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 신간

진이, 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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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등산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1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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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크든 작든 짐을 지고 있다. 단, 그 짐은 옆에서 보면 내려놓으면 될 것 같지만 그 사람에게는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오히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모색한다. 그것을 등에 지고 살아가는 방법을. (346페이지)

 

<나는 자연인이다> 프로그램을 보면서 이해할 수 없던 한 가지는, 그들이 생활의 불편함을 어떻게 견디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의외였다. 당연하고 익숙하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생활의 불편함이 뭐 별거냐 하는 표정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그들에게 있으니 이 정도는 감수해도 괜찮은 것 아니겠냐는 듯이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듣다 보면 다 세상에서 겪은 어려움이 그들은 산으로 보낸 것 같다. 몸이 아파서, 가까운 사람의 배신으로, 사업이 실패 때문에 같은 세상에서 부딪힌 몸과 마음의 상처를 보듬기 위해 산으로 들어가곤 했다. 주변에 몸과 마음 뉠 곳 많을 텐데 왜 하필 산일까 싶은 궁금증이 생겼지만, 그들이 느낀 그대로를 내가 다 알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들의 산속 생활로 내가 알게 된 건 산이 인간에게 주는 마음의 위안과 쉼이었다. 세상의 복잡한 일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을 만드는 일이었다.

 

뜬금없이 들리기도 했다. 미나토 가나에가 '여자들의 등산일기'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추리소설을 주로 썼던 작가가 인생 드라마 같은 이야기로 들려주고 싶은 게 무엇일지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평소 접하던 작가의 글 분위기가 아니어서, 기대보다는 그냥 새로운 맛 하나를 알게 되는 게 아닐까 싶은 내려놓음이었다. 그런데 첫 번째로 들려오는 이야기부터 마음에 파고드는 어떤 느낌이 있다. 공포와 추리를 맛보며 즐겼던 걸 잊을 만큼, 새로운 느낌의 이야기가 일상의 우리에게 훅 다가와 버린 것 같다.

 

8개의 산에 오르는 여자들의 이야기다. 직장동료지만 친하지 않은 사이의 리쓰코와 유미(묘코 산), 맞선 파티에서 만난 미쓰코와 간자키(히우치 산),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에게 등산을 배운 여자의 정상 등반일기(야리가타케), 처음으로 언니와 등산을 하게 된 서른다섯의 유미(리시리 산), 동생 유미, 딸 나나카와 다시 산에 오르게 된 여자(시로우마다케), 남자친구 다이스케와 함께 산에 오른 마이코(긴토키 산), 웹사이트 '여자들의 등산 일기'에 모자를 만들어 파는 유즈키의 뉴질랜드 트래킹 투어(통가리로), 언니와의 등산에 두 번 산에 오르고 본격적으로 등산을 즐기려는 여자(가라페스에 가자)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미 제목에서 느꼈겠지만, 여자들의 등산 일기 그대로다. 산에 오르는 여자들의 속내가 하나씩 들려온다. 그들의 마음을 복잡하게 하는 이야기를 털어놓거나, 관계의 불편함을 드러내거나, 과거의 한때를 불러오거나... 저마다 사연이 다른 그들의 공통된 목적지는 산에 오르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이야기를 품게 된다. 때로는 누구에게 털어놓으면서 내가 가진 문제를 조금 가볍게 만들기도 하지만, 끝까지 꺼내놓지 못하고 가슴에 묻게 되는 이야기도 있다. 각자가 짊어지고 가야 하는 짐처럼 우리 마음의 많은 걱정거리와 생각들도 그러하다. 단순하게 판단하면서 금방 흑과 백의 논리로 판단할 수 없는 문제들 말이다. 불편한 동료와 산에 오르는 것 자체가 거북했던 여자, 남편의 이혼 요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는 여자,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자기가 원하는 일을 선택하면서 불안해하는 여자, 애인과의 결혼을 생각하지만 막상 현실은 자기 뜻과 다르게 흘러갈 것 같아서 고민하는 여자,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혼자인 삶을 선택했지만 외로움을 느끼는 여자. 각자가 가진 고민은 너무 다양하다. 직장, 결혼, 관계. 평범한 일상에서 언제 어디서나 겪을 수 있는 문제들이기도 하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듣고 있다 보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항상 고민해야 하는 문제들 앞에서, 산이라는 곳은 분명 무언가 해답의 길을 열어주는 곳이라는 게 맞는 것 같다. 산의 정상에 오르는 게 아니라, 산에 오르는 그 과정과 시간 속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어떤 것들이 말해주는 것들. 그것을 찾게 하는 여정에 작가는 독자를 동참시키면서 같이 등산하게 한다. 중간 즈음에 잠깐 멈춰서 물 한 모금 마시게 하고, 다시 걷다가 멈춰서 초콜릿을 입에 넣고 당 충전하게 하고, 무심코 바라본 하늘의 구름이 내 발밑에 있는 신기함에 시선을 빼앗기게 하고, 모르는 이들과 함께 오르면서 타인을 이끄는 것도 배우게 하는... 이 여정에서 놓칠 게 하나도 없는 듯하다.

