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에게 만주국이란 무엇이었는가
강상중.현무암 지음, 이목 옮김 / 책과함께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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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노부스케와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를 통해 둘이 살아온 만주국 - 전후 일본 - 해방후 한국의 연속성에 주목한다.

인간 박정희가 만들어진 배경, 그의 생각이 형성되는 전거와 사실들 그리고 기타 잇키, 기시 노부스케, 전전과 전후 일본과의 결탁 또는 박정희가 보배워 제조해낸 5.16쿠데타와 한국의 국가주도 경제건설 모습을 통해 둘의 인간적 한계와 국가통제 계획경제의 명암을 그린다.

개인적으로 박정희를 생각하면 자꾸 선택을 강요받는 느낌이다.

"굶주린 민주주의냐? 밥먹는 독재냐?"가 그 물음이다.

"사흘 굶어서 남의 담 안 넘는 놈 없다"는 속말처럼 배고픔의 해결은 민주주의를 유보해야 할 만큼 급선무였고, 꼭 유보해야만 달성할 수 있는 제로섬 명제란 말인가?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아픈 것은 못 참는다"는 말도 있다.

"사흘 굶어서 남의 담 안 넘는 놈 없다"가 통했다면, 같은 무게로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아픈 것은 못 참는다" 또한 감당 해야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좋은 책이다. 강력 추천한다!


187p. (제2차 세계) 전쟁 종결은 전쟁 자체의 종결을 의미하기 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전쟁의 시작을 의미했다. 소 대립이라는 거대한 파워 시프트는 제국의 귀태들이 새로운 승리자’(미국) 아래에서 소생할 무대를 준비했던 것이다. 그것은 오욕으로 뒤범벅이 된 과거의 경력을 지워 없애고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기시 노부스케) 그들에게 재기의 기회를 부여하는 하늘이 내린 선물처럼 여겨지지 않았을까? ......

구미에서 트루먼 독트린이나 마셜 플랜(유럽부흥계획)이 발표되자 이에 대항해서 코민포름(유럽공산당 정보국)의 설치가 결정된 1947, 기시 노부스케는 옥중에서 호기가 도래할 조짐을 적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옥중일기에는 미소 양국의 냉전열전으로 바뀔지 어떨지, 시기 여하”(하라 요시히사, <기시 노부스케>)에 대한 어렴풋한 기대감이 배어 있다. ......

이처럼 패전과 해방을 거쳐 도래한 새로운 전쟁 시대(냉전&열전, 중국국공내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중소분쟁)는 기시와 박정희에게 재생을 향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

이렇듯 기시와 박정희의 경우, 패전과 해방이라는 단절을 거치면서 그 사상적 핵심에 자리 잡은 것은 통주저음처럼 그 후로도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국을 왕도낙토를 실현하려 했던 미완의 프로젝트로 여기고 강한 반소반공의식 하에 군국주의적 국가개조와 계획적 통제경제를 단행하고 조국의 근대화를 완수한다는 강렬한 내셔널리즘의 고무 등에서, 기시와 박정희의 내면에 자리 잡은 사상의 핵은 전전과 전후에 걸쳐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게다가 두 사람은 국가라는 관제(官制)장치를 통한 강력한 정치력의 결집과 그것을 위한 지도() 원리의 도입이라는 점에서도 공통되었다.

다만 박정희와 기시는 그러한 사상적 핵심의 일관성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기회주의적인 전향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변모를 거듭하면서 그때그때 권력의 원천의 차이에 부응하며 자신의 태도를 바꿔가게 된다. 그토록 재빠른 변신, 그리고 권력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려내는 본능적 후가각의 예민함. 두 사람이 권력의 정점에 기어코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자질에 힘입은 것이었다. 박정희와 기시 모두 그러한 자질의 원형을 만주국이라는 아수라장을 거침으로써 획득했던 것이다.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가 그렇게 만난 뒤로 간담상조(肝膽相照, 서로 간과 쓸개를 꺼내 보인다는 뜻. 친구 사이의 眞正(진정)한 우정. 서로 속마음을 터놓고 가까이 지냄.)하는 사이가 되엇던 것도 이러한 두 사람의 공통점을 서로가 인정했기 때문은 아닐까? 제국의 귀태는 패전과 해방 후의 누란의 위기에서 소생하여 장차 한국과 일본에 그런 각인을 남기에 되었던 것이다.


(※ 트루먼 독트린(영어: Truman Doctrine)19473월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이 의회에서 선언한 미국 외교정책에 관한 원칙으로서 그 내용은 공산주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하여 자유와 독립의 유지에 노력하며, 소수의 정부지배를 거부하는 의사를 가진 세계 여러 나라에 대하여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 이 원칙에 따라 그리스와 터키의 반공 정부에 미국이 군사적, 경제적으로 원조를 했다.)


