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서점기행 (보급판)
김언호 글.사진 / 한길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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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좋아하고,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책을 존중하는(이 책을 읽어보면 저자가 책과 서점을 정말 존중한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세계의 서점을 따라 걷는 저자의 발자취가 낯설지 않은, 마치 정해진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던 걸로 여기게 된다. ‘왜?’라고 묻지 않아도 된다. 그건 눈으로 그리지 않은 그의 인생 계획표의 일부였는지도 모른다. 저자 덕분에 독자인 나도 덩달아 세계의 아름다운 서점을 이렇게 보고 있으니 흐뭇하다.

 

국내의 부산의 어느 서점부터 북유럽의 서점까지, 세계의 아름다운 서점을 그대로 담아왔다. 여기서 아름답다는 의미는 서점의 외관부터 인테리어뿐만 아니라, 그 안의 풍경과 서점이 이끌어온 역사와 정신까지 포함해서 이르는 표현이다. 각 서점의 역사와 의식, 창립자의 사연까지 듣고 보면 반하지 않을 수가 없다.

 

중간 부분 이후로는 중국의 서점이, 뒷부분에 다다르면 부산의 서점도 소개되어 있는데, 아무래도 앞에서부터 소개된 유럽의 서점이 더 눈에 들어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의 서점과는 다른 웅장함과 고서점의 분위기까지 풍기는데, 그 안에 서서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나를 상상해보면, 정말이지 없던 고상함까지 끌어내 오고 싶을 지경이다. 아무래도 책이 가득한 공간이라는 분위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앞서 그 책이 담긴 건물 때문에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는데 한몫한다. 유럽의 건물 양식이 그러할 테고, 익숙한 동양인이 아니라 서양인이 가득한 공간이라는 데서 오는 낯섦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그 서점이 태어난 배경과 유지하는 데 힘을 주는 독자와 동네 주민들의 역할을 들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와 노르웨이의 독립서점을 다녀온 그가 건넨 사진에서 유럽서점의 스타일이 그대로 보인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네덜란드의 마스트리흐트의 <도미니카넌서점>은 어마어마한 복층의 구조가 웅장했다. 800년의 세월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이 서점을 책의 신전, 서점이 고전이라고 했는데, 이 서점의 분위기를 보고 고전이 가득할 거라는 생각 역시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진을 보자마자 여기서는 대부분 책이 고전일지 모른다는 착각부터 했으니까 말이다. ‘회원의 날’을 만들어 음악회도 열고, 일정 권수 이상 구매하면 혜택도 준다. 네덜란드 역시 도서정가제가 시행 중이라고 한다. 영국 런던의 <토트 북스> 역시 비슷한 분위기다. 2층 구조의 서점이며, 어떤 광고도 하지 않는단다. 다만 구매자에게 30파운드 이상의 책을 사면 작은 가방을, 70파운드 이상이면 큰 가방을 선물하는데, 이게 바로 광고 대신이었나 보다. 반응이 좋은 것 같다.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 도미니카넌 서점

영국 런던 돈트 북스

미국 펜실베이니아 미드타운 스콜라

 프랑스 파리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눈여겨봤던 서점이 프랑스 파리의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인데, 그 창립 배경이 단순한(?) 것에 비하면 서점의 역사는 우여곡절을 많이 겪은 것 같다. 1919년 미국 출신의 실비아 비치가 프랑스에서 영어책 서점을 낸 게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다. 가난한 작가·예술가들이 그의 서점에서 책을 빌려 갔다고 하는데, 오늘날의 대여점과 서점의 혼합이 아니었나 싶다. ^^ 1차 세계대전 후, 경제적 불황이 심화하면서 다시 전쟁으로 가고 있던 심사치 않은 그 시대에도 이곳은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니, 어떤 사람들이 어떤 분위기로 여길 드나들었을지 상상이 된다. 여기서 실비아는 제임스 조이스와 만난다. 그의 작품 『율리시스』의 출간이 어려워지자 그녀가 직접 출판하기도 하면서 대박을 친다. (제임스 조이스의 서명이 담긴 율리시스 초판본이 뉴욕의 고서점 아르고시에 있는데, 6,000만 원이란다. 헉!) 하지만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의 살림은 고단했고, 1930년대가 끝나가면서 파리는 전장으로 변했고, 제임스 조이스가 세상을 떠나는 1941녀에 실비아도 서점을 문 닫아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피네간의 경야』 때문이다. 독일 장교가 탐내던 그 책을 실비아는 내어줄 수가 없었다. 그에 거부하니 실비아는 6개월 동안 수용소에 갇혔고, 기력도 쇠약해져 더는 서점을 운영할 수 없었던 거다. 훗날 시간이 흘러 미국 청년 조지 휘트먼에 의해 서점이 이어지면서, 갈 곳 없는 작가들과 배고픈 지식인들을 위해 수프를 끓였다는... 자기 서점을 ‘잡초 여관’이라 부르며 삶과 사유의 안식처로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의 정신은 계속되었다. 현재는 조지 휘트먼의 딸 실비아 휘트먼이 이어가고 있다. 서점이 가업이 되는 순간이 이런 기분일까? 일본의 오래된 라멘집의 전통을 보는 느낌이다. 규모나 배경, 이익 창출을 떠올리지 않고 오직 책과 그곳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라는 믿음이 생긴다. (물론 수익이 있어야 유지가 되는 건 당연하고!

