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하고 게으르게
문소영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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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 방 하나를 그려봤다. 방안의 한 면에는 책장에 책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고, 다른 한 면에는 많은 영화의 DVD가 진열되어 있다. 나머지 한 면에는 그림과 영화와 공연 포스터가 차지하고 있는 방이 될 거다. 그 방 안에 들어가면 심심할 시간이 없겠지. 책 한 권 꺼내 읽다가, 그 책의 한 문장에 꽂혀 연상되는 영화 한 편을 꺼내 보고, 영화의 한 장면에서 떠오르는 그림을 보기도 하는 어떤 시간. 생각하는 많은 일과 누군가와 함께 얘기하고 싶은 온갖 주제가 그 방안에서 터져 나올 것만 같다. 누군가의 이야기에 불합리한 상황을 문제 삼고, 친구의 고민에 같이 고민하게 되는 공감의 순간을 떠올리고, 역사의 한순간을 그려낸 화가의 일생을 생각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쉽게 바뀌지 않는 일들에 여전히 한 손을 얹어놓고 애쓰는 다짐들을 굳건히 하게 되는 공간. 아마도 그 방은 현실과 상상 그 사이에서 삶의 모든 것을 생각하게 되는 공간일 것 같다. 저자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 방을 계속 그리게 된다.

 

사실 미술과 디자인 같은 분야에 많은 이력을 가진 저자의 이름에서 이런 책을 만날 줄은 몰랐다. 그림에는 워낙 문외한이라, 아무리 조금씩 알아가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누군가가 전문적인 지식으로 풀어놓은 글을 읽는다는 게 아직 힘들다. 저자가 들려주는 대부분의 이야기가 그런 쪽은 아닐까 싶어서, 끝까지 이 책을 읽을 수나 있을까 걱정부터 했다. 기우였다. 조금 과장해서 말해도 된다면, 요즘 이렇게 재미있게 읽은 책 드물었다. 배달된 작은 상자 하나를 열었더니 온갖 것이 튀어나오는데, 그렇게 튀어나오는 게 끝이 없다. 이야기가 다양해서 지루할 틈이 없었다는 말이다. 현실에서 마주하는, 세상을 보는 많은 시선을 다양하게 들려준다. 상상 조금 보태서 세상을 향한 새로운 시선을 만드는 것도 즐거웠다. 스스로 게으른 사람이라고 칭하면서, 저자가 보는 많은 것이 게으름과는 거리가 멀더라. 정말 게으른 사람은 이렇게 많은 책, 영화, 그림 등을 접하지도 못할뿐더러, 그렇게 바라보는 많은 것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꺼낼 수조차 없으리라.

 

게으르게, 불편하게, 엉뚱하게, 자유롭게, 광대하게, 행복하게. 총 6개의 챕터로 나뉜 이야기들에 저자가 바라보는 예술 작품, 작가들, 주변 사람, 작가의 경험이 녹아들어 있다. 처음에는 늦게 꽃핀 대가들의 소개에서 대기만성 위대한 인물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그런 인물들이 있으니 우리도 언젠가 '늦게 꽃핀' 무언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에 웃으면서도 골똘히 생각하게 되더라. 뭐랄까. 무엇이든 꾸준히 하다 보면 어떤 결과를 마주하게 되기도 하는 순간이 오지 않는가. 미쳐야 미친다고, 바라던 일을 계속하다가 다다른 어떤 목적지가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기대가 생기는 이상한 심리가 발동한다. 물론 저자도 자신의 게으름을 미워하지 않고 '늦게 꽃핀' 이들을 생각하면서 앞으로의 인생에서 뭐가 더 채워질지 상상하고 있지 않을까? 그저 늦게 이름을 알린 예술가와 작품들의 이름 정도로만 알고 있던 대상에서 다른 시선을 읽게 된다는 게 이런 재미구나 싶다. '그래, 이런 사람들도 있었는데, 혹시 나도?' 하는 인간의 묘한 심리 말이다. ^^ 허무맹랑한 시도와 도전이 아니라, 간절히 바라는 것들을 떠올리며 계속 나아가고 싶은 이들에게 이보다 더한 응원과 위로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읽다가 더 마음에 들었던 건, 우리가 오해하는 작품의 해석을 다시 해주는 부분이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 나는 이 시의 완전체를 몰랐다. 그저 유명한 구절 몇 부분만 기억하는 정도다. 나도 저자의 지적처럼 이 시의 흐름을 오해했던 거다. '가지 않은 길'이 다른 사람이 가지 않은 길을 내가 가야 한다고 '으쌰으쌰'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내가 가지 않은 길이었던 거다. 타인과 비교하면서, 그들이 가지 않을 길을 내가 가서 정복하는 성공의 과정이나 목적지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 시는 타인의 시선 따위 상관없이, 오직 자기 자신과의 문제였다. 갈라진 두 길 앞에서 우리는 오직 한길로만 갈 수 있으며, 내가 가지 않은 길은 언제나 궁금하고 미련이 남기 마련이라는. 그러니 우리가 어떤 길로 가더라도, 가지 않은 다른 길에 대해 아쉬움은 항상 품고 살아간다는 말 아닐까 싶다. 타인과 연결하여 비교 대상이 되는 게 아니라, 그냥 나 자신만 바라보고 원하는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저자는 조지 이네스의 그림 <몬트클레어, 11월>을 시와 함께 떠올린다. 마치 숲속의 두 갈래 길에 서서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망설이는 듯하다고.

 

조지 이네스 / 몬트클레어, 11월 (1893)

 

우리의 인생도 이런 망설임과 선택의 연속일 것이다. 그리고 어느 길을 택하든, 가지 않은 길은 그 미지로 인한 신비와 아쉬움을 황홀한 안개처럼 두르고 저 멀리에 있을 것이다. (51페이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오해)

 

'내가 가진 것들'이 있다고 해서 '내가 갖지 못한 것들'에 대해 그저 입을 다무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자 혼자 안심하고 돌아다닐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비유럽계 인종들이 인종차별 받지 않고 돌아다닐 세계를 만들기 위해, 나는 내 불편함을 말해야 한다. 비록 그 변화가 산을 숟가락으로 떠서 옮기는 일 같더라도……. (59페이지, 프로불편러가 될 수밖에)

 

