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 산사 순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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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 봉정사, 부석사, 통도사. 한국의 산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는 소식은, 산사를 잘 모르는 나도 들뜨게 했다. 우리나라의 산사만이 가지는 특징, 혹은 느낌이 전해지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아서다. 지난봄에는 금산사에 갔었다. 노래와 흥으로 무장한 관광객들을 뒤로하고 막상 걸어 올라간 금산사에서 본 것은, 제법 큰 법당에 모여든 사람들이 간절하게 바라면서 기도하는 모습이었다. 종교의 의미를 떠나서, 절은 그 자체로 사람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고요하게 하며, 마음속 간절함을 표현하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아마도 여러 나라에 그 나라 고유의 그런 장소가 있겠지만, 우리나라의 산사를 따라올 곳이 있을까 싶다. (내가 본 곳이 우리나라만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 오래전부터 산사를 예찬해왔다는 유홍준 작가의 마음이, 이번 산사 순례 답사기로 다시 확인하는 것만 같다.

 

이미 만나본 독자도 있을 테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는 너무도 유명한 베스트셀러이고, 마니아 독자는 1권부터 주제별로 따로 출간된 것까지 다 만나봤을지도 모른다. 이미 선보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뽑아낸, 한국의 산사 20여 곳을 소개한 책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기념으로 출간된 책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산사만을 소개했다는 점에서 이 분야에 관심 있는 독자에게는 요점정리 해주는 느낌이기도 하다. 산사만을 돌아보겠다는 계획을 세워도 좋을 것처럼 각 산사의 특징과 매력을 이야기하듯 펼쳐 놨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를 포함해서, 등재되지는 않았지만 놓치면 아쉬울 산사를 빼곡히 담아냈다. 특히 북한의 산사를 소개한 부분은 의외였다. 통일되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을 곳이라고 생각했던 장소까지 소개해주다니!

 

 

우리나라 산사 건축은 진입로부터 시작된다. 산사의 진입로는 그 자체가 건축적·조경적 의미를 지난 산사의 얼굴이다. 약 반 시간 걸리는 이 5릿길 진입로는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속세와 성역을 가르는 분할 공간이자 완충 지역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산사에는 반드시 저마다의 특징을 가진 진입로가 있다. (73페이지, 순천 선암사)

 

저자는 산사의 진입로부터는 걸어서 간다고 했다. 요즘에는 길을 많이 정리해놔서, 절의 입구까지 차를 타고 올라가는 경우가 많다. 나부터도 다리가 아프니 차로 갈 수 있는 곳까지 가자고 말하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저자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그동안 산사를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진입로 따위는 무시하고 지나가지 않았나 싶다. 그러니까, '그곳'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쌩~ 지나가 버리는 일이 참 가벼워 보이지 않았을까 싶은? 어딘가로 들어갈 때, 대문이나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는 (혹은 똑똑 노크를 하는) 일을 생략한 것만 같다. 그곳을 방문하는 예의를 갖추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아주 많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저자는 '여기서부터는 구석구석 잘 보고 들어가야 여기를 제대로 보는 거다'라는 의미를 담고 말했다. 이곳과 저곳의 구분 짓는 선을 넘어서 들어가니, 무엇이 다르게 느껴지는지 확실히 알 것이라는 예고, 혹은 충고 같은 말. 이 문장을 들으면서 다짐했다. 다음에 다시 산사에 가게 된다면, 절대 진입로를 걸어서 들어가리라.

 

 

수덕사는 결코 볼거리가 많은 절은 아니다. 문화재를 찾는다면 대웅전 하나로 끝이다. 그 밖에 오층석탑이니 뭐니 있지만 대수로운 것이 못 된다. 그러나 덕숭산의 사계절과 그 자연 속에 살았던 인간의 이야기와 전설이 있기에 우리의 가슴속에 젖어오는 감성의 환기가 있고 이성의 일깨움이 있다. (186~187페이지, 예산 수덕사와 서산 개심사)

 

사람들은 국보나 보물이라는 명칭 때문에 문화유산의 가치와 멋을 그런 데에서만 찾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봉암사에서 진실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절집의 자리앉음새이다. 경내 어디에서 보아도 우뚝 솟은 희양산 준봉들이 봉암사를 호위하듯 감싸고 있다. 깊은 산속에 이처럼 넓은 분지가 있다는 것이 차라리 이상할 정도다. (247페이지, 문경 봉암사)

 

뭔가 유명한 볼거리가 없어도, 우리가 산사를 찾는 이유 중의 하나를 콕 집어서 말해주는 것 같아 많이 공감했다. 이름 있는 문화재나 특징 있는 다른 것을 찾아보는 즐거움도 있겠지만, 산사 특유의 고즈넉함과 침잠하는 분위기 때문에 찾게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산에서 뿜어대는 사계절의 바람과 변화하는 색들, 자연스럽게 흐르는 물줄기 하나에도 우리는 종종 특별함을 느낀다. 아니, 오히려 그 고요함과 자연이 그대로 있는 곳을 찾아가는 목적일 때도 있다. 이건 뭐라고 분명하게 설명하기는 좀 어려운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아니면 그 마음 조금은 다독여주는 시간을 만들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인위적으로 만든 배치가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모양 그대로 그 자리에 자리한 구조들이 특이하기도 하다. 아니면 저자가 말한 봉암사의 위치처럼, 주봉들이 호위하듯 감싸고 있는 배치라니 참 놀랍다. 오랜 시간, 그 중심에 있는 봉암사를 어떻게 생각하고 산사를 유지해왔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북한에도 절이 있고 스님이 있다는 데서 조금 놀랐다. 당연히 있을 수도 있는 일인데, 나는 '북한'이란 나라에 많은 부분이 폐쇄되어 있다고 생각했기에,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에, 절과 스님이란 단어를 떠올리지 못했다. 북한에도 우리나라와 같이 오랜 시간 같이 해온 역사가 있었을 텐데, 그 안에서 자리한 절이 있었을 텐데 말이다. 아마도 김씨 일가의 우상화를 먼저 떠올리다 보니 다른 종교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저자가 1997년 9월에 찾아간 보현사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 특별하게 들린다. 보현사가 북한에서 가장 큰 절이라고 한다. 금강산 4대 사찰 중의 한 곳인 표훈사가 금강산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찰이라는 것도 놀라움과 아쉬움이 동시에 밀려온다. 표훈사는 금강산의 핵심처고, 금강산의 복부에 해당하는 곳이라고.

