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지인이 도서 구매를 놓고 고민이 된다고 했다. 동서문화사의 앤 시리즈를 구매할 것이냐, 인디고의 고전 명작 시리즈를 구매할 것이냐 하는... 두 가지 모두 매력적인 책이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오래전부터 인디고 도서로 마음이 기운 상태였다. 이 나이 먹도록 읽지 못한 고전 동화가 많기 때문이다. 고전을 모티브로 한 드라마나 영화, 소설은 많이 있겠지만, 원작으로 읽어본 게 거의 없다. 어렸을 적 책을 가까이하지 못한 이유도 있었고,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이가 읽는다고 생각하는 책을 쉽게 접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니 시리즈로 갖다 놓으면 더 손길이 가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읽고 싶었던 듯하다.
그런 옅은 바람으로 뜬금없이 읽기 시작한 어린이 고전이다. 그 시작은 <키다리 아저씨>였다. 키다리 아저씨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그림자처럼 주디를 후원하던 그 마음이 언제 어떻게 변하기 시작했을까 궁금했다. <빨강머리 앤> 보다, <캔디 캔디> 보다 더 먼저 만나고 싶었던 게 <키다리 아저씨>다. 물론 읽지 않아도 내용은 다 알고 있으니 스토리에 대한 호기심은 크지 않았다. 키다리 아저씨를 모티브로 한 여러 버전 이야기들의 시작을 활자로 확인하고 싶었다고 해야 할까... ^^
<키다리 아저씨>를 언젠가 한번은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었다. 고등학교 때, 매주 일요일 아침 이른 시간에 <키다리 아저씨>라는 만화를 TV에서 보여주었다. 아침 7시나 7시 반쯤이었던 것 같은데 기억은 가물가물. 아무튼! 일요일 아침잠을 포기할 사람이 어디 흔한가?!!! 그 흔하지 않은 사람 여기 있었다. 나, 일요일 아침잠 포기하면서 매주 <키다리 아저씨>를 챙겨봤다고. 혹시라도 특별 편성 때문에 결방하면 TV를 바수어버릴 기세로 덤벼들었었다. 특별 편성으로 결방하면 방송국에 전화까지 했었던, 뒤끝 있던 여인의 조짐이 보였던 거다. 제발 <키다리 아저씨>를 틀어달란 말이야!
그러고 나서 얼마 후, 제주도 수학여행 길이었다. 우리는 예정에도 없던 태풍을 만나 제주도에 이틀을 더 묶여 있다가 평일이 아닌 일요일 새벽에 제주에서 진도로 가는 배를 타게 되었는데!!!!! 럴수 럴수 이럴 수가 있나. 객실 안에 매달려 있던 조그마한 TV 앞에,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몰입하고 있는, 100명도 넘는 여고생들을 상상해봐! 아마 그때가 <키다리 아저씨> 내용의 후반부쯤이었으니까, 주디하고 저비스씨가 밀당하고 있던 때 아니었겠어?! 모두가 한목소리로 이렇게 외쳤잖아. “주디! 키다리 아저씨가 저비스씨란 말이야! 왜 못 알아보는 거야!”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주디의 주리를 틀고 키다리 아저씨를 사수하겠다고 외치는, 사생팬이 된 듯한 분위기였지. “주디, 알간~? 바로 앞에 있었으면 너는 100명이 넘는 이 언니들의 손에 피를 묻혔을 것이야~!!”
그런데 인제 와서야 처음으로 키다리 아저씨를 책으로 읽다 보니,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는 삐딱한 생각이 솔솔 일어난다. 이름 모를 후견인이 나타나 고아 소녀를 대학에 입학시켜 주고 꿈을 찾아가게 하는, 교훈과 감동을 주는 내용이 바탕이긴 한데... 지금 보니, 키다리 아저씨가 아주 인내심 강한 작업남(?)으로 보인단 말이지! 어렸을 적 이 이야기를 보면서 느꼈었던, 한 고아 소녀의 성공기나 키다리 아저씨와의 사랑이 완성되는 달콩달콩 로맨스가 전부가 아니었던 게지. 어른의 눈으로 다시 만나보니 이 남자, ‘키다리 아저씨’라 불리던 이 오빠는 선수였던 거야!!
이 오빠의 작업이 수상해.
