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내가 죽은 집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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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어릴 적의 몇 년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삶이 불편할 것 같지는 않다. 일상이 힘들 것 같지도 않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싶은 기억의 단편이 순간순간 지나가더라도, 그냥 그렇겠거니 할 것 같다. 지금도 흔하게 내 머릿속을 점령하는 건망증 정도로 여기게 될 테니까.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보니, 누군가에게는 그 잃어버린 기억이 언젠가 한번은 정리해야 할 일생의 한 부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앞으로의 삶을 온전히 이어갈 수 없을 것처럼 간절한 뭔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은가. 남들이 볼 때는 별거 아닌 것 같아도, 뭐 그런 것을 그렇게 신경을 쓰느냐고 핀잔을 주더라도, 나는 꼭 그걸 확인해야만 속이 시원해질 것 같은 거. 어쩌면 나에게도 그런 순간 한번쯤 오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화자인 '나'에게 헤어진 여자 친구 사야카의 전화가 걸려온다. 그녀와 헤어진 지 7년이나 되었고, 그녀는 이미 아이와 남편이 있는 유부녀다. 그러니 갑작스러운 그녀의 연락에 놀랄 수밖에. '혹시 내가 그리워진 건 아닐까' 하는 설렘도 잠깐 떠올리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녀의 용건은 의외였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낡은 지도 한 장과 열쇠 하나로 어떤 곳을 같이 찾아가주었으면 한다고. 그 지도와 열쇠에 자기의 잃어버린 기억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면서.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옛 여자 친구와 이 여정을 함께해도 되는지 고민하면서 거절하고 싶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이끌림에 그녀의 탐험에 동참한다. 그렇게 찾아 나선 길에서 도착한 곳은 전기도 수도도 연결되지 않은 집 한 채였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흔적. 이십 몇 년 전에 멈춰있는 실내의 구조와 분위기. 한때 아이와 부모가 살았을 것 같은 집이었다. 사야카의 아버지는 왜 이런 곳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을까? 이곳에 드나들면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여기에서 그녀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을 수 있을까?

 

헤어진 후에야 연인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는다. 초등학교 입학 전의 기억이 없다는 그녀의 말을 처음 듣는 '나'는 만나는 동안 그녀와 무슨 관계를 쌓아가고 있었을까. 오랫동안 방치된 이 집을 탐험하면서, 둘이서 하룻밤을 새우면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지나간 세월에 얹어진, 차마 말하지 못한 서로의 진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한 목적으로 향한 발걸음이지만, 막상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그 기억과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타인의 삶의 흔적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의 교과서, 쓰다가 만 일기, 열리지 않는 작은 금고, 옷장에 걸린 오래된 양복, 뜨다가 만 뜨개실이 굴러다니는, 냉장고에는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들, 거실의 먼지 쌓인 피아노... 오래된 열쇠를 열고 들어간 집에서 마주한 작은 흔적들과 단서들은 생각이 날듯말듯하면서 독자의 애를 태운다. 단서가 하나씩 열리는 것 같은데 도무지 그녀와 연관 지어 생각할 수가 없다.

 

소설의 중반 이후로 분위기는 조금씩 전환된다. 그저 탐험하듯, 그려내듯 그 집의 구석구석을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보였던 두 사람의 시선이 하나씩 퍼즐을 맞춘다. 그 집에 살던 소년의 일기장에 등장하는 인물과 이야기들, 집안의 구석구석에 조금씩 흔적을 남겨놓은 단서들, 11시 10분에 맞춰진 집안의 시계들이 말하는 그날의 사건과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들이 서서히 맞춰진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사라진 유년 시절의 기억, 그것도 초등학교 입학 전의 몇 년이 얼마나 중요할까 싶었다. 그녀가 제안한 그 기억 찾기의 여정에 굳이 참여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오래된 그 집에서 찾아 헤매던 것들이 하나의 완전체가 되어 그려졌을 때의 충격은 예상보다 컸다. 설마 이런 일이 있었을까 싶은,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을까 하는 아쉬움, 어쩌면 그 시간에 공존하던 인물들의 선택이 최선이었을 거라는 이해가 따라왔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는 그녀의 아버지가 유품처럼 남겨놓은 지도와 열쇠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그렇게라도 그녀에게 진실을 전달해야만 하는 간절한 마음이었으리라. 평생 간직해야만 했던 비밀이었겠지만, 죽어서까지 가져갈 수는 없었을 거라는 위로를 건네게 된다.

 

상상하지 못했던 기억의 순간과 마주하는 일은 무섭고 놀라웠지만, 기어코 만나야만 하는 순간을 목격한 것 같다. 현재의 삶이 잘못되고 어긋났다고 믿는 그녀가 나아지기 위해 한번은 마주쳐야 할 진실의 장면이 아니었을까. 결핍을 인정하면서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몰라서, 머뭇거리면서 판단하지 못하는 문제를 앞에 두고 그녀가 나아갈 방향을 만들어주는 시간이었다. 주인공 '나'에게도 타인에게 꺼내놓지 못한 기억의 치유의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왔지만, 어쩌면 저마다 가진 상처는 비슷할지 모른다. 그때는 그때의 방식이 옳다고 믿었지만, 지금은 그 방법이 옳았다는 확신을 못하는 일들. 그렇다고 묻어두기만 하기에는 현재의 삶에 자꾸 주저하게 되는 어떤 감정이 생기기도 하는 순간들을 불러와서 토닥이는 느낌이다. 이렇게 한발 나아가는 기억 찾기라면, 누구라도 한번쯤 마주하고 싶은 시간일 것 같다.

 

빛이 바랜 회색집으로의 초대는 사건도 범인도 찾을 필요가 없는, 닫힌 시간 속의 이야기로 퍼즐을 완성해나간다. 한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꿰어 맞춰진다. 과거를 찾은 현재가 미래를 맞춰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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