명절에 대한 기원을 듣고 심하게 놀랐다. 지금까지 알던 명절은 가족이 모여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는 날이라고 알았다. 열심히 명절 음식 만들고 먹으면서 연휴를 보내고, 귀경길에는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와야 하는 날. 그러니 명절이 재미있고 즐거울 수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저자를 통해 듣게 된 명절의 기원은 차례 음식 준비하면서 보내는 오늘날의 명절과 달랐다. 기록에 따르면, 사월 초파일에는 연등 행사로 볼거리가 풍성했고, 구경꾼들이 온 거리를 채우는 광경이었다고 한다. 추석도 본래는 축제일이었다고, 닭 잡고 술 빚어 온 동네가 취하고 배부르게 먹는 날이었지, 조상의 제사상 차리는 게 주된 행사가 아니었다고. 차례상도 몇 가지 음식이 올리고 간소했다고 한다. 다 함께 먹고 놀고 즐기는 날이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거한 차례 음식 만드느라고 허리 한번 펴지 못하는 날이 되었을까? 명절의 의미가 어떻게 왜 변했는지까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의 모습대로 명절이 계속된다면 아마 '다 함께 먹고 놀고 즐기는' 순간은 절대 오지 않을 것 같다.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누군가는 편하게 먹고 놀고 쉬는 날이 된다면, 언젠가는 파국에 이를 것이다. (차 파국을 불러와~) 거기에 안부를 묻는다면서 계속되는 말과 또 한 번 타인의 시선에 공격당한다면, 더는 명절의 의미는 사라질 것 같다.

 

안중식 / 평생도 과거 급제 부분 (조선 후기)

 

안중식의 그림 <평생도>와 김홍도의 <평생도>로 한국인의 비교 강박의 기원을 찾기도 한다. 몇 폭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것은 탄생부터 결혼, 과거 급제, 고관이 되어 행차, 회혼례로 이어지는 인간의 생애였다. 마치 성공한 삶은 이런 것이라고 증명이라도 하듯, 모든 인간의 삶과 성공이 이렇게 흘러가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생김새부터 태어나서 자라는 환경까지 제각각인데, 세상이 증명하고 판단하는 삶의 흐름은 왜 이렇게 한 가지로 통일되어야만 하는 걸까. 이렇게 살아가는 것만이 최상의 생애라는 거라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 불편하다. 그렇게 탄생한 '엄친아'라는 단어는 오랜 세월 우리 사회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지금도 디테일한 내용만 조금 첨가되고 변화되었을 뿐이지 여전히 우리 곁에서 비교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통해 어머니의 정의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나는 소설로 이 내용을 접했는데, 이들의 감정을 다 이해할 수 없어서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소시오패스 아들과 그 아들이 저지른 범죄의 결과를 책임져야 하는 부모의 처지를 생각했다. 그러면서 자꾸만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는 어때야만 하는지 묻게 된다. 그런데 저자는 아들보다는 엄마의 이야기로 이 영화를 해석한다. 엄마는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어떤 엄마가 가장 보편적이고 평균적인 모습인지 되묻는 것만 같다. 이제까지 우리가 상징하는 엄마는 어떤 모습이었던가? 자식에게 희생하고, 당신 인생보다 아내와 엄마의 역할이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순간 없었던가? 대개 그렇게 생각하는 엄마의 모습이 많았을 거다. 무조건 자식 뒤에서 자식의 수호신처럼 보호해야 하는 존재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엄마는 다르다. 원하지 않은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의 성장에 무관심하지 않다. 케빈이 죄를 저질렀을 때도 맹목적으로 아들 편을 들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아들의 죄에 관한 부모의 책임을 다한다. 케빈의 엄마는 감정이 없는 사람일까? 아니다. 그녀에게도 자식에 대한 개념이 있다. 단지 우리가 그동안 고정관념처럼 쌓아왔던, 자식에게 맹목적이고 희생이 우선시되었던 엄마의 모습이 아니었을 뿐이다. 조금은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엄마와 아들 사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태도였다. 이런 케빈의 엄마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저자도 이 부분에서 엄마의 존재와 의미에 대해 생각한 듯하다. 남자에게 엄마의 심장을 가져다 달라고 하는 여자 이야기('어머니의 심장이야기'가 싫다)를 들려주는 부분과 닮았다. 어머니를 살해하고 그 심장을 여자에게 갖다주려고 뛰면서 떨어진 어머니의 심장이 말한다. "얘야, 괜찮으냐. 다치지 않았니." 듣다 보면 억지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동을 뿜어냈다. 이런 엄마가 어디 있느냐며, 엄마는 죽어서까지 자식을 위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저자는 이 이야기 듣기 불편하다고 했다. 나도 그렇다. 내가 아무리 엄마를 사랑해도 나의 모든 것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엄마에게도 자식을 위해 양보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라는 게 있을 것이다. 그게 사람이다. 그게 인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는, 엄마이기 전에 한 인간일 뿐이다.

 

엄마와 자식의 관계는 가장 원초적인 인간관계다. 설령 미래에 결혼제도가 사라진다 해도 존속될 것이다. 그래서 모성의 진화와 그에 대한 탐구는 계속되어야 한다. (117페이지, 새로운 어머니에 대하여)

 

저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제각각의 인생을 걸어온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어떤 결말로 도착할지 궁금해지곤 했다. 이렇게 누군가의 이야기만 들려주면서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전달하려는 걸까? 저자는 '광대하고 게으르게'라는 모순되게 들리는 삶의 자세로 어디에 도착하고 싶은 걸까? 차근차근 듣다 보면,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은 저자의 말은 우리가 일상에서 매일 마주하는 일들과 다르지 않았다. 한쪽에서 굶어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먹방의 인기는 무엇을 더 생각해야 하는지 묻기도 하고, 욕을 먹으면서까지 셀럽이 되어야만 하는 요즘 세상의 흐름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저출산의 문제를 다양한 시선으로 계산하는 이들이 범하는 오류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흥미롭게 들려준다. 사실 이 저출산 문제는 어느 한 사람의 문제로 시작된 것도 아니고, 누구 한 사람의 노력으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낮은 혼인율과 저출산의 문제는 개인의 선택이기도 하겠지만, 사회적 문제라는 게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거 아닐까. 결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개인의 만족이 미혼일 때보다 크다는 계산이 있어야 결혼과 출산이라는 인생 계획을 생각할 텐데, 가사와 육아 같은 돌봄 노동이 저평가되는 현실에 발생하는 문제도 심각하다. 저자의 말처럼 뼈있는 경제학 농담으로 저출산 문제의 심각성을 들여다보는 방법도 의미가 있다.