 

 

책으로 수없이 보아왔고, 해마다 한국미술사 시간이면 슬라이드로 비추며 보아온 이 보현사 8각13층석탑은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준수하게 잘생겼다. 생각만큼이나 크고 세부의 묘사에도 게으름이 없고 마감질에 불성실은커녕 추녀마다 풍경, 북한말로 바람방울을 무려 104개나 달아매는 치밀성을 보여주고 있다. (372페이지, 묘향산 보현사)

 

작가가 전국을 돌면서 본 많은 산사 중에서도 특히 애정이 묻어나는 곳을 이렇게 들려준다. 여기에서 언급하지 않았다고 해서 볼 게 없는 산사는 없을 터였다. 전국 어느 산을 가더라도 만나게 되는 게 산사다. 우리나라만의 전통인 산사의 아름다움을 이렇게나마 전달하면, 이 내용을 접한 독자는 알아서 더 많은 산사와 절의 자태, 산사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으리라 생각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우리나라의 산사가 등재된 게, 세계에 우리나라 산사의 아름다움을 더 많이 알리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더불어, 우리가 산을 찾을 때 절의 모습, 지붕의 이음선 하나, 기둥 하나, 배치, 그 땅에 뿌리내린 나무 등 산사를 이루는 많은 것을 보는 눈이 달라졌기를 바라게 된다. (나부터!) 종교를 떠나서 그냥 그곳에 자리한, 오랫동안 우리나라의 아름다움이 되어온 산사를 느끼는 것이면 충분하다. 저자가 이 책으로 전하고 싶은 말도 같은 의미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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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늑대의 피
유즈키 유코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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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가 주인공이 되어 사건을 해결한다거나, 예상하지 못한 상황들을 정리하면서 활약을 펼치는 추리소설은 많다. 혹은 그 주인공이 탐정이라던가. 나쁜 놈들 다 해치우고, 정의를 되찾는 것을 보여주면서 말이다. 독자는 그런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아, 역시 아직 세상은 살 만해.'라고 뿌듯해하기도 하겠지. 그렇지 않은가? 온갖 부조리에 불평등에 현실은 우리를 아프게 하는 일투성이인데, 현실에서 다 이루지 못한 정의를 소설에서 되찾는 기분이 들게 하는 것 때문에 만족감을 느낄 때가 있다. (내 욕심이지만, 이런 의미는 소설을 읽는 이유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이 소설 역시, 그런 의미를 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했다. 야쿠자의 등장은 그저 설정이고, 야쿠자와 형사가 대립하며 조직폭력의 근간을 없애버리는 이야기가 아닐까, 나 혼자 상상했더랬다. 다 읽고 나니, '아니오.'였다. 안타깝게도, 야쿠자를 상대하는 경찰 세계도 온전히 정의만을 위해 싸울 수는 없었던가 보다. 그 느낌은 이 소설의 제목과 닿아 있다.

 

오가미는 구레하라 동부경찰서의 폭력단계 형사다. 베테랑이라면 베테랑이기도 하고, 속도니 말로 꼴통 짓을 하는 형사인 듯하다. 자기 식대로 수사하고 필요하다면 절차도 무시할 수 있는 배짱이 있는 형사. 하지만 결과는 늘 올바르게 가져오기에 아무도 뭐라고 할 수 없는 형사이기도 한 존재. 그런 오가미의 밑으로 신입 히오카가 왔다. 고참 형사와 새내기 형사의 조화는 상당히 흥미롭다. 일단 갑과 을이 정확히 보이기도 하고, 신참 형사가 고참 형사를 따라다니면서 어떻게 일을 배울까 하는 궁금증과 호기심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 콤비가 야쿠자를 상대하는 방식은 어떨까. 아마도 오가미의 일방적인 방식이리라. 후훗~

 

 

구레하라 금융의 우에사와가 실종되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오가미는 이 소식을 듣고 의심한다. 구레하라 금융은 악덕 대부업체로 야쿠자가 배후에 있다. 우에사와의 실종은 해당 야쿠자의 범죄와 연결되어 있을 것 같다. 한 사람의 실종으로 더 큰 사건을 찾아낸 거다. 상대의 것을 뺏으려고 하는 집단과 지키고 방어하려는 집단의 싸움이 시작된다. 그 중간에 오가미가 있다. 어떻게 형사가 야쿠자 사이의 싸움에 관여하게 되는가 하는 의문이 여기서 시작된다. 아니, 사실은 그전부터 오가미가 야쿠자를 싫어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때도 이상했고, 야쿠자를 잡아들여야 하는 범죄 집단으로만 생각하지 않는 것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의 싸움에 관여하고, 야쿠자와 소통하며 지내는 오가미의 행동을 보고 난 후,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가미의 어록이 여기서 등장하는데, 그건 야쿠자 세계를 이해하게 하면서도 이 세계의 생리를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공생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야쿠자는 평소에도 불합리한 세계에서 살아. 두목이 희다고 하면 까마귀도 흰 거야. 그런 녀석들을 상대로 싸우는 거라고. 야쿠자를 이해하려면 그들처럼 불합리한 세계에 살아야 하는 거야. (22~23페이지)

"폭력단은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아. 인간은 말이지, 밥을 먹으면 똥을 눠야 해. 밑을 닦을 휴지가 필요하다는 말이지. 그러니까 폭력단은 화장실 휴지 같은 거야.” (213페이지)

 

그러니까 야쿠자의 세계를 이해해야만 오가미가 야쿠자를 대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고, 이권 다툼에 혈안이 된 이들을 벌주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들은 그런 방식으로 정리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것을 오가미가 증명한다. 어차피 폭력단이 사라지지 않는 세상이라면, 평소에도 불합리한 세계에서 사는 그들을 이해하는 게 그들을 대하는 방식이라는 것. 그래서 오가미는 그들의 불합리한 세계에 맞는 방식으로 그들을 대하면서 그의 말처럼 '야쿠자가 민간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감시하고, 도를 넘는 녀석들을 없애는 일(214페이지)' 정도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거다. 그래서 오가미는 그가 만든 나름의 기준과 방식이 있던 게 아니었을까? '야쿠자를 상대하는 방식' 뭐 이런 타이틀로 그의 머릿속에 새기고 일을 하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특히 그 방식 안에서도 정의를 잃지 않은 오가미의 태도는 너무 멋졌다. 오랜 시간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형사의 모습을 그린다면 오가미가 가장 먼저 생각날 정도다. 그 현장은 바로 야쿠자의 세계일 것이고...

