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내가, 언젠가 결혼을 한다면 딱 여동생만큼만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 정도로 결혼생활의 이상향을 보여주었던 여동생이 이혼을 언급했을 때는 충격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여동생이 그런 생각을 할 거로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다. 더군다나 그 이유가 ‘시’자 붙은 사람들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역시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절망적이었다. 역시 시월드의 굴레는 벗어날 수 없는, 며느리의 고통 영역이었던가 싶어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

 

이미 영화에서 보여준 김진영과 시어머니의 갈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보였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적응하면서 살아가기에도 힘든 게 결혼생활인데, 그 결혼생활이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의 관계에 머물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 때문에 더 힘들어진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직도 답을 모르겠다. 그 어려운 문제가 어떤 것인지 이 고부가 보여준 것이다. 처음에는 좀 충격이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이런 대화(라고 쓰고 싸움이라고 읽는다)를 한다는 게 놀라웠다. 누가 봐도 ‘감히’ 시어머니에게 ‘대드는’ 며느리라고 여길 테니까 말이다. 한편으로는 왜 이런 충돌이 계속되어야 하는지 그 시작점을 찾게 되더라.

 

남편은 아내의 입에서 직접 어른들에 대한 거부와 부정과 분노가 쏟아져 나오지 않도록 해줘야 한다. 자식과 오래 알아온 부모님은 자기 자식의 허물에 더 너그럽다. 남편의 중재는 그렇게 간단한 이치에서 필요한 것이다. (슬기로운 B급 며느리 생활 173페이지)

 

행복해지자고 결혼했다.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이 차곡차곡 만들어갈 하나의 가정을 상상하고 나아가고자 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시작으로 만들어져야 할 하나의 가정이 주변 사람들의 개입으로 전쟁터가 됐다. 이 전쟁에서 이긴 사람은 없다. 모두 상처 입고 나뒹굴어 피를 흘리고 있을 뿐이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전쟁의 시작이 ‘간섭’과 ‘관심’의 차이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언제 어디서나 같을 말을 오랫동안 해왔다. ‘간섭’과 ‘관심’은 한 끗 차이라고, 그 한 끗의 차이는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내가 건네는 게 관심이어도 상대가 받아들일 때 간섭이라고 느끼면 그건 간섭이라고 말하곤 했다. 내가 보이는 관심이 상대가 부담스럽고 과하다고 여기면 불편해진다. 그럼 나에게서 나간 관심은 간섭으로 모습을 바꾸어 상대에게 도착했다는 말밖에는 안 된다. 그러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유지되어야 하는데, 그게 시월드와 며느리 사이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믿는다.

 

며느리 김진영은 남편 선호빈과 함께 두 사람이 주축이 되는 가정을 이루어가고자 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부모에게 독립하지 못한 두 사람은 부모의 관심 안에 있었고, 부모는 그런 두 사람의 삶에 관여하고 계속 보살펴야 할 대상으로 여긴 듯하다. 특히 시어머니는 아들의 인생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아들 며느리의 태도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던 거로 보인다. 한번 시작된 김치 건네기는 언제나 싸움과 분노의 발단이 되었고, 며느리의 삶을 좌지우지해도 된다고 생각한 시어머니는 개인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집안의 화장대 위치까지도 간섭하며 계속 말하는 것이었겠지.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의 며느리 삶을 조목조목 따져가면서 보는 경우가 많아졌다. 사실 며느리로 살아가는 부조리함을 말하는 게 이 책이 처음도 아니지 않은가. 앞서 만난 몇 권의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몇 가지가 있다. ‘라떼’를 마시면서 강요하는 과거 여성의 삶이 충돌을 일으킨다. 나 때는 말이야... 시월드의 모든 말에 복종하고 며느리는 그 집안의 하녀처럼 살아온 시절의 이야기. 그 시절을 언급하고 강요하면서 따라주지 않는 며느리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기 시작하면 갈등은 시작된다. 하지만 왜 그 시대가 기준이 되어야 할까 이해하기 어렵다. 그 시대의 며느리 모습은 잘못된 건데, 왜 그 모습이 기준이 되어 똑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게 갈등의 발단이 되어 끝이 없는 전쟁을 일으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그러니까. 서로가 인간적으로 존중받고 살아가야 하는 지금의 모습을 찾아야 하는 게 맞다.

 

사람들은 영화 〈B급 며느리〉보고 거의 두 가지 평을 내놓는다. 저런 며느리 얻으면 큰일 나겠다, 아니면 저런 시어머니 때문에 이혼하는 거다, 뭐 이런 비슷한 의미의 말들을 꺼낸다. 사실 이 책을 읽어도 비슷한 느낌이긴 하다. 이 책이 영화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니, 영화의 연장선에 있으니까. 하지만 왜 그 상황이 시작되었는지 말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나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전쟁이 시작될 때마다, 항상 그 시작을 찾고 싶었는데 말이다. 며느리 김진영이 정말 이상한 사람일까? 그냥 인간 김진영으로 살다가 선호빈의 아내 김진영이라는 호칭이 하나 늘었을 뿐인데, 그녀를 둘러싼 환경과 상황은 낯설고 힘들어졌다. 그녀의 존재는 사라지고, 새롭게 형성된 가족 구성원의 하나로 머물기를 바라는 시선이 고통스러웠다. 그 고통을 없애고자,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말들은 ‘B'급으로 취급받았다. 싸우고, 절연하고, 또 싸우고, 화해하면서도 분노의 찌꺼기는 남아있고.

