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지도 - 우리의 습관과 의지를 결정하는 마음의 법칙
이인식 지음 / 다산사이언스(다산북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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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은 내 건데, 이상하게도 그 마음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다. 내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때도, 사람을 대하면서도 그 마음을 읽고 이해하기가 어려울 때도 많다. 도대체 우리 마음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기에, 어떤 요소들을 품고 있기에 마음의 행방을 알기가 어렵단 말인가. 이 마음을 주관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게 인간의 마음은 너무도 복잡하여 알아도 끝이 없을 것 같다. 그런 우리의 궁금증을 알아서일까. 저자는 '마음의 지도'라는 안내서를 통해 단순하지 않은 인간의 마음을 정의하기에 이른다. 그렇다고 저자의 정의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져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이 궁금해서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이 참여하여 연구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마음에 관한 호기심은 공통적이었던 듯하다.

 

저자는 30여년의 조사 기간, 500여명의 학자의 말과 저서를 인용하고, 200여 편의 참고문헌으로 250년 마음 연구의 성취를 이뤄냈다. 그렇게 마음의 본질을 연구하여 집대성한 책이다. 어느 한 분야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학문에서 마음에 접근했다. 그렇게 다양한 학문의 협조(?)로 연구된 내용이라고 하면 어려울 것도 같지만,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쉬운 말로 들려준다.

 

1부에서는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물으면서, 보통 사람의 마음, 특별한 사람의 마음, 행복한 마음을 말한다. 역마살이 창의력을 키운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시야를 넓혀 많은 것을 보게 되는 건 당연하게도 다른 생각을 많이 하게 한다. 갇힌 곳에서 보는 것은 너무 익숙하다. 사람이 많은 것을 볼 때 생각도 다양해진다는 건 자명하다. 처녀들이 봄을 타는 이유 역시 흥미롭다. 겨울의 우울증이 실재하는데, 그 때문에 봄 열병 역시 실재한다. 물론 증명하기에는 학문적 근거가 부족할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아는 마음 아니던가. ^^ 1부의 마지막 부분에 언급하는 '행복한 마음을 만드는 것'은 학문적 근거만큼이나 보편적으로 아는 내용이다. 경제적인 행복은 금액이 정해진 것이 아니고, 행복은 커다란 덩어리 하나가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는 거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행복을 부른다. 매 순간의 작은 마음들이 모여 행복한 마음을 만든다.

 

확장 및 구축 이론은 여러 차례 실험에 의해 입증되었다. 기분이 좋아지면 뇌가 더 많은 정보를 얻게 되므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고의 폭이 확장되는 것으로 밝혀졌고, 창의성과 문제해결 능력이 개선된다는 실험 결과도 나왔다. 또한 프레드릭슨은 일시적인 긍정적 정서로 인해 인지능력이 확장되면 오랫동안 긍정적인 마음의 상태가 구축되는 것을 밝혀냈다. (94~95페이지)

 

2부, 3부는 우리가 겪는 사회와 세상에 관해 반응하고 생기는 마음들을 말한다. 첫인상으로 친구와 적을 알아보기도 하고, 누군가는 순식간에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 기술을 알기 위해 마음을 읽기도 한다. 인간은 이기적인 측면도 강하지만, 페어플레이할 때는 상대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마음도 강하다. 그런 인간의 선한 마음에 반대되는 폭력적인 마음도 있는데, 인간의 폭력적인 성향은 뇌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착한 사람도 폭발할 때가 있다. 그리고 사이코패스에 관한 선입견 중에 폭력적일 거라는 게 있는데, 실제 사이코패스가 다 폭력적인 건 아니다. 오히려 신사적이고 친절한 얼굴을 하곤 한다. 인간에게 키스는 몸 냄새를 교환하는 행위이며, 사람마다 애착 성향이 달라서 사랑의 모습도 다르게 나타난다.

 

명품에 지갑을 여는 이유는, 생물학에서 과시적 소비에 해당하는 개념은 장애 이론으로 설명된다. 장애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로맨틱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과시적 소비인 셈이다. 상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과도한 선물, 과도한 웃음 공세, 과도한 외모 가꾸기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과시적 소비 본능은 명품으로 상대방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할 수 있지만, 효과는 제한적이라고 한다. 인간의 신뢰나 사랑을 얻으려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잠재적 이득과 관련된 선택을 할 때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는 경향이 있는데, 손실에 의한 심리적 효과는 이득에 의한 심리적 효과보다 적어도 두 배는 큰 것으로 여겨진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재적 이득이 잠재적 손실보다 최소한 두 배가 되지 않을 경우에는 돈을 벌거나 잃을 확률이 50대 50으로 전망될지라도 이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밑지는 건 참을 수 없다는 인간의 마음은 이렇게 설명된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무책임한 아버지 때문에 지능 발달도 더디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가장은 도박이나 범죄에 휩쓸리기 수비고 바람을 피울 가능성도 크다. 아버지가 가출한 가정에서 자란 소녀는 성적으로 조숙에서 어려서 임신을 하기 쉽다. 게다가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고 자란 아이들은 지능 발달도 더디다. (215페이지)