(※ 한일협정(1965) 체결 과정에는 정일권의 드러나지 않은 숨은 공로가 있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일본측 최대의 연결점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11.13. ~ 1987.08.07.) 전수상 이었다. 그는 만주국 시절 산업부 차장과 총무처 차장을 거쳐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1884.12.30. ~ 1948.12.23.) 내각의 군수차관과 상공대신을 지낸 사실상 만주국의 실권자였으며, 명실공히 한일 인맥의 정점에 선 인물이었다. 종전 후 A급 전범자로 복역하다가 석방된 뒤 그는 자민당 전신인 자유당의 창당에 참여, 자민당 간사장, 고문, 총재를 거쳐 1957년에 수상이 되었다. 이복동생인 사토 에이사쿠( 佐藤榮作, 1901.03.27.~1975.06.03.) 에게 수상직을 물려 준 후로는 만주 관련단체의 총본산인 국제선린협회 회장직을 맡아 왔고, 한일협력위원회의 일본측 회장도 겸임하였다. 이러한 기시와 정일권과의 뜻하지 않은만남이 1965130일 처칠(Churchill, W. 1874.11.30. ~ 1965.01.24.) 장례식에서 우연히 옆 자리에 앉은 인연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여기서 정일권은 한일문제 타개에 대한 박정희의 결심을 기시에게 분명히 전달, 기시의 주선으로 그의 이복동생인 사토 수상과 19652월 초 동경회담이 성사되었다. 이 일로 그동안 한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박정희의 의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사토의 불만은 회담 직후 말끔히 사라졌으며, 넉 달 뒤인 622일 한일협정이 정식 조인되기에 이른 것이다. (한국 국회의 동의 절차는) 그해 814일 야당 의원의 불참 속에서 비준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함으로써 14년 동안 끌던 한일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졌다.
_청산하지 못한 역사1, 정일권, 15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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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일본의 지정학적 상상력 - 야마가타 아리토모-아베 신조
서승원 지음 /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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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라는 나라를 생각할 때 항상 궁금한 부분이 있다. 

왜 일본은 끊임없이 주변 나라를 넘보고, 쳐들어가고 쳐들어오는 것도 부족해 아예 눌러앉아 살려드는 걸까? 이젠 예전처럼 드러내놓고 침략이 안통하니 멀리서 지배와 음험한 막후조종을 하고 그것을 일본의 은덕이나 도움으로 주장, 가장하려 드는 걸까? (은혜를 베푼다고 일본은 정말로 그렇게 믿는 것도 같다. '오마사케' 방식이라고 해야할까?그런 생각의 뿌리엔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일본은 팽창주의를 아직까지도 계속해서 주장하는 걸까?

더하여 이 책을 읽어가며 다른 의문이 더해진다.

일본은 자기 땅 덩어리와 자기들의 왕이 몹시 훌륭하고 신神의 나라여서 좋다고 자부하면서도, 그러니까 부족함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데 왜 자꾸 남의 땅과 남의 인민을 그리도 탐하고 욕심내는 것일까? 그렇게 남의 것을 탐한다면 자기들이 자부하는 자기 것들은 결국 한낱 치장하는 수사요, 헛말이였다는 반증인가? 

솔직한 그들의 속마음 고백은 일본인의 아래 말이 되는거고, 그런 무서움이 원인이 되어 또는 경쟁심에서 결국 일본은 전쟁과 침략을 일삼아왔다는 것인가? 


41p. 또한 국토의 형상이 남북으로 꿈틀거리는 것으로 되어있어서 수비가 필요한 지점이 너무 많아 국방에 매우 불리하다.

42p. (열강 러시아가 조선을 먹으면) 이렇게 되면 우리는 결국 유일한 보장지를 잃게 되어 서해의 문호가 파괴될 것이다. 그리하여 탐욕스런 강대국과 지근거리를 두고 마주하게 되어, 그들의 칼날이 우리의 옆구리를 겨냥하게 될 것이다. 우리 제국신민의 안위가 크게 우려되는 바이다.

(1903.6월 오야마 이와오의 ,조선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 中)


상당히 심도 있는 내용이다. 길게 설명하기 보다는 사실 자료 제시로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그것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엮어나가는 내용이다.


