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신의 평온을 깼다면
패티 유미 코트렐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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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묻거나 생각하는 경우는 많았어도, ‘왜 살아야 하는지’ 묻거나 생각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비단 나에게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닌 듯했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어느 화두를 중심에 두고 모여 있을 때도, 세상살이 고달픔을 이야기하면서도, ‘왜’가 아니라 ‘어떻게’를 생각해왔다. 어쩌면 살아가는 일에 ‘왜’라는 의문 자체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서일까? 살아간다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고, 그 이유를 떠올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살아가는 방식과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얘기해왔던 게 아니었을까? 모르겠다.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더 모르겠다. 누군가의 삶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이렇게 어려울 거로 생각하지 못했고, 사실은 그 이해를 반드시 해야 하는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개인의 삶을 들여다볼 때 느껴지는 어떤 것, 누구나 살아가는 이유나 방식이 똑같을 수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고나 할까.

 

내가 존재한다. 다른 사람 세상에 내가 존재한다. 나는 공원을 뛰어다니거나 언덕마루로 올라가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었다. 동생의 삶에 내가 있었어! 중요한 존재였단 말이야, 개새끼들아! (225~226페이지)

 

한국에서 입양된 헬렌은 오래전에 양부모의 집을 떠나 뉴욕에서 산다. 양부모의 집에 남아 있던, 입양아인 남동생의 죽음을 전해 듣고 그녀는 양부모의 집으로 향한다. 솔직히 헬렌의 방향이 의외였다. 나는 그녀가 남동생의 죽음 소식을 듣고도 무심할 거로 생각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녀의 성격이 냉정하다고 지레짐작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래전에 떠난 양부모의 집, 그 후로 연락 한번 한 적이 없는 그녀가 남동생이 죽었다고, 그것도 입양된 아이의 죽음에 그렇게 쉽게 마음이 흔들릴 거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굳이 양부모의 집으로 향하려는 의도가 궁금했다. 혹시 남동생의 죽음에 양부모의 역할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 왜 고요하던 그 아이가 자살을 선택했을까 하는 호기심에, 그 죽음의 비밀을 밝히려는 시도가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된 건 아닐 거라고.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내가 쉽게 생각하는 것만큼 따라오지 않았다. 헬렌이 마주한 남동생 죽음의 진실과 그동안 부정적인 마음으로 자리했던 양부모의 모습이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는 게 충격이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은 그대로였다. 넓지만 으스스한 유령의 집 같은 느낌. 구석구석 자리를 차지했던 벌레들과 칙칙함. 검소하다 못해 자린고비 같은 양부모의 성향에 딱 맞는 집의 분위기가 여전한 그 집에서 얼마나 머물 수 있을까 싶었지만, 헬렌은 남동생의 죽음을 밝히기 전까지는 그곳을 떠나지 않으리라 마음먹는다. 그렇게 눈에 들어오는 단서를 하나씩 추적하면서 서른 즈음에 다다른 한 남자의 인생을 재구성한다. 그녀가 알고 있었지만 몰랐을 남동생의 모습을 하나씩 마주할 때마다 더 혼란에 빠진다. 그 녀석은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지내왔던 걸까. 그렇게나 그곳을 떠나고 싶었던 그녀와는 달리 남동생은 그곳밖에 머물 곳이 없었다. 미래에 대해 생각할 수도 없었고, 그 스스로 밖으로 나와 활발한 인생을 살아가지도 못했다. 고여 있는 물처럼, 그곳에서 머문 온갖 벌레들처럼, 그 집의 방 한 칸을 벗어나지 못한 삶이었다. 그런 사람의 죽음이 쉽게 이해가 될 리 없다. 그런 생각으로 시작된 탐정 놀이는 의외의 과정과 결말을 맞이하면서 정리되는 게 더 당황스러웠다. 어느 날 마주한 진실 앞에서 드는 이런 생각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 내가 알던 사람은 누구였지?’ 싶은 놀라움 같은 거. 그때마다 더 절망에 빠지기도 하지 않았던가. 누군가를 안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라는 걸 깨달으면서 말이다.

