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터
김호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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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청소년 문학을 읽을 때 보이는 장면이 있다. 부모는 자기의 못다 이룬 꿈을 위해 자식에게 자기의 바람을 집어넣는다. 어렸을 적 간절히 바라던 꿈이 있었지만 이루지 못한 채로 성인이 되었을 때, 이루지 못한 그 아쉬움을 자식에게 달래고자 할 때 말이다. 그래서 종종 자기의 간절함을 자식에게서 이루게 하여 만족하고 싶어 한다. 그 바람은 자식과의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이루지 못한 꿈으로 남아있기도 한다. 아쉽고 또 아쉽지만 어쩌랴. 세월은 흘렀고, 이미 어른이 되었으며, 자기의 꿈을 자식에게 강요하기보다는 자식의 인생을 응원해 주는 게 부모의 역할인 것을. 하지만 미련하게도 남아있는 게 있다. 아쉬운 그 마음은 죽을 때까지 이루지 못한 바람을 끌어안고 사는 게 될지도 모른다. 마음 한구석, 언제나 갈증을 일으키는 그것은 무엇일까.

 

이 소설에 등장하는 기득권층의 취미 같은 게임도 비슷하다. 나이는 먹었고, 돈은 많다. 어떤 식으로든 돈을 축적하면서 노년에 이르렀다. 아마도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으로 돈을 쌓았겠지. 당연하다. 누구라도 돈의 힘을 무시할 수 없는 게 바로 세상 아니던가. 그들이 살아온 인생을 부정하거나 그들의 돈을 욕하고 싶지는 않다. 문제는 그들이 아바타처럼 조종하는 젊은이들의 인생이다. 오롯이 자기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가야 하는 게 맞는 건데, 그들에게 선택당한 젊은이들은 자기 맘대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하다. 그걸 아무도 알지 못한다. 오직 젊은 인생들을 조종하는 그들만 알 뿐이다.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는 너무도 아름답다. 이제 멈추어라…… 너는 참으로 아름답다……." (98페이지)

 

메이저리그 진출을 앞두고 있는 박준석은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한다. 그 사고로 최경이라는 여자를 알게 되고, 경은 준석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한다. 준석의 머릿속에 거머리가 심어져 있고, 그 거머리는 파우스트에게 준석의 모든 일상을 지켜보게 한다는 것. 준석이 보고 듣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파우스트가 똑같이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준석의 인생을 누군가가 준석과 똑같이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같은 인생을 두 사람이 사는 게 문제라기보다는, 파우스트가 조종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파우스터가 바로 그 젊은이들이라는 게 문제다. 누가 감히 타인의 인생을 조종할 수 있는가? 개인의 아쉬운 인생을 좀 풀어보고자, 타인의 인생을 마음대로 조종해도 된다고 누가 허락했느냔 말이다. 메피스토 코리아는 창립멤버이자 메피스토 코리아의 개설을 도운 태근은 자기의 젊은 시절을 보는 듯한 야구선수 준석을 골랐다. 형편 때문에 꿈을 이루지 못할 상황에 부닥친 준석에게 보이지 않는 손으로 여러 방면에서 도우면서 준석이 야구선수로의 탄탄대로를 걷게 만든다. 준석은 몰랐지만, 준석이 현재의 선수로 키워지기까지 구석구석 태근의 손이 미친 것이다. 그러니 지금까지 10년 동안 준석이 이룬 삶은 준석의 것이 아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준석만이 바라는 꿈이 있고, 길을 걸어왔던 것도 맞다. 하지만 오롯이 준석만의 의지로 온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건 누구의 인생이 되는 걸까?

 

정말 그런 단체가 있을까 싶었다. 소설은 판타지 느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혹시 지금 이 세상에 우리가 모르는 이런 집단이 있지 않을까 싶을 가능성도 열어두게 한다. 과거에는 여러 가지 여건으로 이루지 못한 것을, 시간과 돈이 있는 지금 누리듯이 가능하게 한다는 이야기가 과연 상상만으로 멈출 수 있을까. 타깃을 정해 자기가 키우는 애완동물처럼 조종하고, 타깃이 느끼는 그대로를 내가 느낄 수 있다는 게 불가능하기만 한 걸까? 세상은 끊임없이 발전해왔고, 현재도 미래도 여전히 발전 가능성을 열어두고 살아간다. 그러니 언젠가는 이런 설정의 상황도 예상할 수 있다. 그게 언제쯤일지는 모르겠지만, 이 소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마냥 허무맹랑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다만, 이 소설에서는 파우스트와 파우스터 사이에 연결된 것으로 노인이 젊음의 시간을 대신 경험하고 있다는 게 잘못되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걸 게임으로 이용하기 때문에 악질이라는 거다. 파우스트와 파우스터를 연결하는 메피스토는 회원을 모집하고, 모집된 회원은 파우스트라 불리며 그들의 돈을 파우스터에게 투자한다. 얼마의 돈을 투자해서 어떤 상황을 만들고, 그런 상황은 그들의 파우스터가 탄탄대로의 길을 가게 인위적으로 만든다.