168p. 소에야 요시히데(添谷芳秀)미들파워 외교라는 용어로 요시다 시게루(1878.9~ 1967.10) 이래 일본의 외교기조를 설명한다. 일정한 힘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강대국처럼 군사력을 수단으로 한 권력정치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다국 간 협력과 같은 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을 말한다. 부연하면 소에야는 일본외교에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해 왔다고 말한다. 그는 요시다 노선을 전후 평화헌법과 미일안보조약을 하나의 세트로 묶는 것으로 정의한다. 1946년에 제정된 헌법은 전후 처리의 문맥에서 9조에 전쟁포기를 규정하고 있는데 비해, 1951년에 체결된 미일안보조약은 냉전의 산물로서 일본의 안전보장을 미국에게 의존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두 가지는 기본적으로 모순되는 관계이다. 좌파들은 평화헌법을 옹호하면서 미일안보조약 해체를 주장하고, 보수파들은 미일안보조약을 옹호하면서 개헌을 주장해 왔다. 그리고 ‘1955년 체제라는 좌우 대립축 안에서 이러한 모순관계는 최근까지 줄곧 이어져 왔다. 소에야의 주장은 일본의 거의 모든 외교행태가 이 두 가지가 전제된 틀 안에서 움직이며 누구도 이 틀의 바깥으로 뛰쳐나가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그 근본 우너인을 과거 군국주의의 역사에서 찾는다. 과거의 권력정치에 대한 부정적 인식(반군국주의 정서, 염전주의 등)이 여전히 팽배하기 때문에 일본국민들은 국력이 신장된 이후에고 헌법과 미일안보의 모순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188p. 미군정의 비군사화 및 민주화 방침은 미국의 적이 되지 않도록 일본을 철저히 약체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 약체화는 사실 국민당 정부를 동맹국으로 육성하려는 구상(이른바 아시아판 티토주의’)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이엇다. 미국은 중국 국민당을 대체하는 동맹국이 필요했고 그 자리에 구 적국 일본을 앉혔다. 미국이 일본을 극동에서의 반공의 방벽으로 육성하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1948년 초였다.

일본의 재군비는 거의 전적으로 총사령부의 지시하에 추진되었다.

189p. 극동위원회의 뉴빌랜드, 중국, 영구, 호주, 소련 대표 등이 일본 재무장 금지를 주장했지만 미국은 거부권을 행사하며 이를 강행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7월에는 경찰예바대 창설 및 해상보안청 증원이 추진되었다. 주일 미 점령군 주력부대인 제8군이 대부분 한국전선에 투입되면서 그 공백을 메꾸기 위한 조치였다.

일본의 재군비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미군의 반영구적인 일본 주둔, 즉 일본의 미국 군사기지화였다. 이가 19519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한 날 오후 미국이 일본과 안보조약(‘일본국과 미합중국 사이의 안전보장조약’)을 체결한 이유였다. 이 조약은 19601월에 개정된 일본국과 미합중국 사이의 상호협력 및 안전보장 조약과 구별하여 구 안보조약으로 불린다. 한국전쟁 직후 일본에는 약 600개의 미군기지와 약 20만 명의 미군병력이 주둔했다. 특히, 류큐제도의 가장 큰 섬인 오키나와는 일본 전체 영토의 0.6%에 불과하지만 미군의 약 75%가 집중되었다. 군사적 관점에서 보면 오키나와가 미일안보조약의 핵심인 셈이다.

 

205p. 또한 장제스는 대만을 중국의 정통정부로 인정받는 대신 일본에 대한 전쟁배상을 포기했다. 대만과 수교 후 일본은 필리핀, 버마, 인도네시아 등 비공산주의동남아 국가들과 일련의 배상교섭 및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일본 측의 배상 의도는 전쟁피해에 대한 보상이기보다는 일본의 경제부흥, 그에 덧붙여 상대국의 경제발전에 간접적으로 기여하는 데 놓여졌다.

 

206p. 그리고 이러한 (1960년대 일본의) 고도성장은 요시다노선, 즉 헌법9조와 미일안보를 두 축으로 하는 경무장노선이 그 배경이었다는 인식이 등장했다.

 

216p. 미국 측은 베트남전쟁의 본격화로 일본은 물론 한국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일본에 대해서는 극동의 안보 문제에 더욱 관여시키고, 한국에 대해서는 파병을 요청하는 방식을 취했다.

 

221p. 한편 한국과의 수교 교섭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10월에 시작되었다. 미국 측이 공산권 봉쇄를 목적으로 일본과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과 미일안보조약을 체결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한일 양국에 대해 국교를 수립하여 지역협력 체제를 구축하도록 권고한 것이 직접적 배경이었다. 하지만 한일 양구 간 교섭은 196512월에 이르기까지 무려 14년이란 세월이 소요되었다. 재산청구권 및 어업 문제에 관한 의견 대립, 한국 측의 이승만 라인선포(1952.1.), 일본 측 수석대표 구보다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의 식민지 지배가 한국에게도 유익했다는 발언, 그리고 재일한국인 북송 문제 등으로 교섭이 지체되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19615월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정부의 등장이었다. 경제발전 목표를 내걸은 박정희 정부는 일본의 자금 지원이 필요했으며 이를 위해 회담 재개에 적극 나섰다. 재개된 회담에서 청구권 금액, 이승만 라인, 독도 영유권 문제가 불거졌지만 회담의 조기 타결을 위해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을 파견하여 일본의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외상과 담판을 짓게 했다, 이 담판에서 합의된 것이 이른바 김종필오히라 메모이다. 한국의 대일청구권을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상품차관 3억 달러의 경제협력방식으로 해결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이후 한일방식으로 일컬어지게 된다.

