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너는 노땡큐 - 세상에 대들 용기 없는 사람이 뒤돌아 날리는 메롱
이윤용 지음 / 수카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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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는다는 건, 단순히 늘어나는 숫자만을 의미하는 건 아닌 듯하다. 나 같은 경우 늘어나는 나이와 주름살이 슬프기도 하지만, 참기만 했던 것들을 말하는 것도 늘어났다. 눈치 보느라 집어넣어야 했던 감정을 표출하는 일이 많아졌다. 남의 인생을 함부로 재단하며, 일상의 시시콜콜함까지 관여하려는 사람에게 차디찬 말 한마디 건넬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는 거다. 물론 이런 경우도 항상 가능한 건 아니다. 상황과 자리에 따라, 속에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지만 참아야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아니까.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참아야 하는 자리가 그리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를 함부로 대하는 것처럼 온갖 참견 다 하면서 말로 상처 주는 사람에게는 배려해야 할 예의 같은 건 챙길 필요가 없었다는 후회가 종종 있었으니까.

 

라디오 작가로 오랜 커리어를 쌓아온 저자가 세상을 향해, 자기 인생을 흔드는 사람을 향해 한 방을 날린다. 생각해보면 라디오라는 공간은 많은 사람의 온갖 사연이 몰려드는 곳 아닌가. 20년 동안 청취자들의 많은 이야기에 공감해 온 작가가 사연을 들으면서 차마 전파로 내보내지 못한, 꺼내고 싶은 말도 참 많았을 것 같다. 거기에 작가 자신이 겪은 일들에 하고 싶은 말을 더 보태고 싶었을 수도 있고. 방송에서나 사적이어서 말하지 못했지만, 자기가 쓰는 책에서는 마구 쏟아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공유하고 싶었겠지. 우리 이런 일로 가슴에 상처받는 일 더는 하지 말자고. 거절할 것은 거절하고, 차단할 것은 차단하면서 우리 인생 흔들리지 말자고 말이다.

 

내 앞에서 칭찬하는 사람은 뒤에서도 날 칭찬하는 줄 알았고, 나한테 잘해주면 그저 다 좋은 사람인 줄 알았고, 나에게 늘 자상한 남자는 다른 여자에게도 자상하다는 걸 몰랐고, 겉멋 부리기 좋아하는 남자는 인생에도 겉멋이 들어 성실하지 않다는 걸 몰랐으며 누군가는 내가 한 이야기를 토씨 몇 개 바꿔 뒤에서 아예 다른 이야기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걸 몰랐다. (122페이지)

 

생각해보면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마냥 쉬운 일도 아니지만, 하려고만 하면 가능한 일을 주저하면서 못 했던 거다. 내가 상처받는 것을 먼저 보지 않아서 그렇다. 내가 상처받고 내 감정이 아파하는 것을 인지하기 전에, 상대에게 밉보이면 안 된다는, 상대에게 싫은 소리 하는 건 안 된다는 판단이 앞서 나를 지키지 못했던 거다. 그렇게 나를 먼저 챙기지 못하고, 주변의 것을 보면서 착하고 괜찮은 사람 이미지를 챙기느라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냉정한 말을 건네지 못했던 시간을 소환한다. 그러면서 이제 인생에 독이 된 사람과 감정과 말들을 삭제할지 저장할지 선택해야 할 시간을 마주한다. 동시에 내 인생에서 힘이 되었던 사람과 따뜻한 말을 살포시 담아본다. 저자의 분위기를 그대로 옮겨보자면, '소심해서 세상에 대들 용기도 없고 억울하지만 따지지 못하는 성격에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는, 나에게 상처 준 사람들과 감정들을 내 인생에서 지워버리는 일'일 테니까. 이 작은 몸부림이 우리에게 주는 시원한 한방이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행복하게 해줄 것만 같다.

