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차와 장미의 나날
모리 마리 지음, 이지수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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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 일상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여러 가지 중에서도 가장 호감을 끄는 것은 먹는 것과 관계된 것이 아닐까 싶다. 먹교수 이영자 님의 말씀에 따르자면 음식은 세 번 먹는 것이라고 했다. 눈으로 먹고, 냄새로 먹고, 입으로 먹고. 그러니 그 맛을 음미하는 즐거움도 더 커지지 않을까? 하루에 한 끼만 먹어도 충분하다며, 굳이 배가 고프지 않으면 음식을 입에 대지 않던 나도 요즘에는 세끼를 다 챙겨 먹는다. 밖에 있을 때도 먹고 싶은 것 찾아서 잘 챙겨 먹는다. 그렇다고 해서 하루 세끼를 채우는 일이 나를 행복하게'만'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 결과로 체중 증가라는 불행을 얻었으니... 다만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저절로 지어지는 미소는 숨길 수가 없다는 건 확실하다. 나도 모르게 젓가락이 먼저 나가고, 음식을 입에 넣으면서 씹고, 목으로 넘어갈 때의 그 기쁨. 맛있게 먹는 행복이 뭔지 이제야 조금 알겠다. 마음의 허함을 먹을 것으로 채우는 일도 마찬가지고, 너무 좋은 일이 있을 때도 먹을 것을 앞에 두고 사람들 불러 모아 함께 나누고, 속이 상하는 일이 생길 때도 뜨겁고 매운 음식으로 슬픔을 식히려고 하는 걸 보면, 음식이 우리 인생의 희로애락을 같이하는 것은 분명하다.

 

대책 없는 인생을 사는 듯한 모리 마리에게도 음식은 행복과 가까이 닿아 있다. 부유한 환경에 공주처럼 자랐던 그녀가, 두 번의 이혼과 가난해진 살림에 어떻게 적응하고 살아갈까 싶었다. 태생부터 공주처럼 자라온 그녀의 삶이 이렇게 바뀔 줄 생각도 못 했을 텐데, 집안에 방치된 꽃들로 저절로 드라이플라워를 만드는 그녀가 직접 만들어가는 살림이 어떨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걱정은 그녀의 몇 문장으로 바로 사라진다. 씻은 듯이 없어진다. 그녀의 상황을 보면서 걱정을 하는 우리가 어리석게 보일 정도로, 그녀는 태평하게 화려한 찻잔에 홍차를 달여 마시는 일상을 보낸다. 타인의 시선 의식하지 않고 그녀만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180도로 뒤바뀐 환경이 그녀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럴 수가 있나? 하아. 그럴 수가 있더라. 모리 마리에게만 허용된 것 같은, 그녀만 가능할 것 같은 일상을 하나씩 풀어내는 이 이야기에 푹 빠져 읽다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다는 그녀의 일상 속으로 같이 들어가고 싶어질 정도로 긍정 마인드가 뿜어난다. 그녀의 일상 안에 도대체 무엇이 있기에?

 

모리 마리의 아버지 모리 오가이는 나쓰메 소세키와 쌍벽을 이루는 대문호라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모리 마리라는 작가도, 모리 마리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도 처음 알았다. 이런 대단한 이력을 가진 아버지를 둔 모리 마리의 성장이 어땠을지 기대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앞에서 그녀를 두고 '공주'라고 칭했는데,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면 그런 수식어가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세상에 둘도 없는 예쁜 딸로 자라온 게 그대로 보일 만큼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모든 사랑을 넘치도록 주었다. 하지만 그런 사랑이 그녀 인생에 계속 넘쳐흐르지는 못했다. 두 번의 이혼과 가난한 살림이 그녀 앞에 놓인 순간이 온 거다. 집안일은커녕, 부엌에 들어가기는커녕, 볕이 좋은 정원에서 우아하게 찻잔을 기울일 것만 같은 그녀의 인생이 뒤집어진 거다. 극과 극의 환경. 이때부터 그녀의 삶을 눈여겨보게 된다.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나갈까 싶은 궁금증에 계속 확인하고 싶어진다. 그녀가 그 순간을 어떻게 벗어나게 될지를.