 

 

그리고 이어지는 미국과 중국, 일본, 한국의 서점이다. 중국의 베이징, 상하이, 난징의 서점과 서점인들이 문제의식을 발동하고 중국사회를 같이 본다. 24시간 문을 여는 싼롄타오펀서점의 바람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지원하는 독서정책이 부럽다. (내가 사는 이곳 도서관은 2016년 도서관 도서구입비를 10분의 1 이하로 줄였다고 하던데, 그래서 올해 입고된 신간이 많지 않더라) 일본의 서점은 보고 바로 일본인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개성 있고 매력적이었다. 우리나라의 부산 영광도서의 계속되는 변신, 꾸준한 보수동 책방골목은 우리 서점의 역사라고 한다. 사실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고, 언제 가게 될지 기약이 없이 그냥 오랜 시간 들어온 곳이라서 그런지, 저자가 말하는 우리 ‘서점의 역사’라는 표현이 낯설지는 않다. 다만 이 책을 읽다 보니, 우리나라에서도 유럽처럼 기본 몇백 년은 된 고서점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보고 싶다는 바람이 생긴다.

 

독자와 시민이 명문서점을 만든다는 저자의 말은 뭔가 울컥하기도 하고, 서점을 좀 더 다르게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그저 책을 파는 곳, 책을 사기 위해 드나드는 곳으로 여겼던 내 마음은 변함이 없지만(여전히 내게 서점은 그렇다), 독자와 시민이 나서서 서점 성원 운동을 벌였던 다른 나라의 서점 역사를 듣고 보니, 역시 이익을 내야 운영되는 곳이 서점이기도 하지만, 그 지역의 문화와 정신을 끌어가는 곳으로 거듭나고 유지되어 한다는 말에 공감하고 싶어진다. 폐허가 된 극장에 들어선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미드타운 스콜라서점이 낙후된 지역을 재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듯, 네덜란드 책방 마을 브레데보르트가 관광지가 지역을 발전시켰듯, 파리의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와 뉴욕의 스트랜드서점이 명문서점이자 관광코스가 된 것처럼, 지역발전에 유의미한 존재가 되는 곳으로 거듭나는 건 서점 혼자만이 이뤄낼 수 없는 일이다. 저자가 들려준 이런 서점의 이야기, 세계 서점의 매력들을 듣고 있노라니 더 부러워진다.

 

내가 사는 이곳에도 서점이 있긴 하지만 안 간지 몇 년은 된 것 같다. 대부분 수험서나 교재, 베스트셀러가 진열되어 있고, 편하게 앉아 책 구경 하기는 힘든 분위기다. 그러다 보니 인터넷서점이 익숙하다. 대형서점이 들어와서 카페 같은 분위기로 이용자들을 편하게 해주었으면 좋겠지만, 앞으로도 금방 들어온 것 같지는 않고... 이번 여름에 집 앞에 시립도서관 분관이 개관했다. 처음 여기 공사할 때는, 책 들여올 예산도 부족하다면서 이미 4개의 분관이 있는 시립도서관에 굳이 또 만드나 싶었다. 차를 타고 10분이면 가는 곳에 도서관이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막상 도서관 개관하고 나니 이용자가 많다는 걸 알았다. 도서관 아래층에 노인복지관을 같이 운영해서 그런가.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어르신도 많았고, 도서관에서 어르신 상대로 개설하는 수업도 종종 있던데, 괜찮더라. 도서관 다니면서 엄마 수업도 신청하고 오곤 했다. 억지로 신청해놓으니 귀찮다고 하면서도 가시더라. 거기 수업에서 만든 작품(?)을 집에 걸어두고, 사진 찍어서 막 손주들에게 보내라고... ^^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서점과 서점인이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사람들과 소통하는지, 세상을 경험하는지 보여준다. 오랜 시간 그 명맥을 이어올 수밖에 없는 의지를 들려준다. 그곳을 지켜내야만 했던 이유가 너무 간절했던 거다. 단순하게 책이 아니고, 그냥 그런 서점으로의 공간이 아니었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싸워야 할 많은 것을 찾게 하는 의식의 장소였던 거다. 서점이 하나의 나라라면 서점을 운영하는 사람들과 이용하는 시민들은 그 나라를 지키고 이끌어온 국민이다. 세계 명문서점은 베스트셀러에 매달리지도 않고, 문화를 연결하여 사람들 가슴에 들어가려 하는지 얘기한다. 책을 선택하는 서점인의 안목, 서점에 대한 독자·시민 의식이 명문서점을 만들어낼 거라 말한다. 도서관도 비슷한 맥락인 듯하다. (여기에 분관 만드느라 예산 낭비한다고 투덜댔던 거, 도서관 개관하자마자 반성했다. 생각보다 이용자가 많았다. 도서구입비나 더 늘어났으면 좋겠다.) 여기에 소개된 서점이 전부가 아닐 테지만, 이보다 더 할 말이 많을 테지만, 이만큼이라도 본 책의 숲도 아름다웠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저자처럼 언젠가 한 번은 세계의 서점 순회 간절하게 하고 싶어질 것 같다. ^^

 

 

 

어느 작은 서점의 구석에, 이런 내 자리 하나 고정석으로 있었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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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디의 남자
훈 지음 / 봄출판사(봄미디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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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년, 파리에서 개최된 세계 박람회에서 가우디의 작품을 본 구엘은 그의 재능을 확인하고 난 후, 그의 작품을 알리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둘의 우정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가난한 대장장이의 아들이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는 계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둘의 각별한 관계는 구엘이 죽기까지 40년 동안 계속되었다고 한다. 둘 사이의 그 어떤 관계보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각인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예술적 안목과 재능을 겸비한 재력가 구엘이 가우디를 통해 자신의 열정을 불태웠다고 한다.

