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수... 난리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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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해 기억해 모중석 스릴러 클럽 48
섀넌 커크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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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괴나 납치가 소재인 기존의 추리소설을 떠올려보면, 보통은 납치된 아이를 찾는 형사나 부모의 시선을 중심으로 써진 소설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의 몸부림, 절대 물러설 수 없는 모성의 최대치, 유괴 사건 해결을 위해 등장한 형사나 전문가들. 이들이 나서면 곧 범인을 추적하게 되고, 중간에 유괴 이유가 서서히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결말에 이르곤 했다. 섀넌 커크의 소설 『복수해 기억해』는 열여섯 소녀 리사가 납치되면서 시작되는데, 납치 이후의 전개가 제법 특이하다. 납치된 소녀의 두려움이나 약함이 아니라, 납치된 소녀의 복수극이라는 게 매력적인 소설이다.

 

리사 일랜드는 열여섯 살이다. 그리고 임신했다. 유명한 변호사인 엄마와 과학자인 아빠는 리사의 임신을 나중에 알았다.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부모님과 함께 병원에 다녀오던 날, 리사는 병원의 데스크에 있던 직원의 눈빛과 행동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얼마 후 리사는 배가 부른 상태로 납치된다. 누가 납치했는지, 왜 그랬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로 두 손과 발이 묶인 채로, 눈이 가려진 채로 차에 실렸다. 어딘가에 있는 건물에 도착하고, 어떤 방에 감금되었다. 방문은 밖에서 잠겼고, 리사가 간수라고 불리는 이가 하루 세 번 식사를 가져올 때만 잠깐 문이 열렸다. 리사는 간수가 올 때만 그 문을 열고 나가 화장실을 사용했고 물을 마셨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의 외출(?)인 셈이다. 그 시간 외에는 방에 갇혀 하루를 보냈다. 임신 때문에 무거워진 몸으로 감히 탈출을 시도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버텼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냥 평범한 납치로 보인다. 알 수 없는 공간에 감금하고, 뭔가 때를 기다리는 느낌. 하지만 소설은 처음 전개부터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더니, 점점 리사의 시선과 의도로 흘러간다. 천재적인 두뇌의 소녀 리사.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유명했다. 머릿속 감정의 스위치를 껐다가 켰다가, 그녀의 의도대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 사랑이나 연민의 감정을 차단하고 싶으면 그렇게 했고, 공감과 이해를 불러오고 싶으면 그렇게 했다. 언제 어디서든 그녀는 자기의 감정 조절을 완벽하게 해냈고, 모든 계산이 정확하고 이성적이다. 납치된 후에도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공포에 떨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기 위치를 가늠하면서 감금된 곳의 분위기를 파악했다. 계단을 세 줄 올라왔으니 3층일 것이고, 도로에서 건물까지의 거리를 기억했다. 간수가 식사를 가져오는 시간과 발소리, 간수가 방으로 들어와 서 있는 위치와 머무는 시간까지 정확하게 알아냈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리사는 모든 것을 계산하고 계획했으며, 그녀가 그 방에서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번호를 부여하고 그녀의 탈출과 복수 계획을 완벽하게 준비했다.

 

감금 생활을 하면서 나는 한 가지 재능을 갈고 닦았다. 그 재능이 신의 섭리로 주어진 것인지, 엄마의 강철 같은 세계 안에서 살면서 체득한 것인지, 아빠의 호신술 교육으로 얻은 것인지, 아니면 내 신체 조건에서 비롯된 본능인지는 몰라도, 그건 전쟁터에서 위용을 떨치는 장군들의 자질과 유사했다. 쉽게 흔들리지 않고, 만족하지 않고, 계산에 능하고, 복수심을 품고, 차분하게 행동할 줄 아는 재능. (19페이지)

 

소설은 납치된 아이를 찾기 위해 투입된 FBI 요원 리우와 납치된 소녀 리사의 시선이 교차로 진행된다. 리사가 탈출보다 복수를 위해 세우는 계획의 놀라움과 리우의 추적과정이 계속되면서, 어느 순간 이 소설의 결말에 다다르면 어떻게 될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특이하지 않은가. 납치된 소녀가 목숨의 위협을 느껴도 모자랄 판에, 이대로는 억울해서 안 되겠다, 반드시 복수하고 탈출하겠다는 계획에 전념하는 모습. 상상이 되는가? 아마 리사여서 가능했을 것이다. 간혹 소시오패스라고 불릴 정도로 감정 조절에 탁월한 재능을 지닌 아이, 그러니 적재적소에 자기가 가진 재능을 발휘하면서 아버지에게 배운 과학의 응용은 이 납치의 탈출극에 특화된 주인공이 아니었을까 싶다. 한마디로, 이 납치범들은 똥 밟았다는 거다. 건드려서는 안 되는 아이를 건드려놓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납치된 인질의 끝내주는 복수극에 소설은 시종일관 활기차다. 게다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소녀의 앞뒤 볼 것 없는 복수를 보다가도, 점점 만삭이 되어가는 몸을 보면서 이 소녀가 엄마가 되어가는 감정을 엿본다. 그러니까 그전까지는 언제나 자기 의도대로 감정을 조절하며 자기 일상을 지휘하던 소녀가 배 속의 아이가 생기자 그녀의 감정 조절이 가끔 실패하거나 의도하지 않은 감정에 당황하게 된다. '이게 뭐지?' 싶은 의문. 하지만 그런 감동도 잠시. 리사는 독자에게 처음부터 보여주었던 그 냉정함과 완벽함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끌고 간다. 그리고 마침내 범인들에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를 선사한다. 그 복수극에 조금이나마 지분을 보탠 FBI 수사관 리우와의 조합은 어쩌면 이 소설의 후속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남긴다. 리사와 리우 콤비가 마지막에 납치범에게 보여주었던 모습은 통쾌하다 못해 복수의 정석을 세운 듯하다. 복수는 이렇게 하는 것이야. 나쁜 놈들을 죽이는 게 끝이 아니야. 그들이 죽는 게 벌이 아니야. 끔찍하고 끈질기게 괴롭혀 주는 거야.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야.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되나?

