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피아노 -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
김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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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동안 너무 뜨거웠다. 저녁 무렵 어스름이 들고 바람이 분다. 갑자기 대책 없이 서글퍼진다. 이 여름이 밉다. 그래, 미워한다는 것, 그 또한 사랑이고 생이리라…… (107페이지)

 

저녁 내내 무엇을 했는지 기억에 없는데, 늦은 밤 동네를 산책한 것 말고는 한 게 없는데 어영부영 자정이 거의 다 되었다. 다른 소음 하나 없이 주변이 조용하다. 쌓아둔 책 옆으로 틀어놓은 라디오만 자기 목소리를 낸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골목의 고요함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봤다. 서늘하다. 춥고 입김이 나온다. 겨울인가? 오후에 잠깐 걸었던 시간 내 등에 흐르던 땀이 기억나지 않을 만큼 몇 시간 차이로 다른 계절을 살고 있다. 매일 한낮의 햇살에 아직은 가을이구나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가을을 느끼는 그 시간은 길지 않다. 오후 서너 시를 넘어가면서 겨울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만 같다. 하루에 겪는 두 개의 계절은 서로 가까운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하지만, 닮지 않았다. 조금은 따뜻하고, 조금은 춥고. 삶과 죽음도 비슷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내 몫의 삶을 묵묵히 이어가면서 세월이 흐르고, 그 삶의 끝에 마주하게 되는 것 또한 내 몫의 죽음일 테지. 하나로 연결되어 계속 흐르고 있는데, 같은 선을 걸어가는 듯한데, 끝과 끝에 삶과 죽음을 놓고 가는 길. 누구나 비슷하다. 누구나 같은 길을 밟는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 다가오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

 

 

김진영. 읽다가 만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 역자로 기억한다. 그를 수식하는 더 많은 이름이 있을 테고 철학자로 그가 이뤄낸 많은 의미와 말들이 있을 테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기억할 수밖에 없는 건 아마도 그가 역자로 이름 올린 『애도 일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의 죽음을 기억하는 기록과 저자 자신이 자기 투병의 시간을 기록하는 것은 너무 닮았으면서도 달랐다. 당연하다. 타인의 죽음을 보는 것과 자기의 병든 육체를 바라보는 게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저자가 하는 말이 크게 다르게 다가오지는 않더라. 아마도 그가 기록한 이 책의 문장들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기록을 읽기라고 불러도 좋다면, 그가 적은 이 일기는 솔직해서 더 가슴에 들어오는 말들이다.

 

지금 내게 주어진 건 남겨진 시간들이다. 그 시간도 흐른다. 사는 건 늘 새로운 삶을 꿈꾸는 것이었다. 남겨진 시간, 흐르는 시간, 새로운 시간, 그 한가운데 지금 나는 또 그렇게 살아 있다. (28페이지)

 

베란다에서 세상의 풍경을 바라본다. 또 간절한 마음이 된다. 한 번만 더 기회가 주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46페이지)

 

현재 상황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남겨진 시간을 더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가끔은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지기를 바라게 된다. 그게 인간이니까. 그런 마음이 솔직하게 들려와서 더 매력적이다. 괜찮은 척하지 않고, 작게 읊조리더라도 기어코 내뱉고 마는 말이다. 괜찮지 않다. 흐르는 시간 속에 새로운 시간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만이 지금 할 수 있는 전부 같지만, 조금은 더 남겨진 시간의 양을 크게 재보고 싶다.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세상의 풍경을 계속 볼 수 있기를, 행복했던 시간을 더 많이 느낄 수 있기를, 아직 다 하지 못한 많은 것을 계속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그런데 그런 마음만 갖고 있기에는 오늘과 내일의 새로운 시간이 너무 값없이 흘러갈 것만 같다. 슬픔을 극복하려고 하면 끝이 없다. 슬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일이 더 의미 있기에, 그의 문학과 철학과 미학의 문장들로 채워진 이 일기가 그의 모든 삶의 기록으로 남는다. 그의 말처럼 '모든 일상의 삶들이 셔터를 내린 것처럼 중단된' 경험을 하는 이 순간, 그가 전에는 만나지 못했던 사랑과 감사를 배우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미처 보지 못했던 다른 사람과 세상에 대해 눈을 뜰 수 있는 시간이었을 거라고, 나이와 경험이 주는 연륜을 여기서 또 한 번 배우는 듯하다. 그가 살아온 시간과 그가 경험한 많은 순간이 채워놓은 기록이 되었다.