 

건축과 관계없는 사람도, 건축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그 이름, 가우디. (오래전, 학교 앞 카페의 이름도 가우디였던 게 생각난다. ^^) 어쩌면 흔하게 들어왔을지도 모를 그 이름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었다. 그저 아름다운 건축물의 이름에 늘 따라오는 이름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가우디와 구엘이라니. 둘의 조합이 이 소설에서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도 궁금했다. 그거야 막상 읽다 보면 알겠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앞서더라. 건축을 하고 싶은 이라면, 정말 한번은 가우디의 건축물을 직접 보고 싶은 건 당연하지 않을까? 그래서 두 주인공이 만나는 배경이 된 스페인이 기대됐다. 어려운 형편이지만, 그래도 직접 보고 싶은 그곳을 향한 원혜윤. 바르셀로나는 낯선 곳이지만 그녀가 꿈꾸던 도시였다. 초라한 행색이지만 그녀의 열정만큼은 누구와 비할 수가 없는 여행길이었다. 우연이라면 그녀의 짝사랑을 고백할 운명인 거고, 아니라면 달콤한 꿈이라고 생각할 그 순간. 대학교 때부터 짝사랑했던 선배 공지섭을 만났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그를 보는 그녀의 눈빛이 반짝일 수밖에 없다.

 

"보자. 내일 이 시간 이 장소에서."

"좋아요. 내일."

 

찰나의 순간에 마주친 인연으로 끝날 것 같았는데, 그는 여행지에서의 다음 만남을 제안했다. 약속이다. 내일, 다시 만나자는 그 말이 혜원의 가슴을 끓게 했다. 저녁을 먹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혜윤은 수줍게 고백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간절함이었다. 하지만 그는 거절했다. 어쩐 일인지, 그는 이미 혜윤이 자기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가오지 말라고 선을 그었다. 자기를 향한 마음을 정리하라면서... 그래, 꿈이었구나. 바르셀로나의 그 순간은 눈을 뜨면 깨어날 그냥, 꿈이었구나. 한국으로 돌아와 학교에서 들은 소식, 지섭이 한 학기 남겨두고 학교를 자퇴했단다. 이렇게 정말, 그와는 끝이구나.

 

6년이 흘렀다. 학교 선배 영민의 건축회사에서 일하는 혜윤은 새로운 프로젝트의 어마무시한 임무를 맡는다. 이름은 유명하지만, 얼굴은 알려지지 않은 건축가 '라이언'을 잡아 오는 것. 그와의 계약을 성사시키는 것. 못한다면 해고. 성공한다면 연봉 두 배. 혜윤은 라이언과의 계약을 위해 애쓴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이메일 주소 하나뿐. guelwantsgaudi. 이메일 주소에서 느낀 호감, '라이언도 가우디를 좋아하는구나!' 하는 반가움이 앞서 이 일을 꼭 성사시키리라 다짐한다. 하지만 쉽지 않은 라이언 수색에서 마주한 것은 의외의 인물. 그렇다고 이 계약을 포기할 수는 없지!

 

처음 혜윤의 캐릭터를 봤을 때는 혹시 고구마인가 싶었는데, 의외다. 혜윤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착하게 생각하고 행동했는데, 그게 마냥 답답하지는 않았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끝까지 해내려던 오기도, 원하는 것을 향한 노력도 있었다. 착한 사람에게만 착하게 대하는, 아무리 노력해도 돌아오지 않을 마음에는 애써 관심 두지 않으려는 현명함도 가진 여자였다. 그녀에게 우선인 것은 건축. 그리고 어렵게 찾은 사랑을 위해 당당해지는 일.

 

나중에야 드러나는데, 지섭이 6년 전 그때 혜윤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다시 만난 혜윤에게 지섭이 다가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상황은 역전된다. 밑도 끝도 없이 들이밀고 들어오는 지섭의 직진이 귀여우면서도 곧아 보여서 좋더라. '나는 너여야만 하고, 그래서 나는 을이 되어 기다림도 불사하겠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는 을이 갑이 되는 하극상도 이뤄 내리라'는 막무가내 정신도 발휘한다. 특히 지섭의 행동에서 눈에 들어오는 부분. 처음에 6년 만에 다시 만난 혜윤과 지섭의 동행에서 지섭은 혜윤의 손목을 잡고 걷는다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그냥 급한 마음에 뒤따르는 사람을 잡아 쥔 곳이 손목이었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런 상황이 몇 번 더 등장하자 어떤 의미가 보였다. 어느 날 지섭이 혜윤의 손을 잡았던 그때, 추측은 사실이 되었다. 그가 혜윤에게 다가가는 방식, 무언가 정리되지 않은 관계에서 더는 다가갈 수 없는 그가 혜윤을 잡을 수 있는 부분은 손목이었다. 손을 잡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대로 보이는 증명하는 듯하다. 지섭이 혜윤의 손을 잡은 순간, 두 손이 하나인 게 어떤 관계인지 설명된다.