 

경제 위기 시절에 겪은 사회의 쓴맛, 여러 번의 연애가 만들어준 남자를 보는 시각, 중독자처럼 일하면서 부딪히는 사람과의 관계. 사람들 사이에서 생긴 상처가 숨통을 조일 때마다, 그들이 자기에게 버리고 간 쓰레기들을 처리하지 못해 켜켜이 쌓아두기만 했다. 쓰레기를 쓰레기인 줄도 모르고 안고 살아왔다. 좋은 것만 기억하고 떠올리며 나아가기에도 부족한 시간이고 인생인데, 그걸 이제야 알게 된 거다. 그렇다고 후회만 하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소중하니까, 아픈 일들은 하나씩 지우고 좋은 기억들 하나씩 품으면서 행복해질 생각만 하면 된다. 그중에서도 유독 마음에 오래 남은 구절이 있다. 우리가 찾았던 것은 거창한 말이 아닌, 그냥, 말 그대로, 마음을 다독여줄 단순한 한 마디의 위로였다는 것을.

 

승객 여러분,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소중한 사람과 따뜻한 저녁 보내시기 바랍니다.

 

순간, 아침부터 온종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던 나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나는 그만 울컥 눈물을 흘리고 말았던 것이다.

 

위로의 말이란 얼마나 단순하고 명료한 것인가.

우리가 언제 거창한 말을 바랐던가.

우리가 언제 잘했다는 칭찬을 원했던가.

 

그저 딱 한 번의 헤아림.

너의 고생을, 속상함을,

잘 해내고 싶은 부담감을, 간절함을

내가 알고 있다는 그 말 한마디면 되는 것을...

그저 그날 내 고생을 알아주는 한 사람만 있으면 되는 것을... (67~68페이지)

 

인생에서 독이 되는 관계를 티 안 나게 정리하는 방법이라고 말하지만, 그 방식이 참 소박했다. 그래서 더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정작 우리가 할 방법이 이거 말고 또 뭐가 있을까 싶어서 공감한다. 우연히 길에서 만난 고등학교 동창이 저자의 늦은 결혼을 걱정하면서 결혼정보회사에 가입하라고 하고,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온 대학 동기는 대뜸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서 저자의 경제 상태를 나무란다. 분명 듣는 사람이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인데 저자는 사과부터 했다고 한다. 순간 나도 모르게 사과의 말이 나갔을 것이다. 내가 받은 상처가 보이기 전에 상대가 화를 내는 게 더 큰 일이라는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우리가 이런 선택을 하면서 나의 마음보다 상대의 감정을 먼저 읽는 것은, 관계가 어색해지고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이 싫어서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원하지는 않았지만, 자꾸만 나에게 부딪혀 오는 일들. 어쩔 수 없이 감당하는 게 답이 되어버린 상황들. 그때마다 상처를 가슴에 쌓아오던 방식이 잘못된 거였다. 이제라도, 하루라도 빨리 내 인생에서 그것들을 내보내야 할 때다. 버리고, 삭제하고, 당장!

 

버튼 하나만 누르면 될 일이었는데, 나에게 상처 주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을 더 봐야 할지 고민해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는데, 무례하고 부당하게 나를 대하는 사람을 삭제하는 일에 야무지게 대처하지 못해 대나무 숲을 찾아다니는 일을 그만하고 싶다면, 저자가 전하는 방식에 귀 기울여보자. 한 번씩 인생을 리셋하고 싶은 순간이 있지 않은가. 지금이 딱 그럴 때다.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과 부정적인 감정들을 정리하면서 한발 한발 나아가는 것만이 내 인생을 채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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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 - 권기태 장편소설
권기태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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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은하는 우리 위에서 서서히 돌아간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삶이라도 그 아래에서 함께 한다. (432페이지)

 

 

우주에 가보고 싶다는 인간의 바람은, 더는 바람이 아닌 현실에 되었다. 물론 그 현실이 지금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상상만 하던 시절에 비하면 현실에 가까이 와 있는 게 맞지 않을까?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으로의 이동이 가능하다고 믿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게 마냥 신기할 뿐이다. 내가 죽기 전에 우주여행이 가능해질까 싶지만, 어쨌든 우리 인간에게 우주로 향하는 일은 이제 상상에 멈춰있는 일이 아니다.