 

4부의 우리가 모르는 불가사의한 마음은 초심리학이나 유체이탈, 예지 능력을 말하며, 과학적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긍정적인 면도 보인다. 가령, 심령요법으로 마음의 병을 고치는 등 과학이 증명하거나 해결해주지 못하는 문제들 말이다. 학문보다는 감정적인 측면으로 접근하는 게 아닐까 싶다. 또한 죽음이나 신앙에 관한 것도 인간 마음의 아이러니를 말하는 부분이다. 몸과 마음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면 몸이 나아지기도 하는 모습을 보면 역시 인간의 마음을 다 알기는 어려운 것 같다. 5부에서는 마음의 미래를 말하는데, 조금 더 먼 미래의 우리 마음 작동법을 듣는 것 같다. 과거를 생각하면 현재도 미래의 시간이었고, 불가능해 보이던 것들이 가능한 것으로 미래를 채웠다. 그렇게 생각하면 현재의 우리가 맞이할 미래의 마음도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미래에는 인간의 마음도 통제될지도 모르고, 인간의 뇌를 컴퓨터가 그대로 읽게 되는 일 같은 거 말이다.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에서 봤던 것들이 실제 우리의 미래에서 마주할 수도 있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

 

2010년 4월 중순 펴낸 『자살에 관한 신화』에서 세계적 자살 이론 전문가인 조이너는 자살의 뜻을 이룬 사람은 공통적으로 두려움을 모르고 고통에 무감각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이를테면 아무리 자살하고 싶을지라도 겁이 많거나 숨이 끊기는 순간의 고통을 견뎌내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확률이 높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에 끝내 성공한 사람은 제3자가 중경상을 입거나 살해되는 장면을 목격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으로 밝혀졌다. (327페이지)

 

마음을 아는 것이 인간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오랫동안 미지의 영역으로 간주하였던 인간의 마음을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다양한 예를 들어 설명해주고 있는데, 우리 일상에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질문들이어서 편하게 읽힌다. 그 질문들의 답을 들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동안 알 수 없던 마음의 이야기들을 재밌게 듣게 된다. 우리가 가진 못 마땅한 성격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그 성격을 바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전하는 말에 따르면, 성격을 바꿀 게 아니라 그 성격의 단점을 드러나게 하는 환경을 바꾸는 게 낫다는 것. 그러니 그 어렵다는 성격 바꾸기를 시도하려고 힘들게 애쓰지 말고, 성격 주변의 것들을 바꾸는 것으로 보이는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 인간에 대한 이해는 사회 시스템과 개인에게 모두 영향을 주고, 사람으로 인한 내적 갈등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럴 때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좀 더 잘 알고 있다면 혼란보다는 대처에 능숙해질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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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봄이 짧게 지나가려나 보다...
여긴 남쪽 지방이라 그런지
지난 주말에 꽃구경 하기에 딱 좋을만큼 벚꽃이 피었다.

오늘 오후부터 계속 바람 불고 비가 내리는데,
이 비가 그치면 꽃잎도 다 떨어져있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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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깜짝할 사이 서른셋
하유지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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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많을 것 같지? 안 많더라.” (170페이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다 알 것 같은 마음이었다. 지금 몰랐던 것을 한 살 더 먹으면 잘 알 것 같고, 그렇게 알아가다 보면 나이든 우리는 인생과 세상을 거의 다 알 수도 있을 거로 믿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하루하루 보고 배우는 것은 많아질 것이고, 나이라는 건 숫자가 늘어나는 것과 동시에 머리와 가슴에 채우는 것도 늘어나야 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알게 되는 것도 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저절로 다 알게 되는 것은 없다. 세상살이가 쉬워지지도 않는다. 나이를 먹는 것만큼 인생의 문제는 많아지는데 답이 없다. 세상을 향해 외쳐 봐도 명확한 답을 알 수가 없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런 건가 보다. 나이를 채우는 숫자만큼 살아도, 살면서 수많은 문제를 마주하면서도 쉽게 답을 찾을 수는 없다는 거.

