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탕에서 생긴 일 비채×마스다 미리 컬렉션 1
마스다 미리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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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는 1주일에 한 번 길게는 2주일에 한 번 목욕탕에 간다. 가끔은 찜질방에 가서 몇 시간을 뒹굴다 오기도 한다. 집에서 샤워한다고 해도 뜨거운 물에 푹 담그고 때를 벅벅 밀어내고 개운해지고 싶을 때가 있다. 어느 순간 습관처럼 거의 매주 가게 되는 곳이 목욕탕이다. 언제부터 다녔는지 기억을 더듬어보면 참 오래된 것 같다. 아주 어렸을 적이었는데, 버스는 타고 시내권으로 갔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동네에 목욕탕이 생기면서, 주말 오전 느지막이 세수도 안 하고 산발한 머리로 슬리퍼 끌고 슬렁슬렁 걸어가면 되는 곳. 몸을 씻고 탕에 들어가서 '어흐~' 하면서 뜨거운 물의 시원함(?)을 느끼고, 몸을 좀 불리고 때를 벅벅 밀어대면서 힘을 쓰는, 뽀드득하는 피부의 깨끗해짐에 혼자 만족하면서 나오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분위기의 목욕탕을 마스다 미리의 에세이로 경험한다. 여탕에서만 볼 수 있는 일, 어느 시절의 목욕탕 분위기, 저자의 어린 시절은 거의 매일 목욕탕에서 마무리하는 것 같다. 그 정도로 자주 다니면서 씻었던 건지 일본이란 문화가 그랬던 건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한 가지 공감하는 건 엄마와 여동생과 함께 다니던 목욕탕이란 공간의 향수다. 탕에 들어가면 동네 사람들을 만나고, 누구네 집 이야기를 하면서 동네 소식을 듣기도 하는, 다 씻고 나오면서 마시던 음료수나 바나나우유 한잔 같은 느낌을 아는가? 사실 내가 어렸을 적 목욕탕에 다닐 때는 바나나우유는 아니어도 뭔가 음료수 하나는 입에 물고 나왔던 것 같다. 요즘에 목욕탕에 다닐 때는 딱히 뭘 사서 마시지는 않고 물 정도로만 마신다. 어린 시절 목욕탕에 가는 건 씻기 위한 목적이기도 했지만, 엄마한테 뭔가 하나 더 얻어먹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는 거, 나만 그런 건 아니지? ^^

 

 

그런 적 있지 않은가? 갈 때마다 같은 패턴으로 목욕탕을 이용하는 거. 꼭 같은 번호의 옷장을 사용하고, 탕으로 들어가면 같은 자리의 샤워기 아래 앉게 되고, 거의 비슷한 시간을 씻는데 할애하는 경우. 그리고 거의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나 같은 경우는 갈아입을 속옷을 안 가져가서 실컷 씻고 입고 갔던 속옷을 찜찜하게 다시 입고 나온 적도 있고, 화장품을 안 가져가서 다 씻고 뻣뻣한 몸으로 집에 온 적도 있다. 때타올 안 가져가서 목욕탕에 갈 때마다 샀던 적도 있고, 동전을 안 가지고 가서 젖은 머리로 온 적도 있다. (지금은 내가 다니는 목욕탕에 일반 헤어드라이어를 놔서 아무나 그냥 사용한다) 옆 사람에게 샴푸를 빌려서 머리를 감은 적도 있다. 다들 이런 비슷한 경험 한두 번쯤 해봤을 것이리라. 목욕탕에 다니면서 경험하는 이런 일들, 실수지만 그럴 수도 있는 재밌는 일로 기억되기도 한다.

 

마스다 미리가 들려주는 여탕 이야기는 성장의 과정을 그대로 느끼는 곳이기도 하다. 내 몸에 하나씩 나기 시작하는 털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던 때가 있었고, 훌러덩 벗고 들어간 탕 안에서 아는 얼굴을 만나서 괜히 민망하던 때가 있었던 시절이 새삼스럽다. 저자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자라왔구나 싶어 웃음도 난다. 몇십 년 목욕탕 경험자는 이제 변했다. 모르는 옆 사람이 보든 말든 가끔 겨드랑이털도 면도한다. 등을 같이 밀자고 말하는 옆 사람에게 힘들어서 못 밀겠다는 말도 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등 미는 기계에 등뿐만 아니라 팔, 가슴 밑, 겨드랑이의 때도 맡긴다. 살이 쪄서 튀어나온 배가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탕 안을 활보한다. 각자의 몸, 각자의 사정으로 다르게 가꿔나가는 걸 어쩌랴. 이렇게 뻔뻔해진다.