 

224p.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한일 수교가 한일 안보협력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점이다. , 한일 수교는 앞서 언급한 닉슨사토 공동성명의 한국조항과 연동되게 된다. 일본은 한국조항에서 한반도 유사시 주일 미군의 한반도 전개에 대해 사실상 사전협의 제도를 적용하지 않음으로써 오키나와가 수행해 온 한국안보에 대한 역할을 받아들였다. 전시(戰時) 주일미군의 자유로운 한반도 전개를 분명히 한 것이다. 또한 일본은 밀약을 통해 오키나와 반환 이후에도 미국이 오키나와에 핵을 반입하는 것을 비핵 3원칙의 예외로 인정한다고 약속했다. 일본이 기존의 소극적 자세에서 벗어나 유사시 주일 미군의 극동 방위에 협조하게 되엇음을 의미한다.

최희식(2011)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1969년 한일 협력체제의 냉전적 원형이 완성되었다고 지적한다. 미국은 억지력을 제공하면서 동맹국들의 자조적 노력과 지역적 역할을 강조하고(이른바 닉슨의 괌독트린[Guam Doctrine]), 한국은 자주국방과 경제발전을 동시에 진행하며, 일본은 주일미군의 전개에 협조하면서 아시아 우방국들에 대해 전략적으로 경제원조를 실시하는 구도를 말한다. 수동적이긴 하나 패전 이후 처음으로 미국에 의해 일본의 군사적 역할에 대한 단초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277p. 1980년대에 한정해서 본다면 중국의 개혁.개방 노선은 일본의 지원.협력을 전제로 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279p. 일본의 정책행동에는 중국의 경제발전이 내정의 안정을 가져오고 이가 온건한 대외행동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자유주의적 사고가 전제되어 있었다. ......

중국의 성장과 관련해 당시 일본경제연구센터가 흥미로운 전망을 내놓은 적이 있다. 무난하게 경제성장을 할 경우 대략 2050년 무렵에는 중국이 일본을 따라잡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러한 예측은 한참 벗어난 것으로 드러났다. 1990년대 고속성장을 달성한 중국이 경제규모에서 일본을 역전시킨 것은 2010년이었다. 150년 만의 중일 역전이라 할 수 있다. 그와 더불어 중국의 군사력도 괄목할 만한 신장을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성장한 중국은 과거사 문제나 영유권 문제로 대일 강경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냉전 해체로 소련위협론이 사라진 가운데 과거 청일전쟁 및 중일전쟁 당시에 보였던 중국위협론이 다시 등장했다. 역설적이지만 중국위협론을 만든 당사자는 중국이 성장하도록 전심전력으로 도와준 일본 자신이었다. 부상한 일본이 미래의 중국 부상을 도운 셈이었다. ......

예상을 뛰어넘어 지나치게 강력해진 중국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가 21세기 일본 대외정책의 최대 과제가 되었다. 그리고 냉전 시기 소련을 대상으로 강화되어 온 미일안전보장체제는 그 바향을 전환하여 이번에는 중국을 대상으로 설정하게 되었다.

 

331p. 기시 노부스케, 후쿠다 다케오, 나카소네 야스히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로 이어지는 보수우파 세력의 일관된 기조는 개헌 추진 및 미일안보 강화였다. 이들은 대미자주라는 자신들의 표어와는 상반되게 미일동맹을 절대화, 목적화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377p. 우리의 대외전략 기조는 한미동맹 플러스 알파이다. 대미동맹은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자신의 지정학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수단이었다. 앞으로도 일정 기간 그러할 것이다. 문제는 전략적 사고의 유연성 여부다. 이러한 유연성늘 저해하는 가장 큰 장애 요소는 다름 아닌 약소국 의식이다. 약소국 의식은 쉽게 사고정지를 야기한다. 강대국의 전략을 수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만 생각하면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약소국 의식은 반도숙명론이라는 고전지정학적 사고와 깊은 친화성을 갖는다. 한반도은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충돌 지점이자 세력 간 완충지대로 정의되며 강대국 간 패권경쟁의 희생양이라는 지리결정론적 사고를 말한다. ...... 이러한 틀에 박힌 인식론이나 고정관념은 전략적 사고를 경직시킨다. 각종 방안을 제시하기 이전에 선결되어야만 하는 우리들의 숙제이다. 역사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지리가 아닌 인간의 의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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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산고 -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에게 미래는 없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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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개봉한 영화 '내부자들' 중 신문사 논설주간 이강희 역으로 나오는 백윤식 배우가 뇌물로 골프채를 받으며 흐뭇하게 외치는 대사가 "스고이凄い"였다.

박경리 선생은 이 단어 '스고이'에 대해 우리말 "굉장"과 비교하며 분석하신다.

더불어 일본 책이나 영화를 보면서 많이 느끼는 거창한 전개나 치밀한 디테일에 비해 뭔가 부족하고 허전한 느낌에 대해 일제강점기를 몸으로 살아내신 선생께서 시원한 분석으로 일갈하는 말을 들으니 속이 다 후련하다. 그리고 그들은 대체  그럴까?