 

사회적 차원에서의 자유와 선택의 공허함에 대한 문제, 자본이 없고 선택을 학습할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유가 주어져 있는데 왜 못해'라고 하는 문제는 사회 제도로 보완하고 해결해야 할 일이다. 『멋진 신세계』를 떠오르게 한 푸념을 했던 경제학 교수 친구는 그런 문제들을 연구한다. 그는 자유의 개인적, 사회적 피로를 잘 알고 있지만, 또한 여전히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있기에, 자유를 지키면서 자유의 피로를 줄일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나도 그렇다. 그러기 위해서 종종 우리는 '멈추어 집중'해야 한다. (192페이지, "뭐든지 될 수 있어"의 피로와 뜻밖의 위로)

 

인생, 삶이, 세상이, 참 아이러니하다. 노력하면 원하는 것만 취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더라는 걸 우리는 안다. 복과 화는 쌍둥이처럼 항상 같이 다니기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화를 피하고 복만 맞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인생에서 어느 순간 마주칠지도 모를 온갖 상황들을 부딪치면서 살아가야 한다. 불평등과 불이익을 마주하고 싸우기도 한다. 불편하다는 말을 소리 내어 해야 하는 순간도 많다. 피해 가지 말아야 한다는 걸 새삼 새기고 싶어지게 하는 저자의 이야기들에 공감하게 된다. 우리 살아가면서 타인과 세상을 질투하고 미워하기도 하지만, 사랑하고 아끼며 함께하고 싶은 순간이 더 많지 않을까? 영화 <코코>의 주인공들이 기억하는 시간은 삶의 의미였고 행복이었을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찾으며 유한의 시간에 행복을 누리라고 했다. 늘 거기 있을 거로 믿었던 소중한 사람이나 장소는 예기치 못한 시간에 사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더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싶은 게 아닐까 싶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영원하지 않기에, 괴로운 것보다 즐거워질 수 있는 것을 찾아다니는 시간이 필요하다. 저자가 보여준 다양한 시선들은 그 즐거움을 채울 수 있는 시간을 만든다.

 

경쟁은 스트레스를 낳는다. 그래서 '행복 경쟁'을 하다 보면 '왜 행복해야 하나?'라는 질문까지 나오게 된다. 물론 불행하고 싶은 사람은 없겠지만, 불행하지 않은 것 이상의 행복을 추구할 필요가 있을까? 무엇보다도, 대체 뭐가 행복일까? (245페이지, 행복도 경쟁해야 하나요)

 

예술과 영화, 문학 작품으로 이렇게 다양하게 쏟아낼 수 있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은데, '게으르다'는 저자는 어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을까? 게을러서는 절대 나오지 못할 내용에 독자로서 한껏 즐기는 시간이었다. 저자가 챕터별로 언급해준 모든 이야기를 여기에 옮기고 싶을 정도로, 이 책 안에서 다양하고 깊은 시선에 곁들인 유쾌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마지막에 배치한 행복에 관한 이야기들에서는, 저자가 게으름(?) 때문에 한껏 행복한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빠르게, 타인보다 먼저, 많이 갖는 인생을 만들어가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 들려서 좋았다. 천천히 가다 보니 어느 순간 도착해 있더라, 하는 완성 같은, 영화 <일일시호일>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아, 부럽네. 이렇게 다양한 것을 보면서 만들어가는 또 다른 시선들. 가끔은 부끄러운 감정을 드러내면서 챙피해 하고, 대가가 되겠다며 게으름을 집어넣고 싶기도 하는, 특히 예술 작품을 보면서 현실에 들여놓은 시각을 읽어내는 방식들이 눈에 들어온다. 평소 음식에서 편식하듯 예술이나 문학, 영화에도 여전히 편식하는 내가, 저자가 들려주는 방식의 행복을 찾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으로 느낀 어떤 감각들이 나를 깨우는 것 같아서, 저자처럼 게으르지만 광대한 시선을 만나보려고 애쓰고 싶다. 어떤 날 마주하는 일상의 모든 이야기를 한꺼번에 들은 것 같아서 배가 부르다. 게으름과 닮은 느림이 어쩌면 행복을 더 가깝게 부르는 손짓일지도. 천천히 가도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 없다. 자기 속도대로,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

 

"계속 끄적거리세요! 뭔가가 일어날 겁니다. (Keep scribbling! Something will happen.)" (20페이지, 늦게 꽃핀 대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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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내가 죽은 집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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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어릴 적의 몇 년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삶이 불편할 것 같지는 않다. 일상이 힘들 것 같지도 않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싶은 기억의 단편이 순간순간 지나가더라도, 그냥 그렇겠거니 할 것 같다. 지금도 흔하게 내 머릿속을 점령하는 건망증 정도로 여기게 될 테니까.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보니, 누군가에게는 그 잃어버린 기억이 언젠가 한번은 정리해야 할 일생의 한 부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앞으로의 삶을 온전히 이어갈 수 없을 것처럼 간절한 뭔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은가. 남들이 볼 때는 별거 아닌 것 같아도, 뭐 그런 것을 그렇게 신경을 쓰느냐고 핀잔을 주더라도, 나는 꼭 그걸 확인해야만 속이 시원해질 것 같은 거. 어쩌면 나에게도 그런 순간 한번쯤 오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화자인 '나'에게 헤어진 여자 친구 사야카의 전화가 걸려온다. 그녀와 헤어진 지 7년이나 되었고, 그녀는 이미 아이와 남편이 있는 유부녀다. 그러니 갑작스러운 그녀의 연락에 놀랄 수밖에. '혹시 내가 그리워진 건 아닐까' 하는 설렘도 잠깐 떠올리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녀의 용건은 의외였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낡은 지도 한 장과 열쇠 하나로 어떤 곳을 같이 찾아가주었으면 한다고. 그 지도와 열쇠에 자기의 잃어버린 기억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면서.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옛 여자 친구와 이 여정을 함께해도 되는지 고민하면서 거절하고 싶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이끌림에 그녀의 탐험에 동참한다. 그렇게 찾아 나선 길에서 도착한 곳은 전기도 수도도 연결되지 않은 집 한 채였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흔적. 이십 몇 년 전에 멈춰있는 실내의 구조와 분위기. 한때 아이와 부모가 살았을 것 같은 집이었다. 사야카의 아버지는 왜 이런 곳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을까? 이곳에 드나들면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여기에서 그녀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을 수 있을까?