 

그래서일까. 읽다 보면, 엉터리 수사로 야쿠자를 상대하는, 이렇게 야쿠자와 호형호제하기도 하면서 슬렁슬렁 일하는 것처럼 보이는 오가미지만, 마지막에는 야쿠자를 일망타진하고 홀가분하게 이야기가 마무리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오가미, 드디어 정신 차렸군! 하면서 말이지) 하지만 소설은 분위기를 전환하면서 또 다른 사건을 수면 위로 드러낸다. 오가미가 야쿠자 집단 사이의 화해와 계산을 중개하던 그즈음에, 뜬금없이 14년 전 미결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오가미를 지목한 투서가 날아든다. 왜 하필 이때? 이때부터 뭔가 자꾸 불안해지고 오가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위태롭게 들린다. 그가 아끼던 라이터를 히오카에게 맡기면서, '혹시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이라는 가정으로 나중에 히오카가 해야 할 일을 말한다. 설마 무슨 일이 생기기야 하겠어, 오가미와 야쿠자 사이에? 그랬다. 그렇게 안심했다. 오가미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히오카는 오가미의 팀으로 그와 계속 수사를 하는 형사로 성장할 것이다, 라고 믿고 싶어진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드러나면서 소설은 반전을 일으킨다. 소설의 중간중간 보이던 수사일지, 이유를 모르겠지만 검은 펜으로 줄이 그어져 삭제된 문장. 오가미가 정의한 현실 속의 논리가 히오카에게 제대로 전달되었다는 증거이리라. 아키코('요릿집 시노'의 주인이자 오가미와 끈끈한 우정을 나눈 여자)에게 히오카가 했던 말처럼, 독자인 나도 오가미와 히오카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저도 동지입니다." 이 사회에서 정의가 온전하게 이뤄진다는 건, 어쩌면 닿을 수 없는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현실이 너무 냉혹해서 그저 상상으로만 가능한 일을 꿈꾸는 것보다, 이 현실을 지금의 상황에 맞게 받아들이며 대응하는 게 맞는 방식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건, 아마도 오가미 때문이겠지.

 

야쿠자 사이의 세력 다툼의 생생한 장면들, 야쿠자와 경찰 사이의 팽팽한 대결, 야쿠자 조직의 생리, 시민의 안전과 정의를 실천한다는 경찰 조직의 실체까지 두루 다루면서 독자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특히 야쿠자와 경찰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은근히 닮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나만 그런 걸까? 예전에 어디선가 들었는데, 범죄자와 범죄자를 쫓는 형사의 관상은 닮았다고 하더라. 오가미가 야쿠자와 싸우기 위해서는 그들처럼 불합리한 세계에 살아야 한다고 하는 말이, 경찰이라는 조직도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복선처럼 들렸다. 어쩌면 오가미는, 야쿠자와 싸우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경찰 조직도 불합리한 세계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던 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베테랑 형사의 야쿠자 정복기이면서, 신참 형사의 야쿠자 적응기이기도 하고, 세상의 정의가 반드시 실현되는 건 아니라는 현실을 알리는, '고독한 늑대의 피'를 이어받는 새로운 형사 콤비의 탄생을 알리는 작품이었다. 이제는 방탄조끼도 입지 않고 출동하는, 어느새 선임 형사가 된 히오카의 활약을 기다려야 하는 건가? (보고 싶다, 오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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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8-09-02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재미있게 보셨나 보네요 형사에도 괜찮은 사람이 있고 자기 신념을 밀고 가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경찰 조직도 위로 가면 안 좋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기에 아주 무너지지 않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상대, 여기에서는 야쿠자를 알면 그 세계를 알 수도 있겠지요 이건 어디나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에도 시대 소설을 보면 그때부터 야쿠자는 있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이런 건 사라지지 않겠지요 한국도 마찬가지겠습니다 아주 없앨 수 없다면 함께 살아가는 것밖에 없겠네요 어떻게 하면 함께 살아갈지 잘 생각해야겠습니다


희선

구단씨 2018-09-02 22:36   좋아요 0 | URL
이 소설에서 오가미가 말하는 것도 딱 그거였어요.
없앨 수 없으니까 같이 가야만 하는 운명이라면,
적어도 그들이 민간인에게 해를 끼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만 기억하자는 느낌?
이런 형사 문제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원래 현장에서는 경험이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
 

 

아버지를 처음 본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 쓰고 보니, 아버지를 처음 봤다는 말은 좀 이상한 데가 있다. 그것이 만남에 대한 이야기라면, 더욱 그렇다. 나는 아버지를 언제 처음 만난 것일까? 그것이 내 몸의 소용돌이가 시작된 기원이라면, 내가 까맣게 잊어버린 기억의 어디쯤에 다다라야 하는 것일까? 사실 ‘처음 본 기억’을 꺼낸 것은 이어서 이런 문장을 쓰기 위해서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2008년 7월 11일 대학병원 중환자실이었다. 그날의 날씨와 창밖의 여름과 분주한 간호사들과 가족들의 모습. 하지만 첫 문장이 다음 문장을 불러 알 수 없는 생각의 문을 열자, 나는 아버지의 마지막을 본 적도 없는 것 같다. (당신은 우는 것 같다, 14페이지)

 

시인의 첫 문장이 강렬하다. 아마도, 저런 말이 나올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겠지. 누구에게나 비슷하다. 부모를 처음 만난 그 순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기억이라는 것을 소환하면 어디쯤에서부터 시작되는지는 알 것도 같다. 저마다 다른 시작점이겠지만, 그 시작은 누구에게나 있다. 우리의 아버지는, 어머니는 이랬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기억의 시작. 나에게도 그런 시작이 있다. 기억이라는 것이 시작될 무렵을 거슬러보니, 나의 기억 대부분은 엄마와 함께였다. 남들이 말하는 '부모'라는 이름은 거의 떠올릴 수 없었다. 나의 모든 일상과 성장에 있었던 건 부모가 아니라 엄마였다. 혹시 모르겠다, 기억이 없는 그 시절에는 아빠가 함께 있었는지도. 그러니까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내 인생에서 기억하고 있는 순간에 아버지와 나는 같은 시간 속에 없었다는 거다. 이런 말을 하는 게 가슴 아프다거나 속상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다만, 나에게 아버지란 이름의 개념이 없었다는 게, 남들이 말하는 ‘보통’과 달랐다는 게 조금은 아쉬울 뿐이다.

 

당신은 우는 것 같다... 제목만 보고 무슨 연애소설인지, 아니면 이별 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알았다. 누군가의 눈물은 차마 앞에서 흘리지 못해 뒤돌아서 우느라고, 그 등만 보이게 된다는 것을. 소개 글에서 보이는 것처럼, ‘아버지를 미워하거나 그와 불화해본 모든 이에게 건네는 위로의 시와 산문’이라고 하는 이유를 읽다 보면 느끼게 된다. 들려주는 시는 그렇다 치고, 산문은 그들의 기억과 시간에서 소환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의 기록일 것이다. 아니, 그 사실에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을 더한 이야기겠지. 어쨌거나 두 시인이 말하는, 아버지를 향한 감정인 것은 그대로일 터이니.