 

그 답을 어느 정도 예상하게 되는 건 이 책의 제목 때문이기도 하고, 그녀가 이 책에서 들려주는 일상의 기록 때문이기도 하다. 절대 쉽지 않은 인생을, 아름답고 우아하게 채웠던 그녀의 일상을 듣다 보면 어느 순간 틈을 비집고 들어온 작은 우울마저 털어내게 된다. 모리 마리는 탐식과 미식에 관심이 많은 작가다. 그녀의 취향대로 듣다 보면 세상 모든 음식을 간단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말하는 음식은 원래의 레시피 그대로 한다면 더없이 우아해지고 보기부터 맛있는 음식이 될 것이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것은 그녀만의 방식대로 새롭게 태어난 음식들이 대부분이다. '지나칠 정도로 단순한 방법으로 본격적인 요리의 느낌을 내는 것'(61페이지)이 그녀의 요리법이니까. 이것만 봐도 그녀가 어떤 성격인지 보인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확인했던, 그녀가 오늘을 사는 모습이 그대로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단순하게, 그러면서도 본연의 맛은 사라지지 않게, 그 음식과 함께했던 추억도 놓치지 않을 정도라면 충분하다는 듯이. 음식이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지만, 그 이상의 힘을 가진 것이라는 잊지 않게 강조하는 것만 같다.

 

책의 뒤표지에 강조하듯이 써진 말이 있다. "괜찮아, 먹고 싶은 건 매일 있으니까!" 이 신조대로 살아가는 그녀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건, 소박하게 보이는 그녀의 식탁 모습에도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느낌 때문이다. 조금 서툰 인생도 맛있는 음식 앞에서 순식간에 근사해질 수 있다는 게 뭔지 알 것 같아서다. 좋고 싶은 것의 구분이 명확한 그녀다. 맛없는 음식을 받아들고 화를 내기도 하고, 그녀만의 치유 방식으로 음식의 메뉴를 선택하기도 한다. 그녀가 들려주는, 오래전부터 그녀의 인생을 돌이키며 들려준 유년 시절의 추억부터 현재의 생활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이 음식과 함께 들려오는 순간이 생생하다. 그녀 스스로 미식가라고 하지만, 그 미식의 진짜 의미를 아는 사람이어서 좋다. '음식에 관해 많이 알고 음식을 대하는 사람보다 좋아하는 음식과 먹을 때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 훨씬 행복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이 뭔지 아는 그녀 때문에, 그녀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들에 푹 빠져서 읽었다. 그래, 누구에게나 지나간 시간 속의 이야기가 있고, 음식을 대하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을 여기서도 확인하게 되는구나, 싶은 공감에 괜히 배가 부르기까지 하다.

 

요즘 많이 듣는 말이 '소확행'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주는 즐거움을 느끼면서 사는 것. 그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말하곤 한다. 그 말을 아주 부정하지는 않겠다. 순간순간 나에게 주어지는 작은 행복에 그 순간이 행복하다는 건 맞는 말이니까. 하지만 인생 오늘 하루만 사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 그 소확행이 먹는 약이라면 그 약효는 오늘 하루 어느 순간의 잠깐이라는 생각에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때가 많았다. 지금만 괜찮으면 어쩌란 말인가 싶어서 말이다. 아마 내가 모리 마리였다면, 인생의 화려했던 시절이 자꾸 떠올라 오늘의 초라한 현실을 즐겁게 누리지는 못할 것 같다. 고통스럽고 매 순간 좌절할 것 같다. 그런데 그녀는 형편없는 솜씨지만 요리를 하거나, 맛있는 것을 먹으며 즐거워하거나, 홍차와 장미를 앞에 두고 사치(?)를 즐긴다. 내일에 또다시 찾아올 불행한 일들이 아니라, 오늘 자기를 확실한 행복으로 만들어주는 것으로 인생을 채우는 것을 택했다.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그녀 말처럼 먹고 싶은 건 매일 있으니까 괜찮은 거지 싶다. 자기 취향대로 먹고 싶을 것을 먹는 일이 가장 솔직한 행복을 만드는 일이라는 걸, 그 시간을 온전히 즐기는 것이 인생을 근사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걸, 이제는 조금 알 듯하다. 소소하게 만드는 행복이 모이면, 인생 전체의 시간을 아우르는 행복도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는 깨달음 같다.