 

이 남자 공지섭, 칼처럼 냉정하고, 자기 잘난 거 너무 잘 알아서 재수 없게 당당한 것도 멋있던데,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마냥 빙구가 되는 것도 보기 좋더라. ㅎㅎ 사랑하는 이의 꿈도 이해해주고, 같이 하고 싶은 시간을 위해 기다림의 인내도 보듬을 줄 아는... 구엘과 가우디가 사업과 재능의 관계에서 시작된 끈끈한 우정이라면, 지섭과 혜윤은 건축이라는 같은 길을 가는 사랑이라는 것을 그대로 확인했다. guel wants gaudi.

 

혜윤을 둘러싼 음울한 환경과 악역들이 거슬리기도 하고, 혜윤이 왜 그들에게 사랑을 갈구하려는지 공감하고 싶지 않았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 확인한 인연들에서 그마저도 이해하고야 마는 혜윤의 성정이 현재 그녀의 꿈을 이루며 살게 하는 바탕이 되었을 거로 생각하니, 이해 못 할 것도 없더라는... 꿈과 일, 사랑 앞에서 당당한 이 여자가 계속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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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합본] 평탄했으면 좋겠어 (전2권/완결)
권화록 / 누보로망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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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눈길을 잡아끄는 여주인공 때문에 참 특이한 캐릭터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남자주인공인 신지헌의 말처럼, 이렇게 산만한(?) 여주인공을 만난 건 아마도 처음인 것 같다.

 

지난 연애의 찌질함에 현재 솔로인 인영은 친구 재형의 결혼식에서 눈에 들어오는 남자를 놓치지 않겠다고, 다른 친구들보다 선점할 것이니 다들 먼저 덤비지 말라고 엄포를 놓는다. 눈에 불을 켜고 이 예식장의 모든 남자를 살펴볼 것이라는 다짐이라도 하는 듯했다. 그러다 보고야 말았다. 재형의 남편에게 인사하는 하객, 신지헌을. 친구의 결혼식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직 그의 동선에 인영의 시선이 따라갈 뿐이다. 그러다 잠깐 친구의 결혼식에 한눈(?)판 사이에 그는 사라진다. 오늘 결혼한 친구를 닦달해서 쟁취한 신지헌의 전화번호를 받고도 한참 망설이다가 연락을 했는데, 잘못 받은 전화번호였다. 친구를 죽이네 살리네 욕이 나올 것 같지만 참고 진짜 신지헌의 전화번호를 다시 받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렇게 어렵게 받아낸 전화번호를 앞에 두고도 연락하지 못한다. 포기하고 싶지는 않지만 먼저 연락을 하는 데 망설인다. 왜? 먼저 들이대는 여자를 상대가 싫어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증 때문에.

 

첫눈에 반한다는 걸 믿지 않았던 여자가 결국 그 첫눈에 반함을 인정하는 순간을 처음부터 드러냈는데, 앞에서도 말했지만 여주인공 인영의 캐릭터가 참 신선하다. 하고 싶은 말 다하는 솔직함에 컬크러시 생각해도 좋겠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다. 지헌의 표현 그대로 산만한 성격이라고 밖에는 안 보였는데, 그게 지헌에게는 오히려 장점으로 다가온 듯하다. 솔직한 성격, 내숭 없이 그대로 내보이는 게 인영의 장점이자 매력이라고. 오히려 곰 같은 남자 지헌이 인영과 대조적으로 보이는데, 그게 닮지 않은 두 사람을 서로에게 끌어당기는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인영의 많은 부분을 지헌이 받아주고 이해해주는 걸 보면 잘 어우러지는 조합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렇게 두 사람이 연애를 시작하고 2년이 흐른 상태에서 ‘결혼’이 화두가 된다. 이 정도 연애했으니 결혼하자는 지헌과 결혼 생각이 없으니 연애만 하면 안 되겠느냐는 인영. 달달하게 해왔던 연애가 한순간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데, 마냥 헌신적일 것 같은 지헌의 노력으로 둘은 결혼을 결심한다. 이제 현실 속 결혼으로 뛰어들어야 하는데, 아... 이 순간 소설은 엄마가 즐겨보는 막장드라마로 전환한다. 지헌의 엄마는 전형적인 시어머니 캐릭터로 등장하는데, 그나마 소설이 중심을 잡는 건 지헌의 노력과 인영 부모님의 털털하고 시원한 성격 때문이다. 뭔가 홀리듯 상황을 이끌고 가는 인영의 부모님은 약간은 코믹 캐릭터에 순수하고 재미있는 사람들이고, 지헌은 약속했던 것처럼 인영을 위해 노력하는 남자이자 남편이 되려고 하고. 그런데 좀 이해 불가한 것은 지헌의 엄마만큼이나 인영의 이기적인 태도였다. 서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무조건 ‘나에게만 맞춰!’ 하는 것보다 같이 노력하는 태도를 보여야 하지 않나? 인영은 전자였다. 자기가 생각하기도 싫고 감당하기도 싫은 것들로 지헌에게 일방적인 을의 자세를 바랐던 것 같다. 뭐, 나중에는 인영도 변하고 두루두루 맞춰가는 길로 발길을 향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여자를 만나는 건 참을 인자 백만 스물두 개를 그리면서 인내심을 길러야 할 판이다.