 

오영오. 난 너라는 문제집을 서른세 해째 풀고 있어. 넌 정말 개떡 같은 책이야. 문제는 많은데 답이 없어. 삶의 길목마다, 일상의 고비마다, 지뢰처럼 포진한 질문이 당장 답하라며 날 다그쳐. (40페이지)

 

주인공 오영오에게도 세상은 그랬다. 나이 서른셋, 학습지 출판사 국어과의 편집자다. 제대로 쉬어본 적 없이 야근에 밤을 새우는 게 일상이다. 피곤이 쌓이고 마음은 팍팍하다. 상사를 욕해보지만 이런 일상을 피해갈 수는 없다. 그런 어느 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는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와 따로 살았다. 어쩌다 한번 얼굴을 봐도 데면데면했다. 그런 아버지의 사망 소식에 찾아가지만, 아버지가 남긴 건 오래된 밥통과 아버지의 낡은 수첩뿐이다. 수첩에 적힌 것도 별 것 없다. 이름 네 개가 적혀있을 뿐이다. 자기 딸인 오영오, 한강주, 문옥봉, 명보라. 영오가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아버지와 무슨 연관인지도 모르겠다.

 

한편 영오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오는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이 있다. 공미지. 처음 영오에게 문제집에 출제된 문제를 물어보려고 전화한 미지는 틈만 나면 영오에게 전화를 하면서 문제 이외의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고등학교 진학을 거부하다가 엄마한테 쫓겨나고, 엄마가 버려두다시피 방치한 낡은 아파트로 이사한다. 낡은 아파트의 옆집에 있는 버찌 할아버지를 알게 되고, 미지는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의 심부름을 해주다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읽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연결해주며, 덩달아 말하지 못한 자기의 상처와 마주한다. 무슨 추리소설처럼 영오 아버지의 수첩에 적힌 이름들의 정체가 하나씩 밝혀지고, 동시에 미지의 심부름센터(?)도 호황을 이루면서 영오와 미지 두 사람의 시선에 비친 세상은 하나로 모인다.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고 마무리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삼십대를 살아가는 또 하나의 인물이 세상을 헤쳐 나가는 이야기로 머물지 않을까 하는 심드렁한 느낌이었다. 더 나은 직장을 구하지 못해 현실에 안주하면서 하루하루 먹고 살고, 폐암으로 죽은 엄마의 빈자리를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풀고, 가끔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오는 맹랑한 여중생과의 통화로 한 번씩 휴식을 취하는, 그럭저럭 하루를 버티는 여자의 일상을 보는 것만 같았다. 예상하지 못한 인물들의 등장과 그 사람들과의 연결고리가 생기면서 하나씩 풀어가는 꼬인 실타래는 영오의 일상에 변화를 만든다. 어둡고 칙칙하고, 팍팍해서 건조하고, 미움과 원망으로 삶을 버티는 것을 들켜버린다. 아버지가 경비로 일하던 새별중학교의 계약직 수학 선생 홍강주의 너스레는 영오의 마음에 깊게 자리한 외로움을 슬면서 꺼내게 한다. 그리고 한명씩 차례로 나타나는 문옥봉, 명보라. 이들의 사연에서 영오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상처 없는 사람 없어. 여기 다치고, 저기 파이고, 죽을 때까지 죄다 흉터야. 같은 데 다쳤다고 한 곡절에 한마음이냐, 그건 또 아닌지만서도 같은 자리 아파본 사람끼리는 아 하면 아 하지 어 하진 않아.” (171페이지)

 

아무것도 아닌 일이 가시처럼 기억에 박히기도 한다. 어떤 틈은 희미한 실금에서부터 벌어지고, 어떤 관계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죄목만으로도 망가진다. (69페이지)

 

남들이 볼 때는 왜 그렇게 사는가 싶겠지만, 누군가 그 평온한 일상을 깨트리면서 다가올 때는 두렵다. 가진 게 없어도, 야근이 일상이어도, 믹스커피 한잔에 버티는 오늘의 초라함일지라도. 영오에게 다가온 일상의 침입자들도 그럴까? 영오에게 두려움만 주는 존재일까? 아니다. 오히려 영오의 외로움을 꺼내놓게 하면서 이것 말고 다른 오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계약직이지만 담담하게 수업을 진행하고 자기 미션(?)을 수행하는 홍강주, 인생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지만 제법 잘 흘러가더라고 알려주는 문옥봉, 거기 말고 다른 곳도 좀 보라고 거침없이 말하고 가르쳐주는 명보라. 이들의 집합에 무슨 공통점이 있기에 서로가 스스럼없이 인연이 되었을까. 앞서 간 사람들이 엮어주는 관계가 되어 오늘의 무의미한 인생에 안녕을 고한다.

