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얻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심을 버리고 가면을 쓰는 거고. 그 가면을 벗기는 게우리 일이야. 거짓의 가면을 벗기면 진실한 얼굴이 나온다. 사람을 믿지 말고 원칙을 믿어라." (신데렐라 포장마차 2, 213페이지)

 

추리소설의 다양한 소재가 있겠지만, 음식이 추리에 끼어든다면 더 흥미진진해지는 건 왜일까. 추측이지만, 아무래도 음식은 우리의 일상에서 익숙한 것이고 그 익숙함 속에 녹아든 추리를 만나는 건 평범하면서도 흥미로운 사건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 이상한 야간열차에 탄 것처럼, 이 소설은 밤에 한 시간 동안만 문을 여는 푸드 트럭이 장소가 된다. 그러니, 한 시간만 영업하는 그곳에서 무슨 음식이 등장하며 독자를 그들의 미스터리한 사건에 초대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1권에서 시작된 이 시리즈의 매력은 2권에서 좀 더 깊게 들어가는 듯하다. 이미 소개 글에서도 나와 있듯이 장편 시리즈라고 한다. (사실 1권 먼저 읽어야 하는데, 신간이니까 이 책을 먼저 읽어보고 싶다는 간절함에...) 등장인물은 똑같고, 그들에게 던져진 사건이 조금 더 깊이를 더한다. 뭔가 더 파고들어야만 확인되는 결정적인 단서를 만났다고 해야 할까.

 

유치장에 갇힌 프랑수아. 그는 한국에서 프랑스 요리 푸드트럭을 운영하는 셰프이자,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건의 단서를 쥔 인물이다. 그가 왜 유치장에 들어갔는지는 모른 채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유치장 밖에서 프랑수아를 기다리는 민간조사원 김 건과 프랑스식당의 수셰프 소주희. 그리고 이들의 기다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프랑수아를 가둔 채로 작은 실마리라도 찾아내고 싶은 형사 신영규. 프랑수아는 김 건과 소주희에게 푸드 트럭에 있는 엽서 한 장으로 무언가를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갇힌 몸이라 어쩔 수 없으니, 또 과거는 모두 잊은 김 건이 현재의 기억력은 최고로 달리고 있으니 소주희와 콤비가 되어 조금씩 사건에 다가간다. 그 사이 김성기 전 장관이 방송 인터뷰 중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전 국민이 보고 있던 상태라 이 사건은 결코 가볍지 않다. 신영규 형사 팀은 이 사건이 단순 자살이 아님을 느끼고 유력한 용의자이자 김성기 전 장관의 비서 같은 강하라를 취조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김성기 전 장관의 자살로 사건은 마무리되고 강하라는 유유히 빠져나간다. 그리고 프랑수아에게 단서를 얻은 김 건과 소주희는 하나씩 단서를 추적하고,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사건의 윤곽을 좁혀나간다.

 

형사, 민간조사원, 셰프, 추리 소설가 등 이들이 모여드는 이유는 알겠는데, 정작 무슨 사건인지 제대로 알 수는 없었다. 사건도 모른 채로 단서만으로 퍼즐을 풀듯이 맞춰가는 뭔가가 오히려 더 궁금해질 지경이다. 그러면서 제각각 개성이 뚜렷한 이들이 모이면 어떤 사건이라도 해결하지 못할 이유가 없겠다는 기대감이 생기는데, 그들이 추적하는 단서에는 음식이 중심이 된다. 이번 2권에서는 1권에 이어 프랑스 음식이 등장한다. 서대기를 주재료로 하는 '솔 베로니크'와 빛나는 칵테일이라는 뜻의 '글로우 칵테일'이다. 단편처럼 두 가지 음식을 소재로 사건을 푸는 이야기 두 편이 담겼다. 처음에는 별도의 이야기로 짧고 굵게 끝나는 건가 싶었는데, 다른 메뉴가 등장하면서도 처음 사건과 연결이 되는 방식이다. '솔 베로니크'로 추적한 음식에 얽힌 사건을 가지고 가면서, 뒤이어 '글로우 칵테일'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건이 따라간다. 물론 사건을 일으키는 주체는 다르지만, 그 사건을 해결하는 사람들은 같다. 첫 번째 사건에 이어 두 번째 사건을 만난 독자에게는 아리아 변호사라는 새로운 인물이 합류하면서 이들에게 사건 해결 어벤져스라는 이름도 붙일 수 있게 된다.