 

헤어진 후에야 연인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는다. 초등학교 입학 전의 기억이 없다는 그녀의 말을 처음 듣는 '나'는 만나는 동안 그녀와 무슨 관계를 쌓아가고 있었을까. 오랫동안 방치된 이 집을 탐험하면서, 둘이서 하룻밤을 새우면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지나간 세월에 얹어진, 차마 말하지 못한 서로의 진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한 목적으로 향한 발걸음이지만, 막상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그 기억과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타인의 삶의 흔적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의 교과서, 쓰다가 만 일기, 열리지 않는 작은 금고, 옷장에 걸린 오래된 양복, 뜨다가 만 뜨개실이 굴러다니는, 냉장고에는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들, 거실의 먼지 쌓인 피아노... 오래된 열쇠를 열고 들어간 집에서 마주한 작은 흔적들과 단서들은 생각이 날듯말듯하면서 독자의 애를 태운다. 단서가 하나씩 열리는 것 같은데 도무지 그녀와 연관 지어 생각할 수가 없다.

 

소설의 중반 이후로 분위기는 조금씩 전환된다. 그저 탐험하듯, 그려내듯 그 집의 구석구석을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보였던 두 사람의 시선이 하나씩 퍼즐을 맞춘다. 그 집에 살던 소년의 일기장에 등장하는 인물과 이야기들, 집안의 구석구석에 조금씩 흔적을 남겨놓은 단서들, 11시 10분에 맞춰진 집안의 시계들이 말하는 그날의 사건과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들이 서서히 맞춰진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사라진 유년 시절의 기억, 그것도 초등학교 입학 전의 몇 년이 얼마나 중요할까 싶었다. 그녀가 제안한 그 기억 찾기의 여정에 굳이 참여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오래된 그 집에서 찾아 헤매던 것들이 하나의 완전체가 되어 그려졌을 때의 충격은 예상보다 컸다. 설마 이런 일이 있었을까 싶은,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을까 하는 아쉬움, 어쩌면 그 시간에 공존하던 인물들의 선택이 최선이었을 거라는 이해가 따라왔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는 그녀의 아버지가 유품처럼 남겨놓은 지도와 열쇠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그렇게라도 그녀에게 진실을 전달해야만 하는 간절한 마음이었으리라. 평생 간직해야만 했던 비밀이었겠지만, 죽어서까지 가져갈 수는 없었을 거라는 위로를 건네게 된다.

 

상상하지 못했던 기억의 순간과 마주하는 일은 무섭고 놀라웠지만, 기어코 만나야만 하는 순간을 목격한 것 같다. 현재의 삶이 잘못되고 어긋났다고 믿는 그녀가 나아지기 위해 한번은 마주쳐야 할 진실의 장면이 아니었을까. 결핍을 인정하면서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몰라서, 머뭇거리면서 판단하지 못하는 문제를 앞에 두고 그녀가 나아갈 방향을 만들어주는 시간이었다. 주인공 '나'에게도 타인에게 꺼내놓지 못한 기억의 치유의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왔지만, 어쩌면 저마다 가진 상처는 비슷할지 모른다. 그때는 그때의 방식이 옳다고 믿었지만, 지금은 그 방법이 옳았다는 확신을 못하는 일들. 그렇다고 묻어두기만 하기에는 현재의 삶에 자꾸 주저하게 되는 어떤 감정이 생기기도 하는 순간들을 불러와서 토닥이는 느낌이다. 이렇게 한발 나아가는 기억 찾기라면, 누구라도 한번쯤 마주하고 싶은 시간일 것 같다.

 

빛이 바랜 회색집으로의 초대는 사건도 범인도 찾을 필요가 없는, 닫힌 시간 속의 이야기로 퍼즐을 완성해나간다. 한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꿰어 맞춰진다. 과거를 찾은 현재가 미래를 맞춰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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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방문자들 - 테마소설 페미니즘 다산책방 테마소설
장류진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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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소설은 이제 하나의 장르가 됐다. 그만큼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는 것이기도 하다. 『현남오빠에게』의 후속작으로 기획된 이 책이 조금 더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마도 시간은 흘렀지만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여성의 목소리, 오히려 더 크게 이야기해야만 하는 또 다른 이야기라 들려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루밍 성폭력, 교사의 성추행, 더 은밀하게 진행되는 성매매 현장들. 드러나는 사건들도 많고 그렇기에 갈수록 이런 이야기들이 덜 들려와야 맞는 것 같은데, 사실 매체에서 들려오는 이야기가 더 줄어들었다는 건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더 다양해졌다면 모를까. 너무 자주 들어서 익숙해졌다는 게 슬플 뿐이다.

 

「새벽의 방문자들」의 '나'는 포털 사이트에서 음란성 댓글 블라인드 처리 업무를 한다. 음란성 글로 홍보를 하거나 검색하는 이들의 지능은 점점 발달하고, 화자의 업무는 더 복잡하고 다양해진다. 화자는 애인과 헤어지고 낡은 오피스텔로 이사를 했는데, 어느 날 새벽부터 초인종 벨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수상한 남자들이 벨을 한참 누르다가 돌아간다. 왜 그들은 그 시간에 남의 집 벨을 누르는 걸까? 화자는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성매매 현장의 방식을 본다. 낯설지만 또 익숙한 그들의 모습에 공포를 인다. 현관문 렌즈에 눈을 들이대면 보이는 상대방의 눈썹이 마치 나를 공격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게, 그동안 혼자 사는 여성은 일상의 모든 순간에 얼마나 많은 공포를 안고 살아와야 했을까 생각해본다.

 

소설로 써졌지만 소설로 머물 수 없는 여섯 편의 이야기는 어느 순간 우리 삶에 깊이 박힌 참고서가 된다. 이런 일이 생겼을 때는 이렇게, 저런 일이 생겼을 때는 저렇게 해도 괜찮겠다는 매뉴얼처럼 들린다. 성을 사기 위해 새벽의 방문자들이 초인종을 누를 때 그들의 얼굴을 찍어 전시(?)해 놓은 주인공을 보면서, 혹시 언젠가 저 사진들이 무기가 되지 않을까 싶은 엉뚱한 상상도 했다. 더는 그들이 초인종을 누르지 않도록 현관 문 앞에 저 사진들을 붙여놓으면 어떨까? 혹시나 성을 사러 온 다른 이들이 초인종을 누르지도 못하고 식겁한 가슴을 부여잡고 돌아가지는 않을까? 그러다가도 이어지는 또 다른 생각들. 아니다. 이렇게 하면 나는 남의 얼굴을 마음대로 찍어서 붙여놨다는 이유로 법의 처벌을 받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한다. 아, 어떤 식으로든 새벽의 벨소리 공포에서 벗어나는 완전한 방법은 없는 거였구나. 주인공이 마지막에 선택한 것은 이사였다. 더는 그 공포에서 시달리지 않도록 그 공간을 벗어나는 일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는 게 절망적이다.

