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해 기억해 모중석 스릴러 클럽 48
섀넌 커크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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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괴나 납치가 소재인 기존의 추리소설을 떠올려보면, 보통은 납치된 아이를 찾는 형사나 부모의 시선을 중심으로 써진 소설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의 몸부림, 절대 물러설 수 없는 모성의 최대치, 유괴 사건 해결을 위해 등장한 형사나 전문가들. 이들이 나서면 곧 범인을 추적하게 되고, 중간에 유괴 이유가 서서히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결말에 이르곤 했다. 섀넌 커크의 소설 『복수해 기억해』는 열여섯 소녀 리사가 납치되면서 시작되는데, 납치 이후의 전개가 제법 특이하다. 납치된 소녀의 두려움이나 약함이 아니라, 납치된 소녀의 복수극이라는 게 매력적인 소설이다.

 

리사 일랜드는 열여섯 살이다. 그리고 임신했다. 유명한 변호사인 엄마와 과학자인 아빠는 리사의 임신을 나중에 알았다.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부모님과 함께 병원에 다녀오던 날, 리사는 병원의 데스크에 있던 직원의 눈빛과 행동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얼마 후 리사는 배가 부른 상태로 납치된다. 누가 납치했는지, 왜 그랬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로 두 손과 발이 묶인 채로, 눈이 가려진 채로 차에 실렸다. 어딘가에 있는 건물에 도착하고, 어떤 방에 감금되었다. 방문은 밖에서 잠겼고, 리사가 간수라고 불리는 이가 하루 세 번 식사를 가져올 때만 잠깐 문이 열렸다. 리사는 간수가 올 때만 그 문을 열고 나가 화장실을 사용했고 물을 마셨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의 외출(?)인 셈이다. 그 시간 외에는 방에 갇혀 하루를 보냈다. 임신 때문에 무거워진 몸으로 감히 탈출을 시도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버텼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냥 평범한 납치로 보인다. 알 수 없는 공간에 감금하고, 뭔가 때를 기다리는 느낌. 하지만 소설은 처음 전개부터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더니, 점점 리사의 시선과 의도로 흘러간다. 천재적인 두뇌의 소녀 리사.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유명했다. 머릿속 감정의 스위치를 껐다가 켰다가, 그녀의 의도대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 사랑이나 연민의 감정을 차단하고 싶으면 그렇게 했고, 공감과 이해를 불러오고 싶으면 그렇게 했다. 언제 어디서든 그녀는 자기의 감정 조절을 완벽하게 해냈고, 모든 계산이 정확하고 이성적이다. 납치된 후에도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공포에 떨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기 위치를 가늠하면서 감금된 곳의 분위기를 파악했다. 계단을 세 줄 올라왔으니 3층일 것이고, 도로에서 건물까지의 거리를 기억했다. 간수가 식사를 가져오는 시간과 발소리, 간수가 방으로 들어와 서 있는 위치와 머무는 시간까지 정확하게 알아냈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리사는 모든 것을 계산하고 계획했으며, 그녀가 그 방에서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번호를 부여하고 그녀의 탈출과 복수 계획을 완벽하게 준비했다.

 

감금 생활을 하면서 나는 한 가지 재능을 갈고 닦았다. 그 재능이 신의 섭리로 주어진 것인지, 엄마의 강철 같은 세계 안에서 살면서 체득한 것인지, 아빠의 호신술 교육으로 얻은 것인지, 아니면 내 신체 조건에서 비롯된 본능인지는 몰라도, 그건 전쟁터에서 위용을 떨치는 장군들의 자질과 유사했다. 쉽게 흔들리지 않고, 만족하지 않고, 계산에 능하고, 복수심을 품고, 차분하게 행동할 줄 아는 재능. (19페이지)

 