 

리사의 감정 스위치 조절은 특이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리사의 그런 특징은 그녀의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전자와 후천적인 교육과 노력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싶다. 맡은 변호는 거의 다 이기는 승률 좋은 변호사인 엄마와 과학적인 두뇌를 계속 발전시키는 아빠의 존재가 그녀의 성장 과정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타고난 냉정함이 바탕이 되고, 거기에 변호사 엄마가 가진 이성과 단호함, 과학의 원리를 이용한 온갖 도구의 활용이 가능하게 했던 아빠. 이 정도면 완벽한 가족 아니던가.

 

나는 분노를 삼키며 하릴없이 배를 문질렀다. 그러다 문득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내 아기에게 위험이 닥쳐올 때마다 내 안에서 공포를 담당하는 스위치가 저절로 켜진다는 것. 임신하기 전에는 이런 문제로 애를 먹은 적이 없었다. 나는 계속 걸음을 옮기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나 자신이 더욱 선명하게 인식되었고, 반갑지 않은, 더 나아가 쓸모없는 감정인 공포를 억누르는 게 한결 쉽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흥미롭기도 했다. 심리학적으로도, 의학적으로도, 심지어는 철학적으로도 생각해볼 만한 문제였다. 아기가 느끼는 공포가 나에게 전이되는 건 아닐까. 나는 아기에게 생명을 주고 있지만, 아기는 나에게 과연 생명을 주고 있을까. (127~128페이지)

 

감정조절에 능숙한 소녀가 임신한 채로 납치되고, 알고 보니 납치범들은 리사처럼 임신한 소녀들을 납치하고 아이를 낳은 후 아이는 팔고 소녀들은 죽이는 이들이었다. 이야기의 구조나 짜임이 잘 어우러진 느낌은 이런 설정에서부터 시작된 듯하다. 자기의 감정 절제력이 뛰어나고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리사가, 이 납치극의 위험에서 자기 방식대로 탈출하고 범인들에게 복수하면서, 사소하고 묘하게 변화하는 감정을 그린다. 언제나 완벽하게 감정 스위치를 작동했던 그녀에게도 그 감정조절이 완벽해지지 않는 게 아이에 관해서다. 배 속에 아이가 있을 때도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면서도, 그 아이 앞에서만은 리사의 감정 조절 능력은 떨어진다. 그게 바로 엄마, 모성애가 가진 힘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 소설은 이런 감동만큼이나 추리소설의 매력도 절대 놓치지 않는다. 그것도 아주 특이한 설정으로 추리소설을 즐기는 독자의 눈을 즐겁게 만든다. 납치 스릴러의 공식을 깨버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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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언니에게 소설Q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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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 일이 없었다면 나는 분명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날 그 일이 없었어도 그는 분명 지금과 같은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207페이지)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보통은 법이 가해자를 처벌하는 방법으로 피해자를 위로한다. 물론 이것도 사건으로 접수되고 제대로 수사를 했을 때 얘기다. 마음 같아서는 피해를 본 그대로 가해자에게 돌려주고 싶지만,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인간으로 범법자가 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법이 그만의 방식으로 위로해준다고 해도, 인간의 마음에 내려앉은 고통의 무게를 줄일 수는 없다. 평생 사라지지 않을 분노의 무게도 여전하다. 그러면서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세월은 흐르고 점점 사람들에게 잊힌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일처럼... 그런데 말이다. 법의 심판이라도 받는 경우에도 그런데 아예 법의 근처에도 가지 못한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가해자는 가해자가 아닌 게 되고 피해자는 그런 일을 당할 근거를 제공한 이가 되는 일이 되기도 하는 현실이, 억울하게도 우리 옆에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었다.

 

끔찍한 그 날을 찢어버리고 싶다는 기록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그날의 일을 결코 찢어버릴 수 없다고 말한다. 피해자의 삶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고스란히 들려준다. 그날의 사건은 한 사람의 인생을 비틀어놨으며, 가장 아름다울 시기를 가장 비참하게 보내게 했다.

