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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잡 SEASON 1 -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양정우 외 지음 / 블러썸북스 / 2020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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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 2일의 짧은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너무 멀지도 않으면서 마음에 들게 다녀올 곳, 숙박하기에 쉬운 곳, 사람이 너무 많지도 않은 곳 등등. 무엇 하나 포기하지 않고 찾아보려니 더 어려운 듯하다. 그리고 말이 계획이지 어디로 어떻게 가서 무엇을 보고 와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온라인을 뒤지고, 주변 사람들에게 묻고. 여기 소도시에 살면서도 이 도시 안의 것들도 다 못 보고 살아왔는데, 특별히 어디론가 다녀오고자 하니 더 만족하고 싶은 마음에 짧은 여행길 욕심만 앞선다. 그래서 목록을 다시 추리고 있다. 가장 먼저 1순위에 올리고 싶은 목적, 그다음 순위를 정해서 골라볼 것. 뭔가를 보고 배우려는 게 아니라 그냥 편하게 하루 쉬고 올 것을 생각하니 그 범위가 점점 좁아진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여행이란, 그 어떤 목적을 두고서라도 그냥 마음이 불편하지 않게 다녀오면 되는 거 아닌가 하고 말이다. 무엇을 배우러 가든, 아무것도 안 하고 시체 놀이를 하고 오든, 일 때문에 방문하는 곳이든. 무언가 하나 마음에 담아오게 되지 않을까?
<알쓸신잡>이 우리에게 안겨준 기쁨은 다른 프로그램과 사뭇 달랐다. 좋은 도서들이 소개되었고, 뜻깊은 장소들이 조명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텔레비전이 바보상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우리는 그런 일들을 뿌듯하고 기쁘게 생각한다. (추천의 글, 2020년 5월, 나영석)
<알쓸신잡 :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처음 이 방송을 접했을 때도 기대가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여행과 거리가 먼 것 같기도 하고, 도대체 이 조합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걱정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걱정이라기보다는 '그래, 너희가 무슨 말을 해서 시청자의 마음속에 들어올지 어디 두고 보자.' 하는 의심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김영하, 황교익, 유시민, 정재승. 각 분야에서 최고를 달리는 이들이지만, 실제로 이들의 만남을 단 한 번도 상상한 적이 없다. 너무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라서 그런가, 이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다는 것조차 어려운 일 아니던가. 그러니 이 방송의 예고를 보고 두 가지 생각이 들었던 거다. 대단하다, 이 사람들을 한자리에 앉게 하다니. 걱정 반 기대 반, 이들의 머릿속에 저장된 모든 지식을 한꺼번에 들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들이 평소에 서로 얼마나 안면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낯선 조합에 웃음이 났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어색한 첫 만남에 무슨 말인가 하긴 해야겠고, 첫 방송이니 프로그램의 취지에 맞게 해야 하는데 아무도 그 취지를 완벽하게 드러내지는 않는 듯하고, 알아서 해야 할 것 같은데 알아서 하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알쏭달쏭. 그런데도 역시 베테랑은 달랐다. 이들은 우리가 언제 처음 만났냐는 듯이 어떤 이야기가 나와도 어떤 주제가 등장해도 그들만의 지식을 마음껏 뽐내며 시청자에게 재미와 감동, 지식까지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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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방송인 듯 아닌 듯, 이들의 만남은 여행으로 시작되었지만 정작 그 여행을 채운 건 수다였다. 이들 나이 세대의 분위기를 보면 한참 문과 이과로 나누며, 각자가 미리 선택한 전공을 공부하고 사회생활 역시 전공에 따라 선택하는 분위기였다. 자기가 공부한 것 외의 분야에 관해서는 잘 알 수 없는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그런 편견(?)은 이들의 수다에서 싹 지워진다. 음식을 먹으면서 어느 시대의 역사를 말하고, 아주 오래전 위인의 숨결이 현재에서도 이어지고 있을 거라는 과학적 설명과, 교과서박물관을 보면서 추억을 곱씹지만 현재 한국의 교육제도를 언급하면서, '꼬막'으로 발음하던 사투리가 정식 이름이 되어가는 변화, 책과인쇄박물관을 보면서 사라진 직업들과 변화한 인쇄방식 이야기들까지. 