 

우주를 꿈꾸던 이진우는 우주인에 도전한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직업은 생태 보호 연구원이다. 과학과 조금 더 가까이 있는 그는 우주인의 자격에 조금 더 가까이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 최초 우주인이 되기 위해 나선 그는 다른 도전자들과 함께 경쟁한다. 협력해야 같이 나아갈 수 있는 동지애도 느낀다. 주변의 많은 이가 경쟁자인데, 우주로 향하고 싶다는 같은 꿈을 꾸는 동료들 사이에서 그는 최종 선발까지 나아간다. 하지만 여러 위기를 극복하고 회사로 돌아온 그에게 남은 건 대기반 발령이라는 좌천 통보였다.

 

이진우는 우주인이 되려고 체력테스트를 통과하고 온갖 단계를 넘어서 최종 4인에 선발된다. 이제 이 고비만 넘기면 된다. 마지막 1명의 자리를 향한 몸부림은 시작되었고, 그 자리에 앉을 확률은 높아졌다. 오랜 시간 꾸어온 꿈을 이룰 수 있는 때가 된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관문처럼 놓인 그 문제 앞에서 그는 고민한다. 치열한 경쟁과 동료애를 같이 키웠던 대상을 밀고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는 이 고비를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 동료를 밀고하고 최후의 1인에 등극할 것인가? 아니면, 조금은 인간적인 감정에 더 치중할 것인가? 어떤 쪽으로든 결론은 내려야 하고, 그는 마치 인생 최대의 위기에 직면한 것처럼 힘든 시간을 보낸다.

 

살면서 많은 경쟁 상황에 놓인다. 때로,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해야만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마치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느냐 아니면 나의 마음 조금 더 안정되는 선택을 할 것이냐 망설이게 된다. 망설이더라도 선택은 해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결론을 내야 할 때가 대부분이다. 소설 속 이진우처럼, 진실을 밝히는 일과 목적을 이루는 일 중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나중에 후회를 덜 할 것인가 생각해야 한다. 반드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무엇을 선택해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 인생에 언제나 있었다. 왜 그래야만 하는 현실일까. 어려운 선택 앞에서 너무 괴롭기만 한데 말이다. 그의 말처럼, '인간의 물리학에는 왜 한 공간에 두 개의 선택이 있을 수 없단' 말인가. 평생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이들의 꿈이 실현되는 그 현장은 만만하지 않았다. 피만 없을 뿐이지 전쟁터였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이다.

 

사람도 너와 나, 우리는 무게 없이는 살 수가 없고 무게가 있는 곳에는 중력이 있다. 중력은 바람과 강, 밀물을 당길 때는 공평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갈 때는 오로지 개별적일 뿐이다. 버릴 과거는 없다. 아무도 모르니까. 피할 미래도 없다. 씨앗이 움트고 있으니까. 운명을 사랑해라. 그리고 가능성을 시험해봐라. 나아간 만큼 너의 인생이 된다. 다시 일어난 만큼 너는 강해진다. 그러니 반드시 생각해라. 이것이 끝이 아니라고. 너는 더 멀리 날아가야 한다고. (440페이지)

 

한때 우주인 선발 경쟁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다던 작가의 말이 인상적이다. 우주인 선발대회에서 탈락한 한 공군사관학교 교관의 눈물을 지켜보면서 '이뤄질 수 없는 꿈'에 관해 생각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에서 수업이 많은 꿈을 꾸고 이루지 못한 꿈을 버리고, 또 새로운 꿈을 꾸기를 반복해나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런 현실에서도 우리가 끝까지 지키고 버리지 말아야 할 삶의 태도 같은 것을 이진우로 대신 보여준다. 아무리 경쟁 상황에 놓여도, 간절한 꿈을 향해 가야만 해도, 내가 차지해야 할 자리가 바로 코앞에 있어도, 우리는 무엇을 지키고 선택해야 하는지 묻는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할 경쟁 과정이겠지만, 그 과정이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린다.