 

열여덟의 이제야는 당숙에게 성폭행당했다. 당숙은 제야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너를 아낀다고 말하며 제야의 정신까지 폭행했다. 성폭행을 당하고도 제야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당숙은 마치 사랑스러운 연인처럼 제야와 저녁 인사를 하고, 다음에도 다시 만날 약속을 남기며 애인 대하듯 문자를 남긴다. 그때 제야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이었을까. 멍하던 제야는 혹시나 당숙에게 무서운 일을 당할까 봐, 당숙 밑에서 일하는 아버지와 가족에게 피해가 갈까 봐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자기가 당한 일이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는 생각에 경찰서로 가서 신고한다. 제야는 그 피해에 관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을까?

 

내 인생이 서너 개쯤 되는 줄 아는 사람들. 이미 일어난 일을 어쩌겠느냐고 말하면서, 이번 생은 이대로, 이대로 재수 없게, 미친 사람들, 그런 일이 어떻게 운이고 재수인가. 그에게만 생이 한 번뿐인 듯 실수 하나로 인생을 망칠 수 없다고…… 그 사람은 이미 망가진 사람이다. 스스로 망가져서 나까지 망친 사람이다. (84페이지)

 

어째서 내가 의심받는가. 어째서 내가 증거를 대야 하는가. 어째서 내가 설명해야 하는가. 어째서 내가 사라져야 하는가. (133페이지)

 

왜 세상 많은 일에는 돈과 권력이 법보다 앞에서 그 힘을 발휘하는 걸까. 제야의 신고는 경찰관들이 연락한 당숙의 등장과 함께 없었던 일이 된다.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그 지역의 많은 일에 앞장서는 당숙의 힘은 어린 제야와 비교할 수도 없었다. 경찰관들의 질문에 제야는 더 주눅이 들었다. '성폭행을 당했는데 왜 보이는 상처가 하나도 없느냐, 보통은 반항하는데 너는 하지 않은 것 같다, 거기서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셨다는데, 이렇게 다정하게 주고받은 문자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이냐.' 제야가 겪은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었고, 제야의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은 모두 제야를 탓했다. 마치 이번 일은 제야가 모든 원인 제공을 한 것처럼 말했다. 가해자인 당숙에게는 남자가 한 번 실수할 수도 있다고, 술 마시고 그럴 수도 있다고, 남자로 살면서 그 정도는 괜찮다고. 뭐가 괜찮은 거지? 어디서 실수인 거지? 그럼 그가 저지른 실수의 피해자는 피해자가 아닌 게 되는가? 왜 사건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무마하면서 한 사람의 인생을 짓밟는 것인지 모르겠다. 피해자의 마음이, 고통이, 상처가 가장 중요한 건데 아무도 그걸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야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때는 말할 수 없었다.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마음을 가까이서 듣는 듯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공감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생긴 일이 언젠가 우리가 겪을 일이 될지도 모를 위험을 안고 살아가니까. 하지만 어디까지일까. 우리는 어디까지 얼마나 그들의 상처와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성폭력에 관한 사건을 들을 때마다 걱정된다. 가해자가 저지른 일과 피해자가 당한 일을 중심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그 주변의 환경에 따라 다르게 보고 해석하는 일들이 너무 빈번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법이 그 기준을 정하고 법대로 판단하는 건 그렇다고 치자. 사람들의 오해와 비틀린 시선으로 가해지는 2차 피해는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지 묻고 싶다. 이들의 피해는 고스란히 안으로 스며들어 온몸에 번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삶을 뒤흔들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제니야, 이게 다 무슨 말이냐면, 나는 살고 싶다는 말이야.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살고 싶단 말이 아니야. 그런 일이 있었던 나로, 온전한 나로, 아무 눈치도 보지 않고, 내 편에 서서, 제대로 살고 싶단 말이야. (224페이지)

 

다행스럽게도 제야에게는 강릉 이모가 있었다. 작은 동네의 사람들 시선을 같이 맞받아쳐 줄 수 있는 이모가 있었다. 사건에 관해서 묻지 않는, 누구의 편을 들기 전에 이성적으로 사건을 볼 수 있는, 오롯이 제야 자체로 받아들이고 보듬어줄 수 있는 사람. 이모와 함께 지내면서 제야는 조금씩 상처를 회복한다. 집 밖으로 나가기도 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면서도 세상에 적응하려고 한다. 집이 아닌 곳에서 치유의 시간을 갖는다. 성폭행 피해자를 보는 시선이 두려워서 벗어난 곳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그래도 그리운 것들이 있다. 함께 성장하며 가족과 친구 이상이었던 동생 제니와 사촌 동생 승호. 그날의 일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함께 어른의 시간을 살면서 성장통을 겪고 있겠지. 막연하게 생각하던 미래의 시간을 조금씩 채워가면서 세상 속에 섞이면서도 인간다움을 배우며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소설은 제야가 쓰는 일기로 조심스럽게 그 상처를 꺼낸다. 감히 잘 안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함부로 위로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한 사람의 인생이 성폭력이라는 사건을 마주하고 어떻게 변해 가는지, 어떻게 견디고 극복해 가는지 세세하게 묘사한다. 마치 눈앞에서 제야의 모든 표정과 생각을 보는 것처럼 섬세하게 들려준다. 누군가가 던진 일상의 폭력 앞에서 피해자의 상처는 얼마나 더 깊어질 수 있는지 대신 대답하는 것 같다. 동시에 우리에게 질문을 되돌리기도 한다. 혹시 우리는 제야의 주변에서 던진 시선들처럼 그렇게 했던 적은 없었는지를. 제야의 일기가 계속되고, 물음표 없는 질문들이 계속될 때마다 제야의 상처를 공유하게 된다. 이건 절대 제야만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말이다. 누군가가 행하고, 누군가가 방관하면서 혹시 그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건 아닌지 묻는다.

