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개의 회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6
이케이도 준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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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말했다. “일이란 말이지, 돈을 버는 게 아니야. 사람들한테 도움이 되는 거야. 사람들이 기뻐하는 얼굴을 보면 즐겁거든. 그렇게 하면 돈은 나중에 따라와. 손님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장사는 망해.” (365페이지)

 

전문적인 분야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일반 독자가 이야기 속 그 전문성을 소화하기에는 한계를 느낄 때가 있다. 그런데도 기어코 이야기 속 그 전문 분야를 즐기면서 재미와 이해를 만들어버리는 작가가 바로 이케이도 준이 아닌가 싶다. 전작 『한자와 나오키』를 읽으면서도 은행원이라는 전문직의 이면을 보는 것 같았다. 금융권 종사자를 부러워하면서도 그 분야의 민낯을 보는 게 놀라웠다. 사실 가족이 예전에 은행에 다닌 적이 있어서 어느 정도 그 분위기를 예상한 부분도 있지만, 근무 기간이 길지 않았기에 제대로 들은 적은 없었다. 궁금하면서도 일반인은 볼 기회가 없었을 은행의 이야기가 나름 신선하고 무섭고 그랬는데, 이번에는 영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회사가 매출을 올리기 위해 어떤 짓까지 하는지, 직원은 회사의 어떤 부분으로 존재하는지, 큰 문제가 발생했을 때 무엇을 1순위로 고려하면서 해결하려고 하는지 들려준다. 그리고 그 안에서 존재하는 회사원은 같은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한다. 나라면, 모두가 감추려고 하는 사건의 내부고발자가 될 수 있을까?

 

도쿄겐덴의 회의 시간. 말이 회의지 영업 실적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검사받는 시간이다. 누구라도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와중에 졸고 있는 이가 있으니, 그는 만년 계장 핫카쿠다. 이 회사에서 무서운 사람이 없나 보다. 습관처럼 회의 시간에 졸다가 급기야 발표를 망치기까지 했다. 그와 반대로 핫카쿠가 소속된 영업1과의 과장 사카도는 영업부의 에이스다. 회사의 누구에게나 칭찬받고 부러움을 산다. 사카도는 발표도 망치고 영업도 망치는 핫카구에게 폭언을 퍼붓는다. 반면 계속 사카도와 비교가 되는 영업2과장의 하라시마는 고통스럽다. 회사에서 필요 없는 인간이 된 것만 같다. 영업이 쉽지만은 않은데,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매번 완벽하게 해내는 사카도가 부럽다. 실적 압박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게 영업부의 운명이라지만, 이거 어떻게 압박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을지 생각하기도 한다. 며칠 후, 핫카쿠는 사카도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고발한다. 회사가 마냥 사카도 편일 것 같은데, 사카도가 대기발령을 받는 의외의 조치가 내려졌다. 이 결과를 쉽게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용은 돈과 똑같다.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얻기는 힘들지만 잃는 것은 순식간이다. (417페이지)

 

별 볼 일 없는 직원 핫카쿠의 고발에 회사가 쉽게 사카도를 대기발령 시킨다? 누가 봐도 의외의 결과에 다들 의문을 품는다. 특히 사카도 대신 영업1과의 과장으로 발령이 난 하라시마는 이 내막이 더 궁금하다. 매사에 낙오자처럼 보이는 핫카쿠가 퇴출당하지 않는 것도, 사카도의 영업 수완이 왜 이런 문제에서 플러스 요인이 되지 않았는지도 궁금하다. 그러다가 발견한 어떤 진실 앞에서 하라시마는 또 다른 임무를 가진다. 사카도가 발굴한 거래처를 바꾸고, 이익만이 목적이 아닌 제대로 된 제품의 보급을 우선으로 하는 태도로 영업에 임한다. 그래도 여전히 하라시마에게는 영업 압박이라는, 영업 일을 하는 이들의 숙명 같은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처음에는 영업하는 회사원들 사이의 암투가 그려지는 건가 했다. 서로 견제하고 질투하면서 저절로 생기는 감정의 골이, 같은 회사 직원들 사이의 존재감 차이를 만들고 노골적인 차별에 노출되어 학대당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물론 그 부분도 맞다. 영업 실적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고, 능력을 인정받으며 회사에서 필요한 인재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그 이면의 것들은 보지 못했다는 걸 나중에서야 안다. 사건이 발생하고 후회하면서. 매출 달성만을 위해 달려가는 동안 어긋난 방식이 끼어들었다는 것을, 그걸 알면서도 그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던 압박을 핑계로 삼을 수 없었다. 이 소설은 처음에 보면 단순히 영업과장이 자기 영업 목표를 채우기 위해 해서는 안 될 일까지 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일을 파헤칠수록 점점 커지는 그림이 두려울 만큼 무서웠다. 사카도가 저지른 일은 개인의 잘못인가 아니면 회사의 묵인인가? 정말 사카도 혼자 개인의 영업 목표를 위해 저지른 일이었던가? 회사는 조직원이 저지른 잘못을 어디까지 책임져줘야 할까? 물음표는 늘어가고 조직은 더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로 남는다.

