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말테의 수기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문현미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평점 :
미술관 옆 동물원 그 옆 어딘가 종합병원이 있다면 응급실 옆에는 어김없이 영안실(장례식장)이 있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장례식장은 낡은 문법처럼 응급실 가까이에 있다. 장편소설이라는데 제목 때문에 수상록인지, 아니면 생활 속 잠언들 모음집인지, <말테의 수기>는 늘 약간의 현기증과 함께 다가온다. 그래도 분명하게 아로새겨진 부분이 있다. 첫 문장이다.
------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여기로 몰려드는데, 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여기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민음사)
"그래, 이곳으로 사람들은 살기 위해 온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곳에 와서 죽어가는 것 같다."(펭귄 클래식)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이 도시로 모여든다. 하지만 나는 도리어 죽기 위해서 모인다는 생각을 한다."(문예출판사)
“그래, 그러니까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곳으로 온다.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여기서 모두 죽어 가지 싶다."(열린 책들)
한 작품이지만 옮긴이, 옮긴 때 , 펴낸 데가 저마다인 세계문학전집을 펴내는 출판사들의 이 책 첫 문장은 이렇다(이하 몇몇 인용은 민음사 번역을 따라간다). 좋은 작품에는 늘 있지만 그것이 번역되었을 때는 실감하기 힘든 것, 번역본임에도 문장과 문장 사이, 문장들에서 발견하는 리듬감이다. 시인의 산문이니까, 필치에 운문의 리듬이 배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말테'를 '릴케'로만 바꿔어놓으면, 소설보다는 수상집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은 이 특별함, 뭘까?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기에도 좀 마땅찮은 부분이 있다. 오히려 작가의 삶, 그 이력을 참고하면서 부분 부분 빛나는 대목들을 이해하는 식으로 발견의 방향을 바꾼다.
-릴케는 51세가 되던 1926년, 스위스의 한 요양원에서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또 지붕이 없는 마차가 도착하는 걸 보았다. 포장을 열어젖힌 역마차로서 일반 요금으로 달린다. 임종 시간당 2프랑 꼴이다."(15면). "(오래된 디외 병원은) 지금은 559대의 침대에서 사람들이 죽어간다. 물론 공장과 같다. 이런 대량 생산에 있어서는 개개의 죽음이 알뜰하게 처리될 수가 없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양이 문제다. 오늘날 잘 마무리된 죽음을 위해 돈을 치를 사람이 누가 있을까? 아무도 없다. 빈틈없는 절차를 밟아 죽을 수 있을 만큼 돈을 가진 부자들조차도 죽음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냉담해지기 시작했다. 자기만의 죽음을 가지려는 소원은 갈수록 보기 드물어진다. 좀 더 지나면 자기 자신의 죽음이 자신의 삶처럼 흔치 않을 것이다. 맙소사, 여기에는 없는 게 없다. 그저 와서 생을 발견하면 그만이다. 그저 그것을 기성복처럼 입기만 하면 된다.:(15~16면)
-사건이 아닌 상상과 기억의 단편만으로 삶의 본질과 인간 실존 문제를 탁월하게 형상화해 낸 일기체 소설. 릴케가 파리 생활의 절망과 고독을 통해 29살부터 쓰기 시작해 6년 뒤인 1910년에 출간했다. (책소개) 루 살로메와의 두 차례 러시아 여행에서 돌아온 릴케는 독일 화가마을 보르프스베데에 정착하였다. 그곳 화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화가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안목을 키우게 되고(저자 소개)
"그 밖에 나는 또 무엇을 보았더라?"(10면), "나는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모든 게 지금까지보다 더 내면 깊숙이 파고들어 과거에는 항상 끝났던 곳에 이제 머물러 있지 않는다. 옛날에는 알지 못했던 깊은 내면이 생겼다. 이제 모든 게 그곳으로 간다.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나는 모르겠다.(11~12) " "내가 이미 말했던가?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그래, 나는 시작했다, 아직 서투르지만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려 한다."(12면) "보는 법을 배우고 있는 지금, 나는 무언가 일을 시작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28세가 되었는데 아무것도 제대로 해놓은 게 없다. 지금까지 해온 일을 돌이켜보자."(26면) "아, 그러나 사람이 젊어서 시를 쓰게 돠면, 훌륭한 시를 쓸 수 없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때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하고 한평생,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의미(意味)와 감미(甘味)를 모아야 한다. 그러면 아주 마지막에 열 줄의 성공한 시행을 쓸 수 있을 거다. 시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고(사실 감정은 일찍부터 가질 수 있는 거다). 경험이기 때문이다.(26~27면)"
