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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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고 괴롭고 불안하고 막막한가.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의 삶이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다. 도망치지 마라. 원래 희망은 아프다. 그래서 꽃이 피는 것이다. (280페이지)

 

어김없이 입시한파가 찾아왔다. 이상하다, 이 계절은. 겨울이라고 하기에는 포근하다고 느끼는 어떤 날들이었다가, 갑자기 입시와 함께 겨울의 추위를 뽐낸다. 겨울에 밀리기 싫어서 버티고 있던 가을은, 오늘을 기점으로 그 계절의 힘을 잃고 이후의 시간을 겨울에 양도한 것 같다. 평화적인 약속처럼 보인다. 한편으로는 입시의 전쟁을 치르고 나면 이제 겨울 따위는 지나가버린 계절이 될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어려운 고비가 한번 넘어갔으니, 앞으로 얼마나 더 힘든 시간이 와도 견뎌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나 다짐 같은 게 굳어지지 않을까. 오래 전, 어렵고 힘들고 가슴 아팠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이제는 평범한 일상처럼 꺼내놓는 저자의 마음이 그랬을 것 같다. 슬픔을 마주했던 어떤 순간 건너왔으니, 이제는 이 이야기를 제법 담담하게 말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여기는 건지도 모른다. 그게 스스로 보내는, 비슷한 슬픔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보내는 고요한, 참 괜찮은 위로라고.

 

이 책을 읽으면서 찾아보니 전작들이 있었지만, 나는 이 글로 작가를 처음 만난 게 됐다. 첫 페이지 첫 문장부터 작가가 걸어온 시간을 생각하게 된다. 개천, 용, 식당에 딸린 단칸방. 어떤 환경의 성장이었는지 가늠해보면서, 가난이 옷처럼 피부를 덮고 있었을 어린 시절의 기억을 꺼낸다. 집이 아닌 방에서 살았던 가족들, 이 방 저 방 옮겨 다니고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면서도 정해진 시간표처럼 저자는 성장했다. 성공을 꿈꾸지만, 실패가 어깨를 짓누르던 시절도 버텨냈다. 아니, 그렇게 흘러갔다고 해야 더 맞으려나? 평생을 따라다닐 것 같은 가난도 버리고 싶고, 가진 것 없이 가족을 건사하는 부모님이 부끄러웠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모든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저자는 그 이해를 넘어설 수 없을 때 그 가족과 다른 일상을 꿈꾸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한때 나에게 간절했다가 버려진 생각이었기에, 저자의 글에서 느끼는 그대로를 나도 모르게 대입하면서 읽고 있었다.

 

좋았던 것보다 나빴던 것들이 많은 기억이다. 성공보다 실패가 많았던 인생의 순간들이었다. 그런 시간을 통과한 저자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비관이 가득한 삶일까, 아니면 무한 긍정으로 다시 일어서고자 하는 에너지일까? 이 글을 읽다 보면 저절로 느껴지는 게 있다. 인제 와서 그 시절의 슬픔이나 기쁨을 복기하지 않는다. 다만 그때의 감정들이 남긴 현실을 바라본다. 슬픔은 저자가 버텨온 흔적이고, 기쁨은 그 이면의 슬픔을 보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다. 지나고 보면 그래도 괜찮았던 기억이 자리하고, 그 정도면 몹시 나쁜 것은 아니었다는 기억이 새롭게 새겨진다. 하지만 그때 그 자리로 돌아갈 마음은 없다고 말한다. 슬픔이 뒤에 가려진 기쁨을 생각하는 것보다, 그 시절에 겪었던 슬픔의 각인이 더 크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잘 버텨왔다고 토닥거리면서도, 다시 그 시간을 버텨야 하는 건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이다.

 

저자의 문장들 속에서 겹치는 많은 이야기를 떠올릴 때마다 감정이 요동쳤다. 같은 그림이지만 다르게 해석할 수밖에 없는, 서로 다른 기억과 경험의 흔적들이었다. 여섯 식구가 한방에서 자다 보니 키가 큰 저자는 다른 식구들의 발밑에서 잤다. 다섯 가족과 직각이 된 저자의 누운 모습을 상상해본다.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난다. 그 비슷한 기억이 소환되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우리 집도 저자의 가족 잠자리와 비슷했다. 한 방에 여섯 명 이상이 저자의 가족과 같은 구도로 잠을 잤었다. 다행히 방은 아주 비좁지 않았지만, 모든 가족이 한방에서 자는 일은 편하지 않았다. 겨울의 어느 날이었던가. 추우니까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다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이상하게 그날 현관문을 잠그지 않았던가 보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 도둑이 들었고, 도둑은 우리 집의 어디선가 훔쳐 갈 물건을 찾고 있었을 테지. 그런데 아마 도둑은 그 방에서 식구들이 그런 구도로 잠을 자는 줄 몰랐을 것이다. 살금살금 걸어가서 집안을 뒤져야 하는데, 여기저기 튀어나온 머리와 발을 밟느라 깬 가족들의 비명에, 도둑은 제대로 털지도 못하고 도망갔다. 도망가다가 넘어진 도둑을 잡겠다고 어린 나는 내복 바람으로 도둑을 쫓으며 뛰어갔는데, 결국은 놓쳤다. 오소소 소름이 돋고 무서웠는데도, 그때만 생각하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방 한 칸에 콩나물시루처럼 꽉 차 있던 가족들 때문에 도둑이 그냥 도망가게 된 거니까. 하긴, 도둑은 그날 그대로 우리 집을 뒤졌어도 가져갈 게 하나도 없어서 허탕을 쳤을 것이다.