 

이어지는 이야기들도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베이비 그루피」의 화자는 예술고등학교에서 연기를 전공하는 학생이다. 라이브클럽에서 만난 P와 연애 아닌 연애를 하게 되면서 첫 경험을 한다. 마치 예술 세계를 공감하는 선배처럼, 자기 음악에서 뿜어대는 열기가 그녀를 향한 마음인 것처럼 포장되어 들려올 때 그녀에게 다가오는 그의 스킨십은 점점 진해진다. 어른의 연애는 이런 것일까 느끼던 사이 그녀는 그와의 관계를 명확하게 설정하지도 못한 채로 성경험을 한다. 시간이 흐르고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봐도 좋지 않다. 그건 사랑도 아니고 선배와의 관계도 아니다. 그루밍 성폭력의 은근한 전개가 바로 이런 게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예의 바른 악당」 역시 비슷한 느낌이다. 지나와 보라는 함께 일하고 함께 사는 사이다. 보라의 애인은 지나와 보내는 시간이 더 많다. 일을 하면서 여러 가지로 엮여 있다 보니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 보라를 애인으로 생각하고 존중했다면 그녀의 애인은 지나와 함께하는 시간을 만들지 말거나 줄여야 했다. 지나 역시 보라를 친구로 여기며 동거인으로 존중했다면 친구 역할만 충실해 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들이 추구했던 정치의 올바름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잊게 하는 거였나 보다.

 

「룰루와 랄라」는, 생계를 위해 취직한 곳에서 만난 나이 어린 남자 상사의 무례함은 주인공을 참지 못하게 한다. 더는 머물 곳이 아니라는 생각에 뛰쳐나온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서 만난 한 여인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누군가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어쩌면 일상의 한 부분처럼 누구나에게 새겨질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 타인의 아픔을 공감한다는 것은 어쩌면 작은 눈빛과 이야기 몇 마디에서 시작되는 연대일지도 모르겠다. 「유미의 기분」은 서로 다른 입장이지만 결국은 서로 닮은 입장이 되고야 마는, 여고생과 성소수자 선생의 이야기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남자 선생은 여자를 비하하는 말을 여고생 앞에서 한다. 그에 반기를 든 유미의 말에 당황하지만, 사실 선생은 자기의 말 어디가 잘못된 부분인지 잘 알지 못한다. 선생들의 성추행을 고발하기 시작한 유미의 시도는 결국 학교 안에서 해결하고 덮어야 할 문제로 치부된다.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날 수 있는 일, 하지만 아무도 모르게 덮이기 쉬운 일이 바로 학교 안에서의 일이 아닐까 싶다. 어른들의 방식으로, 각자가 취한 자리의 이기심으로 드러내지 않는 게 좋은 해결이 되어버린 문제들. 혹시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뀐다면 닫힌 교문이 활짝 열리고 모든 것이 드러날 수 있을까?

 

가장 화가 나고 황당했던 건 「누구세요?」다. 오랜 연애과정에서 남자와 여자는 데이트 통장을 만든다. 같이 돈을 넣고 그 돈으로 데이트비용을 결제한다. 같이 할 미래의 시작으로 데이트 통장이 나쁘지는 않다. 다만, 두 사람이 미래를 함께할 수 없을 때 발생하는 찜찜한 처리 과정이 걸린다. 상사의 성추행에 반기를 들고 회사를 그만두게 된 여자에게 남자는 화를 낸다. 먹고 사는 일인데 그 정도도 못 참느냐, 어디 가서 다시 취직을 하겠느냐, 직장이 장난인 줄 아느냐 등등. 여자는 자기의 고통을 남자가 이해해주기 바랐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느냐고, 견디느라 애썼다고... 하지만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이해하기는커녕 자기 인생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면서 화를 낸다. 그리고 두 사람은 헤어진다. 그때야 여자는 데이트 통장이 생각난다. 남자보다 더 많이 저축한 그녀다. 하지만 데이트 통장은 남자의 명의였고, 남자가 관리하면서 이용했다. 남은 돈의 자기 몫을 되돌려달라는 여자의 말에 남자는 오히려 위자료 운운한다. 하아. 전 남친에게 돈도 털리고 멘탈까지 털리는 경험, 누구 해 본 사람 있지?

 

장류진 작가의 작가 노트에 있던 마지막 문장이 강렬하다.

“응, 이거 네 얘기야.

이 글을 읽고 있는 너, 바로 당신” (43페이지)

언젠가, 누군가. 이 이야기를 읽고 혹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면, 이건 당신의 이야기다. 당신의 손짓 발짓 말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여섯 편의 이야기 속에서 마주한 감정은 '낯설지 않다'는 거다. 어디선가 들어봤고, 언젠가 겪어봤던 이야기들에, 주변에서 본 적 있는 이 이야기들의 가해자와 피해자들에, 언제나 불분명하게 정리되었던 결말들에 정신이 피폐해지는 순간들. 누가 책임져야 하지? 누가 사과를 해야 하는 거지? 또렷하게 구분할 수 없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립에 애매해져서 흐지부지 소멸되고야 말았던 일들. 물리적으로는 소멸되었을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죽을 때까지 머물러 있을 일들이 이 안에 있다. 그런 일들이 문장이 되어 우리 곁에 다시 머물고 되새김 된다. 굳이 잊을 필요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침묵할 수 없어서 꺼내놓아야 하는 순간이 맞이하는 일이다.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제기되는 문제들이 단순이 여성과 남성의 구분에 의해 생기는 건 아니라는 것을 이 소설집을 통해 듣는다. 연애나 결혼은 물론이고 또 다른 개념들이 삶의 과정을 채우면서 보이는 인간의 존중과 윤리 같은 것을 말하고 있음을 인지하게 된다. 침묵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삶의 기본이 되는 조건들을 지키기 위해, 이제는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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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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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었다. 짧은 단편들의 모음집이라고는 하나, 그 짧은 이야기 속에서 발견하는 건 생소한 느낌의 서술 정도였다. 다양한 직업 체험 같기도 하고, 그 다양함 속에서 존재하는 하나하나의 삶을 엿본 것 같기도 하다. 작가들이 좋아하는 작가라고 불리기도 하고, 사후 11년 만에 출간작을 읽게 되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은근한 매력이 풍긴다는 거. 누군가의 삶을 엿보면서 찾게 되는 타인의 은밀한 내면을 보는 기분이 든다는 거.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상의 한 부분을 이렇게 듣게 되는 게 낯설지만 좋았다는 거.