 

 

요리의 맛은 봄이나 여름 등 계절의 변화, 그날그날의 날씨 상태, 선선하거나 덥거나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또 먹는 사람의 기분에도 변화가 있으므로 숟가락으로 몇 숟가락, 몇 개, 몇 그램이라는 식으로 융통성 없이 만들 수 없는 법이다. (69페이지)

 

행복의 주체가 '나'가 되는 시간을 사는 것이 가장 최고의 행복이고, 최고의 인생이라는 걸 그녀만의 방식으로 전하는 게 재밌다.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게 무엇인지 분명하게 찾아가는 시간을 열어준 것만 같다. 때로는 아이처럼 철이 없는 말과 행동을 보이는 것 같은 그녀지만, 조금은 뻔뻔해지는 인생도 행복해지는 방법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행복해지는 게 꼭 한 가지 길만 있는 건 아니잖아?! 행복에도 융통성이 있을 테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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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피아노 -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
김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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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동안 너무 뜨거웠다. 저녁 무렵 어스름이 들고 바람이 분다. 갑자기 대책 없이 서글퍼진다. 이 여름이 밉다. 그래, 미워한다는 것, 그 또한 사랑이고 생이리라…… (107페이지)

 

저녁 내내 무엇을 했는지 기억에 없는데, 늦은 밤 동네를 산책한 것 말고는 한 게 없는데 어영부영 자정이 거의 다 되었다. 다른 소음 하나 없이 주변이 조용하다. 쌓아둔 책 옆으로 틀어놓은 라디오만 자기 목소리를 낸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골목의 고요함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봤다. 서늘하다. 춥고 입김이 나온다. 겨울인가? 오후에 잠깐 걸었던 시간 내 등에 흐르던 땀이 기억나지 않을 만큼 몇 시간 차이로 다른 계절을 살고 있다. 매일 한낮의 햇살에 아직은 가을이구나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가을을 느끼는 그 시간은 길지 않다. 오후 서너 시를 넘어가면서 겨울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만 같다. 하루에 겪는 두 개의 계절은 서로 가까운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하지만, 닮지 않았다. 조금은 따뜻하고, 조금은 춥고. 삶과 죽음도 비슷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내 몫의 삶을 묵묵히 이어가면서 세월이 흐르고, 그 삶의 끝에 마주하게 되는 것 또한 내 몫의 죽음일 테지. 하나로 연결되어 계속 흐르고 있는데, 같은 선을 걸어가는 듯한데, 끝과 끝에 삶과 죽음을 놓고 가는 길. 누구나 비슷하다. 누구나 같은 길을 밟는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 다가오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

 

 

김진영. 읽다가 만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 역자로 기억한다. 그를 수식하는 더 많은 이름이 있을 테고 철학자로 그가 이뤄낸 많은 의미와 말들이 있을 테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기억할 수밖에 없는 건 아마도 그가 역자로 이름 올린 『애도 일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의 죽음을 기억하는 기록과 저자 자신이 자기 투병의 시간을 기록하는 것은 너무 닮았으면서도 달랐다. 당연하다. 타인의 죽음을 보는 것과 자기의 병든 육체를 바라보는 게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저자가 하는 말이 크게 다르게 다가오지는 않더라. 아마도 그가 기록한 이 책의 문장들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기록을 읽기라고 불러도 좋다면, 그가 적은 이 일기는 솔직해서 더 가슴에 들어오는 말들이다.