 

막장드라마만 암 유발하는 건 아닌 듯하다. 며느리와 시월드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고구마 한 박스 그냥 삼킨 것처럼 답답하다. 그럴 때마다 궁금하다. 우리 엄마와 나의 올케 사이에는 어떤 감정이 흐르고 있을까 싶다. 엄마에게도 ‘시’자의 냄새가 풍길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를 조금 다독거린다. 엄마에게도 딸이 다섯이나 있다고, 사람들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있어야 그나마 좋은 관계가 유지된다고. 괜히 친해지려고 애쓰고, 잘하려고 아등바등하다가 지레 질려 나가떨어진다고. 안부 전화 한번 안 한다고 투덜거리지 말고 안부가 궁금한 사람이 전화하면 되는 것이고, 쓸데없이 전화 타령하지 말고 용건 있을 때 통화하면 되는 것이라고. 적당한 관심은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는 것이겠지만 적당한 선을 넘는 간섭은 서로를 피곤하게 하는 것이니 조금만 무관심해지라고 말이다. 며느리 김진영의 시어머니를 보면서 느낀 건, 아들 며느리에게 관심을 넘어선 집착에 스스로 분노를 쌓아가는 것 같았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된 아들의 자리를 인정하지 못하고, 어디까지나 당신이 돌봐주면서 길렀던 아들의 모습으로만 뿌리박혀 있으니 그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고통 속에 자기를 가두게 되어버린 건 아닐까 싶은. 무리하면 탈이 난다. 마음이 넘쳐도 탈이 난다.

 

과연 중간이 있었을까? 이제 보니 우리는 중간 지점에서 만난 게 아닌 것 같다. 각자 자신이 서 있던 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성숙한 관계는 ‘나를 위해 네가 변해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줘’라고 말하는 것이고, 우리는 그동안 서서히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겪었던 것 같다. 눈치채지 못하게, 서서히, 젖어들듯이 말이다. (슬기로운 B급 며느리 생활 238페이지)

 

읽을수록 짠하다. 그러면서도 시원하다. 며느리니까 참아야 하는 건 없다. 하고 싶은 말 담아두기만 할 이유도 없다. 인간 대 인간으로, 새로 어우러진 가족이 된 일원으로 서로를 대하면 되는 일이다. 며느리 김진영이 투쟁하듯 이뤄낸 현재의 관계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아진 관계의 모습을 보니 이 투쟁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의미 있는 전쟁이었다.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며느리 이미지가 바뀌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리’라고 하면서 ‘의무’를 강요하지 말고, 서로를 존재 자체로 인정해주면서 같이 살아가야 할 일이다.

 

수신지 작가의 『며느라기』가 드라마로 만들어진다고 해서 기다리는 중이다. 이미 웹툰이나 후속작으로 그 후의 이야기까지 읽었지만, 아무리 많이 봐도 다시 보게 된다.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너무 현실 속 이야기들이라 생생하고 또 생생하다. 영상으로 만들어지면 또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이야기로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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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5-13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느라기]가 드라마로 만들어진다고요? 우앗... 저는 보기도 전부터 고구마 백 개 먹은 것 같은 답답함이 밀려오네요.

모든 시어머니들이 ‘나는 달라, 나는 좋은 시어머니야‘라는 생각을 하고 계신것 같습니다. 저희 엄마 포함해서요. 저는 그럴 때마다 ‘엄마, 그래봤자 엄마는 시어머니야‘라고 말하곤 합니다.

구단씨 님이 정말 정확한 지적을 하신 것 같아요. 원인을 알아야 해결할 수 있는 거잖아요. 한 여자와 다른 한 여자가 며느리와 시어머니로 만났을 때 왜 그렇게 갈등을 일으켜야만 하는건지, 우리는 그 시작을 찾아서 부숴버려야 하는건데 말입니다.

구단씨 2020-05-13 14:04   좋아요 0 | URL
20분짜리 드라마로 만들어진답니다.
방송하게 될지 웹드라마로 보여줄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옆에 사이다 캔맥주 한잔 가져다 놓고 보고 싶은 드라마여서 기다릴 겁니다요. ^^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요. 남자 사람 포함해서요. 남자들이 하나같이 얘기해요.
˝우리 엄마는 안 그래.˝
그렇게 말하는 너네 엄마가 더 그러더라, 라고 말하곤 했거든요.
실제로 저희 엄마도 아들 며느리 있는데요. 똑같이 말씀하세요. ˝나는 안 그래, 야.˝
그래서 제가 옆에서 자꾸 말씀드리죠.
엄마도 그럴 수 있다고. 그래도 딸 가진 엄마니까 며느리 마음 많이 헤아려주시라고요.

