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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트 투스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9월
평점 :
내 이름은 세리나 프룸이고, 사십여 년 전 영국 보안정보국의 비밀 임무 수행을 위해 파견되었다. 나는 무사히 복귀하지 못했다. 보안정보국에 들어간 지 십팔 개월 만에 망신당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파멸시키고서 해고되었다. (11페이지)
얼마나 호기심 일으키는 첫 문장인가. 직설적으로 자기 이름을 밝히고, 자기가 무슨 일을 해왔는지 말하면서, 그 일의 최후까지 세 문장으로 독자의 눈을 붙잡는다. 소설은 주인공 세리나 프룸의 회고로 시작하면서, 1970년대 초 암호명 '스위트 투스'로 그들만의 문화 전쟁을 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은 군사적으로도 경쟁했지만, 문화 전쟁 역시 만만하지 않았다. 문화로 대중 의식을 장악하려고 애썼다. 그동안의 사실로 보면 문화를 장악하는 쪽이 이긴다는 건 역사에서 증명되었으니 말이다. 그런 목적으로 문화예술 사업에 몰래 돈을 대고, 그들의 후원을 입은 예술가들로 문화 선동 사업을 일으켰다. 물론 이 소설에서처럼 예술가는 그 후원의 정체를 모르기도 하겠지만. 영국의 MI5, MI6은 이러한 문화 선동 사업의 선봉에 서서 반사회주의 성향의 작품들이 태어나도록 했다.
이 전쟁의 용맹한 전사로 투입된 미녀 첩보원 세리나 프롬. 소설을 좋아했지만, 그녀는 수학을 전공했다. 좋아하는 것과 상관없는 것의 학업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고, 케임브리지대학 시절 역사학과 교수 토니 캐닝을 알게 되면서 그녀는 점점 문학적 재능을 찾아간다. 단순히 역사학자로 알던 토니는 사실 전직 보안정보국 요원이다. 세리나는 그에게 알게 모르게 훈련받았던 셈이다. 어쩌면 토니는 그녀의 인생의 다른 길을 열어준 사람이기도 하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영국 정보국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이름에 무색하게 말단 여직원의 일을 하던 어느 날 첫 임무를 부여받는다. 소설가 톰 헤일리에게 접근하여 그를 후원하고 그가 반공주의 작품을 쓰게 하는 것. 정보국에서는 이 작전을 스위트 투스(단 것을 좋아하는 취향, 마약이나 해로운 것에 빠져드는 중독)라고 부르며, 지식인과 문학인이 자유주의적 사고를 작품으로 퍼트리는 일을 목표로 한다. 세리나에게는 소설가가 주어졌으며, 내부 회의에서는 과거 토니의 추천으로 알게 되었던 그녀의 독자 생활을 바탕으로 톰 헤일리에게 붙여질 적격자라고 판단한다.
그런 그녀가 작전 대상과 사랑에 빠졌으니... 어쩌면 독자인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숱하게 봐왔던 영화나 드라마, 소설을 떠올려보라. 비밀 임무 수행하는 이와 그 임무의 대상이 된 이가 사랑에 빠지는, 이성보다 감정이 앞에서 힘을 발휘하기에 가능한 일. 세리나 역시 이 일에 성공하고 싶었다. 그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녀의 임무 역시 완성하고자 했다. 그는 그녀의 프로젝트이며, 일이며, 임무였다. 더불어 그의 예술, 그의 작품, 그들의 연애가 하나였다고 말하며 무게감을 느낀다. 그가 실패하면 그녀도 실패하는 것이기에, 그녀는 성공해야만 했다. 그녀가 성공하는 게 그가 성공하는 일이며, '우리'가 성공하는 것이었기에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더 혼란에 빠지고 감정에 죄책감을 가지는 이유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지만, 그녀의 사랑은 거짓말을 배경에 두고 시작했다는 게 언제나 가슴 한구석을 눌렀다. 그 죄책감은 그녀가 그를 사랑할수록 더 커져만 갔다. 무슨 마음인지 알 것 같기도 하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건 사실이고 진심이지만, 그 사랑이 시작된 배경에는 그녀가 숨긴 정체와 그에게 접근한 의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고민, 언제까지 이 거짓을 숨길 수 없으며 언젠가는 그에게 다 말해야 한다는 고뇌가 그대로 전해져온다. 그에게 그녀의 모든 것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그들의 사랑은 끝날 것이라고 여긴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 말할 수 없지만, 또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말해야 한다는 모순 같은 진실의 혼란에 빠져든다.