 

지금 내게 주어진 건 남겨진 시간들이다. 그 시간도 흐른다. 사는 건 늘 새로운 삶을 꿈꾸는 것이었다. 남겨진 시간, 흐르는 시간, 새로운 시간, 그 한가운데 지금 나는 또 그렇게 살아 있다. (28페이지)

 

베란다에서 세상의 풍경을 바라본다. 또 간절한 마음이 된다. 한 번만 더 기회가 주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46페이지)

 

현재 상황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남겨진 시간을 더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가끔은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지기를 바라게 된다. 그게 인간이니까. 그런 마음이 솔직하게 들려와서 더 매력적이다. 괜찮은 척하지 않고, 작게 읊조리더라도 기어코 내뱉고 마는 말이다. 괜찮지 않다. 흐르는 시간 속에 새로운 시간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만이 지금 할 수 있는 전부 같지만, 조금은 더 남겨진 시간의 양을 크게 재보고 싶다.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세상의 풍경을 계속 볼 수 있기를, 행복했던 시간을 더 많이 느낄 수 있기를, 아직 다 하지 못한 많은 것을 계속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그런데 그런 마음만 갖고 있기에는 오늘과 내일의 새로운 시간이 너무 값없이 흘러갈 것만 같다. 슬픔을 극복하려고 하면 끝이 없다. 슬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일이 더 의미 있기에, 그의 문학과 철학과 미학의 문장들로 채워진 이 일기가 그의 모든 삶의 기록으로 남는다. 그의 말처럼 '모든 일상의 삶들이 셔터를 내린 것처럼 중단된' 경험을 하는 이 순간, 그가 전에는 만나지 못했던 사랑과 감사를 배우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미처 보지 못했던 다른 사람과 세상에 대해 눈을 뜰 수 있는 시간이었을 거라고, 나이와 경험이 주는 연륜을 여기서 또 한 번 배우는 듯하다. 그가 살아온 시간과 그가 경험한 많은 순간이 채워놓은 기록이 되었다.

 

어제를 돌아보면 후회가 있고 내일을 바라보면 불확실하다. 그 사이에 지금 여기의 시간이 있다. 몹시 아픈 곳도 없고 깊이 맺힌 근심도 없다. 짧지만 온전히 나에게 주어진 시간 - 이 사이의 시간들은 내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는 일 없이 또한 존재할 것이다. 끝없이 도래하고 머물고 지나가고 또 다가올 것이다. 이것이 생의 진실이고 아름다움이다. (139페이지)

 

지금이 가장 좋은 때다. 지금이 가장 안전한 때다. 지금은 '아직 그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은 힘이 없다. 지금 여기가 아닌 것은 힘이 없다. 지금과 그때 사이에는 무한한 지금들이 있다. 그것들이 무엇을 가져오고 만들지 지금은 모른다. (252페이지)

 

'아침의 피아노. 베란다에서 먼 곳을 바라보며 피아노 소리를 듣는다.' 그가 사랑했던 아침의 한 장면으로 시작한 문장은, 마지막 장의 '내 마음은 편안하다'와 길게 연결되어 있다. 아픈 몸을 가진 시간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포근하고 편안하게 시작한 문장이었다. 그의 기록이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궁금해하면서 첫 페이지를 펼쳤는데, 어느 순간 그 무엇을 찾는다는 게 무의미해졌다. 때로는 짧게, 때로는 길게. 어느 페이지는 단 한 줄, 어느 페이지는 몇 개의 문장으로 이어진 글에서 그의 사색을 듣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했다. 하루하루 삶이 소멸해가는 순간에 나온 말들은 진심이고, 솔직하고, 깊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철학자로 살아온 그가 온 생을 채워온 문장들이지 않은가. 짧은 문장의 아포리즘에 우리는 어느새 그의 사유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 앞에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생각하면 현재와 내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서, 아직은 생의 시간을 살고 있는데도 죽음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알 것도 같다. 죽음에 닿아있다는데 오늘의 지금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하지만 저자는 그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이며 다른 오늘과 내일을 살았던 이다.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은 삶에 강하게 닿아 있다고 한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다다르면서 무기력해지고 많은 것을 내려놓을 것 같지만, 저자는 오히려 바쁘게 보낸 것 같다. 강의하고, 글을 만지고, 자기 안의 사유를 더 깊이 끌어내는 시간. 자기를 위한 글이 아니라, 그가 떠나도 남겨진 이들을 위한 글로 만들기 위해 애를 썼던 시간이었을 테니. 사랑과 감사에 대해 말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말하게 하기 위해, 그는 마지막까지 썼다. 그렇게, 이 책으로 그는 소멸하지 않고 남아 있다.