 
룬샷 - 전쟁, 질병, 불황의 위기를 승리로 이끄는 설계의 힘
사피 바칼 지음, 이지연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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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의 진화를 보면서 놀랄 때가 많다. 유선 전화에서 무선 전화로, 통화만 하던 전화가 영상 통화가 되고, 손안의 작은 휴대폰 하나로 일상의 거의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세상이라는 게, 아직도 가끔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어쨌거나, 우리는 지금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스마트한 세상에 살고 있고, 이 스마트한 세상을 만든 많은 순간이 룬샷이 아니었을까 싶다. 낯설고 생소한 그 단어, 룬샷(Loonshots)은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발상으로 여겼던 아이디어가 반짝이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기에 생긴 말이다. 신조어이지만 사전에도 등록되지 않은 단어이면서, 우리 미래에도 꾸준히 영향을 미칠 승리의 바탕이 될 것이다.

 

효율과 관리에 중점을 두는 게 기존 이론이라면, 룬샷은 쓸모없는 발상으로 여기던 아이디어의 가능성을 중점에 두고 발전시키며 성장을 이끄는 방법을 제시한다. 세계사에 한 획은 그은 많은 일이 이 방식으로 일어났다. 미국의 심장질환 사망률을 감소시킨 건, 미생물학자인 엔도 아키라가 청록색 곰팡이에서 발견한 약물 때문이다. 처음에는 부작용 때문에 일본에서 외면받았던 약물이 제약회사 머크가 가능성을 발견하고 발전시켜 출시했다. 머크가 돈을 벌게 된 건 당연했다. 누군가는 미친 아이디어라고, 위험하다고 치료 가능성을 아예 무시했던 게 누군가는 성공의 기회가 된 셈이다. 도대체 그 미친 아이디어를 본 사람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무엇보다 룬샷의 가장 쉬운 설명은 이 책의 초반부에서 들려주는 노키아의 예다. 무선 전화 시장을 개척한 노키아의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노키아 엔지니어 몇몇이 새로운 종류의 전화기를 만들었을 때, 기업의 지도부는 그들의 아이디어를 모두 깔끔히 묻어버렸다고 한다. 그 아이디어가 뭐였냐고? 인터넷이 가능하고 커다란 터치스크린에 고해상도 카메라가 달린, 온라인 앱스토어가 함께하는 휴대폰이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이 휴대폰 말이다. 눈앞에서 성공과 돈이 떠나가는 소리가 들리는가? 아이고, 사촌이 좋은 땅을 헐값에 산 것보다 더 배가 아프다. 그 땅을 내가 팔았으니...

 

균형과 소통을 제대로 유지하려면 내부의 장벽을 극복하게 도와줄 손길이 필요하다. 어느 모세의 보좌진의 손길이 아니라, 정원사의 손길처럼 부드러운 손길이 필요하다. 아이디어가 이전되는 데 힘을 너무 받거나(추상같은 명령) 힘이 부족하면(아무 지원 없음), 유망한 아이디어와 기술도 실험실에서 썩게 될 것이다. 그러면 조직은 그 기술을 상실하고, 시간과의 싸움에서 질 것이며, 그 기술을 발명한 사람의 충성심을 잃게 된다. 핵심 인재는 회사에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다. (267페이지)

 

당장은 보이지 않지만, 발상의 전환과 가능성을 믿는 것. 성공한 룬샷의 경우를 보면 대개 이런 눈을 가지지 않았을까. 지금 눈앞의 것만 보고 투자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전략적인 상품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듯하다. 기본적으로 인내가 필요하기도 하다. 꾸준한 노력의 결과를 기다려야 하니까 말이다. 룬샷의 성공 사례와 특징을 살펴보면 많은 이론이 바탕에 있고, 발견과 노력, '상전이(모든 것이 변화하는 순간)'에 있다. 모든 상전이는 경쟁하는 두 힘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보통은 두 가지 형태의 인센티브가 생기는데, 대략 '판돈'과 '지위' 정도가 된다. 이 상전이의 원리는 더 혁신적인 조직을 만들 수도 있고, 구조의 변화로 조직을 탈바꿈시킬 수도 있다. 안정적인 것을 유지하면서 익숙한 패턴만 바라보던 것이 좋은 것만을 아니라는 것을 상기한다.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것은 항상 제자리걸음일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나아가고자 한다면 아이디어는 넘쳐야 한다. 그 아이디어를 찾는 눈을 길러야 하고 발전시키고 활용할 수 있다면 성공의 길은 더 가까워질 것이다. 개인이나 기업이나 룬샷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의 결과가 아닌 앞으로 마주할 결과를 더 집중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버니바 부시의 레이더는 전쟁 영웅이 아니었나 싶다.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야 심장질환을 예방할 수 있다며 약을 만든 엔도 아키라 박사는 오늘날 심혈관질환 환자들에게 고마운 사람일 터. 디지털카메라의 발상이 의미 없다고 여겼던 폴라로이드 사의 몰락 역시 당장의 현상만 봤기 때문일 것이다. 룬샷을 무시해서 실패했다고 여기는 것도 위험하다. 누군가의 기발한 아이디어는 발견되고 발전시키는 게 더 중요하니까. 룬샷과 프랜차이즈(룬샷으로 탄생한 제품의 후속작 또는 업데이트 버전)는 서로가 필요하다. 이 둘이 균형을 이루었을 때의 시너지 효과는 계속되는 발전과 성장을 가져올 것이다. 룬샷 역시 제품형 룬샷과 전략형 룬샷의 균형에 귀를 기울인다. 기본적인 제품의 안정성과 기술 개발의 가능성에 '미친 아이디어'가 함께했을 때 룬샷은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술력이 뛰어나고 자본의 안정성을 갖춘 기업이라도 중요한 타이밍의 룬샷을 놓친다면 그 결과는 뭐, 추락이겠지.