 

아니다. 사실은 이해하기 어려웠던 게 아니라, 회사의 조직 안에서 내가 어떤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벌어진 일을 이해하거나 해결하기 위한 태도가 달라지는 것 같다. 다 드러내놓고 일을 수습할 것인가, 묵인할 것인가. 가장 궁금하고 의문에 싸인 인물인 핫카쿠가 어떤 활약을 할지 기대되면서도, 막상 뚜껑을 열고 하나씩 확인해갈 때마다 묻고 싶은 게 많아진다. 핫카쿠는 끝까지 도리를 우선에 놓고 회사의 안위보다 정의를 택했지만, 누구라도 그런 선택을 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내부고발이라는 게 현재의 자기 모든 것을 내려놓을 위험을 안고 해야 하는데, 그런 선택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내부고발 비슷한 행동으로 만년 계장으로 살아왔던 핫카쿠였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나 싶다. 이미 한번 해봤기에 더 용기 있게 나설 수 있는 일이었다고, 더 만년 계장이 더 내려놓을 게 뭐가 있겠느냐는 막무가내 정신으로.

 

“나는 대체 회사의 무엇이었을까?” (107페이지)

 

“그런 건 속임수예요.”

하라시마의 가슴속 깊은 곳에 던져진 작은 돌 같은 말이었다. “회사에 필요한 인간 같은 건 없습니다. 그만두면 대신할 누군가가 나와요. 조직이란 그런 거 아닙니까.” (41페이지)

 

출간 반년 만에 일본에서는 드라마로 제작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영화로 개봉했던 소설이라고 한다. (나는 아직 이 드라마도 영화도 못 봤기에 궁금하긴 하다) 영업 매출을 위해 도리도 버릴 수 있는 상황, 내부고발이라는 민감한 주제를 던져놓았기에 더 흥미롭다. 실제 우리가 사회생활 하면서 부딪히는 온갖 일들과 감정이 이 소설 안에 다 들어있다. 사회생활의 희로애락이라고 해야 할까. 생존을 위해 싸워야 하는 우리의 모습을 리얼하게 잘 표현했다. 전작에서도 기가 막히게 적나라하고 공감되는 이야기로 세상의 파도에 휘말리는 인간사를 보는 듯했는데, 이번 작품에서도 그 긴장과 재미, 사회성 짙은 의미를 놓치지 않는다. 추리소설의 새로운 맛을 느끼게 해줄 이케이도 준의 작품 세계에 푹 빠져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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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저녁의 졸림을 이기려고 눈을 부릅뜨면서, 저녁 일일 드라마의 오늘 분량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엄마 얼굴을 보고 있다. 웃음이 난다. 졸리면 그냥 주무시지, 기어코 본방 사수하겠다면서 주인공의 복수를 흥미진진하게 보고 계신다. 일상의 낙이 매일 저녁 방송하는 TV 드라마를 보시는 건데, 그게 그렇게 웃기다. 마치 그걸 보지 않으면 하루를 마무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것인지... 옆에서 조용히 앉아 이 책을 읽고 있다가 가만히 눈을 감고 상상해봤다. 엄마가 돌아가시면 나는 엄마의 무엇을 갖고 싶을까 하고. 저자는 엄마의 유골을 갖고 싶었다는데, 나는 엄마의 무엇을 갖고 싶은지 계속 생각하고 있다.