 

흐른다는 건 덧없이 사라진다는 것, 그러나 흐르는 것만이 살아 있다. 흘러가는 '동안'의 시간들. 그것이 생의 총량이다. 그 흐름을 따라서 마음 놓고 떠내려가는 일 - 그것이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자유였던가. (51페이지)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에, 또 한 번 그의 철학적 사유를 듣는 시간이었다. 세상이 아름답다고, 인생은 깊다고, 살아서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있었으니, 바람아 불어오라고... 평소 그가 썼던 칼럼을 다시 언급하기도 하고, 다른 책의 문장을 들추기도 하면서, 그가 걸어온 시간의 자세를 그대로 비춘다. 그 안에서 그가 생각하는 생에 관한 긍정적인 태도를 놓치지 않고 전달한다. 어쩌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를 이 책이, 저자의 말처럼 존재의 위기에 처한 이들에게 위안으로 남을 수 있기를 읽으면서 나도 같이 바라게 된다. 지금 내가 보내는 이 밤이 나에게 무엇으로 남을지 살짝 기대된다. 어제까지도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갔던 하루의 밤인데, 오늘 흐르는 이 시간은 다르게 남을 것 같다는 저자의 긍정 바이러스가 전해지는 듯하다. 짧은 문장에서 전해지는 큰 위로가 오늘 밤의 이 고요함을 가득 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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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8-11-03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을 앞두었을 때 무언가 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갑자기 죽을 수도 있잖아요 어느 정도 살면 그때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요 아파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때 마음이 편안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려면 지금을 살아야겠지요


희선

구단씨 2018-11-05 23:00   좋아요 0 | URL
저도요. 그런 상황을 앞에 두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 하게 되네요.
언젠가 다가올 나의 죽음이 갑자기는 아니었으면 싶다는 바람...

노란장미 2019-04-13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고 궁금해서 찾다보니...구단님이 먼저 읽으셨군요.역시.ㅎㅎ
 



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

예약으로 구매하면 표지가 다르군...

가을이니까
추우니까
차분하게 귀에 들어오는 문장이 좋으니까...

그러니까 한번은 펼쳐봐도 좋지 않을까 싶지만
이상하게
첫 책처럼 끌리지는 않은...

그래도 읽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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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랜드
서레이 워커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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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 펑퍼짐한 원피스를 두 벌 샀다. 교복 이후로 처음 입어보는 치마다. 예쁜 원피스가 너무 입고 싶어서 산 건 아니다. 갑자기 살이 너무 쪄서 가진 옷 중에는 맞는 옷이 없어서였다. 그럼 평소처럼 바지를 사면 될 텐데, 사이즈 올린 바지를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괜히 우울했다. 기존에 입던 옷보다 큰 사이즈의 옷을 사야 한다는 현실이 화가 났고, 어쩌면 곧 다시 살이 빠질지도 모르니까 지금 큰 사이즈 옷을 사는 건 낭비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래, 나는 곧 전의 몸무게로 돌아갈 거야. 지금 큰 사이즈 옷을 사는 건 돈 낭비야. 어차피 곧 입지도 못할 텐데 뭐.' 우울함은 멈추지 않고 반년 넘게 계속됐다. 반년 동안 나는 거의 7kg에 가깝게 살이 쪘고, 큰 사이즈 바지를 입어도 울퉁불퉁 삐져 올라오는 살을 가려주지 못했다. 결국 포댓자루 같은 원피스를 사고야 말았다. 밉게 올라온 살들을 가려줄 게 헐렁한 원피스 말고는 없었다.