 

천재 기업가가 새로운 아이디어나 발명품을 가지고 건설한 제국이 오랫동안 건재하면 그를 둘러싼 신화가 널리 퍼진다. 그러나 정말로 성공을 이루는 사람들, '우연의 설계자들'은 그보다 덜 화려한 역할을 맡는다. 그들은 어느 한 룬샷을 열렬히 지지하기보다는 많은 룬샷을 육성할 수 있는 뛰어난 구조를 만든다. 그들은 예지력 있는 혁신가라기보다 세심한 정원사에 가깝다. 그들은 룬샷과 프랜차이즈 양쪽을 모두 잘 돌보며,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압도하지 못하게 한다. 서로가 서로를 성장시키고 지원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79페이지)

 

기업의 입장에서 룬샷을 잡지 못한다면 망하는 것으로 끝나겠지만, 조금 더 크게 보자면 국가의 위상이 걸린 문제가 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은 서구 사회보다 더 많이, 더 빨리 발견하고 이뤄놓은 기술이 다양했다. 그런데도 오늘날 우리에게 사용되고 기억되는 과학적인 발전은 서양에서 일어난 경우가 대부분이다. 종이와 인쇄술, 자기나침반, 화약, 대포, 주철, 지폐 등 중국이 먼저인 것들이다. 중국은 부유하고 기술적으로 발전해 있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그 발전을 세계로 돌리지 못했다. 그건 중국이 시선을 내부로 돌리면서 베이징, 만리장성, 대운하 등 프랜차이즈 프로젝트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너무 성장한 나라였기에, 중국의 지도자들은 미친 아이디어에 더는 관심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자연법칙'이 만들어낸 보다 정교한 기술, 새로운 생각들을 '과학적 방법'이라는 더 현대적인 이름으로 오늘날 우리의 발전에 바탕이 된다.

 

그저 우연히 발견된 것에서 멈추지 말아야 성공한 룬샷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룬샷 육성을 위한 설계가 중요하다. 저자는 5가지 원칙을 내세워 룬샷의 성공을 말한다. 대부분 회의적이고 불확실한, 짓밟히고 무시당하는 기록 긴 시간을 이겨낼 것. 무엇이 문제인지 엉뚱한 데서 원인을 찾는 가짜 실패에 속지 말 것. 실패의 이면을 파고들어 결과뿐만 아니라 그 결과를 만들어낸 의사결정의 질을 생각할 것. 룬샷을 폭발하는 조직의 시스템을 만들 것. 룬샷을 만드는 것보다 룬샷을 육성하는 정원사가 될 것. 모든 요소, 룬샷으로 성공과 실패를 이끈 내용을 살펴보면 결국, '룬샷을 육성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할 것이다. 미친 아이디어는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발견과 성공시킨 그 이후가 진정한 결과물이다. 아이디어 하나가 얼마나 뻗어 나갈 수 있는지, 얼마나 세상을 바꿔놓을 수 있는지 하는 것은 개인, 팀이나 기업, 아울러 한 나라의 통찰력과 노력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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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05-08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한테 굴러들어온 복을 차 버린 사람 많을 것 같습니다 앞날을 내다보지 못한 사람 많았겠지요 반대로 다른 사람이 관심 갖지 않은 걸 잘 알아본 사람도 많았겠습니다 바로 앞보다는 멀리 내다봐야겠지요 중국이 먼저 만든 것들이 세계로 뻗어가지 못하다니 아쉽군요 세계가 서양 중심이 되고 말았으니... 이제는 좀 다르겠습니다 그래도 좋은 걸 누군가는 잡고 누군가는 놓치겠지요


희선

구단씨 2020-05-13 10:20   좋아요 0 | URL
저는 정말 그런 눈을 갖고 싶어요. 기발함을 알아보는, 남들과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는 눈. ^^
익숙한 것이 편하고 오리지널이 주는 슬기로움이 있겠지만,
세상은 계속 진화하고 있고 인간은 또 그 변화에 어울리게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안간힘
유병록 지음 / 창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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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아들을 잃었다.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이제 행복한 날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고 확신했다. 그렇다고 모든 걸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행복 대신 보람이 있는 삶을 살기로 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로, 약속했다. (201~202페이지)

 