 

처음부터 이 책을 읽으려고 마음먹은 건 아니었다. 그냥 조금은 궁금한 정도? 왜 아버지가 주제인지, 왜 두 사람이 기억하고 추억하는 아버지는 나와 다른지, 그냥 그들의 이야기를 조금 듣고 싶은 정도였다. 나에게는 없다고 생각한 대상을 굳이 책으로 내는 것까지 감행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한번은 만나고 싶은 이상한 느낌에... 호기심이라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남들이 말하는 그들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는 궁금증. 하지만 곧 후회했다. 읽지 말 것을, 공감과 비공감 사이에서 갈팡질팡, 내가 자라온 시간에 없던 아버지가, 다른 이들에게는 왜 그리도 많았는지 속이 조금 상하더라. 사이가 좋지 않았어도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그래도 아버지였다. 그녀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추억이고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이들에게 아버지는 그런 존재인데, 나에게는 왜 그런 아버지가 없던 걸까.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요양병원의 중환자실이었다.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못했던 아버지였다. 특히 나와 더 사이가 좋지 못했다. 한집에 살면서도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아버지와 나는 그런 사이였는데, 아버지의 병원 생활을 하는 3년여의 시간 동안 나는 병원에서 아버지를 가장 많이 마주하는 가족이 되어 있었다. 집에서도 마주하기 싫어서 아무리 배가 고파도 같은 밥상에 앉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은 그동안 아버지와 내가 함께했던 시간의 몇 배를 같이 보내고 있던 거였다. 괜히 억울했다. 화가 났다. 나는 그 병실에서 아버지와 같이 있고 싶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도, 나는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었다. 내가 아버지의 마지막을 볼 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인생 참 아이러니하다. 절대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일들은, 이렇게 그럴 일이 되어버렸다.

 

아버지와 나의 불화는 고등학교 1학년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그전까지는…… 글쎄, 내 기억엔 나쁘지 않았다. (당신은 우는 것 같다, 69페이지)

 

아버지와 나는 서로를 향해 무심한 사이였다. 적어도 내 기억에는 그렇다. 나는 아버지를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고, 내 인생 안에 포함한 적도 없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러네.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라는 단어가 내 일상에서 사라진 것 같다. 내가 아버지를 타인처럼 여겼던 것은 중학교 졸업 무렵이었다. 고등학교 입학 원서를 써놓고 시험 날짜를 기다리던 때였다.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나를 부르더니 왜 입학 원서를 바꾸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해 되물었더니, 아버지가 학교에 오셔서 입학 원서를 바꿔 달라고 했단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갑자기 왜? 의문이 들 수밖에 없던 게, 아버지는 내가 어느 학교로 원서를 썼는지도 몰랐다. 고등학교에 대해 서로 단 한 번도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중학교 생활 내내 어떻게 학교에 다니는지도 알지 못한 사람이 갑자기 학교에 찾아와 입학 원서를 바꿔 달라고 했다니. 그날 집에 돌아와 아버지한테 물었다. 이때껏 부모 노릇한 적 없는 사람이 왜 뜬금없이 내 일에 참견하려 드는 거냐고. 당신의 인생에 관여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 당신도 내 인생에 끼어들지 말라고 하면서 다음 날 담임선생님께 원래대로 진학하겠다고 말했다. 그때 이후로 나의 보호자는 더 확실하게 엄마뿐이었고, 나의 성장 시간 내내 함께한 것도 엄마뿐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아버지는 옆에 존재했다. 가족들에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일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부담을 주는 존재로...

 

시인의 말이 솔직하게 들려서 계속 읽게 된다. 무슨 사전에 정의라도 해놓은 것처럼, 아버지는 무조건 존경해야 하고 아프게 여겨야 하는 대상으로만 말하지 않았다. 때로는 그 존재가 너무 버거워서 인정하고 싶지 않게, 때로는 그 존재가 너무 그리워서 얼굴을 그리고 싶게 하기도 하는...

 

종합병원의 응급실, 중환자실, 일반병실, 요양병원. 수시로 병원에 드나들면서, 엄마의 고충을 덜어드려야겠다는 것 말고는 이유를 찾지 못한 채로 아버지의 보호자로 사인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나는 엄마를 원망하고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 자꾸 화가 났다. 왜 엄마는 이런 사람을 나의 아버지로 만들어놔서, 왜 엄마와 나 단둘이 있을 때 이런 일은 자꾸 일어나서 나를 힘들게 하는 건지. 3년여의 세월을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하고 싶지는 않다. 하루가 일 년 같았다는 상투적인 표현이 왜 나왔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으니까. 양가감정이 수도 없이 부딪히면서 마음을 상처 나게 했다. 시인의 말처럼, '삶과 죽음이 싸우듯, 사랑과 미움이 서로를 찌르고 희망과 절망이 자리를 바꾸듯, 그리고 눈물이 왼뺨과 오른뺨의 길이를 재듯'이.

 

작년 4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평생을 사실 것처럼 보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사람이 언젠가 한 번은 죽는 거지만, 내가 그 대상을 직접 보게 된다는 게 낯설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가까이에서 본 게 처음이라 모든 게 어색했다. 날씨가 좋았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서 나들이 가기 좋았던 날, 손님을 초대하기에도 덜 미안했던 주말을 낀 날, 마침 들어가고 싶었던 장례식장에 자리도 있던 날, 화장터에서 오래 기다리지도 않게 예약도 순조로웠던 날. 한 사람을 보내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바로 알아버린 날이었다. 누군가, 결혼식이 너무 복잡하고 힘들고 피곤해서 두 번은 하고 싶지 않다는 우스갯소리를 했었지. 장례식도 마찬가지다. 힘들고 피곤하고 복잡했다. 하지만 결혼식처럼 한 번만 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닌 듯하다. 남겨진 사람은 또 누군가를 보내는 일을 겪어야 할지도 모르니까. 여전히 익숙하지는 않겠지만, 또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이 되겠지만 말이다. 장례식이 끝난 다음 날, 새벽부터 폭우가 쏟아졌다.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비가 세차게 내렸다. 식구들이 각자의 공간으로 떠나고 엄마와 둘이 남아있을 때, '어제 비가 이렇게 왔으면 더 힘들었겠다'는 말을 계속했다.