소설은 납치된 아이를 찾기 위해 투입된 FBI 요원 리우와 납치된 소녀 리사의 시선이 교차로 진행된다. 리사가 탈출보다 복수를 위해 세우는 계획의 놀라움과 리우의 추적과정이 계속되면서, 어느 순간 이 소설의 결말에 다다르면 어떻게 될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특이하지 않은가. 납치된 소녀가 목숨의 위협을 느껴도 모자랄 판에, 이대로는 억울해서 안 되겠다, 반드시 복수하고 탈출하겠다는 계획에 전념하는 모습. 상상이 되는가? 아마 리사여서 가능했을 것이다. 간혹 소시오패스라고 불릴 정도로 감정 조절에 탁월한 재능을 지닌 아이, 그러니 적재적소에 자기가 가진 재능을 발휘하면서 아버지에게 배운 과학의 응용은 이 납치의 탈출극에 특화된 주인공이 아니었을까 싶다. 한마디로, 이 납치범들은 똥 밟았다는 거다. 건드려서는 안 되는 아이를 건드려놓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납치된 인질의 끝내주는 복수극에 소설은 시종일관 활기차다. 게다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소녀의 앞뒤 볼 것 없는 복수를 보다가도, 점점 만삭이 되어가는 몸을 보면서 이 소녀가 엄마가 되어가는 감정을 엿본다. 그러니까 그전까지는 언제나 자기 의도대로 감정을 조절하며 자기 일상을 지휘하던 소녀가 배 속의 아이가 생기자 그녀의 감정 조절이 가끔 실패하거나 의도하지 않은 감정에 당황하게 된다. '이게 뭐지?' 싶은 의문. 하지만 그런 감동도 잠시. 리사는 독자에게 처음부터 보여주었던 그 냉정함과 완벽함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끌고 간다. 그리고 마침내 범인들에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를 선사한다. 그 복수극에 조금이나마 지분을 보탠 FBI 수사관 리우와의 조합은 어쩌면 이 소설의 후속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남긴다. 리사와 리우 콤비가 마지막에 납치범에게 보여주었던 모습은 통쾌하다 못해 복수의 정석을 세운 듯하다. 복수는 이렇게 하는 것이야. 나쁜 놈들을 죽이는 게 끝이 아니야. 그들이 죽는 게 벌이 아니야. 끔찍하고 끈질기게 괴롭혀 주는 거야.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야.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되나?

 

리사의 감정 스위치 조절은 특이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리사의 그런 특징은 그녀의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전자와 후천적인 교육과 노력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싶다. 맡은 변호는 거의 다 이기는 승률 좋은 변호사인 엄마와 과학적인 두뇌를 계속 발전시키는 아빠의 존재가 그녀의 성장 과정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타고난 냉정함이 바탕이 되고, 거기에 변호사 엄마가 가진 이성과 단호함, 과학의 원리를 이용한 온갖 도구의 활용이 가능하게 했던 아빠. 이 정도면 완벽한 가족 아니던가.

 

나는 분노를 삼키며 하릴없이 배를 문질렀다. 그러다 문득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내 아기에게 위험이 닥쳐올 때마다 내 안에서 공포를 담당하는 스위치가 저절로 켜진다는 것. 임신하기 전에는 이런 문제로 애를 먹은 적이 없었다. 나는 계속 걸음을 옮기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나 자신이 더욱 선명하게 인식되었고, 반갑지 않은, 더 나아가 쓸모없는 감정인 공포를 억누르는 게 한결 쉽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흥미롭기도 했다. 심리학적으로도, 의학적으로도, 심지어는 철학적으로도 생각해볼 만한 문제였다. 아기가 느끼는 공포가 나에게 전이되는 건 아닐까. 나는 아기에게 생명을 주고 있지만, 아기는 나에게 과연 생명을 주고 있을까. (127~128페이지)

 

감정조절에 능숙한 소녀가 임신한 채로 납치되고, 알고 보니 납치범들은 리사처럼 임신한 소녀들을 납치하고 아이를 낳은 후 아이는 팔고 소녀들은 죽이는 이들이었다. 이야기의 구조나 짜임이 잘 어우러진 느낌은 이런 설정에서부터 시작된 듯하다. 자기의 감정 절제력이 뛰어나고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리사가, 이 납치극의 위험에서 자기 방식대로 탈출하고 범인들에게 복수하면서, 사소하고 묘하게 변화하는 감정을 그린다. 언제나 완벽하게 감정 스위치를 작동했던 그녀에게도 그 감정조절이 완벽해지지 않는 게 아이에 관해서다. 배 속에 아이가 있을 때도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면서도, 그 아이 앞에서만은 리사의 감정 조절 능력은 떨어진다. 그게 바로 엄마, 모성애가 가진 힘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 소설은 이런 감동만큼이나 추리소설의 매력도 절대 놓치지 않는다. 그것도 아주 특이한 설정으로 추리소설을 즐기는 독자의 눈을 즐겁게 만든다. 납치 스릴러의 공식을 깨버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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