 

특히 2권에서는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 곳곳에서 등장인물들의 과거가 조금씩 드러나는데, 아마 1권에서 시원하게 확인하지 못했던 그들의 배경이 2권에서 들려줌으로써 이들이 가진 상처와 인생을 사건 해결에 더 열정적으로 다가가게 한다. 마치 숨어 있는 비밀과 미스터리를 풀어가면서,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사건도 밝혀주고 등장인물들의 삶도 나아가게 하는 의미가 있을 듯하다. 아버지가 연루된 비밀조직 '레메게톤'의 사건을 밝히려는 프랑수아, 기억을 잃으면서도 그 재능을 뽐내는 김 건, 어머니의 후계자보다 프랑스 음식에 끌린 소주희, 그 누구도 끼어들 틈이 없이 완벽한 사건 해결을 위해 달리는 신영규,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하여 그 활약을 기대하게 하는 아리아. 이들 앞에 닥칠 진짜 사건이 뭔지 알 수 없어서 그 기대감이 더 커지는 듯하다. 얽히고설키면서 서로의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이들이지만, 그 사이사이에 끼어드는 것처럼 하나씩 새로운 인물이 새로운 가능성을 가지고 등장하면서 분위기는 더 고조된다. 온갖 추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우면서, 지금 눈앞에서 마주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의 진실을 파헤치고 싶어지게 한다.

 

프랑수아가 아버지의 친구를 찾아낸 순간 사건은 끝난 것 같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사건은 묘하게 그 끝이 보이지 않게 붙잡고 있다. 게다가 추방당할 뻔한 프랑수아가 위기를 모면하면서 다시 신포(신데렐라 포장마차)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한국을 구하기 위해 왔다는 프랑수아가 정면에서 마주할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지...

 

페이지가 너무 잘 넘어가면서도, 도대체 이 사건은 언제 시작되는 건가 싶은 마음에 자꾸 투덜거렸다. 전 장관이 방송 도중 죽어버리지를 않나, 살인자로 보이는 여자가 타이밍 좋게 빠져나가지를 않나, 추레한 남자 한 명이 비행기에서 묘하게 분위기를 바꾸지를 않나, 가면 하나 쓰고 인생 바꾸려는 여자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지를 않나. 무엇 하나 시선을 끌지 않는 게 없다. 서로 다른 사건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에 한 지점으로 모여드는 방식이 추리소설의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으면서도 어쩌면 다른 분위기를 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새로운 시리즈의 주인공들이 더 탄탄하게 사건을 마주하게 되었으면 하는 성장의 시간 같기도 하고, 언젠가 이 사건이 완벽하게 마무리될 때는 이들이 가진 상처들 모두 깨끗이 나아서 그들이 처리한 사건처럼 깔끔해질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마지막에 숨어서 보고 있던 '독 예술가'의 정체가 궁금하기도 하고, 아리아 변호사의 합류가 소설을 어디로 끌고 갈지도 궁금하다. 무엇보다 '레메게톤'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가장 궁금하겠지. 2권이 끝인가 싶었는데, 이야기가 점점 열린 결말처럼 보여서 이게 뭔가 싶었는데, 3권이 이어진다는 갈증 나는 마침표로 끝난다. 아우~

 

빨리 1권 마무리 하고 3권 기다려야겠다. 작가님, 빨리 3권 내놔요. 롸잇 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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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도키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9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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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 어렵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다. 소설이니까 가능한 설정이라고 하지만, 누군가는 꿈에서 만날 수 있는 장면들 말이다. 인생의 절묘한 순간에 나타나 나를 옳은 길로 이끌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이 나이에 미래에서 온 자식 같은 건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 밤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다. 내가 미처 모르고 지나치기만 했던 소중한 순간과 기회를 지금이라도 알아차릴 수 있게.

