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공녀 강주룡 - 제2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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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을 이용해 친구와 잠깐 통화를 했다. 시끄러운 음악이 들리기에 뭐냐고 물었더니, 회사 노조 사무실에서 스피커로 틀어놓은 노동가요라고 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기에 그러는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지금 임금 협상 기간인데 회사와 의견이 맞지 않아 대치 중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당장에 파업은 아니지만, 회사와 노동자 사이의 서로 원하는 바가 달라서 협의가 잘 안 되는 중이기에 파업도 예상한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을 여기에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언제 어디에서나 일어났던 일이 내 주변에서 더 가깝게 일어나고 있다. 노동의 질과 노동자의 행복을 위한 투쟁이 멈춰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을 또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다.

 

이런 일이 1931년에도 일어났다는 게 놀라웠다. 그 시대가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세세하게 알지 못하지만, 일제 침략기였고, 농사가 생업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했던 터라 사업주와 노동자의 대치를 상상한 적이 없다. 그런데 더 나은 삶을 바라며 투쟁을 하고, 인간으로의 권리를 누리고자 을밀대 위에 오른 여성이 있다는 걸 이 소설이 말하고 있으니 당황했을 수밖에. 여자 혼자 사는 일상의 고달픔을 말할 것 같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고무공장의 노동자로 일하면서, 한 인격체로 당당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는 성장기였다. 그 시간 속에 노동자의 정당한 삶을 외치는 목소리를 들은 것이다.

 

작가는, 을밀대 위에 오른 한 여성(강주룡)의 사진으로 그 시대의 상황을 그렸다. 사실을 바탕으로 전하고 싶은 내용도 있을 것이고, 상상으로 더해진 한 여성의 삶을 채워갔을 것이다. 기록에 남지 않은 시간과 기록에 남은 몇 줄의 사실에 더 보태어진 상상은 강주룡의 삶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했다. 다양한 분위기를 그리면서 삶의 기복 같은 순간을 만들기도 했고, 살아간다는 것의 무거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집에서 정해준 연하의 남자 최전빈과 결혼한 주룡은 첫 데이트를 하는 것처럼 설렌다. 이 남자를 사랑하고 평생 같이해야 하는 사람으로 여겼다. 새로운 삶을 꾸린다는 게 어려운 일이지만, 오히려 누군가와 콩닥거리는 느낌을 더 크게 받았다. 전빈으로부터 글을 배우고, 독립운동에 대해 알게 됐다. 전빈은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떠나기로 했고 주룡은 그런 남편을 혼자 보내기가 싫어서 따라나섰다. 여기서도 주룡의 성격이 보이는데, 이 여자 참 성격 쿨하다. 마음먹은 일은 그대로 실행에 옮긴다. 솔직하다. 자기는 독립운동에 대한 의미를 잘 알지 못하고,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오늘 하루 먹고 사는 일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전빈이 원하는 일이니 따라나서 보겠다고 한다. 아니, 독립운동이 어디 그냥 한번 해보겠다고 하면 하게 되는가? 무모한 결정이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이 길을 선택한 것은 훗날 주룡이 을밀대 위에 오르는 일을 불사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도 같다.

 

남편 최전빈과 독립운동에 뛰어든 주룡은 오히려 남편보다 더 활약이 두드러진다. 아마도 그건 주룡의 당찬, 옳다고 믿으면 뛰어드는 성격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역사에 기록으로 남은 백광운 독립부대 참여해서 겪은 일들은 참담한 결과를 낳지만, 그녀는 후회 따위는 하지 않는다. 남편 최전빈이 죽고 돌아왔어도 그녀의 삶은 평탄하지 못하다. 남편을 죽게 했다고 시댁으로부터 고발당해 옥살이한다. 옥살이하고 풀려난 그녀가 갈 곳이 친정이었을 텐데, 그곳에서도 그녀는 마음 편히 지내지 못한다. 결국 그녀는 혼자 떠난다. 가족도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감정에 오롯이 홀로서기를 한 거다. 그렇게 정착한 곳에서 고무공장에 취직한다. 이미 예상했겠지만, 월급이 넉넉하지 않은 곳이다. 공장 노동자 대부분이 여성이었고, 그녀들은 노동자로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다. 열악한 노동환경에서도 하루하루 먹고살아야 하는 고된 생활이었다. 어디 그것뿐이랴. 개인의 감정까지 관리자의 감시와 학대를 받아야 했다. 특히 주룡이 모단 껄이 되겠다고 하는 데서 주저하지 않고 성희롱을 하는 관리자의 모습은 끔찍했다. 한 명의 노동자가 아니라, 아무렇지도 않게 함부로 대해도 되는 물건처럼 대했다. 하지만 참았다. 말 그대로 밥줄을 쥐고 있는 대상이라는 생각에 감히 대들 수 없었다. 그러던 중에 노동운동에 눈을 뜬 것이다. 회사에서는 임금을 삭감하겠다고 하고, 노동자는 현재의 임금도 적은 편인데 더는 양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동안 몰랐던 사실들, 유급 출산휴가도 당당하게 요구하지 못한 채로 아이를 낳고 3일 만에 공장으로 출근한 삼이의 이야기는 주룡이 노동운동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더 단단하게 했다. 이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를 요구하지 않고서는 불합리한 현재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을 테니까.