 

이 소설을 13년 동안 취재하고 35번이나 고쳐 쓰면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다 담을 수 있었는지 독자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 그대로 다 전달되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 말을 다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같은 세상을 사는 우리가 느끼는 게 같거나 비슷하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인생과 꿈을 이루고 싶어 하지만, 때로는 이기고 지는 일을 경험하고, 그런 경험 앞에서 어떤 태도를 보여야 인간다운지를 배우고 아는 것. 작가는 치열하고 힘든 우주인 선발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꿈을 향해 도전하는 사람들의 감동적인 모습에 또 한 번 용기를 내고 싶은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매번 넘어지고 무너질 때마다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 꿈을 꾸고 이뤄나가려고 하는 게 사람이 살아가는 의미이자 목표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해, 후회 없이 살아갈 때 꿈에 가까워진다는 거...

 

너는 끝까지 가보았으니까. 그 말이 마치 성큼 걸음을 내딛듯이 나에게로 들어왔다. 너는 끝까지 가보았으니까…… 꿈이 스러져가도 최대치를 다했으니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야. (442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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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의심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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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죄판결의 기준은 무엇일까. 피의자와 피해자. 양쪽에서 주장하는 진실과 제시하는 증거가 나름 다 타당할 것이다. 물론 각자로서 말이다. 판사는 그들의 진술과 제시된 증거로 유죄 무죄를 가려야 한다. 이때 법은 어느 정도의 합리적 의심과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식을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법의 판결을 기다리는 우리의 입장이고, 판사는 그들이 배운 법의 원칙에 의한 판결을 내려야만 한다. 그때 적용되는 법칙 중의 하나가 합리적인 의심이라고 한다.

 

합리적 의심 없는 입증의 원칙 Proof beyond a Reasonable Doubt

의심스러운 때에는 피고인의 이익을 따른다(in dubio pro reo)는 원칙에 근거, 피고인이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존재한다면 판사는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

 

의심은 있지만, 그 의심의 정도만으로 피고인이 범인이라는 확정을 내릴 수가 없을 때, 합리적 의심이 존재할 때 판사는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싶은데, 간단하게 피고인이 유죄라는 분명한 증거가 아니라면 유죄를 선고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혹여나 판결이 잘못되어 피고인의 무죄가 유죄로 둔갑하여 그의 삶이 고통스러워질 수 있기에 만들어진, 판결의 바탕이 되는 원칙이라고 봐도 좋겠다. 하지만 그 합리적 의심의 상황에서 판결을 내린다는 게 쉬운 일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작가는 이 소설로 보여준다.

 

한 여자가 법정 안으로 들어온다. 피고인 김유선은 애인을 살해한 죄로 구속되었다. 일명 '젤리 살인사건'이다. 검사는 애인이 젤리를 먹고 숨이 막혀 죽었다고 증언한 그녀의 말을 거짓이라고 판단했다. 검사는 그녀가 애인을 죽이고 젤리가 목에 걸려 죽은 것이라고 거짓 진술을 했다고 한다. 사고사로 판단하고 애인이 죽은 후 바로 화장을 하고 장례식까지 치렀는데, 갑자기 왜 이 문제가 불거졌나. 장례식이 끝나고 얼마 후에 김유선이 거액의 사망보험금을 받은 데 그 이유가 있다. 애인 사이에서 보험 수익자를 법적수익자가 아닌 애인이 받게 지정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것도 헤어지려고 했던 사이에서? 피고인 김유선의 증언은 상식적으로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녀의 주장에 유죄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이제 판결은 어떻게 내려질 것인가.

