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일본의 지정학적 상상력 - 야마가타 아리토모-아베 신조
서승원 지음 /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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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라는 나라를 생각할 때 항상 궁금한 부분이 있다. 

왜 일본은 끊임없이 주변 나라를 넘보고, 쳐들어가고 쳐들어오는 것도 부족해 아예 눌러앉아 살려드는 걸까? 이젠 예전처럼 드러내놓고 침략이 안통하니 멀리서 지배와 음험한 막후조종을 하고 그것을 일본의 은덕이나 도움으로 주장, 가장하려 드는 걸까? (은혜를 베푼다고 일본은 정말로 그렇게 믿는 것도 같다. '오마사케' 방식이라고 해야할까?그런 생각의 뿌리엔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일본은 팽창주의를 아직까지도 계속해서 주장하는 걸까?

더하여 이 책을 읽어가며 다른 의문이 더해진다.

일본은 자기 땅 덩어리와 자기들의 왕이 몹시 훌륭하고 신神의 나라여서 좋다고 자부하면서도, 그러니까 부족함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데 왜 자꾸 남의 땅과 남의 인민을 그리도 탐하고 욕심내는 것일까? 그렇게 남의 것을 탐한다면 자기들이 자부하는 자기 것들은 결국 한낱 치장하는 수사요, 헛말이였다는 반증인가? 

솔직한 그들의 속마음 고백은 일본인의 아래 말이 되는거고, 그런 무서움이 원인이 되어 또는 경쟁심에서 결국 일본은 전쟁과 침략을 일삼아왔다는 것인가? 


41p. 또한 국토의 형상이 남북으로 꿈틀거리는 것으로 되어있어서 수비가 필요한 지점이 너무 많아 국방에 매우 불리하다.

42p. (열강 러시아가 조선을 먹으면) 이렇게 되면 우리는 결국 유일한 보장지를 잃게 되어 서해의 문호가 파괴될 것이다. 그리하여 탐욕스런 강대국과 지근거리를 두고 마주하게 되어, 그들의 칼날이 우리의 옆구리를 겨냥하게 될 것이다. 우리 제국신민의 안위가 크게 우려되는 바이다.

(1903.6월 오야마 이와오의 ,조선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 中)


상당히 심도 있는 내용이다. 길게 설명하기 보다는 사실 자료 제시로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그것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엮어나가는 내용이다.


168p. 소에야 요시히데(添谷芳秀)미들파워 외교라는 용어로 요시다 시게루(1878.9~ 1967.10) 이래 일본의 외교기조를 설명한다. 일정한 힘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강대국처럼 군사력을 수단으로 한 권력정치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다국 간 협력과 같은 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을 말한다. 부연하면 소에야는 일본외교에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해 왔다고 말한다. 그는 요시다 노선을 전후 평화헌법과 미일안보조약을 하나의 세트로 묶는 것으로 정의한다. 1946년에 제정된 헌법은 전후 처리의 문맥에서 9조에 전쟁포기를 규정하고 있는데 비해, 1951년에 체결된 미일안보조약은 냉전의 산물로서 일본의 안전보장을 미국에게 의존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두 가지는 기본적으로 모순되는 관계이다. 좌파들은 평화헌법을 옹호하면서 미일안보조약 해체를 주장하고, 보수파들은 미일안보조약을 옹호하면서 개헌을 주장해 왔다. 그리고 ‘1955년 체제라는 좌우 대립축 안에서 이러한 모순관계는 최근까지 줄곧 이어져 왔다. 소에야의 주장은 일본의 거의 모든 외교행태가 이 두 가지가 전제된 틀 안에서 움직이며 누구도 이 틀의 바깥으로 뛰쳐나가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그 근본 우너인을 과거 군국주의의 역사에서 찾는다. 과거의 권력정치에 대한 부정적 인식(반군국주의 정서, 염전주의 등)이 여전히 팽배하기 때문에 일본국민들은 국력이 신장된 이후에고 헌법과 미일안보의 모순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188p. 미군정의 비군사화 및 민주화 방침은 미국의 적이 되지 않도록 일본을 철저히 약체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 약체화는 사실 국민당 정부를 동맹국으로 육성하려는 구상(이른바 아시아판 티토주의’)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이엇다. 미국은 중국 국민당을 대체하는 동맹국이 필요했고 그 자리에 구 적국 일본을 앉혔다. 미국이 일본을 극동에서의 반공의 방벽으로 육성하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1948년 초였다.