무엇 하나 놓치면 아쉬울 이야기로 그들의 수다를 채운다. 아마 방송이 아니고 시간만 있었다면 이들은 무슨 합숙 훈련 하듯 한곳에 모여 몇 박 며칠을 다양한 지식을 쏟아내면서 기꺼이 즐겼을 것 같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우리가 가진 편견을 깨트려주는 이들의 행보였다. 무엇보다 여행지에서 김영하의 음식 선택을 보면서, 어느 곳에 가면 어떤 음식을 꼭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게 되었다. 통영에서의 해물 짬뽕과 이탈리아 음식을 먹겠다면서 파스타와 리조또를 골랐다. 누구나 그곳의 특화 음식을 고를 때 김영하는 통영에서 나온 해물로 만들었을 짬뽕과 파스타를 고른 것이다. 흔한 음식들, 어디에서나 맛볼 수 있는 메뉴였지만 김영하는 물론이고 스태프들까지 이 프로그램 최고의 맛으로 꼽은 이들이 있었다니 믿음직한 선택 아니었나 싶다. 이 프로그램의 여행자들은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음식을 먹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자기가 정한 여행 스케줄대로 움직이면서 각자 먹고 싶은 것을 골랐다. 음식에 관해서는 황교익의 선택을 무조건 믿고 따랐을 것 같지만, 그의 음식 지식을 인정하면서도 각자의 입맛과 호기심을 놓치지 않았다. 이런 여행 방식 너무 좋았다. 부럽기도 했다. 혼자 하는 여행이 아니라면 우리는 같이 움직이는 게 익숙하다. 약속처럼 같이 다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일정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각자 입맛이 다르고 보고 싶은 게 다른데 시간까지 여유롭지 않다면, 각자 원하는 것을 보고 먹고 같이 움직이고 싶은 장소에서 다시 만나는 여행 일정도 좋다고 생각한다. 여행이란, 첫째도 둘째도, 그 끝에서는 만족감이 남아야 한다.
사람들은 언제나 특별한 장소에 가보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 특별함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거창하지 않을 때도 많다. 때로는 한 공간을 보전하고자 하는 노력이 곧 그 공간의 매력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동피랑을 보며 깨닫는다. (36페이지, 통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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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이 프로그램의 의미는 누구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편하게 접하는 지식의 향연이 아니었을까. 출연한 이들에게는 평소 그들이 아는 이야기들의 수다일지 몰라도, 이 방송을 보는 우리에게는 '어머나, 그런 숨은 이야기가 있었어?' 하는 놀라움이나, 막연하게 보고 듣고 먹던 모든 것이 가진 역사와 사연들을 아는 즐거움이었다. 통영에서 시인 백석의 사랑을 듣고 시 한 편의 탄생을 더 눈여겨보게 됐다. 박경리의 문학 세계를 경험하면서 대하소설 한편에 담긴 우리네 삶의 시간을 되새긴다. 여류 작가의 고단함과 핍박을 강릉의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에게 같이 본다. 훗날 우리가 만나게 되는 작품들이 얼마나 어려운 환경에서 써진 문장들인지, 동생이 누나의 문장을 기억하고 기록해야만 했던 마음이 읽힌다. 첨성대의 역할을 두고 다양한 의견이 나왔고, 의자왕과 3,000 궁녀의 이야기는 사료에서 증거를 찾을 수 없고, 실제 낙화암의 주변을 봐도 도저히 3,000 궁녀가 떨어질 수 없는 곳이라는 거다. 의자왕의 억울함을 풀어줘야 한다는 유시민의 마음이 그대로 읽혀서 웃음이 났다. 백제보다 훨씬 넓은 영토에 강력한 왕권이었던 조선 시대에서도 궁녀가 500여명 정도였다니, 백제 시대의 궁녀 ,3000명은 진짜 과한 설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어느 곳을 가든 그곳의 대표 음식을 한 번씩은 생각하게 된다. 경주에서 황교익이 황남빵을 사서 모인 장소에서 유시민은 어릴 적 추억을 꺼내면 앞니 끝으로 황남빵을 조금씩 먹었다. 어려웠던 시절의 한 장면이 저절로 그려진다. 경주에서 유명하다는 문어를 사가지고 온 김영하로 저녁 밥상은 더 풍성해졌고, 그 자리에서 이어진 문어에 관한 토론은 또 하나의 지식을 뽐내게 된다. 동서양 모두 문어를 특별한 존재로 여겼지만, 우리가 아는 상식은 조금 어긋난다는 것. 문어의 먹물은 글씨 쓰는데 사용할 수 없고, 머리처럼 보이는 게 사실은 몸통이고 먹물이 가득 들어있지도 않단다. ㅎㅎ 음식과 문화유적으로 유명해진 경주의 황리단길의 어두운 면을 같이 언급하던 장면도 잊지 못한다. 비단 여기뿐만 아니라, 조금씩 사람들의 유입을 애쓰던 이들이 머물던 곳은 이제 자본이 유입되면서 분위기를 바꾼다. 건물 임대료가 오르고 원래 살던 이들이 더는 머물 수 없어서 떠나는 곳이 되어버리는 일. 경제가 살아나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경제는 스러지는 일이 벌어지는 곳이 되었다는 씁쓸한 현실도 이들의 수다에서 빠지지 않았다.