 

그렇게 혼란스럽고 뒤죽박죽인 시간을 흘러 맞이한 행복의 순간, ‘평탄했으면 좋겠어.’라고 읊조리던 말처럼 두 사람, 두 가족이 잘 어우러져 살아가길 바라게 된다. 처음 인영이 지헌을 발견한 순간, 지헌에게서 봤던 후광이 눈앞에 그대로 비추는 듯해서 웃음이 나는 소설이다. 그 남자를 잊지 못해서, 그 남자에게 연락하지 못해서 생긴, 서른살 여자의 상사병이라니... ㅋㅋ

 

그나저나 아무리 생각해도 인영이 캐릭터 참 특이할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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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울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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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나이 들어간다는 것을 치욕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늙어갈 수 없을까? (맞춤육체 238페이지)

 

정아은의 소설 『맨 얼굴의 사랑』은 유명한 성형외과 의사 조성환과 글을 쓰려고 하지만 일단은 돈을 벌어야 하는 이서경이 주인공이다. 이서경은 소설의 캐릭터 연구를 위해 환자로 위장하고 조성환에게 성형수술 상담을 받는다. 그리고 그날, 두 사람은 연인이 된다. 작가 지망생이었던 이서경은 흐지부지한 글쓰기를 일단 멈추고 조성환의 추천으로 그의 성형외과에 상담실장으로 일한다. 어느 날 이서경은 조성환이 집도하는 가슴 성형 수술에 참관한다. 아무래도 수술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보고 나면, 상담을 좀 더 사실적으로 성실하게 할 수 있을 듯했다. 말로만 듣고 상담하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과는 차이가 크게 날 테니. 생생하게 눈으로 목격하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묘사된 가슴 성형 수술 장면이다.

 

가슴 밑을 메스로 긋자 옥수수 알갱이처럼 생긴 조직이 모습을 드러냈다. 간호사가 집게로 벌려 준 일자로 난 틈새에 조성환이 기구를 넣어 공간을 넓혔다. 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긴 송곳 모양의 기구가 위아래를 쑤시면서 보형물이 들어갈 공간을 확보했다. 제법 큰 부피의 공간이 마련되자 조성환이 벌어진 구멍을 들여다보더니 간호사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중략) 조성환은 으음 하고 목청을 가다듬더니 작은 동굴 안으로 보형물을 쑤셔 넣기 시작했다. 동굴이라고 해 봤자 엄지손가락 하나나 들어갈까 싶은 작은 공간이었다. 그보다 몇 배는 돼 보이는 보형물이 순식간에 가슴 조직 안으로 밀려 들어가더니 순식간에 부풀어 오른 곡선을 만들어 냈다. 조성환은 바로 봉합에 들어갔고, 민첩한 솜씨로 입을 벌리고 있던 동굴 입구를 닫아 버렸다.

다른 쪽 가슴에도 똑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거짓말처럼 부풀어 오른 양쪽 가슴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술 전 그어 놓은 마킹 자국과 번진 핏자국, 방금 꿰맨 자국으로 너저분한 상태였지만 환자의 가슴은 사이즈와 형태에서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핀셋과 실을 간호사에게 넘긴 조성환이 한손으로 여자의 유두를 잡아 올리더니 나머지 한 손으로 가슴을 꾹꾹 눌렀다. 순간 외설스러운 상상이 내 머릿속을 휘저었다. 좋겠구나, 저 여자는. (맨 얼굴의 사랑 218~219페이지)

 

소설이니까, 실제 소설을 쓴다고 해도 수술실에 들어가 참관한다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아서, 작가가 그냥 두루뭉술하게 서술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의외로 소설에서는 가슴 성형 장면이 상당히 세세하게 묘사됐다. 가슴 수술을 정말 이렇게 하는 건가? (나도 직접 보지 않았으니 알 수가 없지만, 정말 이럴 것 같다) 어떻게 이런 장면을 쓸 수 있지? 이렇게 적나라하게? 소설 속 이서경처럼 나도 묘사된 그 장면을 보고 속이 메스꺼울 정도로 장면이 생생했다. 작가의 말을 보니, 작가는 가슴 성형 부분을 노엘 샤틀레의 『맞춤육체』를 참고했다고 한다. 궁금해서 노엘 샤틀레의 『맞춤육체』까지 펼쳐보게 된 거다. 부제가 '성형 수술 세계로의 여행'이다. 성형수술이 궁금하다면 딱 펼쳐 봐도 좋을 거 아니겠나? 물론 나는 아직 그 성형 수술에 관심이 많거나 어떤 부분을 고치고 싶은 간절함이 하늘을 찌르지는 않았으나, 이런 내용을 들을 기회가 흔하지는 않을 터이니 생각난 김에 읽어보고 싶었다. 정아은 작가가 소설에 인용한 부분은 『맞춤육체』의 초반부에 나온다. 그 부분을 보는 순간 궁금증은 더 커진 거고. 코는 어떻게 수술할까? 눈은? 지방 흡입은? 그 외에 여러 부위의 성형 수술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노엘 샤틀레는 몇 곳의 병원을 방문하면서 성형 수술 전과 후의 환자를 면담했다. 성형 수술 직전의 환자를 만나기도 하고, 수술 후 퇴원한 환자를 만나러 가기도 했다. 오래전 성형 수술 경험을 한 환자도 만났다. 어쩌면 저자의 성형수술 관찰기는 어떤 내용이 나올지 뻔한 느낌도 있었지만, 막상 읽어가면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가장 먼저는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저자가 방문한 병원에서는 심리상담사가 있다는 거다. 의사와 면담하기 전 환자는 반드시 심리상담사를 거쳐야 한다. 물론 일반 병원에서도 진료 접수를 할 때 어디가 아파서 방문한 것인지 묻고 기록하는데, 아마도 성형외과의 심리상담사의 역할은 그보다 큰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심리상담사는 환자가 원하는 수술의 이유나 부위를 이야기하면서 조금 더 환자를 살펴본다. 수술의 이유에 더 집중하면서 보는 듯하다. 그러고 나서 의사와의 면담 시간이 정해진다. 정아은의 소설에서 이서경의 역할도 비슷했다. 그녀는 상담실장이라는 직함으로 환자를 상담한다. 그렇게 상담실장을 통한 1차 상담이 끝나고 각 수술 부위에 적합한 의사에게 2차로 상담받을 시간이 정해지는 거였다. 모든 성형외과가 이런 절차를 거친다고 생각하고 싶은데, 아직 내가 성형외과에 방문해본 적이 없으니 그저 소설과 취재로 말하는 내용을 믿기로 한다. 그런데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노엘 샤틀레가 방문한 병원의 '심리상담사들'에게 뭔가 전문적인 느낌이 강했다. 그들은 의사를 만나기 전의 환자를 면담하고, 상태를 확인하고 기록한다. 의사는 진료할 때 그 상담 내용을 참고하고 환자를 관찰하는데, 환자가 바라는 성형이 의학적인 이유가 아닐 때, 지금의 상태도 충분한데 욕심껏 성형을 원할 때, 수술이 필요한 게 아니라 정신적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 수술을 거절한다. 어느 정도 살펴보면 이 환자의 문제가 외모인지 정신적인 문제인지 보이는 거다. 그럴 때 다시 심리상담사에게 환자를 인계한다. 외과적 수술로 치료할 이유가 없는 환자들이기에.