 

“톡, 건드리면 터지는 봉선화, 다들 그런 꽃봉오리가 있는 것 같아요.” (236페이지)

 

“어떤 것엔 두 번째가 있는데, 어떤 것엔 없단 생각을 했어요.” (124페이지)

 

묘하다. 삶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감정들을 그대로 드러낸 것만 같다. 타인을 알아간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대로 보여주면서, 한편으로는 그 타인과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기에 외로움을 떨쳐내는 게 또 우리들이라는 것을. 아버지의 죽음은 영오가 처리해야 할 하나의 일에 불과했다. 연락도 없이 지내다가 죽은 후에 발견되는 아버지와 그 연락을 받고 아버지의 죽음을 알게 된 딸 사이의 분위기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걸로 끝일 줄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과 수첩에 적힌 이름 세 개는 영오에게 또 다른 세상을 열어주는 거였다. 각자의 상처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저마다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을 공유하면서, 마음을 보듬는다. 이상하게도, 상처를 가진 이들이 모였을 때 나타나는 치유의 힘이 커 보였다. 상처는 상처로만 머물지 않았다. 딱지가 생기고 흉터가 생겼지만, 나아졌다. 나아갔다. 죽음이라는 커다란 상처까지 고통으로 머물러 있지 않았다.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유쾌하기란 쉽지 않다. 한 사람의 죽음은 아무리 생각해도 슬픔이 먼저 다가오는 거 아니겠나. 그런데도 그 죽음으로 시작된 인연과 이야기들이 너무 재밌게 다가온다. 타인의 상처를 볼 줄 알고, 다른 이와 함께 나아갈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과정이 흥미롭다. 닫힌 마음이 열리고, 모험 같은 시간을 겪으면서 함께 하는 일. 서른셋의 오영오와 열일곱의 공미지가 살아가는 모습이 비슷해 보였던 것, 타인의 삶에 끼어들면서 아픔을 치유해갔던 것이 너무 닮아 보여서 뭉클했다. 어쩌면 작가는 우리가 모두 이렇게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그러니 치유해가는 것도 타인과 함께할 때 더 빠르고 덜 아프게 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사람을 안다는 건 참 어려워. 그렇지? 이해한다는 건 더 어렵고. 그 사람이 나든 남이든 말이야.” (193페이지)

 

언제나 어려운 게 타인을 알아가는 일이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삶은 이만큼 와 있지만, 여전히 다 채워지지 못한 것이 더 외롭게 하는 날들이다. 그렇다고 그 삶을 돌이킬 수도 없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지 않을까. 나 이외의 사람을 알아가는 일, 서른셋에도 이렇게 부족한 사람이고 마흔셋에도 여전히 부족한 사람으로 살아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타인과의 조화겠지. 그들과 함께하면서 나를 보는 시간이 들여다보는 시간도 늘어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힘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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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베르는 정열적이고 허물없는 이집트인들에게 큰 인상을 받았다고 일기에 적었다. 플로베르의 이집트 여행 체험은 그의 작품에도 반영됐다. 플로베르는 이집트에 다녀와서 7년 뒤에 『마담 보바리Madame Bovary』를 발표했다. 이 소설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글로벌 베스트셀러가 됐다. 거기엔 자유롭게 욕정을 즐기고 싶어 하는 엠마 보바리Emma Bovary 부인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에로틱 세계사 220페이지)

 

대문호 플로베르가 이집트로 섹스 관광을 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 누구?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의 작품 몇 편을 접한 게 전부이지만, 적어도 작품으로 만난 그의 이미지는 섹스 관광과 전혀 연결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이집트로 섹스 관광을 다녀온 후에 마담 보바리를 탄생시켰다니, 안 믿을 수도 없지 않은가?!

