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개의 회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6
이케이도 준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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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말했다. “일이란 말이지, 돈을 버는 게 아니야. 사람들한테 도움이 되는 거야. 사람들이 기뻐하는 얼굴을 보면 즐겁거든. 그렇게 하면 돈은 나중에 따라와. 손님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장사는 망해.” (365페이지)

 

전문적인 분야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일반 독자가 이야기 속 그 전문성을 소화하기에는 한계를 느낄 때가 있다. 그런데도 기어코 이야기 속 그 전문 분야를 즐기면서 재미와 이해를 만들어버리는 작가가 바로 이케이도 준이 아닌가 싶다. 전작 『한자와 나오키』를 읽으면서도 은행원이라는 전문직의 이면을 보는 것 같았다. 금융권 종사자를 부러워하면서도 그 분야의 민낯을 보는 게 놀라웠다. 사실 가족이 예전에 은행에 다닌 적이 있어서 어느 정도 그 분위기를 예상한 부분도 있지만, 근무 기간이 길지 않았기에 제대로 들은 적은 없었다. 궁금하면서도 일반인은 볼 기회가 없었을 은행의 이야기가 나름 신선하고 무섭고 그랬는데, 이번에는 영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회사가 매출을 올리기 위해 어떤 짓까지 하는지, 직원은 회사의 어떤 부분으로 존재하는지, 큰 문제가 발생했을 때 무엇을 1순위로 고려하면서 해결하려고 하는지 들려준다. 그리고 그 안에서 존재하는 회사원은 같은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한다. 나라면, 모두가 감추려고 하는 사건의 내부고발자가 될 수 있을까?

 

도쿄겐덴의 회의 시간. 말이 회의지 영업 실적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검사받는 시간이다. 누구라도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와중에 졸고 있는 이가 있으니, 그는 만년 계장 핫카쿠다. 이 회사에서 무서운 사람이 없나 보다. 습관처럼 회의 시간에 졸다가 급기야 발표를 망치기까지 했다. 그와 반대로 핫카쿠가 소속된 영업1과의 과장 사카도는 영업부의 에이스다. 회사의 누구에게나 칭찬받고 부러움을 산다. 사카도는 발표도 망치고 영업도 망치는 핫카구에게 폭언을 퍼붓는다. 반면 계속 사카도와 비교가 되는 영업2과장의 하라시마는 고통스럽다. 회사에서 필요 없는 인간이 된 것만 같다. 영업이 쉽지만은 않은데,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매번 완벽하게 해내는 사카도가 부럽다. 실적 압박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게 영업부의 운명이라지만, 이거 어떻게 압박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을지 생각하기도 한다. 며칠 후, 핫카쿠는 사카도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고발한다. 회사가 마냥 사카도 편일 것 같은데, 사카도가 대기발령을 받는 의외의 조치가 내려졌다. 이 결과를 쉽게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용은 돈과 똑같다.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얻기는 힘들지만 잃는 것은 순식간이다. (417페이지)

 

별 볼 일 없는 직원 핫카쿠의 고발에 회사가 쉽게 사카도를 대기발령 시킨다? 누가 봐도 의외의 결과에 다들 의문을 품는다. 특히 사카도 대신 영업1과의 과장으로 발령이 난 하라시마는 이 내막이 더 궁금하다. 매사에 낙오자처럼 보이는 핫카쿠가 퇴출당하지 않는 것도, 사카도의 영업 수완이 왜 이런 문제에서 플러스 요인이 되지 않았는지도 궁금하다. 그러다가 발견한 어떤 진실 앞에서 하라시마는 또 다른 임무를 가진다. 사카도가 발굴한 거래처를 바꾸고, 이익만이 목적이 아닌 제대로 된 제품의 보급을 우선으로 하는 태도로 영업에 임한다. 그래도 여전히 하라시마에게는 영업 압박이라는, 영업 일을 하는 이들의 숙명 같은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처음에는 영업하는 회사원들 사이의 암투가 그려지는 건가 했다. 서로 견제하고 질투하면서 저절로 생기는 감정의 골이, 같은 회사 직원들 사이의 존재감 차이를 만들고 노골적인 차별에 노출되어 학대당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물론 그 부분도 맞다. 영업 실적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고, 능력을 인정받으며 회사에서 필요한 인재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그 이면의 것들은 보지 못했다는 걸 나중에서야 안다. 사건이 발생하고 후회하면서. 매출 달성만을 위해 달려가는 동안 어긋난 방식이 끼어들었다는 것을, 그걸 알면서도 그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던 압박을 핑계로 삼을 수 없었다. 이 소설은 처음에 보면 단순히 영업과장이 자기 영업 목표를 채우기 위해 해서는 안 될 일까지 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일을 파헤칠수록 점점 커지는 그림이 두려울 만큼 무서웠다. 사카도가 저지른 일은 개인의 잘못인가 아니면 회사의 묵인인가? 정말 사카도 혼자 개인의 영업 목표를 위해 저지른 일이었던가? 회사는 조직원이 저지른 잘못을 어디까지 책임져줘야 할까? 물음표는 늘어가고 조직은 더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로 남는다.

 

아니다. 사실은 이해하기 어려웠던 게 아니라, 회사의 조직 안에서 내가 어떤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벌어진 일을 이해하거나 해결하기 위한 태도가 달라지는 것 같다. 다 드러내놓고 일을 수습할 것인가, 묵인할 것인가. 가장 궁금하고 의문에 싸인 인물인 핫카쿠가 어떤 활약을 할지 기대되면서도, 막상 뚜껑을 열고 하나씩 확인해갈 때마다 묻고 싶은 게 많아진다. 핫카쿠는 끝까지 도리를 우선에 놓고 회사의 안위보다 정의를 택했지만, 누구라도 그런 선택을 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내부고발이라는 게 현재의 자기 모든 것을 내려놓을 위험을 안고 해야 하는데, 그런 선택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내부고발 비슷한 행동으로 만년 계장으로 살아왔던 핫카쿠였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나 싶다. 이미 한번 해봤기에 더 용기 있게 나설 수 있는 일이었다고, 더 만년 계장이 더 내려놓을 게 뭐가 있겠느냐는 막무가내 정신으로.

 

“나는 대체 회사의 무엇이었을까?” (107페이지)

 

“그런 건 속임수예요.”

하라시마의 가슴속 깊은 곳에 던져진 작은 돌 같은 말이었다. “회사에 필요한 인간 같은 건 없습니다. 그만두면 대신할 누군가가 나와요. 조직이란 그런 거 아닙니까.” (41페이지)

 

출간 반년 만에 일본에서는 드라마로 제작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영화로 개봉했던 소설이라고 한다. (나는 아직 이 드라마도 영화도 못 봤기에 궁금하긴 하다) 영업 매출을 위해 도리도 버릴 수 있는 상황, 내부고발이라는 민감한 주제를 던져놓았기에 더 흥미롭다. 실제 우리가 사회생활 하면서 부딪히는 온갖 일들과 감정이 이 소설 안에 다 들어있다. 사회생활의 희로애락이라고 해야 할까. 생존을 위해 싸워야 하는 우리의 모습을 리얼하게 잘 표현했다. 전작에서도 기가 막히게 적나라하고 공감되는 이야기로 세상의 파도에 휘말리는 인간사를 보는 듯했는데, 이번 작품에서도 그 긴장과 재미, 사회성 짙은 의미를 놓치지 않는다. 추리소설의 새로운 맛을 느끼게 해줄 이케이도 준의 작품 세계에 푹 빠져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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