많은 이야기가 과학과 만나니 더 신비하고 즐거워졌다는 건 말할 것도 없다. 과학은 딱딱하고 어렵게만 생각했는데, 정재승이 말하는 과학은 웃음부터 나기도 한다. 의외의 곳에서 그의 과학 지식은 즐거움을 주었다. 방귀로 불을 붙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직접 출연 의뢰까지 있었지만, 호칭의 문제로 출연 불발되었다는 그의 과거(?)에 한바탕 웃고, 자연사박물관의 공룡 이야기에서 이어진 냉동 인간 논쟁은 흥미진진했다. 현재 어느 재단에서 진행되는 냉동인간 연구가 있다는 정재승의 말에 유시민은 냉동에서 깨어난 인간 삶의 관계들을 염려했다. 그에 정재승은 냉동 인간의 연구는 계속되고 있고, 냉동에서 깨어난 인간 세계는 또 다른 관계가 형성될 수도 있고 죽음에 대한 관념 자체가 바뀌는 시대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진짜 그런 세상이 올까? 조금은 긍정적으로 정재승의 말에 공감하게 되는데, 예전의 우리가 상상만 하던 것들을 하나둘 현실로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는 걸 보면 그의 말이 아주 헛된 것은 아닐 듯하다. 정말 냉동 인간 세상이 오면 나는 혹시 내 몸을 얼려서 조금 더 연장된 또 다른 삶을 맞이하고 싶을지 또 한번 상상해봐야겠다.
그날 저녁, MC희열이 생각지 못한 질문을 했다.
"그런데 왜 로봇들은 다 사람 모양일까요? 예전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중략)
재승쌤은 이 말에 명쾌한 대답을 내놓았다. 로봇에게도 얼굴이 필요하다고. 이는 인간의 인식법과도 관련이 있다. 인간은 외부의 물체를 두 종류로 나누어 판단한다. 얼굴이 있는 존재와 얼굴이 없는 존재로. 심지어 우리 뇌는 얼굴에 대한 정보를 전문으로 처리하는 기관인 방추상회를 가지고 있을 정도다. 사람들은 일단 얼굴을 갖추고 있으면 영혼이 없는 물건일지라도 사회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얼굴을 갖춘 인형은 친구처럼 대하지만 쿠션이나 베개에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니 얼굴을 갖춘 로봇을 만들어 훨씬 더 친근한 모습을 보이려는 것이다. (196페이지, 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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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지식의 향연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모두의 고뇌가 동시에 느껴지는 여행이기도 했다.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사는 이들의 모습에서 부족함을 찾기는 어려웠다. 누구나 다 아는 이름, 많은 연구와 작품과 학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현실적으로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들에게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다움이 넘쳐났으니, 그냥 우리는 각자가 하는 일이 다르고 살아가는 모습이 조금 다른 인간들일 뿐이구나 싶기도 했다. 전주 남부시장 청년몰의 슬로건, '적당히 벌고 아주 잘 살자'는 말에 정재승이 외치던 워라밸의 가치를 생각한다. 전주는 영화나 한정식으로도 유명하지만, 남부시장의 청년몰도 유명하다. 나도 두세 번 가본 적이 있다. 처음에는 동네서점 방문 목적으로 가봤는데, 나중에는 그 자유롭고 편한 분위기에 한 번씩 남부시장 2층을 올라가게 되더라. 각종 볼거리에 잠깐 앉아서 쉬다가, 어느 서점의 진열된 책에 눈길이 가다가... 찾는 사람이 드물어지는 재래시장을 살리고자, 청년들의 꿈을 펼치는 장소를 만들고자 형성된 청년몰. 시간은 조금 걸렸지만, 이제는 자리 잡고 잘 운영중인 듯하다. 배가 고프면 1층의 시장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2층의 청년몰에서 구경하고 쇼핑하고. 의외의 조화에 처음에는 이상했는데, 자연스레 발길이 1층 2층으로 향하는 걸 보면 이 조합이 참 괜찮은 거였구나 싶다. 처음 <알쓸신잡> 방송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과 점점 이 방송에 빠지는 느낌처럼 닮았다.