 

저자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발견한 가계부에서 아버지의 일상을 읽는다. 검소한 가격으로 커피 한잔을 마셨겠지. '임대'로 마련한 집을 정성껏 손보는 기쁨도 누리셨을 것이다. 아버지의 그 모든 행동이 저자의 기억에 있다. 방에서 방으로 이사하면서 처음으로 마련한 집에 온 가족이 들뜨지는 않았을까. 가난 때문에 힘들고 단칸방 생활이 여섯 식구에게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저자 아버지의 소박한 가계부를 보고 부러웠다. 가난에 힘들었겠지만, 그 슬픔을 가리는 기쁨이 바로 아버지의 기록 아니었을까 싶다. 나 역시도 저자의 성장 환경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세월을 지나왔다. 가난했고, 육 남매를 키우는 엄마의 일상은 힘들고 찡그린 표정으로 굳어졌다. 엄마가 한밤중에 옆집에 가서 돈을 빌리는 것도 일상이었다. 내 기억에는 없지만 한밤중이나 이른 새벽에 야반도주하듯 이사를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런 생활을 내가 기억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열권이 넘는 노트를 보고 참 허무했다.

 

정확히 언제부터 적었는지는 모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겨진 것들을 정리하면서 찾아보니 열권이 넘는 노트가 있었다는 것만 안다. 저자의 아버지처럼 나의 아버지도 그날그날 당신의 지출과 이야기를 적었다. 누구를 만났고, 무엇을 먹었고, 얼마를 지출했고, 병원에 갔고, 약을 샀고... 노트에 기록된 건 특별할 게 없었다. 일기와 가계부의 중간쯤 되는 이야기였다. 간략한 일정과 사용한 돈의 기록이 전부였다. 이상한 건, 아버지의 노트를 보고서도 아버지의 하루를 지켜본 애틋함 같은 건 없었다는 거다. 오롯이 아버지만의 하루였고, 지출이었고, 기록이었다. 아버지 자신 외의 가족에게 사용한 건 시간도 돈도,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아버지 살아계실 때도 가까웠던 적이 없는 부녀 사이였는데, 돌아가시고 나서도 그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 자기만 생각하는 건 참 한결같으시구나. 그런 아버지에게 한 가지 고마운 건, 아버지가 투병하시던 3~4년의 시간 동안 내가 경험한 일들이다. 병원 생활, 건강보험공단에 관련된 것이나 그 외의 아버지가 벌여놓은 일을 처리하고 서류를 만들면서 바쁘게 돌아다니던 시간, 알아봐야 할 것도 많아서 계속 전화와 발품을 팔아야 했던 일들, 그리고 여러 가지. 그 많은 일을 처리하느라 몸도 마음도 지쳤지만, 그때 알게 된 것들이 요즘에는 나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준다. 이런 아이러니라니. 그래도 나쁘지 않다. 알아두어서 좋은 게 더 많았으니까. 그렇게 알게 된 것들을 앞으로 사용하게 될 일이 더 많을 테니까 말이다.

 

아프기만 한 기억을 뒤로하면 저자의 오늘이 있게 한 '책'의 시작이 있다. 두려움을 이기려고, 빚쟁이들의 고음을 듣지 않으려고 파고든 책에서 저자의 작가로의 인생이 시작된 건 아니었을까. 누구에게나 그런 거, 그런 곳 하나쯤은 있어도 좋지 않은가. 자기만의 방처럼, 너덜너덜한 마음 기워줄 수 있게 숨어들 수 있는 곳. 저자에게 자기만의 방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대신 '책'이 그녀만의 방이 되어 위로해주고 꿈을 키우게 했다. 누가 불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집중해서 책을 읽는 아이의 모습을 그려본다. 처음에는 두려움을 이기려 고개를 숙이고 글자만을 보고 있지 않았을까 싶으면서도, 점점 그 글자 속으로, 문장에 빠져드는 표정을 상상하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괜히 흐뭇해진다. 꿈을 꾸다가도 바뀌고 어긋나고 노선을 변경할 수도 있지만, 책에 빠져든 어린 소녀는 지금 작가가 되어 그 시절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흐뭇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은가. 어려운 시간 잘 견뎠다고, 잘 커 주었다고, 다행이라고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은, 오지랖 넓은 동네 아줌마의 마음이 된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니 정말 모든 게 괜찮아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세상 모든 게 안온하고 안전하게 여겨졌다. (60페이지)