 

이 소설 속 여자들의 이야기가 어디쯤에서 풀려나와 흘러갈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선택한 문제의 해결이 어느 정도의 만족감을 줄지 모르겠지만, 산에 오르는 방식으로 자기만의 문제를 파고든다. 생각하고, 변화시키고, 문제를 더 깊이 들여다보려 애쓴다. 하지만 처음부터 자기의 상황을 냉정하고 간결하게 들여다보는 사람은 없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이게 나을까 저게 나을까, 이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까 아니면 단절해버릴까. 뭐든 정리하고 해답을 보고 싶은데 그게 또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늘 고민하고 생각하고 결정하면서도 완벽한 합의에 이르지 못한 것처럼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사는 게 아닐까. 산에 오른다고 해서 각자가 짊어진 문제와 고민들이 해결되는 건 아니다. 그 과정에서 생각하고 변화하는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게 등산 일기에 기록될 팩트다. 빠르게 가지 않아도 되는, 천천히 한 걸음씩 가다 보면 도착하는 그 목적지를 보게 하는 일.

 

어디가 목표인지는 알 수 없다. 무엇이 목표인지는 알 수 없다.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 그게 문제가 아닐 것이다. (50페이지)

 

페이스를 맞춰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산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 보니 처음부터 나 혼자 힘으로 오를 수 있었던 것처럼 페이스를 흐트러뜨리는 사람과는 같이 오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염치도 없이 상대방에게 말했다. (140페이지)

 

타인과 함께 하는 삶을 이해하고, 관계의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게 필요하다는, 누군가 함께 걷는 길이 생각보다 괜찮을 수 있다는 것을 들려주는 이야기에 은근한 감동까지 생긴다. 아마도 그동안 작가의 글에서 만났던 강함보다 부드러움이 전해져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천천히 걷는 즐거움을 배운 듯하다. 지금이 아니어도, 급하게 하지 않아도 결국 닿게 되는 그 지점에 다다르는 우리 마음의 변화가, 생각보다 즐겁고 의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천천히 한 발자국 떨어져서 걷다 보니 보이는 것들을 확인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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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무민 골짜기 토베 얀손 무민 연작소설 8
토베 얀손 지음, 최정근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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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조금 무민의 이야기를 제대로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벌써 무민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괜히 서운했다. 무민 가족과 그 친구들이 들려주는 가슴 따뜻해지는 이야기에 일상의 다정함 같은 것을 전해 받는 느낌이었다. 착해지는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 투덜거리고 싸우는 것 같아도 진짜 마음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아서일까, 이들이 주고받는 마음이 그냥 생겨난 게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니 더 푸근해지곤 했다. 그런 이야기를 이제는 더 들을 수 없다니, 매우 아쉽다.