 

 

플럼이 길을 걸으면서 자기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불편해하고, 쇼핑몰에 들어가서도 주눅 들고, 직장에서 하는 일이 아니라 재택근무를 권유받은 상황들이 눈앞에 그대로 펼쳐졌다. 길을 걷다가 나도 모르게 덩치 큰 여자에게 시선이 가던 경험, 필요한 옷이 있어서 들어간 쇼핑몰에서 큰 사이즈를 찾아달라고 말하면서 슬펐던 일이 떠올랐다. 플럼이 키티의 대필 이메일을 작성하는데도 직장인 오스틴 타워가 아니라 집에서 일해도 된다고, 마치 플럼을 배려하듯이 했던 말은 거짓이었다. 그녀의 뚱뚱한 몸을 날씬한 여자들이 활보하는 오스틴 타워에서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플럼은 버틴다. 그녀에게는 키티의 보조 일을 하면서 월급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 수술을 예약했다. 곧 그녀의 몸에서 지방이 빠져나가고 그녀는 날씬한 여자가 될 것이다. 수술 후 입을 예쁜 옷들도 미리 사놨다. 그녀의 원래 이름 '얼리샤'가 되돌아 왔을 때 '플럼'을 과감히 버리고 그녀는 원래 찾아야 할 인생으로 돌아갈 거다. 십 대의 고민 상담에 매뉴얼대로 답장을 써서 보내고, 돈도 벌고, 아름다운 여자들이 가득한 오스틴 타워의 일원이라는 자부심도 필요했다. 현재의 삶이 나쁘지 않았다. 사람들의 소리 없는 총격이 불편하고 자존심 상하지만, 이것도 곧 사라질 거니까.

 

 

"모두 다죠!" 나는 그녀에게 쏘아붙였다. "얼리샤는 늘 혼자 있을 필요도 없을 테고, 이 아파트에 하루종일 틀어박혀 있을 필요도 없을 테고, 예쁜 옷을 입고 여행도 하고 마음에 드는 회사에 취직하고 디너파티를 열 수도 있어요." 마지막으로 한 말은 우습게 들렸겠지만, 예전부터 나는 빈 와인병에 초를 꽂아서 병을 타고 종유석처럼 흘러내린 주황색과 빨간색 촛농을 감상하는 디너파티를 여는 게 소원이었다. (162페이지)

 

 

여기까지만 보면, 이 소설은 뚱뚱한 여자의 다이어트 분투기나 성공기처럼 읽힐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플럼은 이제 살이 빠지고 예뻐질 것이다.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데이트도 나갈 것이고, 세상 사람들(특히 남자들)의 시선을 받겠지. 칙칙한 방에서 나가기 싫었던 과거의 시간은 다 지우리라. 얼리샤의 인생을 되찾아와 삶이 빛날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플럼이 유레일라 뱁티스트 프로그램(다이어트)에 참여하면서 날씬한 몸으로 가는 길을 걷는 동안 속은 것이 드러난다. 해당 프로그램은 살을 빼려는 사람들을 위한 게 아니라 유레일라 뱁티스트의 상술이었고, 법의 테두리 안에서 온갖 돈벌이 수단으로만 이용되었던 거다. 설상가상 유레일라 뱁티스트의 원조는 교통사고로 죽었고, 프로그램은 해체된다. 거기에 유레일라의 딸 베레나는 이 다이어트 프로그램의 이면을 만천하에 드러낸다. 거짓과 위선으로, 돈벌이로만 이용되어 많은 사람의 주머니를 털어간 사기꾼임을 밝혀낸다. 그런데도 플럼은 포기할 수 없었다. 프로그램은 망했지만, 그녀에게는 아직 남은 대책이 있다. 바로 수술. 날짜면 기다리면 된다. 변함없는 바람처럼, 그녀는 날씬해질 것이라고 주문을 걸던 그 순간 플럼의 뒤를 쫓던 리타의 등장은 소설의 분위기를 전환한다. 베레나가 쓴 『다이어트랜드 대모험』은 뱁티스트 다이어트 프로그램이 인간의 몸을 대상으로 한 거대한 사기극인지 드러낸다.