 

기어코 찾아낼 거로 믿었다. 한 사람의 죽음이 이렇게 흐지부지, 그 이유로 모른 채로 잊히는 게 읽는 나도 싫었다. 부모에게 버려지고 멀리 보내지는,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온갖 차별까지 받아오면서 자랐을 한 인생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는데, 그 이유조차 모른다면 그가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 그러니 온전하게 보내주기 위해서라도 그 죽음의 시작과 끝을 찾아내야 했다. 그 임무를 헬렌이 수행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헬렌 역시 그 역할에 충실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무언가 알지 못했던, 모른 채로 흘러왔던 남동생의 이야기가 조각을 맞춰가면서 더 알 수 없는 상태가 됐다. 그동안 다 안다고 믿어왔던 남동생의 삶은 무엇이었던가.

 

좌절하는 시기에 윤리의 나침반은 흔들릴 수 있으며, 사실 극단적으로 윤리적 자세가 바뀔 수도 있다. 윤리적 자세는 콘크리트 안에 고정돼서는 안 되며, 가끔은 윤리의 나침반을 흔들 필요가 있고, 때로는 파괴해야만 한다. (165페이지)

 

그녀는 처음으로 그의 삶을 알아간다.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한 실패한 삶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아이가 아니라, 그 스스로는 충분히 만족한 삶이었다는 것을 안다. 누군가가 읽어주기를 바라기라도 한듯, PC 휴지통 폴더에서 꺼낸 편지 한 장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양부모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그를 사랑했다. 뿌리를 찾고 싶던 그는 한국의 어머니를 찾기도 했다. 하지만 온전하지 못한 삶은 여전했으며, 그는 그 자체로 자기 인생의 만족을 느끼며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불행하지 않았다. 쓸모 있는 인간으로 남고 싶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삶을 온전히 이루고 떠났다. 그가 가장 바라는 삶이었고, 그가 이룬 삶이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헬렌은 남동생의 삶을 완전히 재구성하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싸우듯이 얻어낸 삶의 평온은 사실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삶의 완전함과 평온을 위해 투쟁하듯 살아가고 있지만, 결국은 누구도 삶의 그 불완전함에서 쉽게 벗어나지는 못한다는 것을. 그 불완전함 속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평온을 얻으며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가 가진 불안을 장착한 채로, 그녀가 애쓰면서 얻으려고 했던 평온을 내려놓으니, 그때 비로소 남동생의 삶이 보였다. 스스로 선택한, 그 자신이 원하는 것을 준비하면서 얻은 죽음이야말로 어른의 선택이라고 믿은 남동생의 방식에 한발 다가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저 불완전하고 지속하는 삶을 마주할 뿐이다.

 

작가 자신의 실제 경험이 있기도 했겠지만, 완전하게 자전적인 이야기는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디까지나 실제에 바탕이 된 감정이 더 큰 이야기를 끌어낸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느 순간의 기억이 기어코 어떤 이야기를 꺼내야만 하게 만들었을지도, 그 순간의 이야기를 한 번쯤은 꺼내야 인생의 다음 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남동생 삶의 재구성을 완결할 수 없던 헬렌의 시도는 그렇게 미완성인 채로 남겨두어도 괜찮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결말이 아니라 어떤 마음을 꺼내놓는 것 자체였을 테니. 남동생의 죽음으로 헤집어놓은 그의 평온을 이제 다시 다독여주리라. 그의 죽음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것이 사실은 아무 의미가 아닌 채로 그의 주변에 있었다고. 그에게는 아름답다고 여긴 그의 삶이 존재했으며 사랑했다. 그것뿐이다. 그가 받아들이고, 이어왔으며, 만족했고, 스스로 꾸렸을 그 삶이 거기 있었을 뿐이다.

 

'내가 당신의 평온을 깼다면 미안해요'는 내가 사과를 할 때 쓰는 말이다. 직장에서는 늘 이 말을 썼는데, 사람마다 아주 다양한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사과 말이다. 미안해요, 제 실수예요, 라는 뜻일 수도 있다. 내가 널 망쳐주겠어, 나쁜 년, 이런 듯을 수도 있다. (117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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