마지막 제3부에서는 다나카 아키라(田中明)의 글에 대해 답장 형식을 빌려 말씀하시는 박경리 선생의 엄하고 매서운 비판글은 무엇보다 감동적이고 이땅의 지식인이자 참어른의 모습을 몸소 보여주고 계신다.   


56p. 적절한 예가 될지 모르지만 일본에서 많이 쓰이는 말 중에 스고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네의 굉장하다는 말과 같이 일종의 감탄사인데 크고 훌륭하다는 뜻의 굉장과 오싹하게 소름 끼친다는 뜻의 스고이, 일본도(日本刀)의 푸른 칼날의 번뜩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살덩어리

그런 광경과 통하는, 오싹하게 소름 끼치는, 스고이의 뜻. 그 말 속에는 괴기와 악마적 탐미가 들어 있다.

아무튼 특이하다는 것은 보편적인 것에 비하여 편협하다는 의미와는 다르게 세계가 좁은 것은 사실이다. 일본문학 중에 그 구성에 있어서 치밀하고 뛰어난 묘사력 세련된 문장 등 대단히 우수한 작품이 있으나 늘 주제가 약한 것을 느낀다. 그것은 일본 문화의 전반적인 경향이 아닌가싶다.


29p. 생각해보면 개인의 사고를 그토록 붙들어 맨 일본의 국가권력은 놀랍다. 그것도 장구하게 유지해왔다는 것이 더욱 놀랍고 유례없는 일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했기 때문에 기능과 세기(細技)가 우수하면서도 일본은 항상 남의 틀과 본을 훔쳐오거나 얻어 와서 갈고 닦고 할밖에 없었다. 본과 틀이 없는 나라, 그들의 정치이념은 창조의 활력이 위축된 민족을 만들었던 것이다.


※ 일본에 대한 박경리와 김용옥의 대화.

 

박경리 김선생! 일본을 긍정적으로 볼려면 반드시 실패헙니다!

 

박경리 일본은 야만입니다. 본질적으로 야만입니다. 일본의 역사는 칼의 역사일 뿐입니다. 칼싸움의 계속일 뿐입니다. 뼈속깊이 야만입니다.

 

도올 아니, 그래도 일본에서는 이미 나라 헤이안 시대 때부터 여성적이고, 심미적인 예술성이 퍽 깊게 발달하지 않았습니까? 노리나가가 말하는 모노노아와레같은.

 

박경리 아~ 그 와카(和歌)나 하이쿠(俳句)에서 말하는 사비니 와비니 하는 따위의 정적인 감상주의를 말하시는군요. 그래 그런건 좀 있어요. 그리구 그런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보다 훨씬 더 깨끗하고 순수하지요. 그러나 그건 일종의 가냘픈 로맨티시즘이에요. 선이 너무 가늡니다. 너무 미약한 일본 역사의 선이지요. 일본 문명의 최고봉은 기껏해야 로맨티시즘입니다.

 

박경리 스사노오노미코토(素淺鳴尊, 天照大神[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의 남동생)의 이야기가 말해 주듯이 일본의 역사는 처음부터 정벌과 죽임입니다. 사랑을 몰라요. 본질적으로는 야만스런 문화입니다. 그래서 문학작품에서도 일본인들은 사랑을 할 줄 몰라요. 맨 정사뿐입니다. 치정(癡情)뿐이지요. 그들은 본질적으로 야만스럽기 때문에 원리적 인식이 없어요. 이론적 인식이 지독하게 빈곤하지요. 그리고 사랑은 못하면서 사랑을 갈망만 하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디 문인(文人)의 자살을 찬양합디까? 걔들은 맨 자살을 찬양합니다. 아쿠타가와(茶川龍之介,1892~1927), 미시마(三島由紀夫,1925~1970), 카와바다(川端康成,1899~1972) 모두 자살해 죽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그들의 극한점인 로맨티시즘을 극복 못할 때는 죽는 겁니다. 센티멘탈리즘의 선이 너무 가냘퍼서 출구가 없는 겁니다. 걔들에겐 호랑이도 없구, 용도 다 뱀으로 변합니다. 난 이 세상 어느 누구 보다도 일본 작품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내 연령의, 내 주변의 사람들조차 일본을 너무도 모릅니다. 어린아이들은 말할 것두 없구요. 일본은 정말 야만입니다. 걔들한테는 우리나라와 같은 민족주의도 없어요. 걔들이 야마토다마시이(大和魂) 운운하는 국수주의류 민족주의도 모두 메이지(明治)가 억지로 날조한 것입니다. 일본은 문명을 가장한 야만국(civilized savages)이지요.