 

그레고리우스 증후군으로 곧 세상과 이별할 아들이 눈앞에 있다. 다쿠미와 아내는 그 아들의 운명을 일찌감치 알아차리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런데도 쉽게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가족이니까, 자식이니까. 그러다가 혼수상태처럼 빠져있는 아들 도키오의 모습을 보면서 다쿠미는 아내에게 오래전 이야기를 꺼낸다.

 

스물 세 살의 다쿠미. 오래 일하지도 못하고, 남들과 타협하며 살아갈 줄도 모른다. 그러니 인생은 언제나 어긋난 것처럼 여기게 되고, 항상 세상을 탓했다. 언제나 '큰 거 한 방'을 노래하며 인생이 뒤바뀔 날만 기다린다. 하지만 세상은 그가 생각하는 것만큼 쉽지 않다. 일확천금은 말 그대로 우연히 찾아오는 어느 순간일 테다. 지금 다쿠미에게 필요한 건 인내심과 노력으로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뿐인데, 그는 오늘도 홧김에 일을 그만둔다. 그때 그의 앞에 나타난 도키오. 어디에서 온 청년인지 알 수 없지만, 이상하게 다쿠미에 관해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뿐. 자연스럽게 곁을 맴돌며 도키오는 다쿠미의 일상에 스며든다. 그러다가 다쿠미의 애인 지즈루가 사라지는 일이 생기고, 도키오와 다쿠미는 사라진 지즈루를 찾으러 다닌다.

 

두 젊은 남자가 한 여자를 찾아다니는 로드무비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소설은 단순히 흥미로움만 전하지는 않는다. 다쿠미와 도키오와 다니는 그 길의 그 모든 순간에 의미를 부여한다. 현재 그의 삶이 어떻게 시작되고 이어져 왔는지 찾아다니는 여정이었으니까. 현재의 다쿠미는 그의 아내가 희귀병을 유전으로 가지고 있으며, 그들에게 아이가 태어난다면 또 그 병을 가지고 태어날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아내를 설득 시켜 결혼에 이르고, 아이가 생겼다는 걸 알았을 때도 낳기에 이른 건 모두 과거의 어느 시점에 도키오를 만났기 때문이다.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지금 내 아들이 과거의 나에게 다녀간 적이 있다는 게 쉽게 믿어지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다쿠미 부부는 믿는다. 지금 뇌신경이 죽어가면서 누워있는 이 아이라면, 분명 아버지의 흐트러진 청춘을 바로 잡아줄 수도 있을 것 같은 믿음이 저절로 생긴다.

 

그렇게 과거에서 만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이야기다. 부모와 자식의 사랑이 바탕이 되어, 현재에 이른 이 가족의 역사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생각해보면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싶으면서도, 혹시 나에게도 와줄 수 있는 기적이면 좋겠다는 바람이 동시에 생긴다. 미래에서 온 나의 아이가, 지금의 내가 잘못 사는 것을 자꾸만 멈추게 하려고 애쓰는 일. 처음에는 왜 이러나 싶어서 거추장스럽고 귀찮을지도 모르지만, 이상하게 서서히 녹아들고 동화되어 이 아이가 하는 말들에 저절로 신뢰가 생길 때 어떤 마음일까 싶다. 자꾸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뭐가 이상한지는 모르겠고, 어떤 식으로든 내 인생이 좀 더 적극적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느낄 때 당황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 방향이 나쁘지는 않다고 하는 마음이라면 더 믿어도 좋겠지. 상대가 의심스럽기도 하고, 종종 이해하지 못할 이상한 얘기를 하더라도 말이다. 지금 이 순간의 진실을 아주 먼 훗날에 알게 되더라도, 지금은 역시 눈앞의 시간을 제대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게 중요한 거겠지.