이쯤 되면 더 궁금해질 것이다. 세리나는 톰에게 말했을까, 하지 않았을까. 둘의 사랑은 어떤 결말을 낳았을까. 그 궁금증은 이미 소설의 첫 문장, 첫 단락에서 알려주었다. 그녀의 임무는 성공하지 못했고, 사랑하는 사람을 파멸로 이끌었으며, 그녀 역시 정보국에서 파면당했다. 한 사람의 단편 작품들에 빠져들었고, 그러다 보니 그 작가에게 호감이 생기는 일. 결국 그 작가와 사랑에 빠져들어 버린 시간. 그게 삼십여 년 전 그녀의 인생이었다. 그럼 지금은?
이 사랑이 방향을 잡고 흘러가기 전에 그에게 나에 대해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면 우리 사랑은 끝날 것이다. 그래서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말해야 한다.
나중에 우리는 어둠 속에서 팔짱을 끼고 누워 우리의 비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나쁜 짓에 어린애처럼 키득거렸다. 그리고 우리가 나눈 엄청난 말에도 웃었다. 다른 사람들은 규칙에 묶여 있지만 우리는 자유로웠다. 우리는 전 세계에서 사랑을 나눌 것이고, 우리 사랑은 어디에나 존재할 것이다. (412~413페이지)
정보국의 비밀 작전에 투입된 여성 요원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지만, 그 시대에 실제 일어난 사건(인 카운터)을 보면 소설로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작가는 그 사건에 오랫동안 관심을 두었다는데, 그러한 관심은 그 시대의 분위기와 역사적 사실에 더 깊이 파고들게 했으며, 결국 이 소설까지 이어졌다. 냉전 시대의 복잡 미묘했던 문화 전쟁을 배경으로 역사적 사실에 로맨스까지 더해진 이 소설이 재미와 호기심에 한 발짝 더 들여놓게 한다. 게다가 소설 속에서 세리나가 그녀의 스승(?)인 토니와 벌인 열띤 토론과 문학 작품들의 이야기는 소설에서 만나는 또 다른 문학의 목록을 쌓아가기에 충분했다. 그러한 문학 작품 이야기는 그녀의 작전 대상이자 연인이었던 톰과의 시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문학 작품 속에 녹아든 의미를 파악하고 시대를 읽으면서, 소설가의 현실을 동시에 본다. 쓰고 싶은 작품도 많고 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많지만, 정작 그들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도구나 수단은 너무 적었다. 잘 안 팔리는 단편소설만으로는 그의 작품 세계를 알릴 방법이 거의 없다는 것이 21세기의 자유주의 세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현실까지 같이 담아냈다.
소설로의 재미도 넘쳤지만, 여러 가지로 매력적인 작품으로 남을 듯하다. 한 시대의 전쟁에 문화가 했던 역할을 알게 되기도 했고, 작품을 쓰고 싶은 한 소설가의 열정이 그대로 읽히기도 한다. 작전 타깃인 소설가와 작전 수행자인 독자가 공유하는 문학에 대한 애정 역시 엄청나다. 두 사람이 나누는 책 이야기는 어느 독서 토론 못지않게 치열하기까지 하다. 작품의 설명과 이해에 관해 이야기하면서도, 서로 다른 감상과 의도를 가지고 싸우기도 하고, 결국에는 상대의 진심을 읽어내며 감정적으로 한 발짝 더 다가가는 일이 된다. 특히 세리나가 톰의 단편들을 읽어가면서 느끼는 독자 후기 같은 감상은 너무 익숙했다. (우리가 이 책을 읽고 이렇게 몇 마디 남기는 것과 똑같지 않은가?!) 이렇게 너무 잘 소통하고 사랑하고 열정이 넘치는 그들 사이에 '거짓'이라는 게 존재하는 사랑은 너무 위태로웠으니...
소설의 첫 부분에 드러난 이 사랑의 결말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기를. 거짓이 드러나고,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임무에 실패한 이들 사이에 어떤 게 남아 있을지 확인하길 바란다. 세상은, 사람은, 사랑은, 때로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선택으로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기도 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