-20세기를 대표하는 시인 릴케는 보헤미아 출신답게 평생을 떠돌며 실존의 고뇌에 번민하는 삶을 살았다(저자 소개). 20세기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불리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그의 가문은 철강업으로 부를 쌓았다. 1913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며 막대한 유산을 남겼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상속을 거절했다. 공식적인 상속을 거절했는데도 그에게는 상당한 유산이 주어졌다. 비트겐슈타인은 그 재산마저, 가난한 유망 작가 후원에 기부했다. 그 첫 번째 수혜자가 바로 라이너 마리아 릴케였다.(검색어 '릴케 비트겐슈타인')'"
"나는 아무도 아는 사람 없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트렁크 하나와 책 상자 하나를 가진 채, 사실 어떤 것에도 호기심 없이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다. 집도 없고 상속받은 물건도 없고 개도 없이 살아가는 생활은 도대체 어떤 생활일까, 최소한의 추억이라도 있다면 좋으련만, ..어쩌면 사람은 그 모든 추억에 다다르기 위해 나이를 먹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른다. 나는 늙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24면)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별 헤는 밤> 일부, 윤동주 시인이 1941년 11월 5일 지은 유작. 친구 정병욱과 아우 윤일주가 1948년 정리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초간본) 31편 중 앞부분에 실려 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박인환 <목마와 숙녀>의 버지니아 울프와 더불어, 시인 릴케는 우리의 대표시에 등장한다.
"그러나 이런 소음보다 더 끔찍한 것이 있다. 바로 정적(靜寂이다"(11면), "무서웠다. 사람이 한번 공포감을 느끼게 되면 그 공포감을 떨쳐내기 위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도시에서 병에 걸린다는 건 매우 혐오스러운 일일 거다."(14면). "나는 불안을 이겨내기 위해 무언가를 했다. 밤새도록 앉아서 글을 썼던 것이다. "(23-24면), "나는 여기 앉아서 한 시인의 작품을 읽고 있다. 열람실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을 느낄 수 없다. 그들은 책에 몰두해 있다. 그러면서 마치 잠을 자다가 두 개의 꿈 사이에서 몸을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듯 책의 쪽수 사이에서 몸을 뒤척인다. 아, 책 읽는 사람들 속에 있는 게 너무도 좋다. 왜 사람들은 늘 책을 읽을 때와 같지 않을까?(45면)
------
응급실 옆에 영안실(장례식장)이 있다. 누군가는 마중을 위해, 또 누군가는 배웅을 위해 종합병원을 찾는다. 누군가는 살기 위해서, 또 누군가는 죽기 위해서 찾는다. 삶과 죽음이 동전의 앞뒤처럼 붙어 있는 생의 터미널이다. 저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는 것이 있다. 어떤 이는 집념, 어떤 이는 집착이라고 한다. 나쁜 습관, 거기에는 늘 죽음이란 두 글자가 어른거린다. 그대, 언제까지나 살 것처럼 너무 자만하지 않는가! 좋은 습관이라고 늘 '까방권'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내게는 책읽기도 그 중 하나다. 발견을 위한 몸부림도 나쁘지 않지만, 나만의 삶에 더 집중해야 하지 않나, 하는 강박 혹은 반작용. 서른 즈음의 릴케에게서 어떤 터닝포인트(전환점)를 감지한다. 몇 마디로 정리하기 쉽지 않은, 너무 거창한가!
"너는 천년 만년 살 것처럼 행동하지 마라. 죽음이 지척에 있다. 살아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동안 선한 자가 되라.”_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IV 17
“그대들은 언제까지나 살 것처럼 살고 있고, 자신의 허약함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미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갔는지도 알지 못하지요.”_세네카,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 03-4, 297면
이상 『그리스 로마 에세이』 알라딘: 그리스로마 에세이 (alad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