평범하면서도 매력적이고 개성 강한 지역들의 여행을 이 방송과 책 한 권으로 다 한듯하다. 그래서 그곳에 갈 필요가 없다고? 아니다. 방송과 이 책 때문에 그곳에 더 가고 싶어졌다. 첫 방송 이후로 이 방송에서 언급된 책들이 갑자기 팔리던 것처럼, 마음에 담아두기만 했거나 처음 듣는 이야기로 머문 장소들이 많아졌다. 그 지역의 숨은 이야기를 듣고, 음식을 맛보고, 익히 들어왔던 내용 뒤의 또 다른 이야기까지 이어지는 이들의 여행에 푹 빠져들었다. 출연진 모두가 너무 개성적이어서 이 여행이 더 즐거웠는지도 모르겠다. 명소를 찾는 이, 사람들이 드문 곳을 찾는 이, 박물관과 과학관을 찾는 이, 낭만과 풍경에 빠져드는 이, 그리고 이들의 수다에 집중하며 새로운 이야기에 눈이 반짝이는 이. 여행이라 부르지만 마치 옆집 마실 다니는 것처럼 보이던 지식인들의 수다에, 시청자와 독자는 랜선 여행에 잡학 지식까지 더해 머릿속이 더 풍성해졌다. 어디서 이런 조합에 이런 이야기를 또 들을 수 있을까 아쉽기도 하면서, 이제 이런 조합과 주제가 더는 낯선 일이 아니니 누군가는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도 있겠다는 기대가 생긴다. 생각만 해도 다시 설렌다.
방송을 만들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되는 법칙이 있다. 웬만한 연출로는 절대 시청자들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이다. 출연자들이 정말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지, 적당히 멘트를 치고 연기를 하는 중인지 시청자들은 기가 막히게 알아챈다. 촬영과 생활의 경계가 없어질 때, 시청자들은 프로그램에 마음을 빼앗긴다. 경주에서 우리는 비로소 쌤들이 진짜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말하자면 예능 프로그램의 이데아를 실현했달까? (123페이지, 경주)
이 책에서는 방송에서 다 볼 수 없던 촬영 뒷얘기도 있다. 저자들이 이 책을 준비하면서 그때의 여행을 다시 떠올리는 순간은 즐거움이면서 일터의 고단함이기도 했을 것이다. 장소 섭외부터 교통편 준비까지, 현장에서는 늘 변수가 생기기도 하고, 출연자의 다양함에 상황의 다양함은 덩달아 따라온다. 그런데도 이들이 기억하는 이 여행들은 즐겁고 행복했다. 다시 가고 싶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즐거운 시간이었다는 게 이들의 말에서 전해진다. 어쩌면 늦은 시간까지 방송 준비하고, 매번 몸으로 뛰는 고단함에도 이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이유는 이런 것이겠지. 좋은 사람들과 좋은 방송을 만들고 있다는 자부심, 방송의 취지를 정하고 실행에 옮기고 많은 이가 공감해주는 시간을 피부로 느끼고 있음에 행복한 순간들. 여행한다는 것, 이야기에 빠져든다는 게 무엇인지 그대로 보여준 시간에 감사하며, 많은 스태프의 노력과 출연자들의 지식이 만들어낸 이 방송이 오래 기억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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