 

표제작 「청소부 매뉴얼」은 담백한 화법에 청소부로서의 일상이 드러난다. 독백처럼 그녀의 하루를 읊조리는데, 주로 자기가 청소하는 집과 집주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면서도 청소하는 집의 구조와 장식품으로 그들의 삶의 보기도 한다. 구속된 것 같기도 하고 집주인들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이게 또 은근히 자유롭다. 청소부들은 사실 물건을 훔치지만, 집주인은 그걸 염려할 것 없다고 말한다. 청소부를 힘들게 하는 건 그들의 과잉 반응이라고, 그녀가 실제로 훔치는 건 수면제뿐이라고. 이처럼 그녀는 직업에 관한 이미지와 고정관념을 한 번에 바꾸기도 한다. 특히 문장의 중간에 등장하는 '청소부 매뉴얼'은 생소한 직업군의 규칙 같이 들려서 특이하다. 마님이 주는 건 뭐든지 받고 나중에 버리면 되고, 원칙적으로 친구들 집 일은 절대 하지 말고, 취학 전 어린이가 있는 집은 절대 사양하는 등, 그동안의 경험으로 생긴 나름 규칙을 지키려고 한다. 덜 힘들고 더 인정받을 수 있는 방식의 청소부 매뉴얼을 머릿속에 작성한다.

 

이 책을 어느 정도 읽다가 조금 어렵고 답답한 느낌에 뒷부분의 작가 소개를 읽었는데, 이 작품집 속에 그녀의 전 생애가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는 미국의 서부 탄광촌이나 칠레 등지에서 10대를 보내기도 했다. 삼십 대 초반에 이미 이혼을 세 번이나 했다. 네 명의 아들을 낳았고 알코올 중독자로 살기도 했다. 혼자서 네 명의 아이를 키워야 했던 저자는 고등학교 교사, 전화 교환수, 병동 사무원, 청소부, 내과 간호보조 등의 일을 하면서 틈틈이 글을 썼다. 여기까지 듣고 보니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다양한 직업 세계가 배경이 되는 이야기들이 사실적으로 들린다. 알코올 중독을 치료하려고 했던 시기의 「그녀의 첫 중독치료」, 응급실에서 일하는 게 좋다던 「나의 기수」, 병원 의사 선생을 짝사랑하는 동료 이야기를 적은 「관점」도 그녀가 걸어온 생의 한때를 심심하지 않은 일상의 이야기로 들려준다.

 

사실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여러 편의 이야기는 부유함과는 거리가 있다. 소시민의 삶을 차곡차곡 보고 기록한 것처럼 들릴 때가 많다. 인생에 모자란 것이 많아 보여서 씁쓸하면서도 그런 어두운 시간에 침 한번 뱉고 돌아서고 싶은 단호함도 느껴진다. 가난과 알코올 중독을 직접 겪으면서 쌓아온 삶의 단면들, 병원에서 일하면서 마주친 사람들의 삶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생생함도 있다. 특히 응급실에서 마주한 풍경은 세상을 대신 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 자살을 기도하여 죽었거나 미수에 그친 이들, 혈관질환으로 실려 온 사람들, 물에 빠진 아이들, 거리를 헤매는 사람들의 죽음, 술에 저항하지 못하고 빠져든 이들. 당사자가 아니라 지켜보는 사람이었지만, 누구보다 더 사실적으로 그들의 삶을 그리지 않았나 싶다. 마치 그 시간을 같이 경험한 것처럼 말이다.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이 저자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소설이지만 소설 같지 않고, 마치 누군가와 상담하다가 꺼내놓은 이야기처럼 에세이 느낌도 있다. 그러면서 소설의 경계를 넘어서는 듯한 사실적인 분위기는 저자와 이 이야기가 더욱 가깝게 써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번쯤은 작가가 자기 이야기를 쓰는 과정을 통해야 한다는 걸 여기서도 확인하는 순간이다. 저자의 인생이 쉽고 간단하게 흐르지 않은 것을 들어보면, 소설들에 그대로 녹아 있다는 게 그대로 풍긴다. 보통 사람들의 삶이지만, 저자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쓰지 않고서는 그 시간을 건너올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힘든 시간을 걸어온 것으로 끝날지 모르지만, 독자에게는 그 시간의 경험과 생각으로 채워진 이 글을 읽는 순간을 만나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간결하고 담백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의 소설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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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나무를 하던 가난한 나무꾼은 풀숲에서 뛰쳐나온 사슴이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얼른 나뭇가지 더미 속에 숨겨주었다. 사냥꾼이 와서 사슴의 행방을 물었지만 모른다고 대답했다. 나무꾼 덕분에 목숨을 구한 사슴은 목숨을 살려준 은혜를 보답하겠다면서 나무꾼에게 소원을 물었다. 나무꾼은 별다른 고민도 없이 사슴에게 평소 바라던 소원을 말했다. "고운 색시를 얻어 장가를 갔으면 좋겠어!" 그에 사슴은 오늘 선녀들이 목욕하러 내려왔을 것이니, 나무꾼에게 그중 한 선녀의 옷을 훔치라고 했다. 날개옷을 잃어버린 선녀는 다시 하늘로 올라갈 수 없으니 그 선녀를 색시 삼으라고, 아이를 셋 낳을 때까지는 절대 선녀 옷을 내어주면 안 된다는 경고도 함께. 나무꾼은 사슴의 말대로 선녀들이 목욕한다는 폭포로 향했고, 거기서 선녀 옷을 한 벌 훔쳤다. 이제 선녀 옷의 주인만 찾으면 나무꾼은 예쁜 색시도 얻고 재밌게 살겠지...

