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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 나는
최수현 지음 / 가하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뜨거워서 좋았던 여름이라고 기억해야겠다. 『그 여름, 나는』
무슨 약속이든 잘 지키는 이재이, 여자를 때린다고 소문났던 윤제희. 거부하면 할 수 있었을 텐데 어쩌다 보니 부반장과 반장이라는 타이틀을 얻고, 서로 맞지 않는 듯 보였던 두 아이가 함께 보냈던 고3.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가야 한다는 재이에게 방과 후에 과외를 해주고, 재이의 꿈을 들어주고, 자존감과 용기를 심어주었던 제희. 말이 거의 없는, 남들이 뭘 하든 관심 둘 필요가 없을 것 같은, 늘 최고의 자리를 놓지 않았던 제희가 왜 재이에게 그런 태도를 보였는지 알 것 같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말의 의미를 정확하기 판단할 수는 없었으니... 막연하게나마 추측하면서 그 마음을 들여다보지만, 아직은 미성년이니까,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는 일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참아본다. 졸업까지 같이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 두 사람이 2002년 여름, 계절의 더위와 월드컵의 열기가 맞물린 그때, 우연처럼, 기적처럼, 다시 만난다.
대부분 과거를 이야기하며 시작하던지, 아니면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와 교차로 진행되든지 하는 구성이었던 것에 반해, 이 소설은 2015년 현재를 기준으로 본다면 과거와 과거의 교차로 진행된다. 1993년과 2002년의 시간이 2015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거의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는 거다. 그때보다 나이를 훨씬 더 먹고, 30대 후반, 40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타임머신을 타게 하는 기분이 든다. 진짜 오래전 신문을 뒤져야만 알 수 있는 일들, 어느 통신사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기기들이 거리감 느끼게 할 수도 있지만, 그 나잇대를 살아가던 순간만큼은 깊게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누군가를 마음에 담고 설레던 풋풋함, 아침잠을 포기하며 투덜투덜 교복 입고 다니던 그 시간, 수능시험의 최대 수혜자가 누구냐며 성토하던 표정들까지. 저절로 기억나고, 가끔은 돌아가고 싶은 시간이다. 누군가 과거의 어느 시간으로 가고 싶으냐고 물으면, 내 주변의 사람들은 대개 스무 살이나 20대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나는 단 한 번의 고민도 없이 고3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때로 돌아가서 다시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는 게 아니고,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내가 살아갈 시간에 대해 먼 그림을 조금씩 그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떠올릴 수 있는 시간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 뭐, 여러 번 생각해도 지금은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그냥 과거의 시간일 뿐인데 말이지.
재이와 제희가 서로 다른 모습으로 9년의 세월을 어떻게 살았는지 보여주던 장면들은 안타까웠고, 서로의 몰랐던 시간을 조금씩 공유해가는 모습은 애틋했다. '자식들, 귀엽네.' 싶으면서도 나이와 상관없이 아픈 시간을 보내는 것에는 시선이 비켜갈 수가 없다. 특히 재이게에 열아홉, 스무 살은 제희를 만났다는 것 말고는 좋은 기억으로 남을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때는 몰라도 좋았을 삶의 고통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아이의 마음에 가득했을 비참함 같은 것, 꿈을 꾸지 못하게 만드는 환경이 버거워서 지치던 시간, 벗어날 수 있다고 발버둥 치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는 반복될 뿐이었던 기억들. 그게 현재의 삶까지 주관한다고 생각하면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 아닐까. 첫사랑이 있던 시간이라고 해도 말이지. 그래서 소설은 소설인가보다. 꿈을 떠올리게 하고, 괜찮지 않을까 하는 어떤 기대감도 심어주는, 긍정의 결말을 바라게 하니까...
읽으면서 내내 괜한 마음에 아닌 척, 모르는 척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더라. '어머, 대전엑스포는 혹시 역사책에서 나오는 행사였던가요?' 라고 물어보며 한 발 빼고 싶었는데 말이다. ^^ 나와는 다른 시간이라고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처음 듣는 이야기인 척 해보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 되더라고. 같은 시간을 기억하는 어떤 일들에 대해 이렇게 하나씩 꺼내놓는 이야기가, 좋으면서도 괜히 우울해져서 말이다. 드라마를 즐기지 않으면서도 <응답하라 1994>에 푹 빠졌었고, <무한도전 토토가>를 보면서 미칠 것 같았던 시간을 겨우 넘겼는데, 이제 이 책이 다시 그 바통을 이어받은 것처럼 남아버렸다. '읽지 말 것을' 하고 잠깐 후회하면서도, '어디서 같은 추억을 찾아볼까?' 싶어 다 읽은 후에도 한 번 더 뒤적거리는 내가 참 어이없어서...