 

 

제목만 들으면 무슨 스릴러인가 싶겠지만, 유골의 주인이 엄마라는 걸 알게 된다면 놀라움과 궁금증이 먼저 생길 거다.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어야 이런 말이 가능할까. 혹시 경험해본 사람은 조금 알까? 막 화장터에서 나온 유골을 담은 유골함을 손에 들면 따뜻하다. 너무 뜨겁지도 않고 적당한 온도다. 온돌방에 앉아 있는 느낌으로 따뜻하다. 만약 내 엄마의 유골이 그런 느낌이라면, 한 번쯤 그 유골함을 꽉 안고 싶어질 것 같다. 엄마를 안는 기분으로, 이게 마지막이구나 하는 아쉬움을 달래면서 말이다. 사랑하는 엄마를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저자의 저 말을 듣고 나니 궁금해졌다. 얼마나 간절한 마음이어야 엄마의 유골을 먹고 싶다는 생각마저 하게 되는 것일까.

 

저자는 엄마의 유골을 봤을 때 순간적으로 그런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엄마의 유골을 먹고 싶다고. 눈동자가 떨릴 정도로 엽기적인 말로 들리지만, 엄마를 자기 몸의 일부로 만들고 싶었다는 의미를 알게 된다면, 이상하게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문장 그 자체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 순간의 마음이 무엇일지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 된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은 아니지만, 이 강렬한 감정이 부르는 아픔을 알 것 같아서다. 사랑하는 엄마의 부재, 더는 엄마를 볼 수 없다는 슬픔이 어느 정도일지, 한 번쯤은 상상해 보고 싶지 않은가? 상상과 현실의 차이는 어마어마하겠지만,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감정을 알기에는 상상만 한 게 없으니. 나는 저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수시로, 계속 상상한다. 내 엄마와의 마지막을 어떻게 준비하고 맞이해야 하는지를.

일상에서 마주하는 여러 죽음을 볼 때마다, 그 죽음의 대상이 엄마가 될 때를 생각해 본 적이 많다. 특히 언젠가부터 엄마의 병원행이 잦아질 때마다 생각은 극단적인 쪽으로 기운다. 작가 자신이 20대에 겪은 혈액 질환 때문에 엄마의 애정 어린 보살핌을 받았기에, 그 이후로도 엄마의 존재는 남달랐을 것 같다. 저자의 엄마는 위암 말기 선고를 받는다. 아들을 사랑하고, 한없는 애정과 격려를 보내며 아들의 삶을 응원했다. 그런 엄마가 암이라니, 더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의 말기 선고를 받고 나니 이제 엄마의 병을 고치기보다는 엄마의 남은 시간을 행복하게 해드려야 하는 숙제가 남았다. 저자와 애인은 엄마의 병간호를 하고, 긴 시간 엄마를 돌보면서 지쳐갈 때쯤 엄마와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다. 이 글은 저자가 의사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메모해 두던 것이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어떤 순간의 기록이라고 생각하면 그 기록을 읽는 것에서 그만이겠지만, 그 대상이 엄마라면, 부모라면 의미가 달라진다. 더는 볼 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보고 싶은데 볼 수 없다는 게 얼마나 큰 슬픔인지 아는 사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개를 끄덕이면 슬픔에 공감하는 이들, 참 많을 것 같다.

 