 

형사재판에서 유죄로 하려면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이 필요하다. (중략) 형사재판은 한 인간을 감방에 보낼까, 말까, 심지어는 교수대로 보낼까, 말까를 결정하는 일이다. 그 정도 증거로는 턱도 없다. 합리적인 선에서의 '의심'이 전혀 없는 수준까지 입증되어야 한다. 이것이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 원칙이며, 형사재판에서 유죄로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131페이지)

 

몇 년 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 하나가 떠오른다. 여자가 낙지를 먹고 죽었고, 애인이 보험금을 받았다. 이 사건은 대법원까지 갔고 피의자는 무죄로 풀려났다. 소설은 이 사건을 연상하게 한다. 피의자는 대법원 판결에서 무죄로 풀려났다. 소설은 현직 부장판사인 현민우가 일 년 전에 재판한 '젤리 살인사건'을 반추하는 것으로 풀어간다. 애인 사이의 남자와 여자가 젤리와 술을 사가지고 모텔에 들어갔다. 젤리를 안주로 먹던 남자가 질식해서 숨을 멈추었고,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며칠 후 사망했다. 여자는 애인의 사망보험금을 받고 독촉을 받던 돈 문제를 해결하고, 또 그 돈으로 다른 남자와 여행도 다녀왔다. 보이는 많은 것이 그녀를 살인자라고 지목한다. 하지만 법으로 증명해야 할 것들이 있다. 현민우 판사는 두 배석판사와 합의를 하면서 이 피의자에게 어떤 판결을 내려야 하는지 고뇌한다. 부장판사 현민우는 피의자 김유선이 유죄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두 배석판사는 무죄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현민우의 판단에 합리적 의심이 없는 입증을 거쳤는지 묻는다.

 

소설은 1년 전의 이 재판을 돌이켜보는 이야기로 진행되지만, 그 안에는 젤리 살인사건만 있는 게 아니다. 판사로서의 고뇌, 고충이 충분히 전달된다. 한 사람의 유명을 달리할 수도 있는 그 판결의 과정과 절차가 절대 쉽지 않은 일이며, 우리가 생각하는 법이 그리 간단하게 적용되어 유죄 무죄를 밝혀내지 못한다는 것을 보게 한다. 그러면서 저자의 바람이자 독자의 간절함을 담아 소설의 결말로 완성해낸다.

 

본문 중에서 나오는 말인데, 법이 정의를 위하지도 않으며, 판사가 정의의 수호자도 아니라는 말은 가슴을 써늘하게 했다. 무슨 사건이 발생했을 때, 우리가 그 사건에 개입되어 있을 때, 그 사건이 법의 판결을 받아야 하는 일이 생겼을 때, 우리는 법의 정의를 믿는다. 법의 원칙을 바탕으로 판사가 정의를 이뤄 내줄 것으로 믿는다. 법은 언제나 옳아서, 그 옳음으로 억울한 사람 없게 판결해줄 것이기 때문에, 라고 믿으며 공정한 판결을 기대한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한 것이 있다. 법은 상식과 동의어는 아니라는 것. 우리가 상식이라고 믿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과 같은 길을 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사건이 세 번의 재판을 거치면서 무죄로 판결되었을 때, 절망한 사람들이 많았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이 사건이 무죄로 판결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명백한(?) 증거와 정황이 있는데! 저자 역시 이런 판결이 왜 나오는지 알 수 없고 궁금하던 이유로 이 소설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판사가 법을 기준으로 합리적 의심이 없는 입증을 거쳐야 하는 것과 다른 시선에서 보게 되었던 게 아닐까 싶다. 법이 온전히 보호해주지 못하는 정의를 찾아가는 판사를 보여주면서, 사법 시스템에 어긋난 과정과 선택으로 정의의 편에 선다.