 

상처를 받는 건 순간이지만, 그 상처가 치유되기까지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아무리 상처가 치유된다고 해도 상처받기 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크거나 작거나 흉터를 남긴다. 저자는 그 흉터가 제야의 것에서 머물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제야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는지 고스란히 들려준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내가 쏜 화살이 되돌아오는 것처럼. 어쩌면, 절대 끝나지 않을 이야기라는 것을 확인 시켜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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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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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고 괴롭고 불안하고 막막한가.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의 삶이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다. 도망치지 마라. 원래 희망은 아프다. 그래서 꽃이 피는 것이다. (280페이지)

 

어김없이 입시한파가 찾아왔다. 이상하다, 이 계절은. 겨울이라고 하기에는 포근하다고 느끼는 어떤 날들이었다가, 갑자기 입시와 함께 겨울의 추위를 뽐낸다. 겨울에 밀리기 싫어서 버티고 있던 가을은, 오늘을 기점으로 그 계절의 힘을 잃고 이후의 시간을 겨울에 양도한 것 같다. 평화적인 약속처럼 보인다. 한편으로는 입시의 전쟁을 치르고 나면 이제 겨울 따위는 지나가버린 계절이 될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어려운 고비가 한번 넘어갔으니, 앞으로 얼마나 더 힘든 시간이 와도 견뎌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나 다짐 같은 게 굳어지지 않을까. 오래 전, 어렵고 힘들고 가슴 아팠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이제는 평범한 일상처럼 꺼내놓는 저자의 마음이 그랬을 것 같다. 슬픔을 마주했던 어떤 순간 건너왔으니, 이제는 이 이야기를 제법 담담하게 말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여기는 건지도 모른다. 그게 스스로 보내는, 비슷한 슬픔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보내는 고요한, 참 괜찮은 위로라고.

 

이 책을 읽으면서 찾아보니 전작들이 있었지만, 나는 이 글로 작가를 처음 만난 게 됐다. 첫 페이지 첫 문장부터 작가가 걸어온 시간을 생각하게 된다. 개천, 용, 식당에 딸린 단칸방. 어떤 환경의 성장이었는지 가늠해보면서, 가난이 옷처럼 피부를 덮고 있었을 어린 시절의 기억을 꺼낸다. 집이 아닌 방에서 살았던 가족들, 이 방 저 방 옮겨 다니고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면서도 정해진 시간표처럼 저자는 성장했다. 성공을 꿈꾸지만, 실패가 어깨를 짓누르던 시절도 버텨냈다. 아니, 그렇게 흘러갔다고 해야 더 맞으려나? 평생을 따라다닐 것 같은 가난도 버리고 싶고, 가진 것 없이 가족을 건사하는 부모님이 부끄러웠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모든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저자는 그 이해를 넘어설 수 없을 때 그 가족과 다른 일상을 꿈꾸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한때 나에게 간절했다가 버려진 생각이었기에, 저자의 글에서 느끼는 그대로를 나도 모르게 대입하면서 읽고 있었다.

 

좋았던 것보다 나빴던 것들이 많은 기억이다. 성공보다 실패가 많았던 인생의 순간들이었다. 그런 시간을 통과한 저자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비관이 가득한 삶일까, 아니면 무한 긍정으로 다시 일어서고자 하는 에너지일까? 이 글을 읽다 보면 저절로 느껴지는 게 있다. 인제 와서 그 시절의 슬픔이나 기쁨을 복기하지 않는다. 다만 그때의 감정들이 남긴 현실을 바라본다. 슬픔은 저자가 버텨온 흔적이고, 기쁨은 그 이면의 슬픔을 보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다. 지나고 보면 그래도 괜찮았던 기억이 자리하고, 그 정도면 몹시 나쁜 것은 아니었다는 기억이 새롭게 새겨진다. 하지만 그때 그 자리로 돌아갈 마음은 없다고 말한다. 슬픔이 뒤에 가려진 기쁨을 생각하는 것보다, 그 시절에 겪었던 슬픔의 각인이 더 크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잘 버텨왔다고 토닥거리면서도, 다시 그 시간을 버텨야 하는 건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이다.