 

...라고 우리가 알던 동화는 잘못됐다. 선녀들의 목욕을 훔쳐보고 옷까지 훔친 나무꾼은 새신랑이 아니라 죄인이 된 거다. 선녀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잃어버린 날개옷의 주인인 서령선녀는 나무꾼을 붙잡아서 옥반지를 낀 주먹으로 나무꾼의 얼굴을 내리쳤다. 훔친 옷을 돌려달라고 하는데도 나무꾼은 버텼다. "내가 훔쳤다는 증거가 있어?!" 이놈이 강펀치 한 방을 맞고도 정신을 못 차렸구먼. 선녀와 나무꾼은 누가 빨리 나무를 베는지 내기를 하기로 한다. 나무꾼은 설마 선녀가 나보다 나무를 잘 베겠나 싶은 마음에 기세등등했지만, 선녀의 나무 베기 솜씨가 장난 아니었다는 건 안 비밀. 선녀는 나무꾼을 이기고 선녀 옷을 되찾음과 동시에, 이 불량한 계획을 꾸민 나무꾼과 사슴을 가만두지 않았다. 광장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 두 놈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낱낱이 털어놓게 하고, 나무꾼에게 천 일간 투명 옷을 입을 것으로 벌을 주었다. 보이지 않는 옷이라, 남들 눈에는 벌거벗은 것처럼 보이는 거야. 깔깔깔~ 그리고 사슴에게는 나무꾼과 작당한 죄로 천 일간 입이 묶인 채로 생활할 것을 명했다. 암만, 이래야지. 이렇게 벌을 주어야 당연한 것을 우리가 그동안 만난 「선녀와 나무꾼」 동화에서는 하늘로 올라간 선녀를 원망하는 마음으로 마무리하는 내용이었지, 아마?

 

 

구오 작가의 『선녀는 참지 않았다』는 이미 제목에서부터 이 책이 기존의 동화와 얼마나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짐작하게 한다. 우리가 이미 아는 유명한 전래동화 10편을 가져와서, 원작과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몰라서도 몰랐지만, 알고서도 말하지 못하고 감당해내야 했던 여자의 모습을 다른 시각으로 살펴본다. 나무꾼에게 선녀 옷을 훔치라고 알려준 사슴은 은혜를 갚은 게 아니라 계략을 꾸민 거고, 선녀 옷을 훔쳐서 아내로 맞은 나무꾼은 착하게 살아서 복을 받은 게 아니라 범죄자일 뿐이다. 비슷한 이야기로는 「서동과 선화공주」가 있다. 선화공주에 관한 헛소문을 퍼트려 선화공주가 궁에서 쫓겨나게 한 서동은 허위사실 유포로 처벌받아야 했다. 아버지에게 쫓겨난 선화공주가 울면서 신세 한탄을 할 때 ‘짠’하고 나타나서 자기 나라로 데리고 가 아내로 삼는다는 원래의 이야기를 확 뒤집었다. 선화공주는 아버지에게 따진다. 왜 자식의 말을 믿지 않고 저잣거리에 떠도는 헛소문을 믿는 것이냐고. 선화공주는 범인 탐색에 나서고, 마를 팔던 서동을 붙잡는다. 그런데 서동의 핑계가 참 어이가 없다. "저는 그저 공주마마가 너무 아름다우셔서 흠모하는 마음에... 흑흑. 그저 실수했을 뿐이옵니다." 뭣이라? 실수? 그 헛소문에 한 사람 인생이 왔다 갔다 하는데 실수우우우우? 선화공주는 서동의 이마에 그의 죄를 잊지 못하게 하는 주홍 글씨를 새긴다. 사람들은 그의 만행을 알게 되고 선화공주를 둘러싼 오해는 풀린다. 세 자매의 지혜로 범인을 찾아내고, 신라의 세 자매는 현명하게 나라를 이끄는 존재가 된다.

 

 

어렸을 때는 몰랐다. 전래동화의 그런 전개가 당연한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변해야 한다. 누군가에 기대어 인생을 얹어가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새로운 자각이 필요하다. 새로운 시각은 당연히 필요하고, 그 시각에 맞는 동화의 재해석도 이어져야 한다. 아이가 글자를 알고 읽어가기 시작하는 동화 한 편, 두 편. 점점 더 많은 이야기에 빠져 지내게 될 텐데, 처음 잘못 접한 이야기가 그 시작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왕자가 와서 키스해줄 때까지 잠에 빠져 있고, 날개옷 하나 빼앗겼다고 그 남자와 결혼을 하고, 헛소문 하나에 계획에 없던 쫓겨남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책의 저자 ‘구오(俱悟)’는 대학생이 주축이 되어 ‘함께 깨닫다’라는 이름 아래 2015년부터 함께 읽고, 쓰고, 생각을 나누는 독서 토론 모임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작가의 필명쯤으로 생각했는데,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의 생각과 쓰기가 함께한 글이라고 하니 더 의미 있는 이야기로 다가온다. 10편의 동화는 앞서 언급된 선녀와 나무꾼, 선화공주와 서동, 처용, 우렁각시, 장화홍련전, 혹부리 영감, 콩쥐팥쥐전, 박씨전, 반쪽이, 바리데기다. 각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게 각색되었는데,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을 흥미롭게 깨트려놓는다.

 

「우렁각시」에서는 씩씩하게 농사일을 하는 처녀 혜석이 주인공이다. 열심히 일하는 그녀에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집안일 해주고 빨래 해주고 맛있는 식사도 챙겨줄 총각을 만나고 싶은 거였다. 그래서 일하면서 습관처럼 중얼거리곤 했다. “나랑 살면서, 맛있는 밥과 반찬을 해줄 그런 총각 어디 없나?”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저기 멀리 바닷속에 이런 청년이 딱 준비되어 있었다. 용왕의 아들인 우렁이 총각은 매일 깔끔하게 정리하고 음식을 만드는 게 너무 좋았는데, 아버지인 용왕은 그런 아들을 항상 혼냈어. “지금 사내가 무얼 하는 것이냐!” 이미 익숙해진 규범은 우렁이 총각이 집안일을 하고 음식을 만드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렁이 총각은 저기 땅 위에서 일을 하는 처녀가 혼자 중얼거리는 걸 들었던 거다. 자기에게 딱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농사를 짓는 혜석에게 다가간 거지.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알콩달콩 자기 스타일에 맞는 일을 해가면서 행복하게 살았어.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런 둘의 생활을 좋게 보지 않았다. 남사스럽다는 둥, 혜석이 요물이라는 둥, 우렁이 총각이 미련하고 둔해서 혜석에게 홀렸다는 둥. 둘은 마을 사람들의 편견을 깨주기 위해 초대를 한다. 우렁이 총각은 맛있게 음식을 하고, 그 음식 속에 ‘고정관념에서 해방되어 본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게끔 하는 묘약’을 넣는다. 그날 이후로 우렁이 총각의 음식을 먹은 사람들은 변했다. 여자들은 집안에만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고, 남자들은 농사 외에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하며 미래를 생각했다.