 

무민 가족은 어디로 갔을까. 무민 가족이 없는 골짜기로 모두가 모였다. 어쩌다가 이렇게 다시 모여들었는지. 여름의 싱그러움은 점차 사라지고 겨울을 바라보는 가을에 이들은 다시 만났다. 바람은 차갑고, 웬만한 곳의 문은 다 닫혔다. 겨울과 함께 추위와 어둠이 몰려올 것이다. 그러니 꽁꽁 닫힌 문은 더 단단하게 닫히길 바라겠지. 그런 숲길을 걷는 스너프킨은 무민 골짜기의 친구들이 일어날 시간을 기다린다. 그럼블 할아버지와 헤물렌, 밈블, 토프트, 필리용크, 스너프킨. 이 여섯 명이 무민의 빈집으로 찾아온다. 무민 가족이 없다는 것을 미리 알았는지 몰랐는지, 아무렴 어떤가 싶은 마음들인지 무엇인지. 주인 없는 집에 모인 이들의 추운 날이 시작된다.

 

각자의 시간을 살면서 이들은 무슨 일을 겪었던 것일까. 마음에 어떤 생채기를 담게 되었을까. 무민의 골짜기로 모여든 이들은 각자의 아픔이 있다.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 상처 가슴에 품은 채로 살고 있다. 듣는 내가 다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아픔은 오늘을 힘들게 한다. 외롭고, 우울하다. 삶의 피로를 느낀다. 하지만 그들이 기억하는 무민 골짜기는 따뜻한 곳이다. 함께했을 때 그들은 즐거웠고, 그 시간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푸근했다. 아마도 그런 기억과 기대로 다시 그곳에 모여들었을 것 같다. 나의 마음 어루만져줄 유일한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간, 그런 장소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살아가기 마련이지 않은가. 돌아가고 싶어지는 곳, 그곳에서 마주한 것들로 마음을 채우고 싶은 곳 말이다. 무민 가족은 걱정 없이 사는 듯했고, 일상이 평화로웠다. 아마 그 분위기에 스며들고 싶어서 찾아왔을 텐데, 무민 가족은 없고 집은 텅 비어있었다. 그래서 기다리기로 한다. 주인 없는 집에서 언제 올지 모를 무민 가족을 기다린다. 그건 아마도 간절한 바람 같은 게 아니었을까. 무민 가족을 만나고 그들의 평화로움을 접하고 나면 다시 그들만의 세계로 돌아가도 더는 아프거나 슬프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 같은 거.

 

주인 없는 집에 모인 방문객들이 같이 살아가는 모습은 편하지 않다. 각자 개성이 너무 뚜렷한 이들이 어떻게 지낼지 눈에 선하다. 고집불통에, 소심하고, 결벽증이 심하기까지 하는 이들이 어떻게 한 공간에서 머물 수 있겠는가 싶지만, 어쩌랴, 기다리는 이가 있는 것을. 기다려야만 하는 것을. 이들의 불만은 서로가 맞지 않는 성격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마 이런 기분 때문이지 않을까? 그런 거, 학교 갔다가 돌아왔는데 집에 엄마가 없어서 괜히 투덜투덜, 뭔가 불안하기도 하고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없어서 툴툴거리고, 자꾸만 이 방 저 방 문 열고 엄마를 불러보기도 하는, 없는 걸 알면서도 언제 올지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입만 툭 내미는 거. 그들이 바라던 이는 그곳에 없고, 다른 이들과 한 공간에 머물면서 예상 밖의 일(무민 가족이 없었던 일)을 감당해내야 하는 불편함과 괜한 서운함 같은 거 말이다. '나는 아니야, 나는 달라, 그런 거 아니거든!' 이러면서 나에게 변명 같은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릴 적 엄마의 부재로 집이 텅 비어있던 순간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렇지만 또 그 순간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처럼, 또 그들만의 조화를 이루면서 무민 가족이 없는 순간을 견뎌낸다. 혼자였다가 함께였다가, 각자의 뚜렷한 성격으로 서로가 맞지 않으면서도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무민 가족을 기다린다는 것. 그렇다면 함께 해야만 하는 순간도 인정해야 한다.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그들의 공통된 기다림을 즐겁게 보내야 한다. 그렇게 또 하나를 겪는다. 배운다.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벽을 세우면서도 타인과 함께 하면서 맞춰가는 스스로를 보게 된다. 이런 변화가 성장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치유와 위로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무민 골짜기의 겨울은 해가 뜨지 않는다. 그 겨울의 길목에서 모인 이들의 마음도 딱 겨울이었을 것이다. 이 겨울을 견디는 법을 배우고자, 혹은 위로받고자 찾아온 곳에서 더 혹독한 겨울을 보낼 것만 같은 상황이 두렵기도 했을 텐데, 그래도 견뎌내는 이들의 모습이 은근한 감동을 준다. 화창한 여름에서 대부분의 것이 소멸하는 겨울로 가는 그 과정은 겪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스산하고 춥다. 마음마저 춥다면 한파를 제대로 겪는 겨울이 되겠지. 하지만 그 겨울을 거치지 않고서는 다시 봄도, 여름도 만날 수가 없다. 무민 골짜기로 모여든 그들의 삶에서 사라진 그 무엇은, 결국 스스로 찾아야만 한다는 것을 이렇게 배운다. 추운 계절을 겪고 따뜻한 계절로 건너가는 것처럼, 무민 가족의 힘을 받아 건너가고 싶었던 마음의 겨울은 스스로 건너가야 했던 거다.