 

저자의 문장들 속에서 겹치는 많은 이야기를 떠올릴 때마다 감정이 요동쳤다. 같은 그림이지만 다르게 해석할 수밖에 없는, 서로 다른 기억과 경험의 흔적들이었다. 여섯 식구가 한방에서 자다 보니 키가 큰 저자는 다른 식구들의 발밑에서 잤다. 다섯 가족과 직각이 된 저자의 누운 모습을 상상해본다.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난다. 그 비슷한 기억이 소환되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우리 집도 저자의 가족 잠자리와 비슷했다. 한 방에 여섯 명 이상이 저자의 가족과 같은 구도로 잠을 잤었다. 다행히 방은 아주 비좁지 않았지만, 모든 가족이 한방에서 자는 일은 편하지 않았다. 겨울의 어느 날이었던가. 추우니까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다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이상하게 그날 현관문을 잠그지 않았던가 보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 도둑이 들었고, 도둑은 우리 집의 어디선가 훔쳐 갈 물건을 찾고 있었을 테지. 그런데 아마 도둑은 그 방에서 식구들이 그런 구도로 잠을 자는 줄 몰랐을 것이다. 살금살금 걸어가서 집안을 뒤져야 하는데, 여기저기 튀어나온 머리와 발을 밟느라 깬 가족들의 비명에, 도둑은 제대로 털지도 못하고 도망갔다. 도망가다가 넘어진 도둑을 잡겠다고 어린 나는 내복 바람으로 도둑을 쫓으며 뛰어갔는데, 결국은 놓쳤다. 오소소 소름이 돋고 무서웠는데도, 그때만 생각하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방 한 칸에 콩나물시루처럼 꽉 차 있던 가족들 때문에 도둑이 그냥 도망가게 된 거니까. 하긴, 도둑은 그날 그대로 우리 집을 뒤졌어도 가져갈 게 하나도 없어서 허탕을 쳤을 것이다.

 

저자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발견한 가계부에서 아버지의 일상을 읽는다. 검소한 가격으로 커피 한잔을 마셨겠지. '임대'로 마련한 집을 정성껏 손보는 기쁨도 누리셨을 것이다. 아버지의 그 모든 행동이 저자의 기억에 있다. 방에서 방으로 이사하면서 처음으로 마련한 집에 온 가족이 들뜨지는 않았을까. 가난 때문에 힘들고 단칸방 생활이 여섯 식구에게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저자 아버지의 소박한 가계부를 보고 부러웠다. 가난에 힘들었겠지만, 그 슬픔을 가리는 기쁨이 바로 아버지의 기록 아니었을까 싶다. 나 역시도 저자의 성장 환경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세월을 지나왔다. 가난했고, 육 남매를 키우는 엄마의 일상은 힘들고 찡그린 표정으로 굳어졌다. 엄마가 한밤중에 옆집에 가서 돈을 빌리는 것도 일상이었다. 내 기억에는 없지만 한밤중이나 이른 새벽에 야반도주하듯 이사를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런 생활을 내가 기억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열권이 넘는 노트를 보고 참 허무했다.

 

정확히 언제부터 적었는지는 모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겨진 것들을 정리하면서 찾아보니 열권이 넘는 노트가 있었다는 것만 안다. 저자의 아버지처럼 나의 아버지도 그날그날 당신의 지출과 이야기를 적었다. 누구를 만났고, 무엇을 먹었고, 얼마를 지출했고, 병원에 갔고, 약을 샀고... 노트에 기록된 건 특별할 게 없었다. 일기와 가계부의 중간쯤 되는 이야기였다. 간략한 일정과 사용한 돈의 기록이 전부였다. 이상한 건, 아버지의 노트를 보고서도 아버지의 하루를 지켜본 애틋함 같은 건 없었다는 거다. 오롯이 아버지만의 하루였고, 지출이었고, 기록이었다. 아버지 자신 외의 가족에게 사용한 건 시간도 돈도,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아버지 살아계실 때도 가까웠던 적이 없는 부녀 사이였는데, 돌아가시고 나서도 그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 자기만 생각하는 건 참 한결같으시구나. 그런 아버지에게 한 가지 고마운 건, 아버지가 투병하시던 3~4년의 시간 동안 내가 경험한 일들이다. 병원 생활, 건강보험공단에 관련된 것이나 그 외의 아버지가 벌여놓은 일을 처리하고 서류를 만들면서 바쁘게 돌아다니던 시간, 알아봐야 할 것도 많아서 계속 전화와 발품을 팔아야 했던 일들, 그리고 여러 가지. 그 많은 일을 처리하느라 몸도 마음도 지쳤지만, 그때 알게 된 것들이 요즘에는 나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준다. 이런 아이러니라니. 그래도 나쁘지 않다. 알아두어서 좋은 게 더 많았으니까. 그렇게 알게 된 것들을 앞으로 사용하게 될 일이 더 많을 테니까 말이다.