열일곱 살 소녀 주디에게 14살의 나이 차이가 나는 키다리 오빠는 이름을 감추고 후견인을 자청했지. 그런데 이 오빠 왜 이런 거야? 여자아이를 싫어한다고 했잖아. 그동안 쭈욱~ 남자아이들만 후견해왔었잖아. 뜬금없이 왜 여자아이를, 그것도 주디를 콕 지정해서 후원했던 거냐고! 서른한 살의 젊은(?) 오빠, 처음부터 주디에게 꽂혀서 작업 시작한 것만 같은 이 불순한 의심은 어쩔 거야. 게다가 키다리 아저씨의 이름을 물으니 존 스미스래. 아, 이 흔하디흔한 이름과 성. (그래서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란 제목의 영화가 있는 거잖아.) 주디에게 부담 없이 다가가려고 흔한 이름을 붙인 걸 거야. ‘이 오빠는 널 해치지 않아~’, ‘오빠 못 믿어?’ 이런 마음을 날리면서 이름을 그렇게 정한 거 아냐? 난 그렇다고 생각해!
오빠는 어장관리도 참 잘해.
주디를 후원하면서 키다리 아저씨가 요구했던 것은 단 하나였어. 주디의 학교생활과 일과, 공부하는 이야기를 매달 편지로 써서 보내라고 했지. 순진하고 성실한 소녀임을 자청한 주디는 고마우신 후원자(?)님께 시시콜콜 미주알고주알 편지에다 다 적어 보냈지. 이 오빠는 이런 식으로 원거리에서 주디의 생활을 스캔하면서 어장관리를 했던 거야. 특히 목이 마를 만하면 한 번씩 눈앞에 짠~ 하고 나타나 주는 센스~! 줄리아의 삼촌이란 이름으로 학교에 나타나서 주디에게 학교 안내를 하게 만들잖아. 조카의 친구들에게 함께 베푸는 것처럼 꽃이며 초콜릿을 건네준다니까. 이런 앙큼한 오빠 같으니라구. 사실 줄리아는 삼촌과 친하지도 않았다는데 말이야. 그런 식으로 뜬금없이 한 번씩 학교에 나타나 주디를 만나는 우연을 만들기도 했어. 그러면서 자신이 호감 가는 남자라고 어필하려 애쓴 거 아니겠어? 저비스라는 이름으로 주디와 함께 차를 마시고, 둘의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처럼 즐겁게 이야기하고, 같이 쿠키도 만들면서 화기애애한 시간을 만들었다니까! 거기에다 주디의 편지로 알고 있는 많은 것을 근거로, 마치 주디의 마음속에 한번 들어갔다 온 것처럼 다 알고 있잖아! 급기야 이 오빠 돈 많은 걸 자랑이라도 하듯이 뉴욕으로 주디 일행을 초대하지. 때마침 햄릿에 푹 빠진 주디를 꼬시려고 햄릿 공연까지 보여주고. 칫~! 주야장천 ‘내가 키다리 오빠야.’하는 암시를 주지만, 무디고 둔한 주디는 아무것도 몰라. 흑... 주디는 오빠 맘을 그렇게 몰라주고, 편지에다가 자꾸만 저비스의 이야기를 한단 말이야. 그런데 진짜 연적은 이제부터 등장한다니까.
이 오빠의 질투 좀 봐봐, 웃긴다니까.
주디가 초대받고 샐리의 집에 가게 되잖아. 물론 키다리 오빠는 흔쾌히 허락해. “그래, 가서 재밌게 놀다가 와.” 그런데 그게 키다리 오빠 최대의 실수가 될 줄이야. 연적이 나타난 거야! 바로 샐리의 오빠 지미. 주디가 편지로 샐리네(정확히는 지미)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이 오빠는 긴장하기 시작하고 질투에 휩싸이지. 다음번 샐리의 초대에 가지 말라고 하면서, 샐리네 초대에 응하지 말아야 할 온갖 이유를 갖다 붙여. 이 오빠도 이렇게 유치해질 수 있다는 게 놀라울 지경이야. 큭큭... 결국, 주디는 이 오빠의 영역인 록 윌로우의 농장으로 3개월 동안 유배를 가게 되잖아.
이 오빠를 어쩌면 좋아...