 

저자의 가족 이야기뿐만 아니라, 일상을 지내면서 보이는 사회적 이슈도 빼놓지 않는다. 엄마와 아내로 동시에 작가로 살아가는 일의 고충, 작가라는 이름에 맞는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갈등하고 힘들어지는 마음, 문단 내 성폭력과 미투, 사회적 계급이 만든 현실의 고통 등을 언급하면서 자기의 목소리를 낸다. 저자가 부딪히고 겪어온 풍경들을 보여주면서, 세상의 차별과 빈부격차가 만들어낸 슬픔에 공감을 얹는다. 슬픈데도 마음껏 울 수도 없고, 누군가의 위로가 아닌 혐오의 말을 들어야 하는 일들. 살면서 겪는 많은 아픔에 주눅 들고 좌절할 수는 있지만, 그걸로 자기 실패를 고정화하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우리 각자의 경험이 감히 타인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글에서 느끼는 '안다'는 의미를 되새길 수는 있다.

 

당신의 슬픔을 안다고, 실패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험한 세상의 불합리와 그 세계의 한 사람으로 존재하는 불편함을 겪고 있다고. 조곤조곤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저자는 우리가 경험하는 많은 아픔의 틈 속으로 들어온다. '나도 잘 알아' 이런 말은 꺼내지 않는다. 힘내라고 섣불리 위로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기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저자의 가족 이야기와 사회생활, 더 크게는 세상을 겪고 바라보는 이야기를 꺼내놓기만 했다. 저자가 걸어온 시간이 문장이 되어 다가온 게 전부다. 묵묵히 그 문장들을 지켜보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이야기에 공감하거나 자기 기억을 보태거나 하는 건 독자의 몫이다. 그 이후에 다가올 또 다른 위로나 희망 같은 건 즐겁게 받으면 될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어쩌면 위로는 찾아다닐 이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굳이 찾아야 할 이유도 없을 것 같다. 그저 어느 순간, 이렇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거나 어느 노래 가사 하나를 흥얼거리거나, 책 속의 한 문장, 드라마나 영화의 대사 하나에 내 안에서 뭔가가 터진다면, 그게 위로가 아닐까? 우리는 타인을 다 이해할 수 없고, 그들의 슬픔에 위로하는 방법을 다 알고 있지 않으니까.

 

사람의 삶이라는 게 제멋대로 움직이는 동물의 삶 같지만, 실은 한자리에 꽂혀 한자리에서 늙어가는 식물의 삶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제 수명 다한 식물을 뽑아내다 보면 흙 위에서 어떤 꽃을 피웠고 어떻게 시들었든 한결같이 넓고 깊은 흙을 움켜쥐고 있다. 바닥을 치고 딛는 힘이 강할수록 꽃도 열매도 실하다. 사는 게 어려울 때, 마음이 정체될 때, 옴짝달싹할 수 없게 이것이 내 삶의 바닥이다 싶을 때, 섣불리 솟구치지 않고 그 바닥까지도 기어이 내 것으로 움켜쥐는 힘, 낮고 낮은 삶 사는 우리에게 부디 그런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 (182페이지)

 

어떤 글이 좋은 글일까.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계속 생각하게 되는 의문이었다. 잘 짜인 구성과 스토리로 독자의 모든 감각을 빨아들이는 소설. 어떤 생각과 고민의 답을 찾아가게 하는 인문학 강의. 누군가의 일기를 엿보듯 듣게 하는 일상의 소박한 이야기들. 상황과 시간에 따라 다르겠지만, 지금은 산문으로 다가오는 저자의 글이 충분히 좋은 글이었다는 말을 하고 싶다. 왜냐고 묻는다면, 하고 싶은 말 대부분을 삼키려고 애쓰기만 했던 내가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계속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부끄러워서 담아두었던 말들, 화가 나고 고통스러워서 꺼내기 싫은 말들, 불안한 내일이 더 힘들어질까 봐 감히 입방정 떨고 싶지 않은 말들이 자꾸만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고만 한다. 저자의 문장 하나하나에 내 기억과 생각을 꺼내면서 수다쟁이가 되고 싶어진다. 슬픔을 꺼내놓는 방법 하나를, 위로의 의미를 제대로 찾은 거 같다. 참 괜찮은 글이 내게로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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