 

동네 목욕탕 탈의실에서 가지가지 음료수를 마시면서 어른이 됐지만 물론 매일 밤 마시지는 않았다. 오늘은 됐어, 하고 참은 날도 있다. 건강을 염려해서가 아니라 부모님 지갑 사정을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돌고 돌아 내 몸을 생각한 결과가 됐나? (71페이지)

 

 

다양한 에피소드가 들려오는데, 조금 놀랐던 몇 가지가 있다. 어렸을 적에 아빠를 따라 남탕에 갔다던가, 아주머니가 벗은 몸으로 카운터의 청년과 이야기를 한다던가, 여탕에 갓난아이를 놔둘 수 있는 아이 놓는 침대칸 같은 게 따로 있었다던가 하는 이야기들. 특히 벗은 몸으로 카운터의 청년과 이야기한다는 이야기에서는 너무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목욕탕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기에 그런 장면이 가능하지? 아니면 나이를 먹은 여자는 그런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문화이기는 하더라. 그리고 가끔 엄마 손을 잡고 여탕에 들어오는 남자 아이를 본 적은 있는데, 아빠를 따라서 남탕에 들어가는 여자 아이를 본 적은 없다. 내가 못 본 건지 실제로 아빠들이 딸을 데리고 남탕에 가지 않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장면도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좀 안타까우면서도 정이 느껴졌던 건, 목욕탕에 아기들을 뉘어놓는 자리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는 거다. 엄마들이 씻는 동안 아이를 봐주려는 목욕탕의 배려가 눈에 들어오는 이야기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게 다 사라졌다는 게 아쉽다. 아기를 데리고 목욕탕에 오면서 아기를 목욕탕에 맡긴다는 게 싫어서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아기가 적어졌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아니면 시골에서 점점 사라지는 젊은 인구의 부재를 증명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언제였던가, 친구가 처음 서울에 올라가서 자취하던 동네의 목욕탕에 갔더란다. 등이 너무 근질거려서 옆에 있던 아주머니에게 등을 좀 같이 밀자고 했더니 그 아주머니 하는 말이, "나는 등 안 밀어요!" 그랬다고 한다. 바로 거절의 말이 들려올 줄 몰랐다던 친구는, 그게 서울의 인심인가 싶어서 서글퍼졌다고... 모두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시골의 목욕탕을 생각하면 모르는 사이에 서로 등을 미는 것쯤이야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여길 텐데. 친구의 말을 듣고 나는 반대의 마음이 생겼다. 아, 나는 그동안 왜 옆 사람이 같이 등 밀자고 하는 걸 거절하지 못했을까?! 굳이 등을 안 밀어도 되고, 옆에 덩치 큰 아주머니가 등 밀어달라고 하면 힘들어 죽겠던데... ㅠㅠ 요즘 다니는 동네 목욕탕에는 등을 미는 기계가 있어서 굳이 옆 사람과 같이 등을 밀지 않아도 되는 게 너무 편하고 좋다. 물론 엄마와 함께 목욕탕에 갈 때가 대부분이어서 엄마와 서로 등을 밀지만, 굳이 모르는 옆 사람과 등을 같이 밀 생각조차 안 하는 나를 보면, 나도 그리 인심 좋은 시골 사람은 아닌 듯하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온천의 발달 때문인지 일본인들의 정서가 그런 건지 다 알 수는 없지만, 마스다 미리의 이야기만 들어보면 일본인들은 정말 목욕을 좋아하는 건가 싶다. 도시에서도 목욕탕에 계속 다니는 걸 보면 아무래도 이건 저자뿐만 아니라 다수의 일본인이 가지는 문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덩달아 남탕의 모습도 궁금해진다. 여탕의 분위기는 내가 다니고 있으니 어느 정도 알겠던데, 남탕은 어떨까? 누군가의 말처럼 남자는 같이 목욕탕에 가서 친해지고, 여자는 친해져야 같이 목욕탕에 간다던데... 남탕은 모르는 사이의 옆 사람도 불편하지 않게 사우나에 나란히 앉아 있을까?

 

지난주에 목욕탕에 갔을 때는 60대로 보이는 딸이 80대로 보이는 엄마와 함께 온 걸 봤다. 할머니는 치매에 걸리신 것 같았다. 옷도 잘 안 벗으려고 하고, 물에 잘 씻지도 않으시려고 했다. 딸은 그런 엄마를 달래면서 구석구석 씻겨주고, 엉뚱한 질문을 하는 엄마의 말에 꼬박꼬박 대꾸해주고 있었다. 그러면서 가끔 한숨 섞인 개운함을 내뱉곤 했다. 뜨거운 탕에 들어가서 시원하다고 말하면서 크게 숨을 내쉬기도 하는 행동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씻고 집에 가서 점심으로 뭘 먹자는 말을 하는 걸 보면, 아마도 치매에 걸린 엄마와 딸은 같이 사는 것 같았다. 일상이 어떻게 흘러갈지 상상이 됐다. 아마 목욕탕에 오는 별것 아닌 일상이 그들에게는 굉장히 노력해야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한 번의 외출을 위해 딸은 또 집에서부터 엄마를 얼마나 어르고 달래서 모시고 나왔을까. 이 책의 마지막 장이 자꾸 생각난다. 마스다 미리의 말처럼, 동네 목욕탕에서 할머니들을 볼 때마다 죽음을 생각하게 되고, 한편으로는 그 할머니들의 쪼글쪼글한 몸을 볼 때마다 장수의 증거를 확인하는 것 같다. 목욕탕에서 장수인생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내가 엄마의 등을 밀어드릴 때마다 느끼는 것과 비슷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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