키다리 오빠의 작업은 여기서 아주 빛이 나지. 샐리의 초대에 못 가게 해서 주디를 화나게 하더니, 저비스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록 윌로우 농장으로 보내 어린 저비스를 상상하게 하잖아. 저비스는 이렇게 귀여운 아이였다, 저비스는 이곳에서 이런 책을 읽었다, 하는 것을 저절로 알게 하잖아. 아주 계획적이야. 자신의 어릴 적 흔적이 곳곳에 묻어 있는 장소에 보내놓고 차근차근 알아가게 하더니, 저비스라는 존재에게 친근해질 때쯤에 짠~ 하고 나타나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 좀 봐봐. 그러면서 샐리네에 가서 지미가 가르쳐 주기로 했던 걸 자신이 막 가르쳐주고 있잖아. 깔깔깔~ 낚시랑 말타기는 물론이고, 총 쏘기도 가르쳐 주고 있었어. (이거 지미가 주디에게 가르쳐 주기로 한 거였잖아!) 이 부분 읽는데, 이 오빠 진짜 귀엽더라. 지미랑 같이 못 하게 하려고 샐리네 초대에 못 가게 하더니, 자기가 막 다 해줘. 이런 거 저런 거 같이 하고 시간 보내면서 주디에게 자신을 필사적으로 어필하는 모습이 귀여워 죽겠어.
사랑에 빠지니까 이 오빠도 허당이 된다니까.
주디가 점점 독립적인 여자가 되어가는 것을 보던 오빠는 엄청나게 긴장하지. 자기 손길을 받으면서 키우고 길들여야 할 것 같은데 장학금도 받는다고 하고, 졸업 후에 유럽여행을 추천했더니 자신이 선택한 일을 한다잖아! 이럼 안 되는데... 긴장, 초긴장... 선수처럼 자신만만, 뒤에서 살며시 조종하면서, 계획대로 잘 리드한 것 같은데. 이런 노선변경 반갑지 않아~!!
결국.
결국..
결국...
키다리 오빠는 저비스의 이름으로 청혼을 해~!!! 꺄악~!!!!!
근데. 흑...
주디가 거절해서 이 오빠에게 멘붕이 오고, 큰 병이 났잖아.....
오빠의 작업 성공이 물 건너간 거야?
아, 슬퍼.
읽어가면서 어느 정도 알 수가 있다.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키다리 아저씨의 등장과 처음 저비스씨의 등장은 동일 인물임을 곳곳에서 암시하고 있으니까. (주디가 저비스씨의 외모-특히 키-를 그려 넣은 부분만 봐도 알 수 있지.) 알면서도 계속해서 그 긴장감과 재미, 가슴 두근거림을 느끼면서 볼 수 있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검색해보니 도서 분류가 어린이 명작 고전으로 나오는데, 흐음... 고전은 고전인데, 어린이용(조금 더 넓게는 청소년까지) 로맨스고전이다. 그것도 흔하지 않게 서간체로 써진 로맨스소설. ^^ (아, 완전 웃음 나..... 킥킥킥...) 이렇게 재미있는 책을 왜 진즉 읽지 못했는지 안타까울 정도다. 병원 진료대기실에서 앞부분 읽으면서 주디의 말발에 혼자 킥킥대다가 사람들의 시선에 잠깐 민망했으나 그게 뭐! 저비스씨의 등장에서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더니, 알게 모르게 보이는 두 사람의 밀당에서는 역시! 하는 감탄사가 나오더라. 로맨스소설의 조건을 다 갖추었구먼~!! 100년 전에 쓰였다는 이 소설에서 한 가지 더 놀라운 건 오늘날 많이 볼 수 있었던, 띠동갑을 넘어선 나이 차이!! 주디랑 키다리 오빠랑 14살 차이래. 흑흑... 능력 있는 이 오빠, 역시 어린 여자를 차지하는구나. 그것도 처음부터 콕 점찍어서 잘 키우더니 스물두 살에(처음 주디는 17세, 4년의 대학생활, 그리고 졸업 후에 청혼을 받는다.) 확~ 잡아드시는구나. 아이고, 배 아파~!!
고전을,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읽으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더니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건가 싶었다. (나이 불문, 장르 불문하고 고전이라는 것을 통틀어...) 좋다. 책으로 만나는 이런 즐거움, 색다르고 즐겁다. 다음에 한 번 더 읽으면 또 얼마나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지 벌써 궁금해진다.
근데 이 책 마지막까지 읽어보니, 이 오빠 너무 느끼해.
당신이 웃으며 손을 내밀더니 이렇게 말했어요.
“사랑하는 주디, 내가 키다리 아저씨라는 걸 짐작조차 못 한 거야?”
어우~ 이 말을 하고 있을 표정과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막~ 춤을 추고 있어.
(이 말을 하고 있는 키다리 오빠의 목소리가 자꾸만 박영규 아저씨 저음의 느끼한 목소리로 들려... 슬프다...)
오늘, 도서관에 책 반납하고 오면서 이 분위기를 이어갈 고전 두 권을 대출해왔다.
<작은 아씨들>과 <로미오와 줄리엣> ^^
11월이 가기 전에 꼭 완독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