 

 

"우리 여자들은 어렸을 때부터 우리를 잡아갈지 모르는 나쁜 남자를 조심하라는 교육을 받잖아요. 나쁜 남자에게 성폭행과 성추행은 물론이고 심지어 살해를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리죠. 하지만 문제는 좋은 남자와 나쁜 남자를 구분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모든 남자를 경계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우리는 밤늦게 혼자 외출하지 말고, 옷도 이상하게 입지 말고, 모르는 남자와는 말도 섞지 말고, 남자가 관심으로 착각할 만한 행동은 하지 말라는 얘기를 들어요. 호신술 수업을 받고, 문을 잠그고, 페퍼 스프레이와 호신용 호루라기를 들고 다니고요. 남자에 대한 두려움은 어린 시절부터 우리 머릿속 깊이 뿌리박혀 있죠. 그게 일종의 테러리즘 아닌가요?" (344페이지)

 

 

뚱뚱한 여자의 다이어트 분투기에서 사회적인 문제의 큰 그림을 보게 한다. '미투 운동'이나 '탈코르셋'도 떠올리게 된다. 왜 여자는 날씬하고 예뻐야 하는가, 왜 화장으로 아름다움을 더해야 하고, 말로의 책 제목처럼 왜 '떡을 치고 싶은 여자'로 보여야 하는가, 왜 성폭력 앞에서 당당한 피해자가 되지 못하는가, 등등. 여성으로 살면서 고통받는 많은 순간의 부조리를 고발한다. 성폭력의 피해자가 오히려 죽음으로 생을 마감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성폭력의 가해자가 오히려 당당한 놀이를 즐길 것처럼 말하는 세상을 단죄한다. 여기에서 드러난 인물 제니퍼는 더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죄를 벌할 수 없다는 걸 안다는 듯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여성을 무참히 짓밟은 인물들을 한 명씩 처리한다. 조용히 납치해서, 고통의 시간을 겪게 한 후, 사막의 한가운데에 떨어뜨린다. 제니퍼는 누구인가, 또 누가 제니퍼를 돕고 있는 건가, 제니퍼는 정의로운가?

 

 

처음부터 끝까지 가독성을 놓치지 않는 소설이다. 처음에는 뚱뚱한 플럼의 날씬해지려는 계획을 지켜보는 재미로 흥미로웠는데, 중간에 한 명씩 등장하면서 그들과 어떤 조화를 이루며 소설이 흘러갈까 싶은 기대감으로 읽게 된다. 얼굴 반쪽이 화상 흉터로 자리한 새너, 아름다운 여배우에서 비만의 아이 엄마로 변한 말로, 자유로운 영혼처럼 보였던 리타, 비밀이 가득해 보였던 줄리아, 칼리오페라는 성을 만들고 여성들의 자존감 회복과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가르쳐주려고 애쓰는 베레나. 다이어트가 행복이라고 생각했지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플럼, 아니 얼리샤. 그리고 제니퍼. 제니퍼의 등장은 세상 모든 여성이 어떻게 살아가는 게 행복한 일인지, 자존감을 위해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보여주면서 소설의 느낌은 점점 무거워진다. 무거워지는 만큼 진지하고, 우리가 행복해질 거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그동안 참았던 부조리, 침묵해야만 평화롭다고 믿었던 상황들, 인격적으로 살아가지 못했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렇다고 제니퍼가 쏟아낸 단죄가 옳다고 찬성하는 건 아니다. 어찌 되었든 살인은 처벌받아야 할 범죄니까. 다만, 제니퍼가 그들(?)에게 그렇게 벌을 주어야 한다고 판단하게 된 계기를 더 깊게 봐야 한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또 세상에 깊게 새기게 하는 의미들. 여성들이 지금 가진 자기 몸을 혐오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게 만들고 싶었으리라.