늘 함께일 거로 생각했던,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헤어질 시간은 누구에게나 다가온다. 떠나간 이를 기억하며 살아야 하는 게 고통일지 기쁨일지 모르겠다, 아직은. 주변 많은 이의 죽음을 애도했고, 지금도 가까운 이의 백혈병 투병을 지켜보고 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소식을 들을 때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지만, 아직은 그 슬픔을 100% 공감할 그릇을 갖지 못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아니었기에, 그저 누군가의 죽음 때문인 이별을 모르지 않을 것 같은 마음에 가까울 것이다. 그때마다 상상의 시간은 길어진다. 엄마의 죽음을 생각한다. 아마 그들도 이런 마음이겠지 하는 심정을 이해 하고자, 언제가 내가 마주할 엄마의 죽음을 마주하며 가슴을 단단하게 만들고자. 평소 엄마와 얘기하면서도 엄마의 죽음을 빼놓지는 않는다. 작년 말에는 엄마가 죽으면 가고 싶다는 봉안당에 미리 다녀왔다. 조건이 맞으면 좋은 자리에 계약해놓을까 했는데, 아쉽게도 엄마의 종교를 바꿔야만 갈 수 있는 곳이라 포기했다. 외삼촌(엄마의 오빠)이 계셔서 더 마음이 가는 곳이었는데, 종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엄마가 종교를 바꾸지 않는 이상 그곳으로 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은 다른 곳을 찾아보자고 얘기한다. 그곳에서 쉴 주인공인 엄마와 함께 말이다.

 

저자의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저자의 아버지는 뜻밖에 담담해 보였다. 아내의 죽음이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마는, 세상 이치가 다 그렇다는 표정으로 아내를 보내는 모습이 의연했다. 그런 아버지가 술이 늘고, 집안이 지저분해질 정도로 치우지 않고, 일상이 흐트러져 있었다. 겉으로는 자식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는데, 진심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을 보낸 슬픔은 누구나 똑같은 거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슬프지 않은 건 아니었는데 말이다. 저자 형의 모습도 비슷했다. 가장 눈물을 많이 흘리고 슬퍼하는 것으로 보였던 저자에게 시선이 쏠리곤 했는데, 정작 그 주변 사람들의 슬픔을 헤아리지 못했다. 장례식을 치르고 이런저런 정리를 하면서, 남겨진 이들이 감당해야 할 일을 처리하는 것이 먼저 보였는데, 그 이면의 표정을 미처 다 읽지 못했던 거다. 가족을 잃고 슬프지 않은 사람 없고, 엄마의 돌봄에 감사하지 않은 자식 없다. 그러니 엄마와의 영원한 이별은 생애 가장 큰 슬픔일 것이다.

 

 

엄마를 보내고 난 후의 이야기들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여기저기서 발견하는 엄마의 메모들, 엄마가 가꾸던 정원이 시들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의 빈자리를 느낀다. 그러면서도 남겨진 이들은 또다시 주어진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 한 번씩 떠오르는 기억들을 마주해야 하고, 울고 웃으면서 그 시간을 추억해야 한다. 엄마의 강요로 남겨두었던 정자를 꺼내 아이를 낳게 되면서 또 한 번 엄마의 고마움을 느끼고,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해 저마다의 의미를 쌓아간다. 머리로 이해할 수 없더라도, 말론 분명하게 표현할 수 없더라도, 마음이 알고 느끼는 것들을 그렇게 적립하는 시간이었다.

 

몇 십 년을 엄마가 해주시는 밥 먹고 살다가, 이제는 조금씩 엄마와 떨어져서 지내는 연습을 해야 한다. 엄마가 지금보다 덜 늙었을 때 따로 살아볼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 요즘이다. 언젠가 혼자서 지낼 엄마를 생각하니, 작년보다 한 살 더 나이 드신 엄마가 부쩍 더 늙어 보이는 건 왜일까. 같이 살 집을 알아보자고 해도 싫다고 하시고, 따로 살 집을 알아본다고 하니까 투덜투덜 서운해하시고. 하루에도 열두 번씩 변덕을 부리는 엄마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마음이 복잡한 요즘이다. 같이 살자니 자식에게 부담이 될까 봐 싫어하시는 것인지, 따로 살자니 갑자기 혼자 지내는 일상이 겁이 나는 것인지. (사실 나도 많이 무서운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겁이 많아지고, 본인 스스로 결정하는 것보다 자식에게 물어보고 의지하는 모습이 늘어간다. 한때는 이 집의 가장이었던 당신. 이제는 본인이 돌봄을 받는 위치가 되었다는 게 슬프면서도 안도하는 걸 볼 때마다, 그동안 살면서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와 힘듦을 겪었을지 새삼 알겠더라. 그래서 엄마의 지금 변덕을 다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홀가분함과 두려움 사이에서 서성이는 엄마, 당신의 두려움과 떨림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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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위한 되풀이 연말 에디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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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신의 평온을 깼다면
패티 유미 코트렐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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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묻거나 생각하는 경우는 많았어도, ‘왜 살아야 하는지’ 묻거나 생각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비단 나에게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닌 듯했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어느 화두를 중심에 두고 모여 있을 때도, 세상살이 고달픔을 이야기하면서도, ‘왜’가 아니라 ‘어떻게’를 생각해왔다. 어쩌면 살아가는 일에 ‘왜’라는 의문 자체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서일까? 살아간다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고, 그 이유를 떠올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살아가는 방식과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얘기해왔던 게 아니었을까? 모르겠다.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더 모르겠다. 누군가의 삶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이렇게 어려울 거로 생각하지 못했고, 사실은 그 이해를 반드시 해야 하는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개인의 삶을 들여다볼 때 느껴지는 어떤 것, 누구나 살아가는 이유나 방식이 똑같을 수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고나 할까.