 

가을이 조용히 겨울을 향해 가는 시간은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는 시간이자, 필요한 무엇이든 창고에 그득하게 채워 넣는 시간이었다. (12페이지)

 

읽으면서 내내 무민 가족은 언제 등장하는지 기다렸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마치 나도 모르게 도움을 줄 누군가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내 안에서 부족한, 사라진 것들을 채우기 위해 누군가를 기다리는 건 의미가 없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무민 가족은 등장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 부분이 이 이야기의 메시지가 되는 듯하다. 누군가는 다시 떠나고 누군가는 아직도 기다리고.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마음이 흐르는 대로, 겪고 배운 만큼의 시간으로 또 내일을 살아간다. 다시 돌아오는 무민 가족을 만난다면, 괜히 더 반가울 것 같다. 당신들이 사라진 빈집이 마치 마법을 부린 것 같다고 말해주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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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터
김호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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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청소년 문학을 읽을 때 보이는 장면이 있다. 부모는 자기의 못다 이룬 꿈을 위해 자식에게 자기의 바람을 집어넣는다. 어렸을 적 간절히 바라던 꿈이 있었지만 이루지 못한 채로 성인이 되었을 때, 이루지 못한 그 아쉬움을 자식에게 달래고자 할 때 말이다. 그래서 종종 자기의 간절함을 자식에게서 이루게 하여 만족하고 싶어 한다. 그 바람은 자식과의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이루지 못한 꿈으로 남아있기도 한다. 아쉽고 또 아쉽지만 어쩌랴. 세월은 흘렀고, 이미 어른이 되었으며, 자기의 꿈을 자식에게 강요하기보다는 자식의 인생을 응원해 주는 게 부모의 역할인 것을. 하지만 미련하게도 남아있는 게 있다. 아쉬운 그 마음은 죽을 때까지 이루지 못한 바람을 끌어안고 사는 게 될지도 모른다. 마음 한구석, 언제나 갈증을 일으키는 그것은 무엇일까.

 

이 소설에 등장하는 기득권층의 취미 같은 게임도 비슷하다. 나이는 먹었고, 돈은 많다. 어떤 식으로든 돈을 축적하면서 노년에 이르렀다. 아마도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으로 돈을 쌓았겠지. 당연하다. 누구라도 돈의 힘을 무시할 수 없는 게 바로 세상 아니던가. 그들이 살아온 인생을 부정하거나 그들의 돈을 욕하고 싶지는 않다. 문제는 그들이 아바타처럼 조종하는 젊은이들의 인생이다. 오롯이 자기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가야 하는 게 맞는 건데, 그들에게 선택당한 젊은이들은 자기 맘대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하다. 그걸 아무도 알지 못한다. 오직 젊은 인생들을 조종하는 그들만 알 뿐이다.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는 너무도 아름답다. 이제 멈추어라…… 너는 참으로 아름답다……." (98페이지)