 

"내일만이 미래가 아냐. 그건 마음속에 있어. 그것만 있으면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어. 그걸 알았기에 당신 어머니는 당신을 낳은 거야." (396페이지)

 

읽다 보면 얼핏 장르가 궁금해질 수도 있는 이야기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걸 보면 판타지답기도 하고, 다쿠미와 도키오의 우연한(?) 만남이 만들어낸 결과를 보면 감동 드라마 같기도 하다. 자기를 떠난 애인을 찾아 헤매는 걸 보면 연애소설 같기도 하지만, 지즈루와 함께 떠난 오카베를 찾기까지의 과정과 이유를 보면 추리소설 같기도 하다. 결국은 이 모든 조각이 모여 완성해가는, 한 사람이 인간다움과 세상을 배우며 성장해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별을 앞둔 아버지와 아들의 기적 같은 시간 여행에 독자가 편승해, 오늘을 사는 이유를 묻는 것 같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미래가 우리를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어주는지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가 '지금'이라고 부르는 오늘 이 순간도 미래이면서, 우리가 만드는 삶의 한 조각이면서, 우리의 행복을 그리는 시간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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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이동기 영어 실전동형 모의고사 Vol.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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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선재국어 한 권으로 정리하는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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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내가, 언젠가 결혼을 한다면 딱 여동생만큼만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 정도로 결혼생활의 이상향을 보여주었던 여동생이 이혼을 언급했을 때는 충격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여동생이 그런 생각을 할 거로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다. 더군다나 그 이유가 ‘시’자 붙은 사람들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역시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절망적이었다. 역시 시월드의 굴레는 벗어날 수 없는, 며느리의 고통 영역이었던가 싶어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

 

이미 영화에서 보여준 김진영과 시어머니의 갈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보였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적응하면서 살아가기에도 힘든 게 결혼생활인데, 그 결혼생활이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의 관계에 머물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 때문에 더 힘들어진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직도 답을 모르겠다. 그 어려운 문제가 어떤 것인지 이 고부가 보여준 것이다. 처음에는 좀 충격이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이런 대화(라고 쓰고 싸움이라고 읽는다)를 한다는 게 놀라웠다. 누가 봐도 ‘감히’ 시어머니에게 ‘대드는’ 며느리라고 여길 테니까 말이다. 한편으로는 왜 이런 충돌이 계속되어야 하는지 그 시작점을 찾게 되더라.

 

남편은 아내의 입에서 직접 어른들에 대한 거부와 부정과 분노가 쏟아져 나오지 않도록 해줘야 한다. 자식과 오래 알아온 부모님은 자기 자식의 허물에 더 너그럽다. 남편의 중재는 그렇게 간단한 이치에서 필요한 것이다. (슬기로운 B급 며느리 생활 173페이지)

 

행복해지자고 결혼했다.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이 차곡차곡 만들어갈 하나의 가정을 상상하고 나아가고자 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시작으로 만들어져야 할 하나의 가정이 주변 사람들의 개입으로 전쟁터가 됐다. 이 전쟁에서 이긴 사람은 없다. 모두 상처 입고 나뒹굴어 피를 흘리고 있을 뿐이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전쟁의 시작이 ‘간섭’과 ‘관심’의 차이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언제 어디서나 같을 말을 오랫동안 해왔다. ‘간섭’과 ‘관심’은 한 끗 차이라고, 그 한 끗의 차이는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내가 건네는 게 관심이어도 상대가 받아들일 때 간섭이라고 느끼면 그건 간섭이라고 말하곤 했다. 내가 보이는 관심이 상대가 부담스럽고 과하다고 여기면 불편해진다. 그럼 나에게서 나간 관심은 간섭으로 모습을 바꾸어 상대에게 도착했다는 말밖에는 안 된다. 그러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유지되어야 하는데, 그게 시월드와 며느리 사이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믿는다.