 

처음 사례로 등장한 가슴 성형 환자의 이야기가 정아은의 소설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여자는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아이를 낳기 전의 자기 가슴을 그리워했다. 남편은 반대했지만, 여자는 지금 이 수술을 해야만 했다. (사실, 남편과 같이 상담한 순간 더 알게 되는 이들 부부의 성격이나 사생활이 있기도 했다) 그렇게 수술을 했고, 저자는 여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저자가 자기 가슴 수술에 참관한 것을 알았던 여자는 저자에게 묻는다. 자기 가슴 수술이 어땠느냐고. 저자는 그 환자에게 수술은 놀라웠다고 말했다. 그 순간,

의사가 간호사와 함께 들어왔다. 보형물 외피에 연결된 호스를 빼낼 순간이었다. 나는 멀찌감치 물러섰다.

나는 C부인의 고통스런 외침을 정말 잊을 수가 없다. 상처로 괴로워하는 짐승의 외침이었다. 호스가 보였다. 나는 그것이 가슴의 어느 부분에 뾰족한 낚시 바늘 같은 닻을 내렸는지 알고 있다. 나는 갑자기 다리가 풀리고 무기력해져서 옆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바로 이것이 성형수술이다. 생생한 상처의 폭력에 복종해야 하는 육체. 바로 이 육체는 달라지려는 욕망 때문에 그 대가를 치르고 구원의 외침을 날카롭게 내지르는 것이다. (맞춤 육체 22~23페이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상기시키는 부분이었다. 성형수술의 이유와 과정에서 육체의 고통이 빠질 수가 없는 거였다. 수술 후 육체가 마음에 드는, 완벽한 결과를 얻었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거쳐야 할 고통의 시간을 감내해야 한다. 가슴 수술을 한 C부인은 퇴원하고서도 고통을 겪었다. 최소 몇 달을 그런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했다. 언젠가는 그 고통이 사라지고 보형물이 들어간 가슴을 더 만족하게 될 순간이 오겠지. 그녀는 그 순간을 기다리며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있으리라.

 

첫 번째 절개가 이루어진 후 지방 덩어리 속으로 들어간 흡입 기구가 거칠게 왔다갔다하면서 일어나는 끔찍한 그 느낌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지방이 배의 내벽으로부터 붉게 물든 혼합물로 축출되는 것, 그리고 나서 호스를 따라 병에 담기는 것을 어떻게 흥분하지 않고 서술할 수 있을까?

저 물질들을 지방이 아니라 고통이라고 생각하자. 영혼으로부터 뽑혀져 나오는 고통, 지방의 모습으로 저장 용기에 가득 채워짐으로써 마침내 사라질 고통. 나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맞춤육체 153페이지)

 

다양한 부위의 성형이 등장한다. 대머리, 주름 제거, 코, 가슴 등. 미용 성형인지 재건 성형인지 구분이 모호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미용 성형에 관련된 부위였다. (화상으로 가슴 수술을 한 여자아이도 등장하는 걸 보면 성형이라는 분야를 거부감으로 채우는 게 다는 아니라는 것. 재건 성형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지울 수는 없다) 그런데 여기서 듣게 되는 성형의 이유가 참 아팠다. 예쁜 몸을 더 예쁘게 하려는 목적만 등장했다면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했을 것이다. 환자마다 각자의 히스토리가 있었다. 주름 제거 수술을 원하던 여자는 남편의 바람기와 그가 던진 살인 같은 말에 충격을 받았다. "당신은 너무 늙었어." 이 말이 비수가 되어 그녀가 수술을 선택하게 했다. 여자는 남자를 사랑했다. 그에게 너무 집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그를 사랑하지만, 그가 완전히 그녀에게 마음 두지 않음에 불안했다. 급기야 너무 늙었다는 말까지 들었다. 성형 수술이라는 방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자기 몸의 주름이 사라지고 늙은 외모가 조금 더 젊어진다면 남편이 자기에게 다시 시선을 주지 않을까 바랐던 거다. 남편에게 집착하고 사랑에 갈구하던 여자의 선택은 성형이었다. 오직 한 가지. 자기 몸과 정신을 남편의 사랑으로 다시 채우고 싶어서.

