는 사람 자신이나 그의 친구를 해코지했거나 해코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3)이런 ‘모든 분노에는 언젠가 복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즐거움’이 수반된다. 왜 분노가 즐겁지? 생소하면서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달성할 수 없는 것을 목표로 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분노하는 사람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목표로 삼는데,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믿음은 즐거운 것이니까”
그리고 앞서의 『일리아스』 한 대목을 인용한다. 사람들은 복수하겠다는 생각에 온 정신을 쏟기에 분노에는 쾌감이 따른다고 한다. 가능하다면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그래도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대선이 끝났는데, 한 차례 복기는 필요하지 않을까.
20대 대선은 한판의 분노 마케팅이었다. 그 분노를 조직한 키워드는 ‘정권교체’였다. 정당의 목적은 정권을 잡는 것이므로, 대선에서 정권교체는 야당의 프리미엄으로 으레 상수로 작동했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도 ‘정권교체’는 새로울 것도 없거니와, 지금 이 순간에도 현직 대통령의 국정수행 평가가 역대 최고를 유지하고 있기에 의외였다. 결과적으로 이 키워드는 강력한 프레임으로 작동했다. [기승전‘정권교체’]였다. 수세에 몰린 여당은 ‘정치교체‘로 대응하고 늦었지만 ’통합정부‘ 카드로 맞섬으로써 그나마 근소한 차이로 석패하여 ’졌지만 잘 싸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상식, 법과 상식] 판사들은 늘 ’법과 상식에 따라‘ 판결했다고 말한다. 이때 법은 성문법(成文法)이고, ’상식‘은 모든 경우(판례)를 글로 쓴 법률로 규정할 수 없으므로, 전통과 관습 등에 따르는 불문법(不文法)의 장점으로, 보완하였다는 의미에서 ’상식‘이다. 그런데, 상당수 판결도 그렇고 이 ’상식‘이 문제다. 지난 대선 과정을 복기하면서 ’상식‘ 운운하는 것은, 그것이 ’실제 그 자체‘이거나 ’실제 그런 것으로 보이‘거나 상식에 기반하여 프레임이 만들어지고, 프레임 전쟁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분노‘는 그렇게 ’상식‘을 주재료로 하여 조직되고 유포된다.
’분노‘라는 감정을 설명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첫 인용의 출처가 『일리아스』라는 점이 흥미롭다. 그런데 어쩌면 이것은 당연하기도 하다. 그의 『수사학』은 『시학』과 떼어놓을 수 없는 쌍둥이 저작인데, 한국어 콘텐츠로 새로 태어난 두 고전이 한 권으로 묶이기까지, 거기에는 각별한 사연이 있다. 천병희 옮김 『수사학/시학』에서 『수사학』은 최초의 원전번역이다. 반면에 천병희 『시학』은 1980년대 어느 시점으로 거슬러가야 할만큼 천병희 선생의 대표 번역이었다. 그랬는데, 천병희 선생의 원전번역들을 꾸준히 출판해온 출판사(숲) 『수사학/시학』을 펴내면서, (문예출판사로부터) 시학의 판권을 가져와, 한 권으로 묶이게 된 것. 연구이든 창작이든 문학전공자들에게 『시학』은 지금도 전공필수 서적이기에 스테디셀러의 자리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특히, 지금과 같은 신학기에 움직이는 책이다.
그런데 『시학』은 그리스 서사시와 비극 장르의 실체를 밝히는 데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한다. 『일리아스』는 곧 서사시라는 장르 그 자체일 만큼 대표 텍스트이고, 신화와 비극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일리아스』의 주제가 (아킬레우스의) 분노다. 잠시 『수사학』의 '분노'에 대입해보자.
분노하는 사람(아킬레우스)은 1)인류 전체가 아니라 특정 개인(아가멤논 왕)에게 화를 낸다. 2)특정 개인(아가멤논)이 분노하는 사람 자신(아킬레우스)이나 3)그의 친구(파트로클로스)를 해코지했거나 해코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일리아스』의 시작이며, 끝이다. ’분노의 생성에서 소멸까지 그 과정이『일리아스』라는 진단과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다.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 몫의 전리품인 브리세이스를 빼앗는다. 아킬레우스에게 브리세이스는 ’사랑이면서 명예‘였다, 사람도 명예도 빼앗김으로써 아가멤논을 향한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생성된다. 『일리아스』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런데 그(아킬레우스)의 친구를 해코지한 이가 있다. 트로이아의 왕자 헥토르다. 이제 아킬레우스는 ’전투파업‘을 철회하는데 분노의 제1대상(주적)이 헥토르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절친의 죽음에 대한 복수[3)] 덕분에 『일리아스』는 끝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간다. 이처럼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또 하나의 『일리아스』의 시작이면서 끝이 된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또 하나의 『일리아스』의 시작이면서 끝]『일리아스』의 지은이로 확실시되는 호메로스(작가, 창작)는 대단하다. 지 작가에 못지않게 『일리아스』의 주제를 간파하고(『시학』)에서, 분노의 실체를 파악한(『수사학』에서) 아리스토렐레스(비평, 문학이론가)에게도 경의(敬義)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일리아스』의 주인공 아킬레우스에게는 자신의 분노에 수반되는 “죽어도 좋을” 즐거움을 맛보았다. 호메로스는 그 분노를 창조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분노의 실체를 간파했다. 우리 독자들은 한글콘테츠로, 직거래 번역으로 태어난 『일리아스』와 『시학』과 『수사학』 덕분에, 분노의 주성분인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글을 맺으며, 인터넷에서 ’분노 마케팅‘으로 검색하니, 첫 화면에 ’분노 마케팅‘에 꼭 맞는 결과는 별로 없고 ’마케팅에 분노‘란 사례는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