 

세계사와 에로틱을 연결하여 소개하는 게 이 책이 처음은 아닐 테다. 세계사 속에 숨어있는, 은밀한 그들만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건 나뿐이 아닐지도 모른다. 섹스 이야기는 끝이 있을 수 없고, 인간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화두가 된다. 현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아마 오래전부터 인간 사회의 섹스는 일상의 한 부분을 차지하면 인류의 역사와 계속되었을 것이다. 종종 세계사에 녹아든 섹스스캔들 비슷한 이야기는 계속 들려왔다. 하지만 이 책이 흥미로운 건, 부제에서 말하는 것처럼 '1만 년 성의 역사'라는 부분이다. 인류 역사에서 시작된 성 이야기와 후에 발견된 역사의 흔적에서 또 확인하는 성 이야기가 재밌게 들려온다. 앞서 말한 플로베르의 경우만 봐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내용이니, 그 이상의 이야기가 어떻게 들려올지 궁금할 수밖에. 응? ^^

 

수메르인들은 분명 관음증 증세가 심했다. 그들은 남자가 아내의 음부를 오랫동안 바라보면 부자가 되거나 행운이 찾아온다고 믿었다. 에트루리아 사람들은 광란의 사도마조히즘 파티를 열었다. (에로틱 세계사 4페이지)

 

기원전 600년 전의 일이다. 참 기발한 믿음이지 않은가? 여성의 음부를 오랫동안 바라보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믿었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오늘날 심각한 범죄로 인식될 만큼 여성의 신체를 몰래 엿보는 일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하지만 그 시대의 사람들은 그게 범죄가 아니라 열려있는 성문화쯤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성문화가 변하게 된 것은 신석기 혁명부터라고 한다. 떠도는 생활에서 정착생활로 변한 환경, 개인이 가축 키울 땅과 가옥을 소유하게 되면서 그 소유의 주체가 자식으로 돌아가는 게 당연시 됐을 때. 그럼 어떤 자식에게 자기 소유물을 넘겨주어야 하는지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게 적자를 정확히 가려내는 일이 시작되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남편과 아내라는 분명한 관계인 일부일처제가 선호되어야 했다. 그때부터 섹스는 철저한 감시의 대상이 되면서, 소유의 개념 안에 들어간다. 잠자리의 규칙이 생긴다.

 

인간의 갈망은 끝이 없었던 것일까. 이렇게 정한 잠자리 규칙의 제한은 인간의 섹스 욕구를 제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극하기에 이른다. 섹스 테크닉을 전수하는 책이 나오고, 피임약을 만들고, 매음굴을 만들었다. 섹스를 찬양하는 사람과 비난하는 사람이 생겼다. 언제나 양면의 문제를 가지고 존재해온 것이 섹스다. 애널 섹스를 치료법으로 추천한 의사가 있는가 하면, 중세 수도사들은 딜도를 사용하기도 했다. 성문화는 때로는 개방적이고 자유스럽게, 때로는 그 개방성에 반기를 들 정도로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다. 서로 다른 민족의 성문화가 대립하기도 했고, 종교와 도덕적으로 규범적인 제한을 받은 적도 있다. 이 책은 지난 오랜 성문화를 다루면서 인류에게 벌어진 섹스의 감각과 역사를 들려준다. 호모사피엔스는 1만 년 전부터 섹스에 대해 광적으로 관심을 가져왔고, 동굴에 포르노그래피를 그리기도 했으며, 파피루스에 음담패설을 썼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하룻밤에 최소 네 번 성적 만족감을 느끼는 게 여성들의 권리였다고 한다.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는 입으로 여성을 만족시켰다.

 

들을수록 놀라운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중에서도 특이하게 들리면서 많이 놀랐던 게 몇 가지 있는데, 켈트족은 남자나 여자나 상관없이 몸의 털을 모조리 깎았다고 한다. 속옷 없이 바지만 입고 돌아다녔고, 남성들 간의 동성애가 만연이었다. 상당한 미모의 아내가 옆에 있어도 아내와 가까이하지 않으면서 동성과 불같은 연애에 쉽게 휩싸인다. 다른 민족의 사람들에게 야만스럽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그들의 행동은 쉽게 이해를 받을 수 없을 정도였나 보다. 그리고 놀라운 건 지금도 존재하는 섹스 파트너 공동체인 모수오족이다. 이들은 결혼이란 개념이 없다. '아즈부'라는 섹스 파트너만 존재한다. 모수오족 여인은 임신해도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 알 필요가 없다. 아이의 육아는 여자의 어머니와 자매들, 오빠들이 책임진다고 한다. 모수오족의 이런 모습을 본 마르크 폴로는 너무 당황했고, 그것을 미신 숭배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모수오족의 낙원 같은 사회 공동체는 경쟁이나 질투, 분노, 탐욕, 폭력이 없는 세상이었다. 우리가 사는 지금의 사회와는 너무 다른 그들에게는 바로 그곳이 낙원이었으리라. 아니, 낙원인 줄 모르고 처음부터 그냥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회 환경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독일 항문성교의 역사는 30년 전쟁 기간 동안 독일에서 쓰이던 처벌에서 유래했는데, 당시 죄인들은 교도관의 항문을 혀와 입으로 핥아야 했다. 이는 죄수들의 굴욕감을 높이는 방법으로 공개적으로 행해졌다. 이렇게 독일 전쟁사에 등장하는 항문 성교는 독일의 고급문화와 일상생활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괴테도 '엉덩이를 핥을 수 있다'는 말을 사용했고, 모차르트는 <내 엉덩이를 핥아줘>라는 제목의 캐논을 작곡했다고 한다. 독일에서 시작된 항문 집착은 욕에서도 사용되는 말이 나왔고, 항문 성교 행위가 있고, 애닐링구스라는 성교 행위도 있다. 고상했던 문화도시 폼페이에서는 이천년 전에 그려진 그룹 섹스 모자이크가 발견됐고, 독일 황제 하인리히 4세는 비아그라를 사용하고 있었다. 영국의 헨리 8세는 페니스를 강조한 의상으로 패션을 선도하고 있었다. 플레이보이 카사노사가 페미니스트였다는 기가 막힌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기에는 노력이 좀 필요했다.