일본의 재군비는 거의 전적으로 총사령부의 지시하에 추진되었다.

189p. 극동위원회의 뉴빌랜드, 중국, 영구, 호주, 소련 대표 등이 일본 재무장 금지를 주장했지만 미국은 거부권을 행사하며 이를 강행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7월에는 경찰예바대 창설 및 해상보안청 증원이 추진되었다. 주일 미 점령군 주력부대인 제8군이 대부분 한국전선에 투입되면서 그 공백을 메꾸기 위한 조치였다.

일본의 재군비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미군의 반영구적인 일본 주둔, 즉 일본의 미국 군사기지화였다. 이가 19519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한 날 오후 미국이 일본과 안보조약(‘일본국과 미합중국 사이의 안전보장조약’)을 체결한 이유였다. 이 조약은 19601월에 개정된 일본국과 미합중국 사이의 상호협력 및 안전보장 조약과 구별하여 구 안보조약으로 불린다. 한국전쟁 직후 일본에는 약 600개의 미군기지와 약 20만 명의 미군병력이 주둔했다. 특히, 류큐제도의 가장 큰 섬인 오키나와는 일본 전체 영토의 0.6%에 불과하지만 미군의 약 75%가 집중되었다. 군사적 관점에서 보면 오키나와가 미일안보조약의 핵심인 셈이다.

 

205p. 또한 장제스는 대만을 중국의 정통정부로 인정받는 대신 일본에 대한 전쟁배상을 포기했다. 대만과 수교 후 일본은 필리핀, 버마, 인도네시아 등 비공산주의동남아 국가들과 일련의 배상교섭 및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일본 측의 배상 의도는 전쟁피해에 대한 보상이기보다는 일본의 경제부흥, 그에 덧붙여 상대국의 경제발전에 간접적으로 기여하는 데 놓여졌다.

 

206p. 그리고 이러한 (1960년대 일본의) 고도성장은 요시다노선, 즉 헌법9조와 미일안보를 두 축으로 하는 경무장노선이 그 배경이었다는 인식이 등장했다.

 

216p. 미국 측은 베트남전쟁의 본격화로 일본은 물론 한국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일본에 대해서는 극동의 안보 문제에 더욱 관여시키고, 한국에 대해서는 파병을 요청하는 방식을 취했다.

 

221p. 한편 한국과의 수교 교섭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10월에 시작되었다. 미국 측이 공산권 봉쇄를 목적으로 일본과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과 미일안보조약을 체결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한일 양국에 대해 국교를 수립하여 지역협력 체제를 구축하도록 권고한 것이 직접적 배경이었다. 하지만 한일 양구 간 교섭은 196512월에 이르기까지 무려 14년이란 세월이 소요되었다. 재산청구권 및 어업 문제에 관한 의견 대립, 한국 측의 이승만 라인선포(1952.1.), 일본 측 수석대표 구보다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의 식민지 지배가 한국에게도 유익했다는 발언, 그리고 재일한국인 북송 문제 등으로 교섭이 지체되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19615월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정부의 등장이었다. 경제발전 목표를 내걸은 박정희 정부는 일본의 자금 지원이 필요했으며 이를 위해 회담 재개에 적극 나섰다. 재개된 회담에서 청구권 금액, 이승만 라인, 독도 영유권 문제가 불거졌지만 회담의 조기 타결을 위해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을 파견하여 일본의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외상과 담판을 짓게 했다, 이 담판에서 합의된 것이 이른바 김종필오히라 메모이다. 한국의 대일청구권을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상품차관 3억 달러의 경제협력방식으로 해결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이후 한일방식으로 일컬어지게 된다.

