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지도
앤드루 더그라프.대니얼 하먼 지음, 한유주 옮김 / 비채 / 2019년 1월
평점 :
절판


 

 

지도는 길을 헤매지 않게 안내해주는 역할도 하지만, 지도가 소설과 만났을 때는 길 안내 역할 말고 다른 방향의 인도자가 된다. 혹시 비슷하게 느끼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 같은 경우 소설을 읽으면서 장면을 상상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문장으로 그려지는 영상 같은 거 말이다. 문장으로 머릿속 상상력을 더해가지만, 막상 그리려고 하면 잘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 공간이 이렇게 생겼던가? 이런 구도였던가? 순서를 이렇게 그리면 될까? 하는 온갖 걱정으로 상상은 상상에서 멈추고 완성되지 못하곤 했다.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에게 소설의 여정을 알려주는 지도, 아직 그 소설을 읽지 못했다면 당장에 펼쳐보고 싶게 만드는 지도를 그려낸 작가가 있다.

 

두 작가가 함께 그리고 엮은 『소설&지도』는 소설 속의 세계를 재창조하면서 색다른 재미로 그 작품 속을 헤엄치고 싶게 한다. 여기에서 소개된 19편의 작품은 대부분 고전이면서, 현대소설을 포함했다. 목록만 봐도 이미 솔깃할 수밖에 없는 게, 무슨 필독서처럼 어디에서나 봤음직 한 제목들이다. 유감이지만 나는 아직 읽지 못한 목록이 대부분이라 더 간절해지는 마음이 있다. 역자인 소설가 한유주는 이미 여기에서 소개된 책을 읽은 독자가 더 흥미롭게 여길만하다고 했지만, 아니다. 아직 읽지 않은 독자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인 책이다. 이미 다른 소설을 읽으면서 경험한, 문장으로 떠나는 여행 같은 느낌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 속에서 길을 잃는다는 일이 두려움이 아니라, 설레고 황홀한 여행을 떠나는 일임을 알게 된다.

 

 

그중에서 첫 작품으로 『오디세이아』의 항해를 언급하고, 긴 여행을 따라간다. 한 페이지에 그려진 여행 후기 같은 느낌이다. 그가 집으로 가던 그 길, 소설 속 문장으로 상상만 하던 그 길의 흐름이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더해진 분위기에, 축약된 도서 리뷰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햄릿의 엘시노어 성을 비춘다. 막이 오르고 배우는 대본에 따라 연기를 하는 『햄릿』은 그렇게 희곡으로 무대 위에 오르기 위한 준비 과정처럼 보였다. 이 지도에서 작가가 보여준 것은 무대의 배경이 되는 이미지나 엘시노어 성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이동 경로에 맞춘 노선을 보여주는 것 같다. 어디로 가서 어떤 이야기가 펼쳐졌던 건지 또 한 번의 상상을 더 한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갈등, 고뇌 같은 감정이 여러 장마다 흐르게 내버려둔다.

 

각자 다른 길을 가는 것 같지만 결국은 한 곳에서 만나게 되는 길을 따라가는 『오만과 편견』은 제목만 들어도 배시시 웃음이 난다. 두 주인공 특유의 성격이 연상되기도 하고, 전혀 다른 성격과 방식의 두 사람이 소설의 마지막에 그려내는 그 훈훈한 마무리를 이미 알기 때문이다. 이쪽에서 저쪽에서 걷던 두 사람이 한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 과정을 몇 가지 색으로 이어진 빨간색 실 하나를 풀어놓은 것 같아서 설렌다.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은 굉장히 특이한 도서관 구경을 하고 온 것만 같다. 무슨 미로일까 싶으면서도 이런 도서관이라면 꼭 한번은 가보고 싶은 당연한 생각도 든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은 스크루지의 시간여행을 독자가 동참하게 하는 방식이 특이하다. 하룻밤 사이에 이곳저곳을 시간 구애받지 않고 날아다니는 듯했다. 하늘을 날아다니며 그의 과거와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 그의 마음속에 차근차근 쌓여가는 변화를 독자가 함께 느끼게 하는 지도였다. 무인도에 떨어져 탈출을 꿈꾸게 했던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는 환경에 따른 그의 생활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확인하게 한다. 원시적인 느낌도 들지만, 그런 환경에 처했다면 인간 누구라도 생의 원초적인 흐름에 따르게 되지 않을까? 그의 무인도 생활을 생생하게 지켜보는 시선을 가지기도 했다. 그 외에도 80일간의 세계 일주,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 허클베리 핀의 모험, 모비딕 등 여러 작품이 독자의 머릿속에서 꺼낸 지도가 되어 펼쳐진다.

 

 

소설을 한 장의 지도로 담아낼 수 있다는 게 어떤 것일까 떠올려본 적이 없다. 그만큼 내가 소설을 읽는 동안은 머릿속에서만 머무는 상상이었다는 거다. 편집자이자 작가인 대니얼 하먼과 일러스트레이터 앤드루 더그라프는 그런 상상을 지도로 그려내 독자에게 소설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미 작품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를 제외하고 추린 50편을 다시 19편으로 정리해 한 권의 책에 담았다. (50편이 다 담겼다면 독자의 즐거움은 커졌겠지만, 아마 50편이 다 담겼다면 이 책의 가격은 후덜덜하지 않았을까? ^^) 소설을 읽으면서 떠올리는 많은 장면, 등장인물의 궤적이나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공간, 인물 간 관계도 같은 것을 눈앞에서 확인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이 책 『소설&지도』가 제시하는 지도가 그 상태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전한다. 소설은 계속 다양한 작품으로 독자에게 다가올 것이고, 그때마다 작품에서 독자가 느끼는 의미 또한 다르겠지. 매번 다른 작품을 만날 때마다 그 작품으로 들어가 자기만의 지도를 만드는 일이 독자의 몫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작가가 소설로 그려준 지도는 오직 한 가지 길을 알려주는 게 아니었으므로. 여러 갈래 길 중 하나만 보여준 것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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