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에게 만주국이란 무엇이었는가
강상중.현무암 지음, 이목 옮김 / 책과함께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기시 노부스케와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를 통해 둘이 살아온 만주국 - 전후 일본 - 해방후 한국의 연속성에 주목한다.

인간 박정희가 만들어진 배경, 그의 생각이 형성되는 전거와 사실들 그리고 기타 잇키, 기시 노부스케, 전전과 전후 일본과의 결탁 또는 박정희가 보배워 제조해낸 5.16쿠데타와 한국의 국가주도 경제건설 모습을 통해 둘의 인간적 한계와 국가통제 계획경제의 명암을 그린다.

개인적으로 박정희를 생각하면 자꾸 선택을 강요받는 느낌이다.

"굶주린 민주주의냐? 밥먹는 독재냐?"가 그 물음이다.

"사흘 굶어서 남의 담 안 넘는 놈 없다"는 속말처럼 배고픔의 해결은 민주주의를 유보해야 할 만큼 급선무였고, 꼭 유보해야만 달성할 수 있는 제로섬 명제란 말인가?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아픈 것은 못 참는다"는 말도 있다.

"사흘 굶어서 남의 담 안 넘는 놈 없다"가 통했다면, 같은 무게로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아픈 것은 못 참는다" 또한 감당 해야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좋은 책이다. 강력 추천한다!


187p. (제2차 세계) 전쟁 종결은 전쟁 자체의 종결을 의미하기 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전쟁의 시작을 의미했다. 소 대립이라는 거대한 파워 시프트는 제국의 귀태들이 새로운 승리자’(미국) 아래에서 소생할 무대를 준비했던 것이다. 그것은 오욕으로 뒤범벅이 된 과거의 경력을 지워 없애고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기시 노부스케) 그들에게 재기의 기회를 부여하는 하늘이 내린 선물처럼 여겨지지 않았을까? ......

구미에서 트루먼 독트린이나 마셜 플랜(유럽부흥계획)이 발표되자 이에 대항해서 코민포름(유럽공산당 정보국)의 설치가 결정된 1947, 기시 노부스케는 옥중에서 호기가 도래할 조짐을 적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옥중일기에는 미소 양국의 냉전열전으로 바뀔지 어떨지, 시기 여하”(하라 요시히사, <기시 노부스케>)에 대한 어렴풋한 기대감이 배어 있다. ......

이처럼 패전과 해방을 거쳐 도래한 새로운 전쟁 시대(냉전&열전, 중국국공내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중소분쟁)는 기시와 박정희에게 재생을 향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

이렇듯 기시와 박정희의 경우, 패전과 해방이라는 단절을 거치면서 그 사상적 핵심에 자리 잡은 것은 통주저음처럼 그 후로도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국을 왕도낙토를 실현하려 했던 미완의 프로젝트로 여기고 강한 반소반공의식 하에 군국주의적 국가개조와 계획적 통제경제를 단행하고 조국의 근대화를 완수한다는 강렬한 내셔널리즘의 고무 등에서, 기시와 박정희의 내면에 자리 잡은 사상의 핵은 전전과 전후에 걸쳐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게다가 두 사람은 국가라는 관제(官制)장치를 통한 강력한 정치력의 결집과 그것을 위한 지도() 원리의 도입이라는 점에서도 공통되었다.

다만 박정희와 기시는 그러한 사상적 핵심의 일관성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기회주의적인 전향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변모를 거듭하면서 그때그때 권력의 원천의 차이에 부응하며 자신의 태도를 바꿔가게 된다. 그토록 재빠른 변신, 그리고 권력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려내는 본능적 후가각의 예민함. 두 사람이 권력의 정점에 기어코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자질에 힘입은 것이었다. 박정희와 기시 모두 그러한 자질의 원형을 만주국이라는 아수라장을 거침으로써 획득했던 것이다.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가 그렇게 만난 뒤로 간담상조(肝膽相照, 서로 간과 쓸개를 꺼내 보인다는 뜻. 친구 사이의 眞正(진정)한 우정. 서로 속마음을 터놓고 가까이 지냄.)하는 사이가 되엇던 것도 이러한 두 사람의 공통점을 서로가 인정했기 때문은 아닐까? 제국의 귀태는 패전과 해방 후의 누란의 위기에서 소생하여 장차 한국과 일본에 그런 각인을 남기에 되었던 것이다.


(※ 트루먼 독트린(영어: Truman Doctrine)19473월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이 의회에서 선언한 미국 외교정책에 관한 원칙으로서 그 내용은 공산주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하여 자유와 독립의 유지에 노력하며, 소수의 정부지배를 거부하는 의사를 가진 세계 여러 나라에 대하여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 이 원칙에 따라 그리스와 터키의 반공 정부에 미국이 군사적, 경제적으로 원조를 했다.)


(※ 한일협정(1965) 체결 과정에는 정일권의 드러나지 않은 숨은 공로가 있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일본측 최대의 연결점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11.13. ~ 1987.08.07.) 전수상 이었다. 그는 만주국 시절 산업부 차장과 총무처 차장을 거쳐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1884.12.30. ~ 1948.12.23.) 내각의 군수차관과 상공대신을 지낸 사실상 만주국의 실권자였으며, 명실공히 한일 인맥의 정점에 선 인물이었다. 종전 후 A급 전범자로 복역하다가 석방된 뒤 그는 자민당 전신인 자유당의 창당에 참여, 자민당 간사장, 고문, 총재를 거쳐 1957년에 수상이 되었다. 이복동생인 사토 에이사쿠( 佐藤榮作, 1901.03.27.~1975.06.03.) 에게 수상직을 물려 준 후로는 만주 관련단체의 총본산인 국제선린협회 회장직을 맡아 왔고, 한일협력위원회의 일본측 회장도 겸임하였다. 이러한 기시와 정일권과의 뜻하지 않은만남이 1965130일 처칠(Churchill, W. 1874.11.30. ~ 1965.01.24.) 장례식에서 우연히 옆 자리에 앉은 인연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여기서 정일권은 한일문제 타개에 대한 박정희의 결심을 기시에게 분명히 전달, 기시의 주선으로 그의 이복동생인 사토 수상과 19652월 초 동경회담이 성사되었다. 이 일로 그동안 한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박정희의 의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사토의 불만은 회담 직후 말끔히 사라졌으며, 넉 달 뒤인 622일 한일협정이 정식 조인되기에 이른 것이다. (한국 국회의 동의 절차는) 그해 814일 야당 의원의 불참 속에서 비준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함으로써 14년 동안 끌던 한일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졌다.
_청산하지 못한 역사1, 정일권, 15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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