 

아프기만 한 기억을 뒤로하면 저자의 오늘이 있게 한 '책'의 시작이 있다. 두려움을 이기려고, 빚쟁이들의 고음을 듣지 않으려고 파고든 책에서 저자의 작가로의 인생이 시작된 건 아니었을까. 누구에게나 그런 거, 그런 곳 하나쯤은 있어도 좋지 않은가. 자기만의 방처럼, 너덜너덜한 마음 기워줄 수 있게 숨어들 수 있는 곳. 저자에게 자기만의 방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대신 '책'이 그녀만의 방이 되어 위로해주고 꿈을 키우게 했다. 누가 불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집중해서 책을 읽는 아이의 모습을 그려본다. 처음에는 두려움을 이기려 고개를 숙이고 글자만을 보고 있지 않았을까 싶으면서도, 점점 그 글자 속으로, 문장에 빠져드는 표정을 상상하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괜히 흐뭇해진다. 꿈을 꾸다가도 바뀌고 어긋나고 노선을 변경할 수도 있지만, 책에 빠져든 어린 소녀는 지금 작가가 되어 그 시절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흐뭇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은가. 어려운 시간 잘 견뎠다고, 잘 커 주었다고, 다행이라고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은, 오지랖 넓은 동네 아줌마의 마음이 된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니 정말 모든 게 괜찮아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세상 모든 게 안온하고 안전하게 여겨졌다. (60페이지)

 

저자의 가족 이야기뿐만 아니라, 일상을 지내면서 보이는 사회적 이슈도 빼놓지 않는다. 엄마와 아내로 동시에 작가로 살아가는 일의 고충, 작가라는 이름에 맞는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갈등하고 힘들어지는 마음, 문단 내 성폭력과 미투, 사회적 계급이 만든 현실의 고통 등을 언급하면서 자기의 목소리를 낸다. 저자가 부딪히고 겪어온 풍경들을 보여주면서, 세상의 차별과 빈부격차가 만들어낸 슬픔에 공감을 얹는다. 슬픈데도 마음껏 울 수도 없고, 누군가의 위로가 아닌 혐오의 말을 들어야 하는 일들. 살면서 겪는 많은 아픔에 주눅 들고 좌절할 수는 있지만, 그걸로 자기 실패를 고정화하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우리 각자의 경험이 감히 타인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글에서 느끼는 '안다'는 의미를 되새길 수는 있다.

 

당신의 슬픔을 안다고, 실패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험한 세상의 불합리와 그 세계의 한 사람으로 존재하는 불편함을 겪고 있다고. 조곤조곤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저자는 우리가 경험하는 많은 아픔의 틈 속으로 들어온다. '나도 잘 알아' 이런 말은 꺼내지 않는다. 힘내라고 섣불리 위로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기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저자의 가족 이야기와 사회생활, 더 크게는 세상을 겪고 바라보는 이야기를 꺼내놓기만 했다. 저자가 걸어온 시간이 문장이 되어 다가온 게 전부다. 묵묵히 그 문장들을 지켜보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이야기에 공감하거나 자기 기억을 보태거나 하는 건 독자의 몫이다. 그 이후에 다가올 또 다른 위로나 희망 같은 건 즐겁게 받으면 될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어쩌면 위로는 찾아다닐 이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굳이 찾아야 할 이유도 없을 것 같다. 그저 어느 순간, 이렇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거나 어느 노래 가사 하나를 흥얼거리거나, 책 속의 한 문장, 드라마나 영화의 대사 하나에 내 안에서 뭔가가 터진다면, 그게 위로가 아닐까? 우리는 타인을 다 이해할 수 없고, 그들의 슬픔에 위로하는 방법을 다 알고 있지 않으니까.

 

사람의 삶이라는 게 제멋대로 움직이는 동물의 삶 같지만, 실은 한자리에 꽂혀 한자리에서 늙어가는 식물의 삶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제 수명 다한 식물을 뽑아내다 보면 흙 위에서 어떤 꽃을 피웠고 어떻게 시들었든 한결같이 넓고 깊은 흙을 움켜쥐고 있다. 바닥을 치고 딛는 힘이 강할수록 꽃도 열매도 실하다. 사는 게 어려울 때, 마음이 정체될 때, 옴짝달싹할 수 없게 이것이 내 삶의 바닥이다 싶을 때, 섣불리 솟구치지 않고 그 바닥까지도 기어이 내 것으로 움켜쥐는 힘, 낮고 낮은 삶 사는 우리에게 부디 그런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 (182페이지)

 