 

 

버스 옆면에 달린 한 쌍의 젖가슴이 나를 스쳐지나갔다.

걸어가는 동안 마음을 가다듬고 보란듯이 당당하게 턱을 들었다. 막말을 하려면 해보라지. 사람들은 늘 뚱뚱하다는 말로 내게 모욕감을 줬지만 이제 더는 그런 식으로 내게 상처를 입힐 수 없었다. 나는 뚱뚱한 게 맞았고, 내가 그걸 단점으로 보지 않으면 그들이 나를 향해 휘두른 무기는 힘을 잃었다.

나는 내 체구에 대해 미안해하길 거부하며 밝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 원피스를 입자 반항적인 기분이 들었다. 난생처럼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데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329~330페이지)

 

 

여전히 나는 살을 빼고 싶다. 뚱뚱해지기 전 입던 옷을 다시 입고 싶고, 다시 큰 사이즈 옷을 사면서 돈 낭비도 하기 싫다. 살이 찌면서 통증이 심해지는 허리와 다리의 고충을 덜어내고 싶다. 살을 빼고 외모에서 오는 만족감보다, 병원 다닐 일이 늘어나는 게 겁나서 예전의 몸무게로 돌아가고 싶다. 플럼이 좋아하는 베이킹을 하면서 마음껏 먹고 행복해하는 모습은 이해가 가지만, 나는 먹는 것에서 그 정도의 행복과 만족감을 느끼지는 못하므로 플럼이 쌓아두고 먹는 일에 많이 공감하지는 못한다. 다만 그녀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갈 순간이 기대된다. 응원하고 싶다. 나도 그렇게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고 싶으니까. 이 소설로 최소 한 가지는 얻었다. 플럼이 길을 걸으면서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일, 그들의 수군거림이 플럼을 아파트 안으로 가두었던 일을 더는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런 삶의 자세를 나도 몸에 장착하고 살아가고 싶다는 것을.

 

 

"체중은 언제나 그랬듯이 내게 되돌아올 것이었다. 나는 온갖 일들을 겪었음에도 겉으로는 예전과 다를 게 없어 보였지만 보이지 않는 부분은 달라져 있었다. 나는 변신을 거쳤다." (318~319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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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10-29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거 사두고 안읽은 책중에 한 권인데 이 리뷰 읽으니 당장 읽고 싶어지네요. 지금 읽고 있는 책 끝내면 바로 들어가야겠어요. 불끈.

구단씨 2018-10-31 13:46   좋아요 0 | URL
정말로 다이어트에 관한 가벼운 이야기로 생각하고 읽었는데,
의외의(?) 결말에 가벼움이 사라졌던 소설이었어요. ^^
 

 

아직은 이렇게 추울 때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이미 추워져버린 날씨만 탓하기에는 의미가 없는 듯하고.

이대로 놔두면 다시 좀 포근해지는,

아직은 가을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으려나 싶지만 그것도 확신이 서질 않고.

 

밀린 숙제하듯 서평 도서 몇 권 읽고 있는데,

역시나 책의 맛은 신간이지 하면서,

날씨도 이렇게 스산하고 지치지 않고 비까지 내려주시니,

'책 사기 딱 좋은 날씨군!' 하면서 주섬주섬 장바구니에 책을 넣는다.

 

10월이 다 가기 전에 품으로 들여올 것...

 

 

 

 

 

 

 

 

 

보관함에 있던 것을 꺼내봤는데, 뜬금없이 <수미네반찬>이 있다.

이건 엄마의 책.

"엄마, 이 책 보고 똑같이 해줘. 내가 하면 맛이 없어. 역시 음식은 손맛이 최고지!"

 

 

아니 에르노 - 사진의 용도

그녀의 글은 적나라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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