아버지의 코와 닮았다는 남자는 자기 얼굴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지우고 싶어서 코 수술을 했다. 아버지와의 모든 관계를 벗어나고 싶었던 거였다. 23살부터 36살에 이르기까지 13년 동안 10번의 수술을 했다. 그래서 10번의 수술로 그는 만족할 수 있었을까? 혹시 또 한 번의 수술로 아버지의 기억과 완전한 이별을 이뤄내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생겼다. 가슴 속 상처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선택한 성형 수술. 그게 완전한 답이자 치료가 될 수 있는지 묻는다.

 

이밖에도 많은 성형 수술 환자의 이야기가 들려오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이 드는 생각은 -저자도 같은 얘기를 했지만- 결핍과 사랑이 성형수술로 이끄는 부분이 많다. 물론 성형 수술 환자의 모두가 그런 이유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듣다 보면, 정말로 그 이유가 가장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기 자신이 아닌 누군가 때문에 선택하는 성형. 사랑받기 위해서, 누군가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 선택하는 건 아니냐고... 수술의 남용과 방지를 위해서, 걱정 때문에 심리상담사가 존재하는 걸 보면, 환자의 불안과 결핍을 없애주기 위한 노력도 병행하는 역할이 아닐까 한다. 성형 수술이 해결이 아니라는 것을 전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심리상담사일 거라고. 애슐리 몬테규의 『터칭』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촉각, 인간의 피부에 접촉되는 감각으로 존중과 배려, 아껴지고 있다는 느낌을 찾을 수 있다는 말. 접촉을 통해 사랑을 느끼는 게 우리를 건강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좀 더 다양하고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내가 그 책에서 느낀 가장 큰 부분이다. 우리 몸을 덮고 있다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피부가 스킨십을 통해서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알 수 있다. 외모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교감으로 이루어지는 감정들이 우리를 건강하고 사랑받게 한다는 느낌이다. 수술을 통해 외모의 변형이 사랑을 만들거나 완벽한 육체를 선사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와 닮은 듯하다.

 

나는 여자들이 아름다워지고 결점을 고치기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육체를 내밀고, 의사가 그 피부라는 옷감에 실시하는 작업을 본 이후로, 정말로 우리가 외모에 관한 욕구의 한 단계를 정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눈속임은 더 이상 옷이나 화장, 액세서리에 제한되지 않는다. 눈속임은 이제 의복과 액세서리가 된 살 자체를 정복하고 있다. (맞춤육체 56페이지)

 

성형은 분명 삶에 도움이 되는, 필요한 부분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성형의 부정적인 측면 때문에 막연한 거부감이 먼저 생기곤 했다. 여기를 좀 고쳤으면 더 예쁠 텐데, 더는 굶어도 빠지지 않는 뱃살의 지방을 좀 뽑을 수는 없을까, 눈이 좀 작아진 것 같은데 어떻게 쌍꺼풀이라도, 안 그래도 작은 가슴 나이 들면서 점점 더 작아지는 것 같은데 내 가슴에도 보형물을? 많은 생각과 상상을 하지만 거기서 멈춘다. 가끔 보는 부작용의 모습들이 성형 후 나의 모습이 될까 봐 무서워서 감히 엄두를 못 낸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이대로 사는 게 문제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니, 그대로 살아내 보자, 하는 긍정의 주문을 걸면서 말이다. 그런데 정말, 저자가 만난 사람들의 완벽을 위한 욕망이 아닌 숨겨진 사연들을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성형이 답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나에게 그들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면 나도 성형외과의 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 본다. 젊음에 대한 욕망을 꿈꾸다가도 세월의 흐름과 같이 가는 얼굴의 주름이 괜찮아 보이기도 한다면서 한번 웃고 마는 결론에 이를 때가 더 많지만 말이지.

 

성형수술이 모든 사회 계층으로 확산될 거라는 예감은 어떤 면으로 본다면 논리적이다. 즉 수십 년 전부터 이러한 의학적 발달의 혜택은 여성의 외모라는 문제에 집중되었지만 이제는 남자들과 학생들, 노동자들에게까지 확대되고 있다. 그것 역시 달리 보면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메스로 손쉽게 고칠 수 있는 볼품없는 모습을 평생 감수하면서 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병원에서는 시술을 통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임으로써, 아름다움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원칙을 내세우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외양에 대한 과대평가에는 우리가 경계해야만 하는 일종의 끔찍한 면이 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맞춤육체 211페이지)

 