 

내가 존재한다. 다른 사람 세상에 내가 존재한다. 나는 공원을 뛰어다니거나 언덕마루로 올라가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었다. 동생의 삶에 내가 있었어! 중요한 존재였단 말이야, 개새끼들아! (225~226페이지)

 

한국에서 입양된 헬렌은 오래전에 양부모의 집을 떠나 뉴욕에서 산다. 양부모의 집에 남아 있던, 입양아인 남동생의 죽음을 전해 듣고 그녀는 양부모의 집으로 향한다. 솔직히 헬렌의 방향이 의외였다. 나는 그녀가 남동생의 죽음 소식을 듣고도 무심할 거로 생각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녀의 성격이 냉정하다고 지레짐작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래전에 떠난 양부모의 집, 그 후로 연락 한번 한 적이 없는 그녀가 남동생이 죽었다고, 그것도 입양된 아이의 죽음에 그렇게 쉽게 마음이 흔들릴 거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굳이 양부모의 집으로 향하려는 의도가 궁금했다. 혹시 남동생의 죽음에 양부모의 역할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 왜 고요하던 그 아이가 자살을 선택했을까 하는 호기심에, 그 죽음의 비밀을 밝히려는 시도가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된 건 아닐 거라고.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내가 쉽게 생각하는 것만큼 따라오지 않았다. 헬렌이 마주한 남동생 죽음의 진실과 그동안 부정적인 마음으로 자리했던 양부모의 모습이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는 게 충격이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은 그대로였다. 넓지만 으스스한 유령의 집 같은 느낌. 구석구석 자리를 차지했던 벌레들과 칙칙함. 검소하다 못해 자린고비 같은 양부모의 성향에 딱 맞는 집의 분위기가 여전한 그 집에서 얼마나 머물 수 있을까 싶었지만, 헬렌은 남동생의 죽음을 밝히기 전까지는 그곳을 떠나지 않으리라 마음먹는다. 그렇게 눈에 들어오는 단서를 하나씩 추적하면서 서른 즈음에 다다른 한 남자의 인생을 재구성한다. 그녀가 알고 있었지만 몰랐을 남동생의 모습을 하나씩 마주할 때마다 더 혼란에 빠진다. 그 녀석은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지내왔던 걸까. 그렇게나 그곳을 떠나고 싶었던 그녀와는 달리 남동생은 그곳밖에 머물 곳이 없었다. 미래에 대해 생각할 수도 없었고, 그 스스로 밖으로 나와 활발한 인생을 살아가지도 못했다. 고여 있는 물처럼, 그곳에서 머문 온갖 벌레들처럼, 그 집의 방 한 칸을 벗어나지 못한 삶이었다. 그런 사람의 죽음이 쉽게 이해가 될 리 없다. 그런 생각으로 시작된 탐정 놀이는 의외의 과정과 결말을 맞이하면서 정리되는 게 더 당황스러웠다. 어느 날 마주한 진실 앞에서 드는 이런 생각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 내가 알던 사람은 누구였지?’ 싶은 놀라움 같은 거. 그때마다 더 절망에 빠지기도 하지 않았던가. 누군가를 안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라는 걸 깨달으면서 말이다.