 

아직도 나는, '당신은 우는 것 같다'는 그 순간을 완전히 공감하지 못한다. 나는 아버지가 우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혹시라도 아버지가 혼자 울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두 시인이 말하는, 그 교차하는 마음은 한없이 공감한다.

 

나를 상처 입힌,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사람을 향해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가파른 사랑인지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알고 있기도 하다. 창과 방패처럼, 팽팽하게 맞서는 미움이 있어 또 다른 사랑은 태어나고 사랑은 또 사랑을 낳는다는 것을. (당신은 우는 것 같다, 144페이지)

 

첫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부터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연한 일 아닌가.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쓴 이야기들 속에서 어떻게 나의 아버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있나. 누구라도 그러겠지. 기억 속 아버지를 소환하며 추억하거나, 지우고 싶은 기억으로 남아 있거나 하는 순간을 떠올리겠지. 한때는 아버지와 관련된 모든 일이 세상 전부인 것처럼 여겨져 이렇게 세상이 끝날 수도 있겠구나 싶었는데, 지금은 전부라고 생각했던 그 시간이 점점 조각이 난다. 하나둘씩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는 느낌이다. 악에 받쳤던 감정은 마치 남의 일처럼 조금씩 흐트러진다. 이대로 계속 흐트러져 완전히 사라져가는 기억이도 좋을 것 같다.

 

오늘처럼 비가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집으로 가는 골목에 들어섰는데, 앞서가는 사람의 등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였다. 비가 오는데 우산도 없이, 그 비를 맞으며 추적추적 걸어가고 있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얼른 가서 우산을 씌워드리고 집으로 가는 그 길을 같이 걸었을 텐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앞서가는 사람의 뒤를 따라 걷는, 그냥 모르는 사람과 같은 방향을 걸어가는 것처럼, 가만히 걷기만 했다.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 모습을 볼 때까지, 나는 천천히 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작정하고 뒤를 따라 걸었던 게 아니라 조금은 주저하고 있었던 듯하다. 평생 해보지 않은 일을 하려니 머쓱하고, '아버지' 하고 부르며 가는 걸음을 멈춰 세울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같이 가요' 그 말을 하기가 어색했던 건 아닐까 생각한다. 아버지와 화해하지 못한 것,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시간을 아쉬워하는 건 아니지만, 오늘처럼 비가 내리면 그날이 자꾸 생각난다.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거나 이해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날은 우산을 같이 써야 했던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모든 일은 지난 일이 된다. 시간은 세상의 전부였던 일들을 기억의 일부로 돌려놓는 재주가 있다. (당신은 우는 것 같다, 85페이지)

 

기억이라는 단어는 이상하다. 너무 많아 버거운 것이기도, 때로는 텅 빈 것이기도 하니까. 기억은 호리병처럼 생겼을까, 핀셋으로 집어야 하는 작은 칩처럼 인간의 몸속 어딘가에 심어진 부품일까. 기억의 모양은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시간과 밀접한 연관이 있고 인간의 의지로 결별을 제안할 수 없는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당신은 우는 것 같다, 188페이지)

 

가족은 뜨겁고도 차갑고, 성기면서도 질긴 이름. 어느 가족이건 가만히 들여다보면 상한 부분이 조금씩은 있게 마련. 기타노 다케시의 말마따나 “누가 안 볼 때 쓰레기통에 갖다 버리고 싶은 존재”가 가족이라는 건 이제, 그리 특별한 비유도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너무 구질구질해서 갖다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결국 가족이고 끝내 가족이니까 마지막까지 당신 곁에 남는 게 또한 가족이라는 거. (당신은 우는 것 같다, 199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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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공녀 강주룡 - 제2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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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점심시간을 이용해 친구와 잠깐 통화를 했다. 시끄러운 음악이 들리기에 뭐냐고 물었더니, 회사 노조 사무실에서 스피커로 틀어놓은 노동가요라고 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기에 그러는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지금 임금 협상 기간인데 회사와 의견이 맞지 않아 대치 중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당장에 파업은 아니지만, 회사와 노동자 사이의 서로 원하는 바가 달라서 협의가 잘 안 되는 중이기에 파업도 예상한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을 여기에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언제 어디에서나 일어났던 일이 내 주변에서 더 가깝게 일어나고 있다. 노동의 질과 노동자의 행복을 위한 투쟁이 멈춰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을 또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다.

 

이런 일이 1931년에도 일어났다는 게 놀라웠다. 그 시대가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세세하게 알지 못하지만, 일제 침략기였고, 농사가 생업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했던 터라 사업주와 노동자의 대치를 상상한 적이 없다. 그런데 더 나은 삶을 바라며 투쟁을 하고, 인간으로의 권리를 누리고자 을밀대 위에 오른 여성이 있다는 걸 이 소설이 말하고 있으니 당황했을 수밖에. 여자 혼자 사는 일상의 고달픔을 말할 것 같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고무공장의 노동자로 일하면서, 한 인격체로 당당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는 성장기였다. 그 시간 속에 노동자의 정당한 삶을 외치는 목소리를 들은 것이다.

 

작가는, 을밀대 위에 오른 한 여성(강주룡)의 사진으로 그 시대의 상황을 그렸다. 사실을 바탕으로 전하고 싶은 내용도 있을 것이고, 상상으로 더해진 한 여성의 삶을 채워갔을 것이다. 기록에 남지 않은 시간과 기록에 남은 몇 줄의 사실에 더 보태어진 상상은 강주룡의 삶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했다. 다양한 분위기를 그리면서 삶의 기복 같은 순간을 만들기도 했고, 살아간다는 것의 무거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집에서 정해준 연하의 남자 최전빈과 결혼한 주룡은 첫 데이트를 하는 것처럼 설렌다. 이 남자를 사랑하고 평생 같이해야 하는 사람으로 여겼다. 새로운 삶을 꾸린다는 게 어려운 일이지만, 오히려 누군가와 콩닥거리는 느낌을 더 크게 받았다. 전빈으로부터 글을 배우고, 독립운동에 대해 알게 됐다. 전빈은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떠나기로 했고 주룡은 그런 남편을 혼자 보내기가 싫어서 따라나섰다. 여기서도 주룡의 성격이 보이는데, 이 여자 참 성격 쿨하다. 마음먹은 일은 그대로 실행에 옮긴다. 솔직하다. 자기는 독립운동에 대한 의미를 잘 알지 못하고,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오늘 하루 먹고 사는 일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전빈이 원하는 일이니 따라나서 보겠다고 한다. 아니, 독립운동이 어디 그냥 한번 해보겠다고 하면 하게 되는가? 무모한 결정이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이 길을 선택한 것은 훗날 주룡이 을밀대 위에 오르는 일을 불사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도 같다.