내가 감당해야 할 가장 큰 슬픔을 상상하곤 한커. 그 슬픔의 대상이 누구일까, 그 슬픔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 막상 내 앞에 닥친 깊은 슬픔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 슬픔의 끝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생각해보면 내가 경험하는 슬픔의 크기는 점점 커갔다. 그건 나이를 먹어가기 때문일 수도 있고, 살면서 책임지고 겪어야 할 무게가 커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렸을 때 우리가 생각하는 슬픔은 고작 숙제를 안 해가서 선생님께 혼나는 정도에서 시작하는 경우도 있지 않았던가. 그 슬픔이 크기를 키워 와서, 지금은 숙제 정도로 슬픔을 가늠하지 않는다. 사랑하거나 아끼는 사람과 죽음으로의 이별 같은 일을 큰 슬픔이라고 말한다. 이 정도의 기준을 슬픔이라고 말한다면, 글쎄, 나는 아직 그 슬픔을 경험하지 못했다. 언제가 닥칠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끔은 그 슬픔을 상상하면서도, 설마 그 슬픔의 깊이가 이미 경험한 사람만 하겠는가. 저자가 어린 아들의 죽음을 감당하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잘 이겨내기를, 잘 버티고 무사히 일상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드는 건, 언젠가 내가 겪을 그 시간을 마주하는 느낌이 들어서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불행의 순간이겠지만, 언제까지 그 슬픔을 붙잡고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안간힘을 버티며 살아간다. 슬픔도 이겨내고, 불행도 밀어내려고 발버둥 치면서 말이다.

 

 

어떤 침묵은 외면이겠지만, 어떤 침묵은 그 어떤 위로보다도 따뜻하다. (37페이지)

 

한 번도 예상한 적 없던 슬픔이 찾아왔다. 저자는 아들을 잃었다.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고통이 그를 엄습했고, 그만의 방식으로 슬픔을 이겨내는 중이다. 누구나 각자의 슬픔이 가장 크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면서도 저자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대로 다가오는 건, 언젠가 내가 했던 생각들이 그대로 비쳐서다. 사실 나는 누군가에게 위로하는 게 정말 어렵다. 상대의 고통을 공감하고 이해하지만, 그 순간 내가 건넬 수 있는 마음이 어설픈 위로로 비칠까 봐서다. 그런 마음을 저자는 염려한다. 그가 겪은 아픔이 주변 사람들에게 퍼질까 걱정하고, 그들이 자기에게 닥친 불행을 금방 또 잊을 거로 생각해서 서운함을 비춘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다르지 않다. 내 일이니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진심으로 위로하고 걱정한다고 해서 그들의 일이 되지 않는다. 똑같은 경험을 하기 전까지는 막연하게 공감하는 슬픔으로 여길 수도 있다. 기꺼이 속내를 털어놓지 못하는 불편함은 상대를 향한 서운함으로 저장된다. 게다가 내가 겪는 슬픔의 분위기가 그들에게까지 옮아간다면, 나 하나 때문에 그들의 감정이 내내 슬픈 채로 머물러야 한다는 게 또 미안해진다. 그래서 점점 주변과의 거리를 두게 된다. 내 마음이 감당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그들의 웃음이 가득한 일상에 나의 아픔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슬픔은 어떻게 다가오고,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통과하는지 그대로 보여주는 글이다. 어린 아들의 죽음은 그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그대로 가슴에 꽂아주었고, 함께하는 아내만이 자기의 고통을 공감해주리라 믿었지만 그마저도 온전하게 같지 않았다. 부부의 아들이었지만, 그 아들을 같이 잃었지만, 그 고통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미세하게 달랐다. 저자는 그런 아내에게까지 서운했을 것이다. '영원히 지금 그대로의 슬픔을 당신과 공유한다고 믿었는데, 그 슬픔을 벗어나는 방식이 당신과 내가 이렇게 달랐구나' 싶은 순간, 마치 아내의 슬픔이 더 작은 건 아닐까 하는 오해도 하지 않았을까? 듣다 보면 인간의 가장 기본이고 바탕이 되는 마음들이 보인다. 이것저것 재는 것이 아닌, 가장 순수했던 마음 그대로 돌아간 것만 같다. 내 마음과 같으면 그렇게 이해해주는 게 고맙고, 내 마음과 다르면 괜한 미움과 서운함이 겹쳐 감정이 멀어지려고 하는 일들을 보면서, 그 상황과 마음이 무엇인지 알 것도 같으면서도 조금은 더 성장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중심을 잡고 슬픔을 끌어안는 방법은 어떤 게 있을까? 그 방법은 각자 다를 수도 있지만, 저자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아들과 함께한 시간 그 자체를 기억하는 것이었다. 아들의 사망신고를 하면서 죽은 이가 남긴 기록을 생각한다. 아직 학교에 다닌 적도, 돈을 벌어본 적도 없는 아들은 어떤 기록을 남겼을까. 공식적이지는 않지만, 저자가 부모로서 기억하는 모든 것은 아들이 남긴 게 된다. 아들이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 편안하게 잠들었던 작은 침대, 살던 집의 곳곳에서 풍기는 아들의 자국들. 그 공간을 떠나면 아들의 흔적을 금방 지우고 슬픔도 소멸할까 싶지만, 저자는 굳이 그곳을 떠나면서 아들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자기에게 다가온 슬픔을 마주하며 기꺼이 끌어안았다. 우리 삶은 슬픔을 외면해도 계속되니까. 그러니까 굳이 그 아픔을 빨리 지우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시간이 흐르는 게 당연한 것처럼, 슬픔도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게 방법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가 슬픔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방법이 꼭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의 말을, 그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따라해 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이해와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77페이지)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은 말에서 먼저 드러나기 마련이다. 지위가 낮다는 이유로,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함부로 반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상대의 존중을 얻는 방법은 높은 지위가 아니라, 많은 나이가 아니라, 깊고 넓은 마음뿐이다. (147페이지)