 

기어코 찾아낼 거로 믿었다. 한 사람의 죽음이 이렇게 흐지부지, 그 이유로 모른 채로 잊히는 게 읽는 나도 싫었다. 부모에게 버려지고 멀리 보내지는,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온갖 차별까지 받아오면서 자랐을 한 인생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는데, 그 이유조차 모른다면 그가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 그러니 온전하게 보내주기 위해서라도 그 죽음의 시작과 끝을 찾아내야 했다. 그 임무를 헬렌이 수행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헬렌 역시 그 역할에 충실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무언가 알지 못했던, 모른 채로 흘러왔던 남동생의 이야기가 조각을 맞춰가면서 더 알 수 없는 상태가 됐다. 그동안 다 안다고 믿어왔던 남동생의 삶은 무엇이었던가.

 

좌절하는 시기에 윤리의 나침반은 흔들릴 수 있으며, 사실 극단적으로 윤리적 자세가 바뀔 수도 있다. 윤리적 자세는 콘크리트 안에 고정돼서는 안 되며, 가끔은 윤리의 나침반을 흔들 필요가 있고, 때로는 파괴해야만 한다. (165페이지)

 

그녀는 처음으로 그의 삶을 알아간다.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한 실패한 삶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아이가 아니라, 그 스스로는 충분히 만족한 삶이었다는 것을 안다. 누군가가 읽어주기를 바라기라도 한듯, PC 휴지통 폴더에서 꺼낸 편지 한 장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양부모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그를 사랑했다. 뿌리를 찾고 싶던 그는 한국의 어머니를 찾기도 했다. 하지만 온전하지 못한 삶은 여전했으며, 그는 그 자체로 자기 인생의 만족을 느끼며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불행하지 않았다. 쓸모 있는 인간으로 남고 싶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삶을 온전히 이루고 떠났다. 그가 가장 바라는 삶이었고, 그가 이룬 삶이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헬렌은 남동생의 삶을 완전히 재구성하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싸우듯이 얻어낸 삶의 평온은 사실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삶의 완전함과 평온을 위해 투쟁하듯 살아가고 있지만, 결국은 누구도 삶의 그 불완전함에서 쉽게 벗어나지는 못한다는 것을. 그 불완전함 속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평온을 얻으며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가 가진 불안을 장착한 채로, 그녀가 애쓰면서 얻으려고 했던 평온을 내려놓으니, 그때 비로소 남동생의 삶이 보였다. 스스로 선택한, 그 자신이 원하는 것을 준비하면서 얻은 죽음이야말로 어른의 선택이라고 믿은 남동생의 방식에 한발 다가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저 불완전하고 지속하는 삶을 마주할 뿐이다.

 

작가 자신의 실제 경험이 있기도 했겠지만, 완전하게 자전적인 이야기는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디까지나 실제에 바탕이 된 감정이 더 큰 이야기를 끌어낸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느 순간의 기억이 기어코 어떤 이야기를 꺼내야만 하게 만들었을지도, 그 순간의 이야기를 한 번쯤은 꺼내야 인생의 다음 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남동생 삶의 재구성을 완결할 수 없던 헬렌의 시도는 그렇게 미완성인 채로 남겨두어도 괜찮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결말이 아니라 어떤 마음을 꺼내놓는 것 자체였을 테니. 남동생의 죽음으로 헤집어놓은 그의 평온을 이제 다시 다독여주리라. 그의 죽음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것이 사실은 아무 의미가 아닌 채로 그의 주변에 있었다고. 그에게는 아름답다고 여긴 그의 삶이 존재했으며 사랑했다. 그것뿐이다. 그가 받아들이고, 이어왔으며, 만족했고, 스스로 꾸렸을 그 삶이 거기 있었을 뿐이다.

 

'내가 당신의 평온을 깼다면 미안해요'는 내가 사과를 할 때 쓰는 말이다. 직장에서는 늘 이 말을 썼는데, 사람마다 아주 다양한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사과 말이다. 미안해요, 제 실수예요, 라는 뜻일 수도 있다. 내가 널 망쳐주겠어, 나쁜 년, 이런 듯을 수도 있다. (117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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