어떤 글이 좋은 글일까.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계속 생각하게 되는 의문이었다. 잘 짜인 구성과 스토리로 독자의 모든 감각을 빨아들이는 소설. 어떤 생각과 고민의 답을 찾아가게 하는 인문학 강의. 누군가의 일기를 엿보듯 듣게 하는 일상의 소박한 이야기들. 상황과 시간에 따라 다르겠지만, 지금은 산문으로 다가오는 저자의 글이 충분히 좋은 글이었다는 말을 하고 싶다. 왜냐고 묻는다면, 하고 싶은 말 대부분을 삼키려고 애쓰기만 했던 내가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계속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부끄러워서 담아두었던 말들, 화가 나고 고통스러워서 꺼내기 싫은 말들, 불안한 내일이 더 힘들어질까 봐 감히 입방정 떨고 싶지 않은 말들이 자꾸만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고만 한다. 저자의 문장 하나하나에 내 기억과 생각을 꺼내면서 수다쟁이가 되고 싶어진다. 슬픔을 꺼내놓는 방법 하나를, 위로의 의미를 제대로 찾은 거 같다. 참 괜찮은 글이 내게로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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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하고 집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옷을 갈아입고, 벗은 옷은 털어서 걸어놓거나 세탁기에 넣고, 손과 발을 씻는다. 그 후로 바로 샤워를 하거나 다른 일을 먼저 하고 씻거나 하는 약간의 순서 차이만 있다. 들어와서 손을 씻는 행위는 개인이 지켜야 하는 기본 위생 중의 하나이며, 어렵지 않게 습관으로 만들 수 있는 일이다. 세균이 우리 몸에 침투하지 않게 위해 방어할 수 있는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세균 감염의 무서움은 이미 여러 가지 사례로 경험했다. 과거 세계사 속에서 활약하던 페스트 같은 거 말이다. 위험한 병이기에 전염을 막을 한계도 있었겠지만, 어쩌면 깨끗한 환경에서 살았다면 그 전염 확률을 낮췄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사람과 사람에게 옮겨 다니면서 그 힘을 발휘하는 세균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알기 때문에, 개인이 지켜야 할 기본 위생의 중요성 또한 잘 안다.

 

병을 옮기는 세균이 사람 몸에 침범했을 때 증상이 나타나야 하는데, 그 특별한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런 사람을 '무증상 보균자'라고 부르는데, 이 책 <위험한 요리사 메리>에서 말하는 메리 맬런이 그러하다. 아일랜드 태생의 메리는 요리사다. 뉴욕의 상류층 가정에서 일했다. 우연인지 뭔지, 메리가 일하던 집의 사람들에게 단체 장티푸스 증상이 나타났다. 당시의 질병을 조사하던 사람들은 그 집의 환경을 보고 장티푸스 발병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병이 가까이 올 수 없을 정도의 깨끗한 환경이었다. 그렇게 원인을 찾지 못한 장티푸스 사건이 희미해질 무렵, 조사관 조지 소퍼는 요리사 메리가 무증상 보균자일 것으로 의심한다. 집안의 거의 모든 사람이 장티푸스에 걸렸는데, 같은 환경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이 생활한 메리만 장티푸스에 걸리지 않았다는 게 그 증거다. 하지만 메리는 소퍼의 말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기는 장티푸스에 걸린 적이 없다며 건강하다고 조사관들에게 저항했다. 소퍼의 말을 확실하게 증명하려면 메리에 관한 더 많은 자료 수집이 필요했다. 그렇게 더 많은 조사를 하고 그동안 메리가 일했던 집들을 역으로 추적한 결과, 메리가 일했던 모든 집에서 장티푸스가 생겼고 그들 중에서는 죽은 사람도 있었다는 걸 알아냈다. 소퍼의 말이 사실이 된 순간이다.

 

메리의 흔적을 따라다니는 장티푸스. 위험하고 전염이 되는 이 질병을 어떻게 치료하고 단속해야 하는가? 사실 치료 방법을 찾아내고 환자를 돌봐야 하는 건 의학의 문제다. 중요한 건 무증상 보균자인 메리를 대하는 보건 당국과 사람들의 방식이다. 메리는 자기가 병을 옮기지 않는다면서 보건 당국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움직이는 보건 당국은 장티푸스 제공자 메리를 체포하고 강제로 병원에 입원시켰다. 메리의 대소변과 혈액을 채취하여 검사해보니 그녀는 장티푸스 보균자였다. 메리가 요리사로 일하던 1900년대 초반만 해도 미국에서는 장티푸스로 2만 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했다고 한다. 장티푸스에 관한 공포로 벌벌 떨었을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그녀는 두려운 대상이었을 터, 언론에서도 그녀를 '인간 장티푸스균'이라고 부르며 선정적인 제목으로 기사를 썼다. 얼마 후에는 메리의 실명까지 공개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누군가 학회에서 그녀의 사건을 '장티푸스 메리'라고 부르면서 널리 퍼지기도 했다.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보건 당국은 전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메리를 단속해야 했고, 메리는 자신의 자유를 억압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유를 외칠 수 없이 보건 당국의 강제 집행으로 병원에 감금되듯 입원했고, 섬에 있던 병원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 한쪽에서는 장티푸스를 퍼지게 하는 그녀의 감금 같은 입원을 당연하다고 여겼고, 한쪽에서는 아무리 그래도 그녀에게 주어진 인권을 강탈당했다고 말했다. 그녀의 불행은 아무도 해결해주지 못했고, 누구도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공중 보건이냐,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냐 하는 문제는 금방 해결할 수 없었다.