 

남편 최전빈과 독립운동에 뛰어든 주룡은 오히려 남편보다 더 활약이 두드러진다. 아마도 그건 주룡의 당찬, 옳다고 믿으면 뛰어드는 성격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역사에 기록으로 남은 백광운 독립부대 참여해서 겪은 일들은 참담한 결과를 낳지만, 그녀는 후회 따위는 하지 않는다. 남편 최전빈이 죽고 돌아왔어도 그녀의 삶은 평탄하지 못하다. 남편을 죽게 했다고 시댁으로부터 고발당해 옥살이한다. 옥살이하고 풀려난 그녀가 갈 곳이 친정이었을 텐데, 그곳에서도 그녀는 마음 편히 지내지 못한다. 결국 그녀는 혼자 떠난다. 가족도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감정에 오롯이 홀로서기를 한 거다. 그렇게 정착한 곳에서 고무공장에 취직한다. 이미 예상했겠지만, 월급이 넉넉하지 않은 곳이다. 공장 노동자 대부분이 여성이었고, 그녀들은 노동자로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다. 열악한 노동환경에서도 하루하루 먹고살아야 하는 고된 생활이었다. 어디 그것뿐이랴. 개인의 감정까지 관리자의 감시와 학대를 받아야 했다. 특히 주룡이 모단 껄이 되겠다고 하는 데서 주저하지 않고 성희롱을 하는 관리자의 모습은 끔찍했다. 한 명의 노동자가 아니라, 아무렇지도 않게 함부로 대해도 되는 물건처럼 대했다. 하지만 참았다. 말 그대로 밥줄을 쥐고 있는 대상이라는 생각에 감히 대들 수 없었다. 그러던 중에 노동운동에 눈을 뜬 것이다. 회사에서는 임금을 삭감하겠다고 하고, 노동자는 현재의 임금도 적은 편인데 더는 양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동안 몰랐던 사실들, 유급 출산휴가도 당당하게 요구하지 못한 채로 아이를 낳고 3일 만에 공장으로 출근한 삼이의 이야기는 주룡이 노동운동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더 단단하게 했다. 이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를 요구하지 않고서는 불합리한 현재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을 테니까.

 

광운은 정색하고 주룡의 어깨를 붙든다.

스스로 그러시면 아니 되오. 부엌데기이고자 자처하면 부엌데기 취급을 받고 독립군 행세를 하면 독립군 취급을 받는 거요. (72페이지)

 

내 배운 곳이라군 예서 배워준 교육밖에 없는 무지랭이지마는 교육 배워놓으니 알겠습데다. 여직공은 하찮구 모단 껄은 귀한 것이 아이라는 것. 다 같은, 사람이라는 것. 고무공이 모단 껄 꿈을 꾸든 말든, 관리자가 그따우로 날 대해서는 아니 되얐다는 것. (180페이지)

 

책의 소개 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을밀대 위에 오른 여성의 사진 한 장으로 시작된 이야기라는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강한 이미지가 펼쳐질 거로 예상했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외치는 큰 목소리를 내는 강주룡을 상상했다. 하지만 소설을 읽어갈수록 느껴지는 건 한 명의 인간으로 사는 모습이 더 보였다. 강주룡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보는 듯했다. 당연한 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앗아가는 환경에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는 우리의 간절한 바람을 강주룡이 외치고 있었던 거다. 아사 투쟁을 하면서 을밀대 위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선택에 아프게도, 공감되는 이유다. 그래서 저항하는 행동을 보여주는 것, 투쟁한다고 타인을 공격하는 게 아니라, 나의 의지를 끝까지 관철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의 도입부가 인상적이다. 더 나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주룡은 자기가 선택한 행동으로 말을 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동안 주변의 지시대로 살아온 인생이 뒤집어지는 순간이다. 가족을 따라 이주해서 살고, 아버지의 뜻대로 결혼하고, 남편이 한다니까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살아왔던 주룡이었다. 고무공장에서 일했던 것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혼자서 살아가야 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라도. 하지만 노동운동은 달랐다. 그녀가 자기 의지로 선택한 일이다. 주변의 선택에 휩쓸려 따라가는 게 아니라, 그녀 자신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선택한 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배워가던 그녀가 주저 없이 결정한 일이다.

 

생각해보면, 한 여성의 노동운동만은 아니었다. 아주 적은 자료로 시작된 한 편의 소설에 불과할지 몰라도, 그 여성의 삶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독자의 눈에 들어오는 건 한 가지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때그때, 눈앞에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듯 살아가는 인생이, 어느 날 보석을 발견한 것처럼 변해가는 모습이 황홀했다. 지금 자기가 사는 시간이 누구의 것인지 비로소 깨달은 것처럼,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지 알게 된 것처럼, 하찮거나 귀한 인간이 따로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들이 그랬다. 잘 알고 있던 일인데,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당연히 아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 당연한 것을 우리는 자주 잊고 사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 했다. 우리가 바라는 삶이 무엇인지 다시 떠올려본다. 싸우면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생각한다. 내 삶을 사랑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대단한 일인지 각인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사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를...

 