 

며느리 김진영은 남편 선호빈과 함께 두 사람이 주축이 되는 가정을 이루어가고자 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부모에게 독립하지 못한 두 사람은 부모의 관심 안에 있었고, 부모는 그런 두 사람의 삶에 관여하고 계속 보살펴야 할 대상으로 여긴 듯하다. 특히 시어머니는 아들의 인생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아들 며느리의 태도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던 거로 보인다. 한번 시작된 김치 건네기는 언제나 싸움과 분노의 발단이 되었고, 며느리의 삶을 좌지우지해도 된다고 생각한 시어머니는 개인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집안의 화장대 위치까지도 간섭하며 계속 말하는 것이었겠지.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의 며느리 삶을 조목조목 따져가면서 보는 경우가 많아졌다. 사실 며느리로 살아가는 부조리함을 말하는 게 이 책이 처음도 아니지 않은가. 앞서 만난 몇 권의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몇 가지가 있다. ‘라떼’를 마시면서 강요하는 과거 여성의 삶이 충돌을 일으킨다. 나 때는 말이야... 시월드의 모든 말에 복종하고 며느리는 그 집안의 하녀처럼 살아온 시절의 이야기. 그 시절을 언급하고 강요하면서 따라주지 않는 며느리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기 시작하면 갈등은 시작된다. 하지만 왜 그 시대가 기준이 되어야 할까 이해하기 어렵다. 그 시대의 며느리 모습은 잘못된 건데, 왜 그 모습이 기준이 되어 똑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게 갈등의 발단이 되어 끝이 없는 전쟁을 일으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그러니까. 서로가 인간적으로 존중받고 살아가야 하는 지금의 모습을 찾아야 하는 게 맞다.

 

사람들은 영화 〈B급 며느리〉보고 거의 두 가지 평을 내놓는다. 저런 며느리 얻으면 큰일 나겠다, 아니면 저런 시어머니 때문에 이혼하는 거다, 뭐 이런 비슷한 의미의 말들을 꺼낸다. 사실 이 책을 읽어도 비슷한 느낌이긴 하다. 이 책이 영화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니, 영화의 연장선에 있으니까. 하지만 왜 그 상황이 시작되었는지 말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나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전쟁이 시작될 때마다, 항상 그 시작을 찾고 싶었는데 말이다. 며느리 김진영이 정말 이상한 사람일까? 그냥 인간 김진영으로 살다가 선호빈의 아내 김진영이라는 호칭이 하나 늘었을 뿐인데, 그녀를 둘러싼 환경과 상황은 낯설고 힘들어졌다. 그녀의 존재는 사라지고, 새롭게 형성된 가족 구성원의 하나로 머물기를 바라는 시선이 고통스러웠다. 그 고통을 없애고자,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말들은 ‘B'급으로 취급받았다. 싸우고, 절연하고, 또 싸우고, 화해하면서도 분노의 찌꺼기는 남아있고.

 

막장드라마만 암 유발하는 건 아닌 듯하다. 며느리와 시월드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고구마 한 박스 그냥 삼킨 것처럼 답답하다. 그럴 때마다 궁금하다. 우리 엄마와 나의 올케 사이에는 어떤 감정이 흐르고 있을까 싶다. 엄마에게도 ‘시’자의 냄새가 풍길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를 조금 다독거린다. 엄마에게도 딸이 다섯이나 있다고, 사람들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있어야 그나마 좋은 관계가 유지된다고. 괜히 친해지려고 애쓰고, 잘하려고 아등바등하다가 지레 질려 나가떨어진다고. 안부 전화 한번 안 한다고 투덜거리지 말고 안부가 궁금한 사람이 전화하면 되는 것이고, 쓸데없이 전화 타령하지 말고 용건 있을 때 통화하면 되는 것이라고. 적당한 관심은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는 것이겠지만 적당한 선을 넘는 간섭은 서로를 피곤하게 하는 것이니 조금만 무관심해지라고 말이다. 며느리 김진영의 시어머니를 보면서 느낀 건, 아들 며느리에게 관심을 넘어선 집착에 스스로 분노를 쌓아가는 것 같았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된 아들의 자리를 인정하지 못하고, 어디까지나 당신이 돌봐주면서 길렀던 아들의 모습으로만 뿌리박혀 있으니 그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고통 속에 자기를 가두게 되어버린 건 아닐까 싶은. 무리하면 탈이 난다. 마음이 넘쳐도 탈이 난다.