저자의 취재로 듣는 성형에 관한 좀 더 깊고 넓은 이해. 무엇보다 성형은 자기 자신을 위한 수술이 동기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성형외과는 희망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거라고, 성형이 인생을 바꿀 거라는 생각은 환상이라고. 성형이 옳다 그르다 하는 이분법적 결론을 내놓지는 않는다. 그렇게 편 가르듯 간단하게 말할 수 있었다면 오늘도 성형을 고민하는 사람은 생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균형 감각의 유지를 말하는 저자의 의도를 알 것도 같다. 우리 몸과 정신을 살필 수 있는 심리적 의미와 질문을 계속하면서 글을 맺었다. 수술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비슷한 사례를 들려주며 선택의 책임을 묻기도 하고,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서 성형을 선택해야만 하는 고민도 언급한다. 성형과 관련한 업종에 직접 종사하지 않는다면 잘 알지 못한, 성형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시술 후 이야기를 같이 들려줌으로써 여러모로 문제를 인식하게 한다. 영원한 물음표로 계속될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내가 가볍게 농담처럼 말했던 성형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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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8-22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씨 님, 먼저 좋은 글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근래에 접하기 어려웠던 성찰과 사색을 던져주는 글입니다. 정말 구단씨 님의 글 「육체를 맞춤할 수 있다면, 삶도 맞춘 것처럼 바뀔까?...」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저 또한 요즘 성형에 관한 생각을 나름 깊게 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과 접점이 딱 맞아떨어지는 글을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요. 정말 놀랍고도 흥미롭습니다. 윗글에서 구단씨 님의 성형에 관한 일종의 실존적 고민과 성찰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숨 막히듯 전개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어떤 분은 과장이라고 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구단씨 님 윗글을 읽으면서 분명 그런 느낌을 느꼈습니다. 성형 시술자(성형외과의사), 성형 심리상담사, 성형 당사자, 성형 관찰자들 각각의 시각으로 성형을 여러 측면에서 바라보고 그 이면 혹은 속사정을 두루 살펴봄으로써 상호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형에 대한 막연한 선입견과 피상적 인식을 뚫고 들어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아니 이해해보려고 하지 않았던/못했던 성형의 비밀과 사연과 고민을 귀 기울여 듣게 합니다. 나아가 깊은 철학적 사색으로까지 이끄는군요. 우리 각자는 고유의 형태 혹은 형상을 지니고 있죠. 그것이 고유하다는 의미는 불변하는 정보로서 유전자에(DNA에) 각인돼 있다는 것이죠. 우리 몸의 형태는 동그라미(원), 세모, 네모 등등의 형태적 구성요소들이 적절한 비율로 섞여 완성이 된다고 볼 수 있죠. 그 비율이 유전자에 들어 있는 정보일 텐데요. 그 정보 내용들이 개인마다 존재마다 다르다는 것이죠. 헌데 성형은 (즉 여기에서 논의되고 있는 외과적 성형은) 그 정보 내용을 원천적으로는 바꿀 수 없다는 것이죠. 우리는 대개의 경우 (특히 족보 등 뿌리를 중시하는 한국인들의 경우) 원본, 원형, 원천적인 것, 근원적인 것, 본질적인 것 따위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유전자나 DNA에 내재된 원본·원형·본질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고 할 수 있죠. 따라서 성형이 외형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경향의 발로인 것이라면 우리는 자기모순적인 상황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성형은 외형적 가치 중시의 발로인 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죠. 위 구단씨 님의 글에서 이러한 점은 충분히 드러났다고 봅니다. 성형이 불가피한 선택, 필수불가결한 처방(치료), 혹은 실존적 결단일 수도 있는 경우가 너무나 많으니까요. 해서 저는 이런 상황을 꿈꿔봅니다. 내 정체성(identity) 혹은 인격 동일성, 존재적 고유성을 결정짓는 유전적 정보, 그 원천적 정보의 코드를 선택적으로 바꾸거나, 수정하거나, 교체하거나, 조정하는 그런 가능 세계를 꿈꿔봅니다. 요컨대 외형만을 바꾸는 불완전한 성형에서 원형을 바꾸는 근본적 성형이 가능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겁니다. 이건 헛된 욕망일 수 있죠. 너무나 공상적이거나 혹은 망상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요즘의 외과적 성형이 외형적 가치를 중시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럼 저런 공상/망상은 무엇이라고 이름할 수 있을까요? 외형을 바꾸기보다는 근원으로 돌아가 원형과 본질을 바꾸고 싶다는 갈망을 저렇게 표현해 본 것입니다. 이런 사유를 전개하다 보니 수많은 논제와 개념들이 빗발치듯 마음 속에 몰아치네요. 요즘 화젯거리인 인공지능(AI), 유발 하라리의 Data 개념, 일론 머스크의 AI 종말론, 레이 커즈와일의 2045년 특이점(singularity) 도래 예측, 사이보그(cyborg), 앤드로이드(android), 섹스 로봇(sex robots, sexbots) 등등과 관련지어 성형(plastic surgery) 개념에 대한 사유를 더 깊이 파고들고 싶은데요. 하지만 일단 여기서 마무리짓겠습니다. 막상 깊게 고민하던 문제가 눈앞에 딱 나타나면 갑자기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비워지는 때가 있어요. 지금도 그런 순간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구단씨 님의 윗글은 너무나 깊은 사유의 글이고, 또 그런 깊은 사유로 이끄는 글인 듯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구단씨 님 덕분에 성형이란 논제 혹은 개념을 조금은 생각해볼 계기를 마련한 듯도 합니다.

2017-08-26 14: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제베도 2017-09-01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은 글 읽었습니다. 내가 참 무식하구나...생각하게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qualia님의 글도 좋구요.
아...난 무식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