그 의미에 비하면 역사에 충분히 기록되지 못했다는 강주룡. 그녀의 행동이 얼마나 큰 역할이었는지 지금의 상황들을 보며 알게 된다. 그녀가 을밀대 위로 올라간 지 80여 년이 흘렀다고 한다. 80여 년의 세월 동안, 우리 사는 오늘은 그때와 얼마나 달라졌을까? 오늘도 어디에선가는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 무엇을 위해 우리가 그 투쟁을 계속하는 것인지 끊임없이 묻는 것, 우리 삶의 더 나은 행복을 찾는 건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아는 일.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한다. 이 소설이 우리에게 전하는 간절한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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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강의 삶과 죽음 - 금강요정 4대강 취재기
김종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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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이 넘게 폭염경보 문자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여름을 싫어하지만, 그래도 별말 없이 견디는 계절이었다. 하지만 올해처럼 더운 여름이라면 구시렁대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앞으로의 여름은 어떨까. 더 더울까? 지구 온난화로 앞으로 간절기는 사라지고 여름과 겨울만 남을지도 모른다는데... 덥다고 노래를 부르니까 옆에 있던 친구가 한마디 한다. 인간이 그렇게 만든 거라고, 그동안 편한 생활 누리고자 신나게 지구를 오염시켜서 이런 더위가 온 거라고, 인간이 자초한 일이라고 하더라. 안다. 뭐가 어떻게 잘못된 건지 자세히는 몰라도, 지금 이 더위는 그동안 지구를 함부로 사용한 인간이 만든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자연을 해치고 인간은 잘살 수가 없다. 2009년, 무리하게 시작된 4대강 사업도 그러하다.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할 생태계를 망가뜨리면서 시행된 일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던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4대강 사업. 자연환경을 파괴할 것이라고 사람들이 내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일이라며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시하면서 시작됐다. 물 관리나 관광자원으로 이용될 거라고, 우리 삶에 충분히 이로운 일이라고 하면서 4대강 사업은 계속됐다. 사업이 계속 진행되면서도 반대의 목소리는 끊임없었다. 환경을 해치는 게 눈에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우리 삶은 자꾸 망쳐가고 있었고, 강의 흐름 역시 자연스럽지 못함으로 망가지고 있었다. 물고기들이 떼죽음 당하고, 녹조는 번져갔다.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강이 병들어갔다. 4대강 사업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강의 문제를 쉬쉬했다. 수시로 계속 생겨나는 문제들을 임시방편으로 눈가림했다. 특히 금강은 내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어서 그런지, 저자가 말하는 장면들이 안 봤는데도 눈에 선했다. (금강하구둑까지는 여기서 차로 30분도 안 되는 거리다) 금강요정이라고 불릴 정도로 금강이 망가져가는 모든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저자는 4대강 사업이 시작하면서 어떻게 강을 해치고 있는지, 강 근처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며 살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지 취재했다. 4대강 사업은 강만 망친 게 아니라, 강에 삶을 의지하고 살았던 사람들의 인생까지 망친 거였다. 4대강 인근에는 농사로 삶의 터전을 일구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강의 물을 끌어와 농사에 이용하기도 하고, 강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생을 이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농사를 짓던 땅을 잃고, 강에서는 더는 물고기를 잡을 수도 없었다. 농사짓던 땅을 4대강 사업 구역에 포함된다며 내놓고 보상금을 받았지만, 갑자기 손에 쥐어진 돈 때문에 가족과 불화를 일으키는 사람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터무니없는 보상금으로 다른 생계를 찾을 수 없어 가난을 안고 사는 사람도 있다. 주민들에게 주어진 보상금을 노리는 사람들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사는 수밖에 없었다. 땅을 일구며 사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닥친 환경은 적응할 사이도 없었던 거다. 저자는 강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면서 만난 사람들의 생활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평생을 그 땅에서, 천직으로 알며 소박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모든 것을 잃은 채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눈에 훤하다.

 

 

물고기 사체의 단백질이 부패하면서 질산성 질소 농도가 높아졌다. 질산은 물고기 생체에 흡수된 뒤 아질산성 질소로 변하여 혈액 내 헤모글로빈과 결합한다. 그나마 남아 있던 물고기들이 또다시 질식으로 집단폐사했을 가능성이 있었던 세이다. 당시 백제보 하류의 수질악화를 초래한 환경부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87~88페이지)

 

수온이 떨어지는 가을, 금강에서는 물고기 떼죽음이 반복됐다. 물고기 아가미 속은 휴면아 상태의 큰빗이끼벌레가 가득 차 있었다. 밀집서식하는 큰빗이끼벌레가 사멸하는 과정에서 미량의 질소가 발생하고 주변의 용존산소를 고갈시킨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147페이지)

 

4대강 사업으로 강이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지 말하는 저자는, 2장에서는 강에서 발견한 오염의 흔적을 들려준다. 사람이 마실 수 없는 물에서만 존재하는 벌레들을 발견함으로써 강이 얼마나 망가져가고 있는지 증명한 거다. 특히 큰빗이끼벌레의 발견은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2급수여서 사람이 마실 수 있는 물이라고 하면서, 정작 마실 수 없는 물에서만 발견되는 큰빗이끼벌레의 등장은 강이 오염되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붉은 깔따구나 실지렁이는 또 어떤가. 솔직히 나도 이 책에서 처음 듣는 이름들이어서 낯설기도 했지만, 이 벌레들이 어떤 환경에서 살아가는지 들었을 때는 기함할 정도였다. 저자도 처음에는 이 벌레들이 무엇인지 몰라서 한참을 묻고 다녔다. (큰빗이끼벌레는 뭔지 몰라서 직접 먹어보기까지 했다니까! 윽~!) 그리고 오염의 흔적으로 빠질 수 없는 녹조. 흘러야 할 물이 흐르지 못해 고여 있다가 생기는 녹조는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그 당시 정부가 온갖 방법으로 녹조가 위험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으나, 녹조는 사라지지 않았다. 저자는 녹조를 건져 올려 녹조로 그릇을 만들기까지 했다. 당시 대통령에게 보내려고 했으나, 우편물을 부치는 것조차 못했다고 한다. 악취가 너무 심한 상태여서 우체국에서 발송 불가라고 거절당했단다.

 

 

수온이 20도 이상에 인이나 질소 농도가 높아야 녹조가 발생하는데, 낙동강, 영산강, 금강 등 모든 강 녹조 속에서 남조류, 즉 독성 마이크로시스틴을 생산하는 종들이 발견되었다. 그중 판별이 쉬운 군체에서 구멍 난 콜로린이 검출되었는데, 이 종은 독성을 생산하는 종으로 낙동강 다음으로 금강에서 제일 많이 검출되었다는 것이다. (171페이지)

 

자연스러운 하천의 모습은 사라졌다. 막힌 강물에서는 거머리, 나방애벌레, 실지렁이, 종벌레, 꽃등에, 깔따구 등만 살아갈 수 있다. 이들은 물속 수서생물 중 최악의 오염지표종으로, 결국 사람들이 사용할 수도 없고 사용해서도 안 되는 폐수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189~191페이지)

 

결론은 하나였다. 4대강 사업은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았어야 할 정책이었다는 거다. 자연스럽게 흘러야만 하는 강을 인간의 마음대로 조정하려고 하니 문제가 생기는 거다. 길게 봐도 이로울 게 없는 정책이었다. 밑 빠진 독에 계속 물을 부으면서도 나아질 게 없는 일이었던 거다. 아니, 오히려 위험과 해로움만 가져오는 사업이었다. 강물이 흐르는 길조차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건데, 그 길을 인간의 눈으로 만들려고 하고, 강물의 깊이마저 관여하려고 하고, 강물의 흐름을 조정하려고 하는 일을 왜 시작하려 하였는가 말이다. 무엇 때문에?