 

어제를 돌아보면 후회가 있고 내일을 바라보면 불확실하다. 그 사이에 지금 여기의 시간이 있다. 몹시 아픈 곳도 없고 깊이 맺힌 근심도 없다. 짧지만 온전히 나에게 주어진 시간 - 이 사이의 시간들은 내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는 일 없이 또한 존재할 것이다. 끝없이 도래하고 머물고 지나가고 또 다가올 것이다. 이것이 생의 진실이고 아름다움이다. (139페이지)

 

지금이 가장 좋은 때다. 지금이 가장 안전한 때다. 지금은 '아직 그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은 힘이 없다. 지금 여기가 아닌 것은 힘이 없다. 지금과 그때 사이에는 무한한 지금들이 있다. 그것들이 무엇을 가져오고 만들지 지금은 모른다. (252페이지)

 

'아침의 피아노. 베란다에서 먼 곳을 바라보며 피아노 소리를 듣는다.' 그가 사랑했던 아침의 한 장면으로 시작한 문장은, 마지막 장의 '내 마음은 편안하다'와 길게 연결되어 있다. 아픈 몸을 가진 시간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포근하고 편안하게 시작한 문장이었다. 그의 기록이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궁금해하면서 첫 페이지를 펼쳤는데, 어느 순간 그 무엇을 찾는다는 게 무의미해졌다. 때로는 짧게, 때로는 길게. 어느 페이지는 단 한 줄, 어느 페이지는 몇 개의 문장으로 이어진 글에서 그의 사색을 듣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했다. 하루하루 삶이 소멸해가는 순간에 나온 말들은 진심이고, 솔직하고, 깊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철학자로 살아온 그가 온 생을 채워온 문장들이지 않은가. 짧은 문장의 아포리즘에 우리는 어느새 그의 사유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 앞에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생각하면 현재와 내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서, 아직은 생의 시간을 살고 있는데도 죽음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알 것도 같다. 죽음에 닿아있다는데 오늘의 지금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하지만 저자는 그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이며 다른 오늘과 내일을 살았던 이다.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은 삶에 강하게 닿아 있다고 한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다다르면서 무기력해지고 많은 것을 내려놓을 것 같지만, 저자는 오히려 바쁘게 보낸 것 같다. 강의하고, 글을 만지고, 자기 안의 사유를 더 깊이 끌어내는 시간. 자기를 위한 글이 아니라, 그가 떠나도 남겨진 이들을 위한 글로 만들기 위해 애를 썼던 시간이었을 테니. 사랑과 감사에 대해 말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말하게 하기 위해, 그는 마지막까지 썼다. 그렇게, 이 책으로 그는 소멸하지 않고 남아 있다.

 

흐른다는 건 덧없이 사라진다는 것, 그러나 흐르는 것만이 살아 있다. 흘러가는 '동안'의 시간들. 그것이 생의 총량이다. 그 흐름을 따라서 마음 놓고 떠내려가는 일 - 그것이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자유였던가. (51페이지)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에, 또 한 번 그의 철학적 사유를 듣는 시간이었다. 세상이 아름답다고, 인생은 깊다고, 살아서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있었으니, 바람아 불어오라고... 평소 그가 썼던 칼럼을 다시 언급하기도 하고, 다른 책의 문장을 들추기도 하면서, 그가 걸어온 시간의 자세를 그대로 비춘다. 그 안에서 그가 생각하는 생에 관한 긍정적인 태도를 놓치지 않고 전달한다. 어쩌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를 이 책이, 저자의 말처럼 존재의 위기에 처한 이들에게 위안으로 남을 수 있기를 읽으면서 나도 같이 바라게 된다. 지금 내가 보내는 이 밤이 나에게 무엇으로 남을지 살짝 기대된다. 어제까지도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갔던 하루의 밤인데, 오늘 흐르는 이 시간은 다르게 남을 것 같다는 저자의 긍정 바이러스가 전해지는 듯하다. 짧은 문장에서 전해지는 큰 위로가 오늘 밤의 이 고요함을 가득 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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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8-11-03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을 앞두었을 때 무언가 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갑자기 죽을 수도 있잖아요 어느 정도 살면 그때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요 아파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때 마음이 편안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려면 지금을 살아야겠지요


희선

구단씨 2018-11-05 23:00   좋아요 0 | URL
저도요. 그런 상황을 앞에 두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 하게 되네요.
언젠가 다가올 나의 죽음이 갑자기는 아니었으면 싶다는 바람...

노란장미 2019-04-13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고 궁금해서 찾다보니...구단님이 먼저 읽으셨군요.역시.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