 

도올 나쯔메 소오세키(夏日漱石, 1867~1916)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경리 나쯔메 소오세키요? 그사람은 표절작가입니다. 구미문학을 표절해먹은 사람일 뿐입니다. 모리 오오가이가 조금 괜찮긴 하지만 모두 보잘 것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모두 다 있는거에요. 우리가 우리를 못 볼 뿐이지요. 아니, 우리나라 사학자들이구 민속학자들이구 문인들이 무식하게 유종열(야나기 소오에쯔,柳宗悅,1889~1961)같은 사쿠라새끼를 놓고 걔가 조선을 좀 칭찬했다구 숭배하는 꼬라지 좀 보세요. 이거 정말 너무 한심헙니다. 아니 걔가 뭘 알아요. 조선에 대해서 뭘 알아요. 걔가 조선칭찬하는 것은 조선에 대한 근본적 멸시를 깔고 있는 거에요. 걔가 어떻게 조선의 위대함을 압니까?

 

김용옥은 박경리 어록을 동경대학교 중국철학과 오가와 하루히사 교수에게 전달한다.

오가와는 이렇게 대답했다.

˝ 아탓테이루(들어맞는 얘기다!)˝

 

- 김용옥, 도올세설, 굼발이와 칼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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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식민사관 - 해방되지 못한 역사, 그들은 어떻게 우리를 지배했는가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만권당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 관련동영상 

① 한국 상고사 대토론회 - 한군현 및 패수 위치 비정에 관한 논의

일시 : 2015.11.16.월.오전10시

주최 :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

☞ https://youtu.be/NrALsUDAtUM


②제320회 국회정기회 제05차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

일시 : 2013.09.27.

☞ https://youtu.be/Bn9PfRHTweg


수년전 등산모임 뒷풀이 자리에서 벌어진 대화이다.

"지금 현재 시점이나 생각으로 과거 인물, 사건을 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과거 당시 상황과 당시 시점으로 모든 걸 판단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자리를 물러나 혼자 생각할수록 수긍보다는 반론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대화였다.


만약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무엇을 결국 평가할 수 있다는 말인가? 

타임머신이 있는 것인가? 과거 당시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기는 있는건가?

그래서 과거 당시로 돌아가 눈앞에서 직관으로 지켜봐야만 누구를 또 무엇을 평가할 자격이 생긴다는 말인가? 그가 대체 누구인가?


시간은 과거지만 여러 복합적 이유로 공간적으로 한 곳이 아닌 여러 장소, 여러 사람에게서 사건이라도 벌어진다면 몸은 하나인데 이는 또 어찌 한단 말인가?

과거로 돌아가는 타임슬립은 물론 전우치 도사의 분신술이라도 부릴 수 있어 과거의 여러 공간에 동시에 등장, 직관할 수 있는 이는 누구인가?


설령 현재를 떠나 과거로 가본 도사道士나 누군가가 있다 하더라도 정말로 그가 주관적 입장 빼고, 개인적 견해나 편견 전부 털어내고, 혈연 학연 지연 등 모두 없애 깨끗하게 걷어놓거나 말끔히 덮어두고 잘 평가는 할 수가 있는 건가?

그는 대체 누구이고, 그렇게 나온 결과를 공정한 평가라고 다시 2차로 평가할 수 있는 이는 또 누구인가?

 

혹시 그 말의 이면으로 과거는 그대로 덮어두자는 숨은 뜻을 애둘러 말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평가에 대한 '사다리 걷어차기'를 은밀히 시도하며 지금까지 이미 있는 평가만 고스란히 그대로 밀고나가겠으니 잔말 말고 모두 따르거나 아니면 가만히 그 입 닫으라는 것인가?

이런 문제에 대해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교과서에 기댄 입에 올리기 쉬운 해답을 뛰어넘어 작은 해결 실마리를 이 책 속에서 읽는다.


197p. 역사학은 관점의 문제와 그 관점을 뒷받침하는 사료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199p. 해방 후 식민사학자들의 이중성은 이른바 순수사학을 지향했던 데서도 드러난다. 사관(史觀)이 핵심인 역사학에서 순수사학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순수라는 말로 현실에서 멀어지는 것은 그 자체로 집권 세력을 돕는 길이 되기 일쑤이다.

주관을 배제한 역사를 표방하면서 이를 순수또는 객관이라고 주장했지만 주관의 배제순수또는 객관은 모두 일제 식민사관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


31p. 조선총독부는 시험을 통해 학생들의 머리를 통제했다

머리를 통제하는 데 주입식 교육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교육 시스템과 고등문관 시험(현재의 고시)을 필두로 하는 각종 관료시험제도를 통해 식민지의 어린 학생들과 젊은이들의 머리를 통제했다. 머리 통제의 핵심이 역사였다. ...... 조선총독부의 주입식교육 핵심 과목은 역사였다. 그것도 고대사에 집중되었다. ......

조선총독부는 한반도 북부에는 한사군이 있었고, 한반도의 남부에는 임나일본부가 있었다.”고 주입식으로 가르쳤다. 고대 한반도 북부는 중국의 식민지였고 한반도 남부는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이다. 식민지가 되는 것은 한국사의 당연한 귀결이란 이야기였다. 결론은, 그러니 독립운동을 하지말라는 것이었다.

