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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도키오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9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0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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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 어렵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다. 소설이니까 가능한 설정이라고 하지만, 누군가는 꿈에서 만날 수 있는 장면들 말이다. 인생의 절묘한 순간에 나타나 나를 옳은 길로 이끌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이 나이에 미래에서 온 자식 같은 건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 밤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다. 내가 미처 모르고 지나치기만 했던 소중한 순간과 기회를 지금이라도 알아차릴 수 있게.
그레고리우스 증후군으로 곧 세상과 이별할 아들이 눈앞에 있다. 다쿠미와 아내는 그 아들의 운명을 일찌감치 알아차리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런데도 쉽게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가족이니까, 자식이니까. 그러다가 혼수상태처럼 빠져있는 아들 도키오의 모습을 보면서 다쿠미는 아내에게 오래전 이야기를 꺼낸다.
스물 세 살의 다쿠미. 오래 일하지도 못하고, 남들과 타협하며 살아갈 줄도 모른다. 그러니 인생은 언제나 어긋난 것처럼 여기게 되고, 항상 세상을 탓했다. 언제나 '큰 거 한 방'을 노래하며 인생이 뒤바뀔 날만 기다린다. 하지만 세상은 그가 생각하는 것만큼 쉽지 않다. 일확천금은 말 그대로 우연히 찾아오는 어느 순간일 테다. 지금 다쿠미에게 필요한 건 인내심과 노력으로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뿐인데, 그는 오늘도 홧김에 일을 그만둔다. 그때 그의 앞에 나타난 도키오. 어디에서 온 청년인지 알 수 없지만, 이상하게 다쿠미에 관해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뿐. 자연스럽게 곁을 맴돌며 도키오는 다쿠미의 일상에 스며든다. 그러다가 다쿠미의 애인 지즈루가 사라지는 일이 생기고, 도키오와 다쿠미는 사라진 지즈루를 찾으러 다닌다.
두 젊은 남자가 한 여자를 찾아다니는 로드무비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소설은 단순히 흥미로움만 전하지는 않는다. 다쿠미와 도키오와 다니는 그 길의 그 모든 순간에 의미를 부여한다. 현재 그의 삶이 어떻게 시작되고 이어져 왔는지 찾아다니는 여정이었으니까. 현재의 다쿠미는 그의 아내가 희귀병을 유전으로 가지고 있으며, 그들에게 아이가 태어난다면 또 그 병을 가지고 태어날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아내를 설득 시켜 결혼에 이르고, 아이가 생겼다는 걸 알았을 때도 낳기에 이른 건 모두 과거의 어느 시점에 도키오를 만났기 때문이다.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지금 내 아들이 과거의 나에게 다녀간 적이 있다는 게 쉽게 믿어지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다쿠미 부부는 믿는다. 지금 뇌신경이 죽어가면서 누워있는 이 아이라면, 분명 아버지의 흐트러진 청춘을 바로 잡아줄 수도 있을 것 같은 믿음이 저절로 생긴다.
그렇게 과거에서 만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이야기다. 부모와 자식의 사랑이 바탕이 되어, 현재에 이른 이 가족의 역사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생각해보면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싶으면서도, 혹시 나에게도 와줄 수 있는 기적이면 좋겠다는 바람이 동시에 생긴다. 미래에서 온 나의 아이가, 지금의 내가 잘못 사는 것을 자꾸만 멈추게 하려고 애쓰는 일. 처음에는 왜 이러나 싶어서 거추장스럽고 귀찮을지도 모르지만, 이상하게 서서히 녹아들고 동화되어 이 아이가 하는 말들에 저절로 신뢰가 생길 때 어떤 마음일까 싶다. 자꾸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뭐가 이상한지는 모르겠고, 어떤 식으로든 내 인생이 좀 더 적극적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느낄 때 당황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 방향이 나쁘지는 않다고 하는 마음이라면 더 믿어도 좋겠지. 상대가 의심스럽기도 하고, 종종 이해하지 못할 이상한 얘기를 하더라도 말이다. 지금 이 순간의 진실을 아주 먼 훗날에 알게 되더라도, 지금은 역시 눈앞의 시간을 제대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게 중요한 거겠지.
"내일만이 미래가 아냐. 그건 마음속에 있어. 그것만 있으면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어. 그걸 알았기에 당신 어머니는 당신을 낳은 거야." (396페이지)
읽다 보면 얼핏 장르가 궁금해질 수도 있는 이야기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걸 보면 판타지답기도 하고, 다쿠미와 도키오의 우연한(?) 만남이 만들어낸 결과를 보면 감동 드라마 같기도 하다. 자기를 떠난 애인을 찾아 헤매는 걸 보면 연애소설 같기도 하지만, 지즈루와 함께 떠난 오카베를 찾기까지의 과정과 이유를 보면 추리소설 같기도 하다. 결국은 이 모든 조각이 모여 완성해가는, 한 사람이 인간다움과 세상을 배우며 성장해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별을 앞둔 아버지와 아들의 기적 같은 시간 여행에 독자가 편승해, 오늘을 사는 이유를 묻는 것 같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미래가 우리를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어주는지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가 '지금'이라고 부르는 오늘 이 순간도 미래이면서, 우리가 만드는 삶의 한 조각이면서, 우리의 행복을 그리는 시간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