 

저자가 판사 시절에 썼던 추리소설들과는 사뭇 그 맥락을 달리한다. 그는 스스로 이 소설을 법정소설이라고 했다. 분위기도 그렇지만, 소설의 흐름에서만 봐도 알 수 있다. 사건의 해결과 범인을 찾는다는 의미보다는, 하나의 사건과 그 사건이 법정 안에서 어떻게 흘러가고 판결 내려지는지 세세하게 드러낸 것 같다. 실제 사건을 보면서 가졌던 의문점과 판결에 한발 더 깊게 들어가서 본 기분이다. 그동안에 좀 더 자세히 들을 수 없던 내용이기도 했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법과 판결에 적용되어야 하는 법의 차이에 관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숙제를 말한다. 법이 원칙으로 판결해야 하는, 상식에 맞는 판결이어야 하는 두 가지 사이에서 어떤 옳음으로 가야 하는지를.

 

판사에게 요구되는 건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솔로몬의 지혜로 내리는 획기적이고 기발한 판결이 아니다. '법과 절차를 빈틈없이 준수해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 일뿐이다. 그 결정이 옳을 것까지는 보장하지 못한다. (145~146페이지)

 

재판을 통해 범죄자를 가려낸다. 내 기준에선 결과가 아니라 '의도'의 선악이 더 중요하다. 그다음에는 격리. 그가 세상에 해를 끼칠 기회를 최대한 주지 않는다. (162페이지)

 

이미 들은 내용이어서 뭘 더 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으로 읽었다. 재판 과정에서 보이는 답답함에 화가 났다가도, 소설이기에 가능한 반전과 결말로 조금은 후련해지는 느낌도 들고. 하지만 독자로서, 일반인으로서 영원히 궁금할 것 같다. 법의 기준이 정하는 판결과 인간의 감정과 상식이 담긴 판결의 차이는 얼마나 좁혀질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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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양이 8 - 에이 설마~
네코마키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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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콩고양이 시리즈를 만났다. 이웃님의 리뷰에서 한 번씩 만나던 두식이가 너무 궁금했더랬다. 이상하게 고양이 무리 틈에서 혼자 외롭게 존재할 것 같은 개 한 마리 두식이. ^^ 그런 궁금증으로 읽게 된 콩고양이 여덟 번째 이야기를 맞이하기 전에 두식이의 배경을 좀 찾아봤다.

 

고양이 콩알, 팥알과 같이 살면서 두식이는 자기를 고양이라고 생각했단다. 듣고 보니 이게 너무 웃긴 거다. 아니 그러면, 지금은 자기 자신을 개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추측건대, 내 주변의 존재하는 모든 게 고양이라면 나도 고양이로 생각하고 살아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환경의 차이일 수도 있고. 암튼 두 냥이와 너무 잘 지내는 두식이가 의아스럽지만, 이들이 어떻게 같이 지내왔는지 살펴보면 화기애애한 이들 사이가 낯설거나 이상하지 않다. 그렇게 두식이가 자기가 고양이라고 착각하든 말든, 더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된 거다. 적어도 이 가족에게는 말이다. 이 가족에게는 고양이와 개만 있는 게 아니다. 거북이에 가끔 고개를 들이미는 비둘기도 있고, 어느 순간 너구리까지 합세했다. 그리고 더 많은 동물이 이 집에 머문다. 이 집에 머무는 인간의 숫자보다 동물의 숫자가 더 많다. 어떻게 이런 집이 있을까 싶지만, 있다. 바로 여기에.

 

 

콩알, 팥알처럼 주인에게 귀여움을 받고 싶지만, 언제나 한발 뒤에서 간절한 눈빛만 보내는 두식이는 두 어른의 손길에도 행복하다. 게다가 엄마와 같은 체형에 같은 숙제를 안고 있다. 바로 다이어트. 살을 빼야 해. 두식이도 엄마도. 둥실둥실 보기에는 귀엽고 예쁘지만, 너무 과한 것은 안 되느니... 콩알 팥알이 간식을 먹을 때도 두식이는 쳐다만 봐야 했다. 그에 콩알 팥알이가 간식을 획득할 수 있는 비결을 전수하는데, 이런~ 이거 제법 설득력 있는 방법이다. ^^ 결국, 두식이도 엄마도 당분간 다이어트 성공하기는 어려울 거란 예고를 하는 듯하다.