 

그리고 놀랐던 것 또 하나는 바로 콘돔이다. 타이어가 콘돔에서 탄생했단다. 타이어의 아버지 찰스 굿이어가 아내 몰래 부엌에서 실험하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게 콘돔이다. 고무의 적정 비율을 맞추지 못해 매번 실패하던 실험에서 콘돔을 만들게 되었단다. 영국의 산부인과 의사는 히스테리 치료 목적으로 바이브레이터를 발명했다. 의도적으로 섹스에 관련된 것을 찾다가 개발할 수도 있는 게 많겠지만, 이렇게 우연으로 만들어진 개발과 발명의 현장에서 이뤄낸 성과가 섹스와 연관되어 있다는 게 신기하다. 어느 길로 가더라도 결국엔 섹스에 이용되거나 섹스와 관련된 발견으로 그 목적지를 찍는다.

 

1만 년 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 곳곳에 숨겨진 성 이야기를 시간의 흐름 순서로 들려준다. 섹스가 인류의 보편적인 주제라는데 부정할 수가 없다. 하지만 분위기 탓인지 체면 때문인지, 근엄한 인류 역사 속에서 섹스는 잘 드러내지 못하는 주제가 되기도 했다. 이 책은 성에 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 성 이야기를 재밌게 듣게 한다. 솔직히 나도 이렇게 흥미롭게 읽게 될 줄 몰랐다. 그저 역사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곁가지로 붙여놓은 자질구레한 성 이야기 몇 개 담아놓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으니까. 섹스를 주제로 본 1만 년 인류 연대기가 섹스를 책상 위에 꺼내놓아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숨겨야만 하는, 억압된 주제가 아니라는 거다. 수세기 동안의 우리 조상의 성문화를 다루면서, 인류와 함께해온 섹스가 어떻게 변화하고 어떤 의미를 담아내고 있는지 다양한 사례로 들을 수 있다.

 

덧붙이자면, 책의 뒷부분에 저자가 한국 독자에게 던진 발칙한 제안이 있다. 저자는 한국의 성문화가 많이 궁금한가 보다. 독일에서도 유명하다던 제주도에 있는 러브랜드 테마파크와 한국의 비디오방 문화가 듣고 싶단다. 게다가 한국 성의 역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있는 사건들을 알려달라면서 이메일 주소까지 공개한다. ^^ 역시, 범상치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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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탕에서 생긴 일 비채×마스다 미리 컬렉션 1
마스다 미리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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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는 1주일에 한 번 길게는 2주일에 한 번 목욕탕에 간다. 가끔은 찜질방에 가서 몇 시간을 뒹굴다 오기도 한다. 집에서 샤워한다고 해도 뜨거운 물에 푹 담그고 때를 벅벅 밀어내고 개운해지고 싶을 때가 있다. 어느 순간 습관처럼 거의 매주 가게 되는 곳이 목욕탕이다. 언제부터 다녔는지 기억을 더듬어보면 참 오래된 것 같다. 아주 어렸을 적이었는데, 버스는 타고 시내권으로 갔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동네에 목욕탕이 생기면서, 주말 오전 느지막이 세수도 안 하고 산발한 머리로 슬리퍼 끌고 슬렁슬렁 걸어가면 되는 곳. 몸을 씻고 탕에 들어가서 '어흐~' 하면서 뜨거운 물의 시원함(?)을 느끼고, 몸을 좀 불리고 때를 벅벅 밀어대면서 힘을 쓰는, 뽀드득하는 피부의 깨끗해짐에 혼자 만족하면서 나오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분위기의 목욕탕을 마스다 미리의 에세이로 경험한다. 여탕에서만 볼 수 있는 일, 어느 시절의 목욕탕 분위기, 저자의 어린 시절은 거의 매일 목욕탕에서 마무리하는 것 같다. 그 정도로 자주 다니면서 씻었던 건지 일본이란 문화가 그랬던 건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한 가지 공감하는 건 엄마와 여동생과 함께 다니던 목욕탕이란 공간의 향수다. 탕에 들어가면 동네 사람들을 만나고, 누구네 집 이야기를 하면서 동네 소식을 듣기도 하는, 다 씻고 나오면서 마시던 음료수나 바나나우유 한잔 같은 느낌을 아는가? 사실 내가 어렸을 적 목욕탕에 다닐 때는 바나나우유는 아니어도 뭔가 음료수 하나는 입에 물고 나왔던 것 같다. 요즘에 목욕탕에 다닐 때는 딱히 뭘 사서 마시지는 않고 물 정도로만 마신다. 어린 시절 목욕탕에 가는 건 씻기 위한 목적이기도 했지만, 엄마한테 뭔가 하나 더 얻어먹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는 거, 나만 그런 건 아니지? ^^