249p. 조선총독부 사관과 독립운동가 사관 사이의 최전선은 늘 한국 고대사였다.

 

51p. (메이지 일본의) 국사교정국은 1887년 도쿄제국대학에 사학과가 설치되면서 도쿄제대 부설 사료편찬소로 전환하는데, ...... 이때부터 도쿄제대 역사학과는 식민사학 생산 및 전파에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도쿄제대 역사학과 및 국사(일본사)학과는 차후 식민지 경성에 설치되는 경성제대 법문학부 및 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와 함께 식민사학의 삼두마차로 맹활약을 펼친다.

62p. (도쿄제대를 졸업한)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1865.03.01.~1942.03.30.)의 제자가 한사군 한반도설‘<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의 주장으로 유명한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1873.10.03.-1961.12.04.)로서 이병도의 스승이기도 한데, 이병도는 해방 후에도 쓰다 소키치가 자신을 사랑했다고 자랑스레 말하고 했다. ......

시라토리는 교토제국대학의 나이토 고난(內藤湖南 1866~1934)과 역사학의 쌍벽을 이뤄 동쪽에는 시라토리, 서쪽에는 나이토 고난이란 말을 만들어 냈고, 또한 문헌학파의 시라토리, 실증학파의 나이토 고난이란 말도 만들어냈다. ......

시라토리의 제자가 한사군 한반도설‘<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주장한 쓰다 소키치라면 나이토 고난의 제자는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이라고 주장했던 아나바 이와키치(稲葉 岩吉 1876~1940, 일본식민사학자.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 조선사편수회 수사관(修史官), 만주건국대학 교수).

 

130p.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식민사관의 핵심은 둘이었다

하나는 한사군 한반도설인데, 이는 고조선 한반도설과 같은 논리였다. 곧 고조선과 한사군은 모두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주장이었다

또 하나는 임나일본부설로서, 구체적으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으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이 두 이론을 만든 일본인 식민사학자는 쓰다 소키치와 이나바 이와키치였는데, 해방 후 이병도를 비롯해서 이 땅의 여러 식민학자들이 이 이론을 그대로 추종하든지 조금 변형(고조선 중심지 이동설 : 고조선 중심지는 요동,랴오둥에 있다가 평양으로 이동했으며, 그 자리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가 거꾸로 요서,랴오시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주장)시켜서 현재까지 식민사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가 쓴 <조선사편수회 식민사관 이론 비판>의 주요 내용이었다.

134p. 고고학(평양 출토 낙랑 목간)은 현재 문헌사료적 근거가 파탄난 식민사학계가 기대고 있는 마지막 보루이다.

140p. (외부교수들로 꾸려진) 평가단은 낙랑 목간을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증거로 단정 짓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데 이는 역사학의 기초인 사료 비판에도 어긋나는 자의적 확대 해석이다.

138p. (평양 출토) 낙랑 목간은 이런 과정에서 고구려가 습득한 전리품이거나 망명객들이 가져온 물건으로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139p. 낙랑 목간은 지역을 표시하는 지도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낙랑군 각 현의 호수가 얼마이고 인구가 얼마인지를 말해주는 행정문서에 불과하다

미국 위싱턴에서 조선시대 한양 각 방의 호구 수와 인구 수가 적힌 문서가 나왔다고 500년 전의 한양이 워싱턴에 있는 것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294p. 우리나라 형사소송법 307조는 사실의 인정은 증거에 의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를 증거재판주의라고 한다. ...... 증거는 직접증거와 간접증거로 나뉘는데, ......

직접증거를 역사학 용어로 바꾸면 1차 사료다. 1차 사료란 당대에 쓰인 사료를 뜻한다. 한사군에 대한 1차 사료는 한사군이 설치되었을 당시 (지금으로부터 21백 년 전인 서기전 108)에 쓰인 사료이다.

298p. 한사군의 중심은 낙랑군이기 때문에 낙랑군의 위치만 밝혀내면 그 주변에 있었던 것이 분명한 나머지 삼군의 위치는 자연히 밝혀지게 된다.

295p. (조선총독부의 사관은 한사군 중) 낙랑군의 중심지는 평양이나 대동강 연안에 있었고, 대방군은 지금의 황해도에 있었다는 것이다.

296p. (이병도의 한사군 관련 서술에 따르면) 이병도는 사관이 뚜렷하다. 이병도에게 한군현, 즉 한사군의 설치는 한민족에게 축복이었고, 일제의 식민통치 또한 한민족에게 축복이었다.

263p.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당시에 쓰인 <사기>, <한서>, <삼국지>, <후한서>, <진서> 등은 일관되게 한사군의 위치를 요동이라고 쓰고 있다.

307p. 중국의 고대 사서들은 낙랑군의 위치가 한반도가 아니라 요동이라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낙랑군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말하는 1차 사료는 단 하나도 없다.