 

메리는 섬에 있는 병원에서 3년을 갇혀 살았다. 전국에 본명과 사진도 공개되었다. 그녀는 자유를 위해 보건 당국과 서약을 한다. 요리사 일을 그만둘 것과 그녀의 거취를 항상 보건 당국에 보고할 것. 그렇게 3년 만에 섬에서 나온 메리는 그녀의 천직인 요리사 말고 다른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보건 당국에 주기적으로 보고하면서 검사를 받기도 했다. 그렇게 메리가 보건 당국과의 약속을 지키면서 살아갔으면 좋았을 것을, 그녀는 보건 당국에 주기적으로 보고하는 것도 멈췄고 자취를 감추기까지 했다. 보건 당국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병원에서 단체로 발생한 장티푸스 때문에 또 한 번 그녀의 인생은 감금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생계를 이어가기 힘들었던 메리는 가명으로 다시 요리사 일을 시작했고, 그녀가 일했던 병원의 사람들이 단체로 장티푸스에 걸렸던 것이다. 그렇게 다시 섬에 있는 병원에 수감된 메리는 23년 동안, 그녀가 죽을 때까지 섬에서 나오지 못했다.

 

1900년대 초반의 의학은 그 전보다 훨씬 발전했고, 현대 의학이라고 불러도 좋은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의학이 질병이나 의학에 관해 지금보다는 무지했던 시대였을 것이다. 메리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기가 장티푸스 보균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검사 결과와 그녀의 행적을 따라가 보면, 그녀가 장티푸스 보균자라는 것이 증명되니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그녀가 무증상 보균자라는 이유로 평생 섬에 갇힌 채로 살아가야 했는지는 다른 문제다. 그녀가 공중의 보건을 이유로 격리당해야 할 이유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녀의 신상 정보가 만천하에 공개될 이유도 없었다. 실제로 메리 이후에 드러난 무증상 보균자들은 자유를 억압당하지도 않았고, 병원에 감금되지도 않았다. 메리처럼 수십 명의 장티푸스를 일으킨 건강한 남자 보균자들은 보호관찰 처분으로 그만이었다. 그들의 신상정보가 신문에 나지도 않았다. 메리가 '최초의 여자 무증상 보균자'였다는 이유로 그녀의 인생이 다른 이들에 의해 이렇게 파괴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그녀에게 '장티푸스 메리'라고, 마녀라고 불렀다. 언론이 씌운 마녀 이미지와 공포에 한 사람의 인생이 본인의 의지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망가졌다. 타인에 의해 불행한 삶을 이어가며 죽음을 맞이했다.

 

저자는 단순하게 장티푸스 무증상 보균자였던 메리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전염병의 공포를 말하고 싶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전염병의 보균자였던 한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보면서, 의학과 인권 중에서 무엇이 우선시되어야 하는 문제를 꺼내놓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메리는 모두가 자기를 몰래 훔쳐보는 구경거리였다고 말했다. 보건 당국의 조사관 조지 소퍼는 그녀를 살아있는 배양관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아마도 질병의 관리와 개인의 인권이 마주하는 감정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할지도 모른다. 상황에 따라 우선순위가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전히 의학이냐 인권이냐 하는 문제의 답을 꺼내놓을 수가 없다. 질병의 공포를 없애주는(유배시키는) 것을 찬성하면서도, 한 개인의 삶이 공중 보건에 의해 처참히 무너져야 하는지 묻는다면 한마디로 대답하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메리의 인생을 힘들게 했던 이들, 조사관 조지 소퍼와 조지핀 베이커 박사의 활약도 무시할 수 없는 업적이었다. 메리를 생각하면 그녀의 인생이 무너지는 순간을 만든 이들 중 한 사람일 테지만, 공중 보건의 발전과 전염병의 치료에 업적을 쌓은 이들이었다고 생각하면 현대 의학을 발전에 이바지한 이들이니까 말이다.

 

'장티푸스 메리'라고 불릴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몰고 간 게 누구였는지 무엇이었는지 계속 물으면서도, 공중 보건과 개인의 인권이 충돌하면서 벌어지는 비극을 그대로 보여주는 메리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비극 뒤에서 배경처럼 자리한 여러 가지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사회적 약자인 메리에게 씌워진 굴레는 여기저기서 손을 뻗어 합세하고 만들어낸 거다. 전염병에 관한 공포와 하층 계급에 대한 혐오, 거기에 인간이 빚어내는 온갖 반감까지 맞물려 일으킨 재앙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회의 무지와 혐오에서 비롯된 이 비극은, 조용히 숨어 있다가 언제 어디서 우리에게 다가올지 모른다. 그런 일을 마주할 때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메리의 이야기가 많이 생각날 것 같다. 격리된 병원에서조차 자기 일을 찾아서 했고, 억압된 자유를 찾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던 그녀의 노력은 인간이 누려야 할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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