 

 

그런 적 있지 않은가? 갈 때마다 같은 패턴으로 목욕탕을 이용하는 거. 꼭 같은 번호의 옷장을 사용하고, 탕으로 들어가면 같은 자리의 샤워기 아래 앉게 되고, 거의 비슷한 시간을 씻는데 할애하는 경우. 그리고 거의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나 같은 경우는 갈아입을 속옷을 안 가져가서 실컷 씻고 입고 갔던 속옷을 찜찜하게 다시 입고 나온 적도 있고, 화장품을 안 가져가서 다 씻고 뻣뻣한 몸으로 집에 온 적도 있다. 때타올 안 가져가서 목욕탕에 갈 때마다 샀던 적도 있고, 동전을 안 가지고 가서 젖은 머리로 온 적도 있다. (지금은 내가 다니는 목욕탕에 일반 헤어드라이어를 놔서 아무나 그냥 사용한다) 옆 사람에게 샴푸를 빌려서 머리를 감은 적도 있다. 다들 이런 비슷한 경험 한두 번쯤 해봤을 것이리라. 목욕탕에 다니면서 경험하는 이런 일들, 실수지만 그럴 수도 있는 재밌는 일로 기억되기도 한다.

 

마스다 미리가 들려주는 여탕 이야기는 성장의 과정을 그대로 느끼는 곳이기도 하다. 내 몸에 하나씩 나기 시작하는 털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던 때가 있었고, 훌러덩 벗고 들어간 탕 안에서 아는 얼굴을 만나서 괜히 민망하던 때가 있었던 시절이 새삼스럽다. 저자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자라왔구나 싶어 웃음도 난다. 몇십 년 목욕탕 경험자는 이제 변했다. 모르는 옆 사람이 보든 말든 가끔 겨드랑이털도 면도한다. 등을 같이 밀자고 말하는 옆 사람에게 힘들어서 못 밀겠다는 말도 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등 미는 기계에 등뿐만 아니라 팔, 가슴 밑, 겨드랑이의 때도 맡긴다. 살이 쪄서 튀어나온 배가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탕 안을 활보한다. 각자의 몸, 각자의 사정으로 다르게 가꿔나가는 걸 어쩌랴. 이렇게 뻔뻔해진다.

 

동네 목욕탕 탈의실에서 가지가지 음료수를 마시면서 어른이 됐지만 물론 매일 밤 마시지는 않았다. 오늘은 됐어, 하고 참은 날도 있다. 건강을 염려해서가 아니라 부모님 지갑 사정을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돌고 돌아 내 몸을 생각한 결과가 됐나? (71페이지)

 

 

