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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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었다. 짧은 단편들의 모음집이라고는 하나, 그 짧은 이야기 속에서 발견하는 건 생소한 느낌의 서술 정도였다. 다양한 직업 체험 같기도 하고, 그 다양함 속에서 존재하는 하나하나의 삶을 엿본 것 같기도 하다. 작가들이 좋아하는 작가라고 불리기도 하고, 사후 11년 만에 출간작을 읽게 되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은근한 매력이 풍긴다는 거. 누군가의 삶을 엿보면서 찾게 되는 타인의 은밀한 내면을 보는 기분이 든다는 거.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상의 한 부분을 이렇게 듣게 되는 게 낯설지만 좋았다는 거.

 

표제작 「청소부 매뉴얼」은 담백한 화법에 청소부로서의 일상이 드러난다. 독백처럼 그녀의 하루를 읊조리는데, 주로 자기가 청소하는 집과 집주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면서도 청소하는 집의 구조와 장식품으로 그들의 삶의 보기도 한다. 구속된 것 같기도 하고 집주인들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이게 또 은근히 자유롭다. 청소부들은 사실 물건을 훔치지만, 집주인은 그걸 염려할 것 없다고 말한다. 청소부를 힘들게 하는 건 그들의 과잉 반응이라고, 그녀가 실제로 훔치는 건 수면제뿐이라고. 이처럼 그녀는 직업에 관한 이미지와 고정관념을 한 번에 바꾸기도 한다. 특히 문장의 중간에 등장하는 '청소부 매뉴얼'은 생소한 직업군의 규칙 같이 들려서 특이하다. 마님이 주는 건 뭐든지 받고 나중에 버리면 되고, 원칙적으로 친구들 집 일은 절대 하지 말고, 취학 전 어린이가 있는 집은 절대 사양하는 등, 그동안의 경험으로 생긴 나름 규칙을 지키려고 한다. 덜 힘들고 더 인정받을 수 있는 방식의 청소부 매뉴얼을 머릿속에 작성한다.

 

이 책을 어느 정도 읽다가 조금 어렵고 답답한 느낌에 뒷부분의 작가 소개를 읽었는데, 이 작품집 속에 그녀의 전 생애가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는 미국의 서부 탄광촌이나 칠레 등지에서 10대를 보내기도 했다. 삼십 대 초반에 이미 이혼을 세 번이나 했다. 네 명의 아들을 낳았고 알코올 중독자로 살기도 했다. 혼자서 네 명의 아이를 키워야 했던 저자는 고등학교 교사, 전화 교환수, 병동 사무원, 청소부, 내과 간호보조 등의 일을 하면서 틈틈이 글을 썼다. 여기까지 듣고 보니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다양한 직업 세계가 배경이 되는 이야기들이 사실적으로 들린다. 알코올 중독을 치료하려고 했던 시기의 「그녀의 첫 중독치료」, 응급실에서 일하는 게 좋다던 「나의 기수」, 병원 의사 선생을 짝사랑하는 동료 이야기를 적은 「관점」도 그녀가 걸어온 생의 한때를 심심하지 않은 일상의 이야기로 들려준다.

 

사실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여러 편의 이야기는 부유함과는 거리가 있다. 소시민의 삶을 차곡차곡 보고 기록한 것처럼 들릴 때가 많다. 인생에 모자란 것이 많아 보여서 씁쓸하면서도 그런 어두운 시간에 침 한번 뱉고 돌아서고 싶은 단호함도 느껴진다. 가난과 알코올 중독을 직접 겪으면서 쌓아온 삶의 단면들, 병원에서 일하면서 마주친 사람들의 삶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생생함도 있다. 특히 응급실에서 마주한 풍경은 세상을 대신 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 자살을 기도하여 죽었거나 미수에 그친 이들, 혈관질환으로 실려 온 사람들, 물에 빠진 아이들, 거리를 헤매는 사람들의 죽음, 술에 저항하지 못하고 빠져든 이들. 당사자가 아니라 지켜보는 사람이었지만, 누구보다 더 사실적으로 그들의 삶을 그리지 않았나 싶다. 마치 그 시간을 같이 경험한 것처럼 말이다.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이 저자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소설이지만 소설 같지 않고, 마치 누군가와 상담하다가 꺼내놓은 이야기처럼 에세이 느낌도 있다. 그러면서 소설의 경계를 넘어서는 듯한 사실적인 분위기는 저자와 이 이야기가 더욱 가깝게 써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번쯤은 작가가 자기 이야기를 쓰는 과정을 통해야 한다는 걸 여기서도 확인하는 순간이다. 저자의 인생이 쉽고 간단하게 흐르지 않은 것을 들어보면, 소설들에 그대로 녹아 있다는 게 그대로 풍긴다. 보통 사람들의 삶이지만, 저자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쓰지 않고서는 그 시간을 건너올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힘든 시간을 걸어온 것으로 끝날지 모르지만, 독자에게는 그 시간의 경험과 생각으로 채워진 이 글을 읽는 순간을 만나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간결하고 담백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의 소설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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