 

광운은 정색하고 주룡의 어깨를 붙든다.

스스로 그러시면 아니 되오. 부엌데기이고자 자처하면 부엌데기 취급을 받고 독립군 행세를 하면 독립군 취급을 받는 거요. (72페이지)

 

내 배운 곳이라군 예서 배워준 교육밖에 없는 무지랭이지마는 교육 배워놓으니 알겠습데다. 여직공은 하찮구 모단 껄은 귀한 것이 아이라는 것. 다 같은, 사람이라는 것. 고무공이 모단 껄 꿈을 꾸든 말든, 관리자가 그따우로 날 대해서는 아니 되얐다는 것. (180페이지)

 

책의 소개 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을밀대 위에 오른 여성의 사진 한 장으로 시작된 이야기라는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강한 이미지가 펼쳐질 거로 예상했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외치는 큰 목소리를 내는 강주룡을 상상했다. 하지만 소설을 읽어갈수록 느껴지는 건 한 명의 인간으로 사는 모습이 더 보였다. 강주룡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보는 듯했다. 당연한 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앗아가는 환경에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는 우리의 간절한 바람을 강주룡이 외치고 있었던 거다. 아사 투쟁을 하면서 을밀대 위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선택에 아프게도, 공감되는 이유다. 그래서 저항하는 행동을 보여주는 것, 투쟁한다고 타인을 공격하는 게 아니라, 나의 의지를 끝까지 관철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의 도입부가 인상적이다. 더 나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주룡은 자기가 선택한 행동으로 말을 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동안 주변의 지시대로 살아온 인생이 뒤집어지는 순간이다. 가족을 따라 이주해서 살고, 아버지의 뜻대로 결혼하고, 남편이 한다니까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살아왔던 주룡이었다. 고무공장에서 일했던 것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혼자서 살아가야 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라도. 하지만 노동운동은 달랐다. 그녀가 자기 의지로 선택한 일이다. 주변의 선택에 휩쓸려 따라가는 게 아니라, 그녀 자신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선택한 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배워가던 그녀가 주저 없이 결정한 일이다.

 

생각해보면, 한 여성의 노동운동만은 아니었다. 아주 적은 자료로 시작된 한 편의 소설에 불과할지 몰라도, 그 여성의 삶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독자의 눈에 들어오는 건 한 가지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때그때, 눈앞에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듯 살아가는 인생이, 어느 날 보석을 발견한 것처럼 변해가는 모습이 황홀했다. 지금 자기가 사는 시간이 누구의 것인지 비로소 깨달은 것처럼,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지 알게 된 것처럼, 하찮거나 귀한 인간이 따로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들이 그랬다. 잘 알고 있던 일인데,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당연히 아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 당연한 것을 우리는 자주 잊고 사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 했다. 우리가 바라는 삶이 무엇인지 다시 떠올려본다. 싸우면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생각한다. 내 삶을 사랑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대단한 일인지 각인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사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를...

 

그 의미에 비하면 역사에 충분히 기록되지 못했다는 강주룡. 그녀의 행동이 얼마나 큰 역할이었는지 지금의 상황들을 보며 알게 된다. 그녀가 을밀대 위로 올라간 지 80여 년이 흘렀다고 한다. 80여 년의 세월 동안, 우리 사는 오늘은 그때와 얼마나 달라졌을까? 오늘도 어디에선가는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 무엇을 위해 우리가 그 투쟁을 계속하는 것인지 끊임없이 묻는 것, 우리 삶의 더 나은 행복을 찾는 건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아는 일.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한다. 이 소설이 우리에게 전하는 간절한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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