 

 

나에게 다가온 슬픔을 잊으려고 애쓰지 않고 간직하면서 삶을 유지하는 이야기 같다. 세상을 떠난 아들을 기억하면서 슬픔에 빠져있기보다는, 아들의 빈자리만큼 더 나은 삶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그가 맞이한 비극에 주저앉지 않고,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면서 아들을 가슴속에 새기고 있었다. 아내와의 시간을 곱씹으며 살아가는 방식을 배우고, 그의 성장을 함께한 가족에 대한 애정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그가 처음 겪은 상실은 존경의 의미를 기억하게 했다. 사회생활을 하며 보고 느꼈던 일들에 그의 다짐을 더 하고, 관계를 더 현명하게 이어가는 방식을 경험한다. 매 순간 삶의 진지한 태도를 보여주는 문장에, 그가 안간힘을 내며 나아가는 모습은 이 책을 읽는 우리에게 또 다른 위로가 된다.

 

그 대상을 잊는 게 반드시 슬픔을 지우는 방법은 아닐 테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에게 다가온 슬픔을 극복하면서, 슬픔을 대하는 방식이 반드시 한 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배운다. 떠나간 것을 잊고 또 다른 것들로 삶을 채우면서 나아가는 일이 때로는 버거울지 모르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이 그렇게 한 걸음 내디디고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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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05-05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부모보다 자식을 잃은 아픔이 더 크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자식은 자기 분신과도 같으니 자기 살이 떨어져나가는 느낌... 그런 마음 잘 모르지만 어쩐지 그럴 것 같아요 아이가 죽고 사망신고 하는 일도 무척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부부라 해도 슬픔이 똑같지 않기도 하겠지요 그렇다고 누구 슬픔이 더 작다 말하지 못할 것 같아요 둘 다 힘들겠습니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어서 좀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희선

구단씨 2020-05-07 22:32   좋아요 1 | URL
그러겠죠?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뭔지 알 것 같아요.
누구나 자기 슬픔이 가장 큰 슬픔일 거예요. 같은 고통을 겪었으니 슬픔도 같을 거로 생각하지만,
저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슬픔은 다 똑같지가 않더라고요.
희선님 말씀처럼, 그래도 혼자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힘든 시간을 같이 걸어가는 동안 슬픔도 같이 줄어들 것 같아서요.
 
생강빵과 진저브레드 - 소설과 음식 그리고 번역 이야기
김지현 지음, 최연호 감수 / 비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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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작품 속 어느 장면에 빠져들었던 적이 있던가? 주인공이 심란한 마음에 펼쳐 들었던 책의 한 구절,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걷던 길, 술 한 잔과 함께 들려오던 음악. 어쩌면 이런 장면에 빠져들어 이야기 속 주인공들과 하나가 된 기분을 느끼게 되는 건 비단 문학 작품만은 아닐 테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책이나 음악, 장소는 주인공의 중요한 순간에 함께하는 의미가 되기도 하니까. 저자는 문학 작품을 번역하면서 마주했던 여러 감정을 이야기하면서 그동안 만나온 문학 속 주인공과 음식을 떠올린다. 그때 그 음식이 주인공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인간의 성장과 어떤 관계가 만들어지는지 묻는 듯하다. 마치 소설 속에서 마주친 장소, 음악, 책 같은 것과 같은 느낌으로. 그 순간에 느끼는 모든 것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처럼.

 

10월 17일. 키다리 아저씨에게.

체육관 수영장을 레몬 젤리로 가득 채우고 그 안에서 헤엄을 치려 한다면, 몸이 과연 뜰까요? 가라앉을까요?

친구들과 디저트로 레몬 젤리를 먹다가 그런 의문에 빠졌어요. 삼십 분 동안 열띤 토론을 벌였는데도 여태 결론이 안 나네요. 샐리는 헤엄을 칠 수 있을 거라지만, 저는 세계 최고의 수영 선수라도 틀림없이 가라앉을 거라고 생각해요. 레몬 젤리에 빠져 죽는다면 우습겠죠?

- 진 웹스터 『키다리 아저씨』

 

레몬 젤리는 주디의 상상력을 키우는 음식이 아니었을까? 주디가 키다리 아저씨에게 쓰는 편지는 그녀가 성장하는 모든 과정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글쓰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편지 안에 가득한 주디의 일상과 모험, 상상력 같은 이야기는 다시 봐도 생생하다. 주디의 머릿속에 떠오른 레몬 젤리가 가득한 수영장은 읽는 이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생각만 해도 피부에 닿으면 끈적거릴 것 같지만, 그곳에서 수영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싶어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러면서도 소설이니까 가능한 상상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현실에서 하기 어려운 일은 소설 속 주디가 우리를 대신해서 보여주는 느낌이랄까. 아무것도 모른 채로 마냥 아이였던 시절을 떠올리듯, 어쩌면 잠시 이 장면을 상상하며 마음 놓고 느긋하게 있어도 좋은 시간 말이다. 팍팍한 현실에 지치고 피곤한 몸을 달달함 가득한 수영장에 넣어놓고, 누가 뭐라 해도 좋으니 상관 말고 즐기고 싶다는 깜찍한 바람이 이루어진 것 같은 낭만?