 

메이저리그 진출을 앞두고 있는 박준석은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한다. 그 사고로 최경이라는 여자를 알게 되고, 경은 준석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한다. 준석의 머릿속에 거머리가 심어져 있고, 그 거머리는 파우스트에게 준석의 모든 일상을 지켜보게 한다는 것. 준석이 보고 듣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파우스트가 똑같이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준석의 인생을 누군가가 준석과 똑같이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같은 인생을 두 사람이 사는 게 문제라기보다는, 파우스트가 조종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파우스터가 바로 그 젊은이들이라는 게 문제다. 누가 감히 타인의 인생을 조종할 수 있는가? 개인의 아쉬운 인생을 좀 풀어보고자, 타인의 인생을 마음대로 조종해도 된다고 누가 허락했느냔 말이다. 메피스토 코리아는 창립멤버이자 메피스토 코리아의 개설을 도운 태근은 자기의 젊은 시절을 보는 듯한 야구선수 준석을 골랐다. 형편 때문에 꿈을 이루지 못할 상황에 부닥친 준석에게 보이지 않는 손으로 여러 방면에서 도우면서 준석이 야구선수로의 탄탄대로를 걷게 만든다. 준석은 몰랐지만, 준석이 현재의 선수로 키워지기까지 구석구석 태근의 손이 미친 것이다. 그러니 지금까지 10년 동안 준석이 이룬 삶은 준석의 것이 아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준석만이 바라는 꿈이 있고, 길을 걸어왔던 것도 맞다. 하지만 오롯이 준석만의 의지로 온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건 누구의 인생이 되는 걸까?

 

정말 그런 단체가 있을까 싶었다. 소설은 판타지 느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혹시 지금 이 세상에 우리가 모르는 이런 집단이 있지 않을까 싶을 가능성도 열어두게 한다. 과거에는 여러 가지 여건으로 이루지 못한 것을, 시간과 돈이 있는 지금 누리듯이 가능하게 한다는 이야기가 과연 상상만으로 멈출 수 있을까. 타깃을 정해 자기가 키우는 애완동물처럼 조종하고, 타깃이 느끼는 그대로를 내가 느낄 수 있다는 게 불가능하기만 한 걸까? 세상은 끊임없이 발전해왔고, 현재도 미래도 여전히 발전 가능성을 열어두고 살아간다. 그러니 언젠가는 이런 설정의 상황도 예상할 수 있다. 그게 언제쯤일지는 모르겠지만, 이 소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마냥 허무맹랑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다만, 이 소설에서는 파우스트와 파우스터 사이에 연결된 것으로 노인이 젊음의 시간을 대신 경험하고 있다는 게 잘못되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걸 게임으로 이용하기 때문에 악질이라는 거다. 파우스트와 파우스터를 연결하는 메피스토는 회원을 모집하고, 모집된 회원은 파우스트라 불리며 그들의 돈을 파우스터에게 투자한다. 얼마의 돈을 투자해서 어떤 상황을 만들고, 그런 상황은 그들의 파우스터가 탄탄대로의 길을 가게 인위적으로 만든다.

 

살면서 느낀다. 부정부패의 순간들 말이다. 공정한 경쟁으로 이뤄져야 할 장이 때로는 누군가의 힘으로 불공정해진다. 그로 인해 피해자가 생긴다. 누군가가 죽는 일도 흔하다. 메피스토에 가입비 100억을 내고 들어오는 65세 이상의 노인의 힘이란 이런 것이다. 누구나 자기 인생이라고 의심하지 못할 시간을 자기들이 조종하여 하나의 인형을 만들어가는 일. 돈은 들지만 인생의 만족을 느낀다면 한번쯤 시도해보고 싶지 않을까? 가끔 이런 질문 많이 해보지 않는가, 스무 살로 돌아간다면, 1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하는 만약을 상상하며 즐거워보고 싶은 바람들. 젊은 육체를 얻을 수는 없지만, 젊은 육체를 가진 이의 눈으로 보는 세상의 많은 것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흥분될까. 자식은 마음대로 안 되지만, 파우스트의 파우스터는 자기 맘대로 조종되는 게 얼마나 만족스러울까 싶다. 그 만족감으로 오랜 시간 큰돈을 들여가면서도 파우스터를 지켜보는 재미를 놓고 싶지 않았겠지.