 

할아버지 내복씨의 여든 살 생일 파티 후 돌아오니 난장판이 되어 있는 집이 눈에 훤히 그려지고, 우연히 데려오게 된 유기묘 그레이를 돌보고 있던 이 가족에게 그레이의 주인 할머니가 찾아온다. 같이 살았던 정이 그렇게 큰 건가 보다. 그레이가 떠나고 그레이의 안부를 궁금해 하는 이 가족이 그레이의 평온한 일상을 살짝 훔쳐보고 와서 안심하는 모습이 뭉클했다. 그리고 내복씨의 건강에 이상이 생긴 일. 아침 식사하라고 내복씨를 부르러 간 콩알 팥알이와 두식이는 깜짝 놀란다. 내복씨가 움직이지 않은 것. 내복씨는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받고 며칠 후 집에 돌아오는데, 내복씨와 동물들의 사이는 더 애틋해진다. 이 부분을 보는데, 진짜 눈물이 날 것 같더라. 내가 키우는 동물이 나의 안부를 묻고, 나에게 이상이 생겼을 때 크게 짖어가면서 소식을 전한다고 생각하면, 진짜 감동이지 않은가. 동물을 좋아하지 않아서 키우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대는 이런 동물들을 볼 때면 가슴을 꽉 채우는 애틋함이 있다.

 

소소하고 소박한 에피소드에 읽는 재미는 기본이고, 인간 세상에서 느낄 감동이 이 이야기에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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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지도
앤드루 더그라프.대니얼 하먼 지음, 한유주 옮김 / 비채 / 2019년 1월
평점 :
절판


 

 

지도는 길을 헤매지 않게 안내해주는 역할도 하지만, 지도가 소설과 만났을 때는 길 안내 역할 말고 다른 방향의 인도자가 된다. 혹시 비슷하게 느끼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 같은 경우 소설을 읽으면서 장면을 상상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문장으로 그려지는 영상 같은 거 말이다. 문장으로 머릿속 상상력을 더해가지만, 막상 그리려고 하면 잘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 공간이 이렇게 생겼던가? 이런 구도였던가? 순서를 이렇게 그리면 될까? 하는 온갖 걱정으로 상상은 상상에서 멈추고 완성되지 못하곤 했다.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에게 소설의 여정을 알려주는 지도, 아직 그 소설을 읽지 못했다면 당장에 펼쳐보고 싶게 만드는 지도를 그려낸 작가가 있다.

 

두 작가가 함께 그리고 엮은 『소설&지도』는 소설 속의 세계를 재창조하면서 색다른 재미로 그 작품 속을 헤엄치고 싶게 한다. 여기에서 소개된 19편의 작품은 대부분 고전이면서, 현대소설을 포함했다. 목록만 봐도 이미 솔깃할 수밖에 없는 게, 무슨 필독서처럼 어디에서나 봤음직 한 제목들이다. 유감이지만 나는 아직 읽지 못한 목록이 대부분이라 더 간절해지는 마음이 있다. 역자인 소설가 한유주는 이미 여기에서 소개된 책을 읽은 독자가 더 흥미롭게 여길만하다고 했지만, 아니다. 아직 읽지 않은 독자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인 책이다. 이미 다른 소설을 읽으면서 경험한, 문장으로 떠나는 여행 같은 느낌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 속에서 길을 잃는다는 일이 두려움이 아니라, 설레고 황홀한 여행을 떠나는 일임을 알게 된다.