 

물이 빠진 모래톱에 허연 배를 드러내고 죽어가는 물고기들을 발견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여러 종류의 많은 물고기가 터전을 침략당했다. 4대강 공사가 진행되면서 물고기 집단폐사가 이어지는 일이 흔했다. 죽은 물고기는 강변에 방치되었고, 물고기 사체에서 구더기가 들끓고 사체에서 나오는 침전물을 강으로 흘러 들어가 강을 더 오염시켰다. 저자는 그렇게 썩어가는 강에서 노숙하며 취재했다. 현장이 얼마나 끔찍했을지 짐작을 하고도 남음이다. 몸을 아끼지 않고 강의 모든 것을 파헤쳤다. (아니, 이름 모를 벌레의 정체를 확인하고자 먹어봤다는 게 말이 되나? 오염된 물을 마시는 것은 다반사...) 저자가 전해주는, 이 책에 실린 사진 몇 컷이 내가 보는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게 정말 강인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강이 이렇게 될 수 있지? 무엇을 위해 강을 이렇게 해쳐놨어야 했을까? 글쎄다. 도저히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오로지 누군가의 이기심으로 시작된 일이라고밖에는. 하지만 그 이기심으로 시작된 일은 너무 큰 문제를 만들었다. 처음으로 되돌릴 수도 없는, 혹여나 처음 그대로 되돌린다고 해도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야 가능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많은 동식물이 아프다고 살려달라고 소리치던 것을 외면한 대가를 어떻게 다 치르려고 그러는지... 오랜 시간 거짓말로 덮어온 일이 이제야 이렇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권력으로 해서는 안 될 일을 행하려는 자 때문에, 권력의 힘에 눌려, 혹은 권력의 힘에 붙어 있던 기관들이 도와준 덕분에 말이다.

 

4대강 사업이 시작되고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정권이 바뀌고 꽉 닫혔던 금강의 수문이 열렸다. 거의 반년, 금강의 수문이 열리고 강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저자가 보여줬다. 꼬마물세떼가 돌아왔고 금강의 모래톱에 꼬마물세떼가 둥지를 틀었다. 황오리, 고라니가 돌아왔다. 흐르는 강에 사는 물고기도, 떠나간 낚시꾼도 돌아왔다고 한다. 뭔가, 점점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에 괜히 흐뭇해진다. 저자의 취재가 없었다면, 누군가 이 악행을 고발하려고 그 안을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저자의 취재가 막막해질 때마다, 여기서 그만두어야 하는가 싶어 힘이 들 때마다, 그와 함께 4대강을 취재하는 '4대강 독립군'들이 힘을 내게 했다. (4대강 독립군은 저자와 함께 4대강 사업의 폐해를 취재하던 오마이뉴스 팀이다) 저자의 사연이 알려지고 많은 사람이 저자를 후원하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취재가 가능했던 것이겠지. 저자의 의지도 충분히 높이 사겠지만, 그와 뜻을 함께한 사람들이 없었다면 그의 취재는 더 힘들었을 것 같다.

 

이제 시작이라고 했다. 4대강 16개 보 중에서 겨우 몇 개의 수문이 열렸을 뿐이라고... 녹조로 가득하고, 물고기 떼죽음이 일어나고, 물고기 사체들이 다시 강을 오염시키는 일이 반복되고, 강에 살던 많은 동식물이 떠나갔다. 댐이 그렇게 했다. 모든 것이 원래의 자리를 찾으려면 꽤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 것이다. 저자가 얼마나 위험한 순간을 경고하고 기록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자연과 생태계를 무시하고 저지른 일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그대로 보여줬다. 강이 그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거, 자연을 거슬렀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며 깨닫게 했다. 누가 그렇게 했는지 이제는 그걸 따질 때가 아닌 듯하다. 어떻게 하면 처음 모습 그대로의 강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현재의 우리뿐만 아니라 미래의 세대에게 어떤 강을 만들어줘야 하는지 답을 찾게 했다.

 

 

이곳은 물안개의 강이자 백로와 고라니의 강이며 사람의 강이다. 예전처럼 다시 살아날 강을 기다리며 강의 변화를 기록한다. 강이 깨어나면서 숨을 토하는 하얀 새벽 강가에서 나는 지금도 공존의 강을 꿈꾼다. 강에서 살아가며 강을 찾는 사람들을 맞이할 것이며 강으로의 ‘소풍’에 동참할 것이다. 이 기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328페이지)

 

우리가 환경을 오염시키고 지구의 생태계가 변하고 언젠가 우리가 저지른 일이 무시무시하게 큰 문제를 만들 것이라는, 너무나 막연하게 생각했던 일을 눈앞에서 확인한 기분이다. 오늘도 마트에 갔다가 레몬 몇 개를 사려고 옆에 걸린 비닐 봉투에 담았다. 계산대에서 봉툿값 20원을 내라고 했다. 낱개로 파는 것을 몇 개 사려고 봉투에 담았는데 이것도 돈을 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내야 한다고 했다. 투덜거리면서 봉툿값 20원이 아까워서 봉투는 빼고 손으로 레몬을 집어 가방에 넣었다. 집에 와서 이 책을 마저 읽다가 생각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비닐 봉투 한 장 사용하는 일이, 어쩌면 지금의 더위를 만들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두려움이 밀려오더라. 억지로 강에 손을 대는 일이나, 아무렇지도 않게 비닐 봉투 쉽게 사용하는 일이 뭐가 다르다는 말인가. 저자의 기록은 4대강의 사업의 위험을 경고하고 4대강 사업으로 무너진 생태계를 회복하는 일이었지만, 우리의 생활 습관은 더 큰 문제를 만들고 있는 게 아니었을까 반성해본다. 지독한 폭염이나 한파가 괜히 오는 게 아니었던 거지.

 

읽으면서, 너무도 생생한 취재기에 울컥할 때가 많았다. 읽는 나도 이러는데, 그 현장에서 겪은 저자는 오죽했을까. 대단한 기록이라는 말밖에는 할 수 없다. 오늘을 사는 모든 이의 필독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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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8-08-23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다음에서 펀딩할때 열심히 금강요정 김종술 기자님에 대한 다른 이들의 글도 보고 기자님 기사도 꼬박 챙겨보았었네요.
책이 이렇게 나온 줄 몰랐는데.... 기사 읽을 때마다 저도 울컥 했는데 이렇게 책으로 만나게되면 또 어떨지.......

구단씨 2018-08-27 15:21   좋아요 0 | URL
저자가 취재한 내용을 말하는 것도 그랬지만,
책에 담긴 사진이 정말 끔찍합니다. 에휴...
무서웠어요.
지금이라도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려는 노력이 다행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