 

자식들은 절대 부모 마음대로 될 수 없다. 부모 마음대로 되는 자식이란 또 얼마나 바보 같은 존재인가. 하지만 파우스터는 다르다. 파우스터는 자식들이 해줄 수 없는 모든 것을 대체해준다. 파우스터는 새로 태어난 나다. 내가 되고 싶었던 청년이고 내게 없었으며 하는 것들을 제거한 젊음이다. (244페이지)

 

파우스팅의 여운이 계속되고 있었다. 남선은 취해 잠들었을 은민을 떠올리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의 아이이자 나의 청춘이자 나의 분신이다. 나는 그녀의 후원자이자 절대자가 되고 싶다. 아니 그녀가 나고 내가 그녀가 되고 싶다. 남선은 더 밀어붙이고 싶었다. 중독되어가는 걸 알고도 남선은 멈출 수가 없었다. (299페이지)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김혜자의 마지막 대사가 기억난다. 드라마를 본 당시에도 뭉클했지만, 백상예술대상에서 대상을 받은 배우의 소감 역시 드라마의 마지막 대사였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중략) 후회만 가득한 과거의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열심히 사느라 놓친 순간들을 아쉬워하며 지금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닐까 싶다. 그 아쉬움에 사로잡혀 살아가야 할 순간의 많은 것을 다시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 같다. 세대의 갈등은 언제나 있어왔지만, 세대의 차이와 변화를 인정하지 않아서 그 갈등을 심화시키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부모니까, 내가 이렇게 너를 키웠으니 부모의 뜻에 따라주어야 한다는 강요 같은 권위를 행사하는 게 관계를 악화시키는. 언제까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을 품게 한다. 누군가를 조종할 수 있다고 믿는 당신은 완벽하게 조종당하지 않은 인생을 살아간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소설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반전은 타인의 인생을 조종할 수 있다고 여겼던 이들이 얼마나 불완전한 믿음을 갖고 살아왔는지 증명한다. 누군가가 만들어주지 못하는 인생이다. 준석이 마운드 위에서 공을 던지며 자기 존재감을 확인해나가는 삶이 진짜 인생이듯, 그렇게 조금씩 쌓아가는 게 답인 거였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오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한 가지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다"는, 배우가 전하는 드라마의 대사는 이 소설에서 보는 욕심들을 한방에 무너뜨린다. 자기가 경험한 것만이, 자기가 쌓아 올린 것만이 자기 인생이 된다. 그게 비록 슬픔의 눈물을 뿌리는 시간이었을지라도, 누군가 대신 설계하듯 만들어지는 인생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생생하게 전한다. 내가 이루지 못한 많은 것을 타인이 아닌 나 자신에게서 다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인간의 욕망이 끌어내는 과함은 언제나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이다.

 

작가의 전작을 몇 편 읽었는데, 그때도 페이지 터너의 힘을 대단하게 보여주더니 이번 작품도 마찬가지다. 설정 자체도 흥미로웠지만, 결말에 이르기까지 독자를 끌고 가는 힘이 대단하다. 상상 가능한 만약으로 시작하고, 결코 이뤄질 수 없는 상상을 무너뜨리듯 주저 없이 달리기하더니, 불가능한 시도의 끝을 보여주겠다는 듯이 절망하여 넘어지게 한다. 스토리가 탄탄해서 읽는 재미가 있다. 뭐가 또 나올지, 다음 작품도 저절로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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