 

306p.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최근까지 식민사관은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황해도 수안까지 이르렀다고 주장해왔다. 앞에서 잠시 설명했지만 이런 논리를 처음 개발한 인물은 조선사편수회의 이나바 이와키치였고, 이병도가 이를 계승하고, 그 제자들이 추종해서 최근까지 한국 고대사학계의 하나뿐인 정설로 만들었다. 이나바 이와키치는 진 장성 동간 및 왕험성고진 장성 동쪽 끝 및 왕험성에 관한 논고에서 진나라 장성의 동쪽 끝을 지금의 황해도 수안(遂安)이라고 주장했는데, 그 논리를 보자.

“...... 사실은 한서』 「지리지에 의해서 의심할 바 없다.”


308p. (그래서) 필자는 한서』 「지리지원문 전체를 통독해봤다

한서』 「지리지에는 이나바 이와키치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내용이 단 한 글자도 없다오히려 이나바 이와키치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사실만 말해줄 뿐이었다. 한서』 「지리지에는 황해도 수안은 커녕 한반도 자체에 대해 설명한 구절이 단 한 글자도 없다.

319p. 한서전체에 황해도라는 글자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필자는 늘 사기, 한서, 삼국지, 후한서, 진서같은 중국 고대 사서를 주석까지 완역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242p. 식민사학 해체 국민운동본부는 2014519일 동북아역사재단에 공문을 보내 한사군의 위치 문제를 놓고 공개 학술대회를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 ......
동북아역사재단이 말한 것처럼 한사군 한반도설이 맞는지 필자 등처럼 한사군 허베이성(하북성)이 맞는지 한번 공개적으로 논쟁해보자는 제의였다. 국민세금으로 한사군 한반도설을 주장했던 학자들과 자신의 쌈짓돈을 털어서 한사군 허베이성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한사군 위치 문제를 가지고 공개적으로 논쟁해 보자는 제안이었다.

244p. (동북아역사재단 및 관련 학자들의 공개 논쟁 거절에 대해) 국민운동본부는 이런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다. ‘한사군 한반도설은 일체의 1차 사료적 근거가 없는, 조선총독부에서 날조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민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대학 강단에 있는 저들의 주장이 근거가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는 옛날처럼 식민사학자들이 모든 여론 매체를 독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250p. 필자처럼 역사를 전공하고 그들만의 리그를 스스로 거부하는 학자들이 생겨났다. 필자가 있는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에도 이제 여러 명의 박사학위 소지자가 있으며 비록 박사학위는 없지만 식민사학자들보다 1차 사료를 줄줄 외는 실력자들이 수두룩하다. 이렇게 해방 후 70여 년 만에 최초로 식민사학에 맞서는 한 축이 형성된 것이다. 이런 학자들이 이제 역사학의 방법론대로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서 고대 1차 사료를 바탕으로 학술토론회를 개최하자고 요구하자 식민사학계는 일제히 침묵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305p. 그러면서 (동북아역사재단 및 관련 학자들은) “‘한사군 한반도설은 이미 정리가 끝난 문제라고 말해왔다. 이들이 학계라고 말할 때 ‘(식민사)학계라고 읽으면 맞다는 사실은 이미 말했다.

 

34p. (2차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대만의) 국립 대만대는 푸스녠(부사년傅斯年 1896.03.26.~ 1950.12.20.) 같은 학자가 정신적 지주가 되어 (대만 내부의) 식민사학을 청산했다면 국립 서울대는 한국의 학문 전통에 무지한 미군 대위(B. 엔스테드 Harry Bidwell Ansted)가 총장으로 있으면서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 출신들이 역사학과(이병도)를 장악해서 식민 학문을 하나뿐인 정설로 유지시켰다.

49p. 역사 침략은 항상 영토 침략의 전초전의 성격을 갖는다. 영토 침략의 속셈이 없으면 역사 침략에 나설 이유가 없다.

81p. 자국사를 긍정적으로 보려는 노력을 악의적으로 민족주의라고 비난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더구나 한국 민족주의는 일본 민족주의처럼 침략적 극우 민족주의가 아니라 침략에 저항했던 민족주의다.


p.s. 

1. 리뷰한 위 책은 옛판으로 이후 이야기까지 담긴 신판(아래책)이 따로 있다.


2. <우리 안의 식민사관> 이전까지 사연을 담은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이 먼저 있었다.


3. 이 책 속에서 언급한 다른 책으로 식민사관의 두가지 핵심 내용을 비판한 연구결과를 담은 즉, 한사군 한반도설을 비판한 <조선사편수회 식민사관비판1_한사군은 요동에 있었다> 및  한반도 남부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한 <조선사편수회 식민사관비판2_임나일본부는 일본열도에 있었다> 2권이 나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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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식민사관 - 해방되지 못한 역사, 그들은 어떻게 우리를 지배했는가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만권당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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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93p.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식민사관의 정화精華다. 나의 시각이 아니라 타인의 시간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 그 중에서도 조선총독부의 시각으로 한국사를 바라보는 것이 한국 식민사관의 정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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