다양한 에피소드가 들려오는데, 조금 놀랐던 몇 가지가 있다. 어렸을 적에 아빠를 따라 남탕에 갔다던가, 아주머니가 벗은 몸으로 카운터의 청년과 이야기를 한다던가, 여탕에 갓난아이를 놔둘 수 있는 아이 놓는 침대칸 같은 게 따로 있었다던가 하는 이야기들. 특히 벗은 몸으로 카운터의 청년과 이야기한다는 이야기에서는 너무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목욕탕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기에 그런 장면이 가능하지? 아니면 나이를 먹은 여자는 그런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문화이기는 하더라. 그리고 가끔 엄마 손을 잡고 여탕에 들어오는 남자 아이를 본 적은 있는데, 아빠를 따라서 남탕에 들어가는 여자 아이를 본 적은 없다. 내가 못 본 건지 실제로 아빠들이 딸을 데리고 남탕에 가지 않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장면도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좀 안타까우면서도 정이 느껴졌던 건, 목욕탕에 아기들을 뉘어놓는 자리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는 거다. 엄마들이 씻는 동안 아이를 봐주려는 목욕탕의 배려가 눈에 들어오는 이야기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게 다 사라졌다는 게 아쉽다. 아기를 데리고 목욕탕에 오면서 아기를 목욕탕에 맡긴다는 게 싫어서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아기가 적어졌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아니면 시골에서 점점 사라지는 젊은 인구의 부재를 증명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언제였던가, 친구가 처음 서울에 올라가서 자취하던 동네의 목욕탕에 갔더란다. 등이 너무 근질거려서 옆에 있던 아주머니에게 등을 좀 같이 밀자고 했더니 그 아주머니 하는 말이, "나는 등 안 밀어요!" 그랬다고 한다. 바로 거절의 말이 들려올 줄 몰랐다던 친구는, 그게 서울의 인심인가 싶어서 서글퍼졌다고... 모두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시골의 목욕탕을 생각하면 모르는 사이에 서로 등을 미는 것쯤이야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여길 텐데. 친구의 말을 듣고 나는 반대의 마음이 생겼다. 아, 나는 그동안 왜 옆 사람이 같이 등 밀자고 하는 걸 거절하지 못했을까?! 굳이 등을 안 밀어도 되고, 옆에 덩치 큰 아주머니가 등 밀어달라고 하면 힘들어 죽겠던데... ㅠㅠ 요즘 다니는 동네 목욕탕에는 등을 미는 기계가 있어서 굳이 옆 사람과 같이 등을 밀지 않아도 되는 게 너무 편하고 좋다. 물론 엄마와 함께 목욕탕에 갈 때가 대부분이어서 엄마와 서로 등을 밀지만, 굳이 모르는 옆 사람과 등을 같이 밀 생각조차 안 하는 나를 보면, 나도 그리 인심 좋은 시골 사람은 아닌 듯하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온천의 발달 때문인지 일본인들의 정서가 그런 건지 다 알 수는 없지만, 마스다 미리의 이야기만 들어보면 일본인들은 정말 목욕을 좋아하는 건가 싶다. 도시에서도 목욕탕에 계속 다니는 걸 보면 아무래도 이건 저자뿐만 아니라 다수의 일본인이 가지는 문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덩달아 남탕의 모습도 궁금해진다. 여탕의 분위기는 내가 다니고 있으니 어느 정도 알겠던데, 남탕은 어떨까? 누군가의 말처럼 남자는 같이 목욕탕에 가서 친해지고, 여자는 친해져야 같이 목욕탕에 간다던데... 남탕은 모르는 사이의 옆 사람도 불편하지 않게 사우나에 나란히 앉아 있을까?

 

지난주에 목욕탕에 갔을 때는 60대로 보이는 딸이 80대로 보이는 엄마와 함께 온 걸 봤다. 할머니는 치매에 걸리신 것 같았다. 옷도 잘 안 벗으려고 하고, 물에 잘 씻지도 않으시려고 했다. 딸은 그런 엄마를 달래면서 구석구석 씻겨주고, 엉뚱한 질문을 하는 엄마의 말에 꼬박꼬박 대꾸해주고 있었다. 그러면서 가끔 한숨 섞인 개운함을 내뱉곤 했다. 뜨거운 탕에 들어가서 시원하다고 말하면서 크게 숨을 내쉬기도 하는 행동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씻고 집에 가서 점심으로 뭘 먹자는 말을 하는 걸 보면, 아마도 치매에 걸린 엄마와 딸은 같이 사는 것 같았다. 일상이 어떻게 흘러갈지 상상이 됐다. 아마 목욕탕에 오는 별것 아닌 일상이 그들에게는 굉장히 노력해야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한 번의 외출을 위해 딸은 또 집에서부터 엄마를 얼마나 어르고 달래서 모시고 나왔을까. 이 책의 마지막 장이 자꾸 생각난다. 마스다 미리의 말처럼, 동네 목욕탕에서 할머니들을 볼 때마다 죽음을 생각하게 되고, 한편으로는 그 할머니들의 쪼글쪼글한 몸을 볼 때마다 장수의 증거를 확인하는 것 같다. 목욕탕에서 장수인생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내가 엄마의 등을 밀어드릴 때마다 느끼는 것과 비슷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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