 

 

그중에서 첫 작품으로 『오디세이아』의 항해를 언급하고, 긴 여행을 따라간다. 한 페이지에 그려진 여행 후기 같은 느낌이다. 그가 집으로 가던 그 길, 소설 속 문장으로 상상만 하던 그 길의 흐름이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더해진 분위기에, 축약된 도서 리뷰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햄릿의 엘시노어 성을 비춘다. 막이 오르고 배우는 대본에 따라 연기를 하는 『햄릿』은 그렇게 희곡으로 무대 위에 오르기 위한 준비 과정처럼 보였다. 이 지도에서 작가가 보여준 것은 무대의 배경이 되는 이미지나 엘시노어 성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이동 경로에 맞춘 노선을 보여주는 것 같다. 어디로 가서 어떤 이야기가 펼쳐졌던 건지 또 한 번의 상상을 더 한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갈등, 고뇌 같은 감정이 여러 장마다 흐르게 내버려둔다.

 

각자 다른 길을 가는 것 같지만 결국은 한 곳에서 만나게 되는 길을 따라가는 『오만과 편견』은 제목만 들어도 배시시 웃음이 난다. 두 주인공 특유의 성격이 연상되기도 하고, 전혀 다른 성격과 방식의 두 사람이 소설의 마지막에 그려내는 그 훈훈한 마무리를 이미 알기 때문이다. 이쪽에서 저쪽에서 걷던 두 사람이 한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 과정을 몇 가지 색으로 이어진 빨간색 실 하나를 풀어놓은 것 같아서 설렌다.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은 굉장히 특이한 도서관 구경을 하고 온 것만 같다. 무슨 미로일까 싶으면서도 이런 도서관이라면 꼭 한번은 가보고 싶은 당연한 생각도 든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은 스크루지의 시간여행을 독자가 동참하게 하는 방식이 특이하다. 하룻밤 사이에 이곳저곳을 시간 구애받지 않고 날아다니는 듯했다. 하늘을 날아다니며 그의 과거와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 그의 마음속에 차근차근 쌓여가는 변화를 독자가 함께 느끼게 하는 지도였다. 무인도에 떨어져 탈출을 꿈꾸게 했던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는 환경에 따른 그의 생활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확인하게 한다. 원시적인 느낌도 들지만, 그런 환경에 처했다면 인간 누구라도 생의 원초적인 흐름에 따르게 되지 않을까? 그의 무인도 생활을 생생하게 지켜보는 시선을 가지기도 했다. 그 외에도 80일간의 세계 일주,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 허클베리 핀의 모험, 모비딕 등 여러 작품이 독자의 머릿속에서 꺼낸 지도가 되어 펼쳐진다.

 

 

소설을 한 장의 지도로 담아낼 수 있다는 게 어떤 것일까 떠올려본 적이 없다. 그만큼 내가 소설을 읽는 동안은 머릿속에서만 머무는 상상이었다는 거다. 편집자이자 작가인 대니얼 하먼과 일러스트레이터 앤드루 더그라프는 그런 상상을 지도로 그려내 독자에게 소설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미 작품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를 제외하고 추린 50편을 다시 19편으로 정리해 한 권의 책에 담았다. (50편이 다 담겼다면 독자의 즐거움은 커졌겠지만, 아마 50편이 다 담겼다면 이 책의 가격은 후덜덜하지 않았을까? ^^) 소설을 읽으면서 떠올리는 많은 장면, 등장인물의 궤적이나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공간, 인물 간 관계도 같은 것을 눈앞에서 확인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이 책 『소설&지도』가 제시하는 지도가 그 상태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전한다. 소설은 계속 다양한 작품으로 독자에게 다가올 것이고, 그때마다 작품에서 독자가 느끼는 의미 또한 다르겠지. 매번 다른 작품을 만날 때마다 그 작품으로 들어가 자기만의 지도를 만드는 일이 독자의 몫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작가가 소설로 그려준 지도는 오직 한 가지 길을 알려주는 게 아니었으므로. 여러 갈래 길 중 하나만 보여준 것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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