 

224p.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한일 수교가 한일 안보협력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점이다. , 한일 수교는 앞서 언급한 닉슨사토 공동성명의 한국조항과 연동되게 된다. 일본은 한국조항에서 한반도 유사시 주일 미군의 한반도 전개에 대해 사실상 사전협의 제도를 적용하지 않음으로써 오키나와가 수행해 온 한국안보에 대한 역할을 받아들였다. 전시(戰時) 주일미군의 자유로운 한반도 전개를 분명히 한 것이다. 또한 일본은 밀약을 통해 오키나와 반환 이후에도 미국이 오키나와에 핵을 반입하는 것을 비핵 3원칙의 예외로 인정한다고 약속했다. 일본이 기존의 소극적 자세에서 벗어나 유사시 주일 미군의 극동 방위에 협조하게 되엇음을 의미한다.

최희식(2011)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1969년 한일 협력체제의 냉전적 원형이 완성되었다고 지적한다. 미국은 억지력을 제공하면서 동맹국들의 자조적 노력과 지역적 역할을 강조하고(이른바 닉슨의 괌독트린[Guam Doctrine]), 한국은 자주국방과 경제발전을 동시에 진행하며, 일본은 주일미군의 전개에 협조하면서 아시아 우방국들에 대해 전략적으로 경제원조를 실시하는 구도를 말한다. 수동적이긴 하나 패전 이후 처음으로 미국에 의해 일본의 군사적 역할에 대한 단초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277p. 1980년대에 한정해서 본다면 중국의 개혁.개방 노선은 일본의 지원.협력을 전제로 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279p. 일본의 정책행동에는 중국의 경제발전이 내정의 안정을 가져오고 이가 온건한 대외행동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자유주의적 사고가 전제되어 있었다. ......

중국의 성장과 관련해 당시 일본경제연구센터가 흥미로운 전망을 내놓은 적이 있다. 무난하게 경제성장을 할 경우 대략 2050년 무렵에는 중국이 일본을 따라잡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러한 예측은 한참 벗어난 것으로 드러났다. 1990년대 고속성장을 달성한 중국이 경제규모에서 일본을 역전시킨 것은 2010년이었다. 150년 만의 중일 역전이라 할 수 있다. 그와 더불어 중국의 군사력도 괄목할 만한 신장을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성장한 중국은 과거사 문제나 영유권 문제로 대일 강경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냉전 해체로 소련위협론이 사라진 가운데 과거 청일전쟁 및 중일전쟁 당시에 보였던 중국위협론이 다시 등장했다. 역설적이지만 중국위협론을 만든 당사자는 중국이 성장하도록 전심전력으로 도와준 일본 자신이었다. 부상한 일본이 미래의 중국 부상을 도운 셈이었다. ......

예상을 뛰어넘어 지나치게 강력해진 중국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가 21세기 일본 대외정책의 최대 과제가 되었다. 그리고 냉전 시기 소련을 대상으로 강화되어 온 미일안전보장체제는 그 바향을 전환하여 이번에는 중국을 대상으로 설정하게 되었다.

 

331p. 기시 노부스케, 후쿠다 다케오, 나카소네 야스히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로 이어지는 보수우파 세력의 일관된 기조는 개헌 추진 및 미일안보 강화였다. 이들은 대미자주라는 자신들의 표어와는 상반되게 미일동맹을 절대화, 목적화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377p. 우리의 대외전략 기조는 한미동맹 플러스 알파이다. 대미동맹은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자신의 지정학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수단이었다. 앞으로도 일정 기간 그러할 것이다. 문제는 전략적 사고의 유연성 여부다. 이러한 유연성늘 저해하는 가장 큰 장애 요소는 다름 아닌 약소국 의식이다. 약소국 의식은 쉽게 사고정지를 야기한다. 강대국의 전략을 수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만 생각하면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약소국 의식은 반도숙명론이라는 고전지정학적 사고와 깊은 친화성을 갖는다. 한반도은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충돌 지점이자 세력 간 완충지대로 정의되며 강대국 간 패권경쟁의 희생양이라는 지리결정론적 사고를 말한다. ...... 이러한 틀에 박힌 인식론이나 고정관념은 전략적 사고를 경직시킨다. 각종 방안을 제시하기 이전에 선결되어야만 하는 우리들의 숙제이다. 역사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지리가 아닌 인간의 의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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