 

소설가이자 번역가이면서 독자인 저자가 어린 시절부터 읽은 문학 작품의 세계이다. 그 안에서 맛본 음식의 의미, 사연, 문장이 담은 문학의 섬세함을 읽게 한다. 생강빵과 진저브레드가 어떤 차이인지, 얼마나 같은지 다 알 수는 없으나, 단어에서 다르게 다가오는 그 분위기를 읽고 즐기는 건 독자의 몫이니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상상의 세계를 누리는 것도 독자에게 주어진 즐거움이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게 의역과 직역의 장단점이었다. 전체적인 흐름에 어울리고 매끄럽게 읽히는 게 좋은 것인지, 있는 그대로의 원래 뜻을 담는 게 좋은 것인지. 나도 원서를 읽을 수준이 안 되니 매번 번역본을 기다리는 독자이기에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 상황 파악 잘되고 흐름이 매끄러우면 좋은 것 같으면서도, 더욱 정확한 의미와 있는 그대로 전달되기는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읽는 독자도 이럴진대, 원서를 마주하고 번역해야 하는 사람은 이런 고민이 끝도 없이 이어지겠지. 그래서 번역 일에 대해 고단하면서도 황홀하다고 표현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작가와 독자를 이어주는 막중한(?) 임무를 가지면서도, 어떤 번역이 작가와 독자에게 가장 좋은 일일까 하는 고민은 계속될 듯하다. 그러면서 독자로 성장한 자기 기억의 순간을 같이 풀어놓으면서 독자로 살아갈 우리들과 공감한다.

 

 

혹시, 고전 명작에서 처음 접했던 낯선 풍경들을 기억하는가? 주인공이 입은 옷이나 시대를 설명하는 일만큼이나 어려웠던 것 중 하나가 음식이었을 거다. 저자에게 그런 낯선 풍경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건 상상력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 검색 하나로 모르는 대부분을 확인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스마트하지 못한 옛날을 생각하면 글자 그대로 상상에 의존하여 문학 작품 속 세상을 이해해야만 했으니까. 그러니 저자가 번역가가 되고 얼마나 황홀했을까 싶다. 막연하게 상상하며 소화하던 것이 이제는 하나하나 직접 확인하면서 이해하는 순간을 맞이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 어색하고 투박했던, 과거 저자가 접했던 작품들의 번역이 우리말로 옮길 마땅한 표현이 없어서였다는 걸 알게 된다. 너무 이상하다고 여기며 읽었던 문장들의 탄생을 비로소 이해한다. 거기에 중심을 둔 게 음식이다. 각종 빵과 수프, 요리들. 눈앞에 차려진 음식들이 뭔가를 표현하는 것 같지만, 제대로 알지 못해서 다 맛보지 못한 아쉬움을 저자의 설명으로 달래게 한다. 링곤베리를 귤로 상상했다는 저자의 기억이 귀엽다. 그때는 또 그럴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겠지.

 

검고 딱딱한 빵 대신에 할머니에게 하얗고 말랑한 빵을 주고 싶었다는 하이디. 커다란 빵에 건포도가 박혀 있어서 먹음직스러웠던 소공녀 세라의 시선. 거위 구이가 차려진 식탁에 비교되어 갇힌 히스클리프가 더 생생해지는 워더링 하이츠. 땅콩버터와 잼 샌드위치가 하나의 음식이 아닌 것처럼 들리는 건 또 뭔가. (여담이지만, 땅콩버터와 잼을 같이 바른 샌드위치는 정말이지, 너무 맛있고 달달하다. 칼로리가 엄청 높은 음식을 먹었다는 죄책감도 동반한다) 더 많은 작품 속 음식 이야기가 있지만, 계속 들으면서도 선뜻 그 음식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 무엇보다 문화의 차이가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우리는 칼칼하고 개운한 뒷맛이 나는 음식을 좋아하기도 하니까. 마치 피자를 맛있게 먹어놓고 마지막에 김치 한 가닥 먹어줘야 하는 순간도 있는 것처럼. ^^

 

저자가 소개해준 이 많은 작품을 다 읽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이렇게 유명한 작품들, 고전이라 불리며 마치 필독서인 것처럼 여겨지는, 언젠가 한 번쯤은 읽어보고 싶어서 목록에 넣어둔 작품들의 제목을 다시 마주하고 있자니 반성 아닌 반성 모드가 된다. 무엇보다 저자가 건드려준 작품 속 음식들의 의미가 다르게 다가올 것 같다. 모르고 읽었다면 그냥 식탁 위에 차려지고 지나가는 음식 하나로 끝났을지도 모르는데, 어느 순간에는 주인공의 인생을 좌우하는 음식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그냥 음식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빵 하나에도 삶이 담긴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저자는 이 책으로 번역을 지적하고 오역을 바로잡는 게 아니었다. 번역으로 태어난 글이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면서, 그동안 만났던 작품에서 발견한 오해의 순간들을 아름다운 되새김으로 저장한다. 그러면서 독자에게는 새로운 마음으로 그 작품들을 읽고 싶어지게 한다. 그런 장면이 있었나 싶고, 그 음식이 그렇게 번역되었나 하는 궁금증, 그러면서 원작에 더 가까이 가게 하는 마음을 심는다.