 

 

나쁜 혹부리 영감에게는 혹을 하나 더 붙여서 주변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할 때마다 아프게 만들었고, 장화홍련의 새엄마에게는 세상 모든 새엄마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했다. 언젠가부터 새엄마는 계모라고 불리면서, 무조건 아이를 학대하고 괴롭히는 못된 엄마로 만들었을까? 계모는 모두 나쁘고 못됐다는 고정관념부터 새로 써야 한다. 장화홍련의 새엄마는 오히려 위기에 빠진 장화와 홍련을 구해주는 현명한 여자로 재등장했다. 홍련은 과거에 급제하여 고을 수령이 되고, 누명을 쓴 장화의 억울함을 풀어준다. 장화와 홍련에게 다가가 술수를 부리고 약한 여인으로 대하면서 수작을 걸어보려고 했던 이들을 벌준다. 콩쥐팥쥐의 성별을 여자에서 남자로 바꿔놓는다. 또 박씨전에서는 결말을 바꾸어 허물을 벗고 외모가 달라지는 일을 만들지 않는다. 박색이었던 박 씨가 나중에 허물을 벗는다고 하여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 될 거로 생각하기 쉬운데, 박 씨의 어질고 현명한 모습이 외모가 달라졌다고 하여 인정받는 게 좀 억울하지 않은가? 외모가 달라도 내면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박 씨는 집안사람들의 구박에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할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여인이었다. 현명함과 지혜로움을 장착한 한 명의 인간이었는데, 그 인간다움을 존중받지 못하다가 외모의 변화로 인정받게 된다는 설정 자체가 외모지상주의에 힘을 실어주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책에서 재해석된 박 씨는 허물을 벗었어도 외모가 달라지지 않았고, 덕은 생김새로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전쟁으로 붙잡혀가서 되돌아온 여인들은 사람들이 욕할 때, 그녀들은 그저 ‘환향 여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 여인들과 함께 상처 입고 아픈 기억을 지우는 데 애쓰면서 악몽을 벗어내 새로운 삶을 꾸려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으로 거듭난다.

 

 

딸이라는 이유로 버려진 바리데기는 어느 노부부에게 거두어져 자랐고, 상인으로 성공한 후에는 학당을 세워 갈 곳 없이 버려진 아이들을 불러 모아 먹여주고 재워주고 가르쳤다. 사람들은 그런 아이들(특히 여자아이들)을 거둬서 무엇 하느냐고 말했지만, 바리데기는 상관하지 않았다. 딸이라는 이유로 버려진 그녀가 가슴에 한이 된 일이기도 했을 테지. 처음 바리데기는 부모에게 왜 버려졌는지 몰랐다. 그저 형편이 좀 어려웠나보다 싶은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날 도성에서 신하가 찾아와 바리데기를 붙잡았을 때 모든 상황을 알게 되었다. 딸이라고 필요 없으니 버려놓더니, 이제는 왕과 왕비가 심각한 병에 걸렸다고, 그 병을 고칠 사람이 바리데기밖에 없다면서 찾아온 게 화가 났다. 저승의 서천서역국에서 나는 약수를 먹어야만 병이 낫는다고, 그곳에 갈 수 있는 사람은 하늘이 점지한 바리데기뿐이라나 뭐라나. 딸이라서 버리고, 딸이라서 왕위를 이을 수 없고, 그래서 내쳐지는 운명. 그런데 인제 와서 부모의 병을 고치러 저승의 서천서역국에 다녀오라고? 안 한다. 못 한다. 그래도 꼭 해야 한다면 공짜로는 못하겠다. 뭔가 내놓아라. 어찌어찌 서천서역국까지 다녀온 바리데기는 스스로 왕이 되고, 성차별 없이 공부하고 생활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든다. 여인이어서 할 수 없고 거부당하는 세상은 이제 상대하지 않으련다.

 

왜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하고 바꾸려고 하지 않았을까? 원님이 꽃신 한 짝을 들고 콩쥐를 찾아가는 일, 서동이 퍼트린 헛소문에 진상을 밝히지 못했던 일, 나무꾼의 절도에 벌하려고 하지 않은 일, 아내가 좋아하는 농사를 하고 남편이 좋아하는 집안일을 할 수도 있는 거, 반쪽이에게 업혀 가는 게 운명이라고 생각하기만 했던 것 등등. 아니라고, 잘못된 거로 생각하면서도 꺼내놓지 못한 마음속 말들이 왜 가슴 속에서 머물기만 해야 했을까. 학생들의 손끝에서 재탄생한 이 페미니즘 전래동화는 말 그대로, 살짝 뒤집으니 이야기의 판이 뒤집어졌다. 여럿이 모여 함께 읽고 토의하고 여성적 시각이 담긴 이야기로 재구성하다 보니, 뭔가 더 적극적인 게 되었다. 오랜 세월 이어져 왔기에 당연하게 여긴 차별과 편견이, 더는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런 의식을 변화하는 게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게 강하게 다가온다. 익숙하게 만나온 전래동화에서 뿌리박힌 가부장적 사회와 그 사회에서 재생산되는 성차별을 없애는데 이 책이 굉장한 힘이 될 것 같다.

 

그냥 재밌기만 한 이야기가 아니라, 재미있고 통쾌해서 시원하다. 우리가 그동안 익숙하게 바라봤던 많은 것이 더는 익숙하지 않도록, 그 모든 것을 더 깊고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시선을 갖게 한다. 어린 시절 읽었던 전래동화를 떠올릴 때마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적이 있었다면, 왜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흘러가야만 했는지 의문이 든 적이 있었다면, 이야기의 흐름과 다른 생각이 마구 비집고 나온 적이 있었다면, 더 의미 있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오랜 시간 불합리하고 차별에 물든 역사가 동화 속에서 더는 머물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읽기 좋은 글이다. 이렇게 바뀐 이야기를 듣고 자라는 아이는 분명, 우리가 자라면서 배운 것과 다른 의식을 심을 것이다. 불합리하고 억울한 여성의 목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도록, 자기 삶의 주체가 되는 존재로 성장하기를, 집안일과 희생을 강요당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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