1990년에 10대 고3 시절을 보내고, 2002년에 20대의 후반을 지내면서 월드컵을 즐긴 세대가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물론 나는 열아홉에 첫사랑도 없었고, 2002년에 첫사랑을 다시 만난 적은 더더욱 없었고, 길에서 우연히 첫사랑을 만난 일 따위의 경험은 없는 인간이지만, 이들이 만들어가는 그 배경의 시간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열아홉에 고3을 지냈고, 대전엑스포의 열기가 사라진 겨울에 그곳을 찾았었다. 2002년 월드컵 때는 친구들과 함께 갔던 맥줏집에서 황선홍의 얼굴이 그려진 맥주잔을 훔쳤다. 무엇보다, 호출기의 음성녹음이 10개만 된다는 건 지금 안 사실. 같은 시간을 지나왔던, 호출기를 사용했던 나도 몰랐던 이 이야기가 2015년을 살아가는, 온갖 스마트기기가 생활을 지배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궁금하다.
악역인 듯 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인물, 조력자로 등장하는 귀여운 의사쌤, 제희의 꼼수에 누명을 썼지만 '끝내주는 이것'으로 미안함을 전해야만 했던 녀석. 개성 있는 인물들과 무리수 없는 이야기에 충분히 빠져들 수 있다.
여담이지만, 몇 가지 생각나는 것.
* 수학능력시험의 최대 수혜자?
고3 때 처음으로 같은 반이 된 아이가 있었다. 하루 7~8교시 수업 내내 과목과 상관없이 책만 읽던 아이다. 단행본 만화책, 격월간지 만화책, 온갖 소설류, 할리퀸까지. 용돈 전부를 책을 사는 데 쓴다고 말하던 아이였다. 신기했다. 책을 저렇게 읽을 수 있을까? 하는 놀라움을 보여줬다. 특히, 전교 등수도 아니고 반 등수에서 하위권을 달리던 그 아이에게 대학이란 단어가 상관없는 줄 알았다. 정말 아무런 공부를 하지 않았으니까. 적어도 학교에서는. 모의고사나 중간 기말 성적은 말할 것도 없이 바닥이었다. 다들 그 아이가 대학에 가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대학 1학년 때, 학생식당에서 점심 메뉴를 고르고 있었던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치기에 돌아봤다가 놀란 기억. 그 애였다. 수업시간 내내 소설과 만화책만 보던, 내신이나 모의고사 성적이 바닥이었던 그 아이. 겨우 얼굴과 이름만 알고 있었던 그 아이가 너무 반가워 그날 학생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었다. 같은 학교 불문과에 입학했다고 했다. 와우~ 괜히 반가운 마음. 나중에서야 들었는데, 그 아이는 수능 언어영역 만점을 받고 입학했단다. 지금 수능시험의 분위기는 잘 모르겠는데, 그 당시만 해도 수능시험에서 언어영역 점수를 잘 받는 건 수리나 외국어에서 만점 받기보다 더 어렵다는 얘기가 있었다. 내 경험으로도 그 말은 맞는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수리영역 만점 받는 게 더 쉬웠다. 그래서 우리끼리 그때 얘기를 꺼내면 어김없이 그 아이 이름이 등장한다. 학력고사에서 수능시험으로 바뀌어서 가장 크게 이득 본 사람은 그 아이라고... ^^
* 호출기의 녹음은 10개까지만 되었던가?
그랬나 보다. 사실 기억에 없다. 호출기 녹음이 10개까지 되는 건지 아닌 건지.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호출기가 새삼 신기하기도 했는데, 녹음이 10개까지만 된다는 이유로 아쉬운 마음을 녹여냈던 게 제법 잘 어울린다. 거의 대학 졸업 때까지 호출기를 사용했고, 90년대 후반부터 휴대폰을 사용했다.
* 대전엑스포는 어느 나라 행사였던가?
아마 요즘 아이들은 모를 수도 있겠다. 대전엑스포는 우리나라 행사, 맞다. 행사가 다 끝나고 겨울에 갔던 기억이 있다. 친구들 7~8명쯤 같이 갔었다. 휑한 그곳을 걸으며 춥다고, 따뜻한 뭔가를 먹자고도 얘기했었고, 우리끼리 그런 낯선 곳에, 먼 곳에 갔던 게 처음인지라 무섭고 혼란스럽기도 했다. 다행히 무사히 귀가했고 그날의 경험으로 우린 더 멀리까지, 며칠의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물론 부모님의 허락은 받았음) 그때 대전엑스포는 한동안 이슈였고, 이런 게 정말 세상에 나올까 싶었던 것들이 하나둘씩 우리 삶에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미래의 시간, 상상을 말했던 게 현실이 되고 있음을 증명하던 시간.
* 2002년 월드컵.
제희가 한밤중에 편의점을 돌면서 경험했던 일(?)은 아마도 사실일 거다. (편의점마다 달랐을 수도 있으니 그건 알아서 판단하시고) 그 당시 이런 이야기를 주변에서 엄청 많이 들었었다. 그래서 이 부분 읽으면서 웃음이 피식피식 났다. 제희의 표정이 그려져서다. 아, 도대체 몇 군데를 돌았을까? 그래도 무책임한 녀석은 아니어서 좋네.
2002년은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싶은, 대한민국에서 경험할 수 있을까 싶은 일들이 일어났던 시간인 듯하다. 그 시간을 지났던 모든 사람, 특히 스물여덟을 살았던 이들에게 더욱 공감하는 이야기겠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