 

과연 중간이 있었을까? 이제 보니 우리는 중간 지점에서 만난 게 아닌 것 같다. 각자 자신이 서 있던 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성숙한 관계는 ‘나를 위해 네가 변해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줘’라고 말하는 것이고, 우리는 그동안 서서히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겪었던 것 같다. 눈치채지 못하게, 서서히, 젖어들듯이 말이다. (슬기로운 B급 며느리 생활 238페이지)

 

읽을수록 짠하다. 그러면서도 시원하다. 며느리니까 참아야 하는 건 없다. 하고 싶은 말 담아두기만 할 이유도 없다. 인간 대 인간으로, 새로 어우러진 가족이 된 일원으로 서로를 대하면 되는 일이다. 며느리 김진영이 투쟁하듯 이뤄낸 현재의 관계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아진 관계의 모습을 보니 이 투쟁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의미 있는 전쟁이었다.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며느리 이미지가 바뀌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리’라고 하면서 ‘의무’를 강요하지 말고, 서로를 존재 자체로 인정해주면서 같이 살아가야 할 일이다.

 

수신지 작가의 『며느라기』가 드라마로 만들어진다고 해서 기다리는 중이다. 이미 웹툰이나 후속작으로 그 후의 이야기까지 읽었지만, 아무리 많이 봐도 다시 보게 된다.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너무 현실 속 이야기들이라 생생하고 또 생생하다. 영상으로 만들어지면 또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이야기로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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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5-13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느라기]가 드라마로 만들어진다고요? 우앗... 저는 보기도 전부터 고구마 백 개 먹은 것 같은 답답함이 밀려오네요.

모든 시어머니들이 ‘나는 달라, 나는 좋은 시어머니야‘라는 생각을 하고 계신것 같습니다. 저희 엄마 포함해서요. 저는 그럴 때마다 ‘엄마, 그래봤자 엄마는 시어머니야‘라고 말하곤 합니다.

구단씨 님이 정말 정확한 지적을 하신 것 같아요. 원인을 알아야 해결할 수 있는 거잖아요. 한 여자와 다른 한 여자가 며느리와 시어머니로 만났을 때 왜 그렇게 갈등을 일으켜야만 하는건지, 우리는 그 시작을 찾아서 부숴버려야 하는건데 말입니다.

구단씨 2020-05-13 14:04   좋아요 0 | URL
20분짜리 드라마로 만들어진답니다.
방송하게 될지 웹드라마로 보여줄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옆에 사이다 캔맥주 한잔 가져다 놓고 보고 싶은 드라마여서 기다릴 겁니다요. ^^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요. 남자 사람 포함해서요. 남자들이 하나같이 얘기해요.
˝우리 엄마는 안 그래.˝
그렇게 말하는 너네 엄마가 더 그러더라, 라고 말하곤 했거든요.
실제로 저희 엄마도 아들 며느리 있는데요. 똑같이 말씀하세요. ˝나는 안 그래, 야.˝
그래서 제가 옆에서 자꾸 말씀드리죠.
엄마도 그럴 수 있다고. 그래도 딸 가진 엄마니까 며느리 마음 많이 헤아려주시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