 

오역으로 보이는 문장들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름다운 이야기 한편으로 다시 태어나는 기분을 느끼게도 한다. 소설 속 단어 하나로 우리는 또 한 번 상상의 시간을 만나기도 한다. 알 수 없는 단어들로 작품을 보는 다른 시선을 갖기도 한다. 섬세한 번역으로 우리가 작품을 더 잘 이해하는 건 맞겠지만, 어쩔 수 없이 고민에 고민을 더한 단어의 선택으로 우리는 원작의 다양한 해석을 맛보는 즐거움을 저자의 추억 같은 명작 이야기로 듣는다. 때로는 지나가는 행인1처럼 사소해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의 세상을 꿈꾸고 다른 삶을 만나는 귀한 경험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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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순간들 - 박금산 소설집
박금산 지음 / 비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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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글이든, 비슷한 기준이 있는 듯하다. 독후감이나 리뷰 같은 후기를 쓸 때도 간결하면서도 의미가 전달되는 글이 좋다고 하는데, 소설도 마찬가지다. 이 책의 단편 중에 나오는 말이 잊히지 않는다. 어느 교수가 자기 소설을 읽어봐 달라고 하는 학생에게 요구한 것은, 자기가 쓴 글을 요약하라는 것이었다. 한 줄로 말해보라고 말이다. 하나의 소설이 한 줄로 요약이 될까? 읽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 한 줄로 소설의 내용이나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울 텐데, 독자가 읽기 위해 쓰인 글이 한 줄로 요약한다고 해서 무슨 의미를 가질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글이든, 그 글을 읽기 전에 마주할 혹은 그 글을 읽고 난 후에 남길 한 줄은 필요한 것 같다. 간단하지만 내용을 다 알 수 있는. 그렇게 듣고 좀 더 관심 있다면 읽어보게 되는 게 독자의 선택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주 짧은 단편들로 구성된 이 책은 조금 깊이 들어가면 소설의 구성을 설명하고자 배치한 단편들이기도 하다. 소설의 구성 요소인 발단, 전개, 절정(위기), 결말로 챕터를 나눈다. 짧은 소설 한 편에 소설의 모든 구성 요소가 그대로 담겨 있기도 했지만, 그 구성 요소의 특정 부분이 강조된 이야기로 배치하여 소설 작법을 설명한다. 소설의 발단 단계에서는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문장을 적어놓았다.

아내가 말했다.

“강물 속에 커다란 문이 있어.” (21페이지, 강물 속에 커다란 문이 있다는 말)

딱 봐도 소설의 시작이라는 게 눈에 보인다. 강물 속에 커다란 문이 있다는 화두를 던져놓고 그 후에 펼쳐질 이야기를 기대하게 한다. 아내가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뒤에 이어져야 하겠지. 아니면, 강물 속 커다란 문의 궤적을 찾아가는 흐름이라거나. 흥미진진한 단서를 툭 던져놓으면서 다음 페이지를 넘기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되고, 전개와 절정을 지나 결말을 향해 간다. 플래시 픽션(flash fiction, 콩트나 엽편소설(葉篇小說)로도 불림)이라고 불리는 형식의 소설 25편으로 작가의 소설론을 표현한다. 마냥 긴 설명이라면 자칫 지루해서 읽다가 덮겠지만, 작가가 앞서 했던 구성의 설명을 생각하면 이야기 자체보다는 그 이야기가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같이 보게 되는 게 신기해서 계속 읽힌다. 그러니까 이야기와 소설의 구성이 동시에 들려오는 기분이나 형식. 독특한 구성인 만큼 소설을 쓰고 싶은 이에게 일석이조의 효과를 내는 책이 아닐까 싶다. 독자가 이 책을 읽으면서 은근히 소설을 나눠 읽는 느낌이 드는 건, 또 하나의 즐거움일지도 모른다. 부분을 설명하려고 배치한 소설들에서 이야기의 전과 후의 내용을 상상하게 하니까 말이다. 앞에서 던져놓은 작은 단서로, 뒷부분 읽다 보니 발견하는 전말 같은 거. ‘아하’ 하는 순간을 확인하는 즐거움이 소설 읽는 재미 아니겠나.

 

소설 작법서인 것 같으면서도, 독자가 즐길 수 있는 단편소설집이기도 하다. 작가는 여러 의미로 이 책을 구성했는지 모르겠지만, 독자인 내 시선으로 따라가는 건 이야기의 바탕에 깔린 소설 작법보다는 소설 그 자체로 즐기는 맛이 더 컸다. 단편 하나하나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애써 그 의미를 표현하지 않아도 좋다. 단편을 읽는 재미는 그 짧은 이야기 속에서 발견하는 자기만의 공감일지도 모르니까. 그러면서 은근히 강조하는 소설 작법을 눈여겨봐도 좋겠다. 소설을 쓰려는 이가 아니더라도, 어떤 글이 읽는 이에게 편하고 즐겁게 다가오는지 아는 재미는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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