 

살면서 느낀다. 부정부패의 순간들 말이다. 공정한 경쟁으로 이뤄져야 할 장이 때로는 누군가의 힘으로 불공정해진다. 그로 인해 피해자가 생긴다. 누군가가 죽는 일도 흔하다. 메피스토에 가입비 100억을 내고 들어오는 65세 이상의 노인의 힘이란 이런 것이다. 누구나 자기 인생이라고 의심하지 못할 시간을 자기들이 조종하여 하나의 인형을 만들어가는 일. 돈은 들지만 인생의 만족을 느낀다면 한번쯤 시도해보고 싶지 않을까? 가끔 이런 질문 많이 해보지 않는가, 스무 살로 돌아간다면, 1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하는 만약을 상상하며 즐거워보고 싶은 바람들. 젊은 육체를 얻을 수는 없지만, 젊은 육체를 가진 이의 눈으로 보는 세상의 많은 것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흥분될까. 자식은 마음대로 안 되지만, 파우스트의 파우스터는 자기 맘대로 조종되는 게 얼마나 만족스러울까 싶다. 그 만족감으로 오랜 시간 큰돈을 들여가면서도 파우스터를 지켜보는 재미를 놓고 싶지 않았겠지.

 

자식들은 절대 부모 마음대로 될 수 없다. 부모 마음대로 되는 자식이란 또 얼마나 바보 같은 존재인가. 하지만 파우스터는 다르다. 파우스터는 자식들이 해줄 수 없는 모든 것을 대체해준다. 파우스터는 새로 태어난 나다. 내가 되고 싶었던 청년이고 내게 없었으며 하는 것들을 제거한 젊음이다. (244페이지)

 

파우스팅의 여운이 계속되고 있었다. 남선은 취해 잠들었을 은민을 떠올리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의 아이이자 나의 청춘이자 나의 분신이다. 나는 그녀의 후원자이자 절대자가 되고 싶다. 아니 그녀가 나고 내가 그녀가 되고 싶다. 남선은 더 밀어붙이고 싶었다. 중독되어가는 걸 알고도 남선은 멈출 수가 없었다. (299페이지)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김혜자의 마지막 대사가 기억난다. 드라마를 본 당시에도 뭉클했지만, 백상예술대상에서 대상을 받은 배우의 소감 역시 드라마의 마지막 대사였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중략) 후회만 가득한 과거의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열심히 사느라 놓친 순간들을 아쉬워하며 지금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닐까 싶다. 그 아쉬움에 사로잡혀 살아가야 할 순간의 많은 것을 다시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 같다. 세대의 갈등은 언제나 있어왔지만, 세대의 차이와 변화를 인정하지 않아서 그 갈등을 심화시키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부모니까, 내가 이렇게 너를 키웠으니 부모의 뜻에 따라주어야 한다는 강요 같은 권위를 행사하는 게 관계를 악화시키는. 언제까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을 품게 한다. 누군가를 조종할 수 있다고 믿는 당신은 완벽하게 조종당하지 않은 인생을 살아간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소설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반전은 타인의 인생을 조종할 수 있다고 여겼던 이들이 얼마나 불완전한 믿음을 갖고 살아왔는지 증명한다. 누군가가 만들어주지 못하는 인생이다. 준석이 마운드 위에서 공을 던지며 자기 존재감을 확인해나가는 삶이 진짜 인생이듯, 그렇게 조금씩 쌓아가는 게 답인 거였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오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한 가지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다"는, 배우가 전하는 드라마의 대사는 이 소설에서 보는 욕심들을 한방에 무너뜨린다. 자기가 경험한 것만이, 자기가 쌓아 올린 것만이 자기 인생이 된다. 그게 비록 슬픔의 눈물을 뿌리는 시간이었을지라도, 누군가 대신 설계하듯 만들어지는 인생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생생하게 전한다. 내가 이루지 못한 많은 것을 타인이 아닌 나 자신에게서 다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인간의 욕망이 끌어내는 과함은 언제나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이다.

 

작가의 전작을 몇 편 읽었는데, 그때도 페이지 터너의 힘을 대단하게 보여주더니 이번 작품도 마찬가지다. 설정 자체도 흥미로웠지만, 결말에 이르기까지 독자를 끌고 가는 힘이 대단하다. 상상 가능한 만약으로 시작하고, 결코 이뤄질 수 없는 상상을 무너뜨리듯 주저 없이 달리기하더니, 불가능한 시도의 끝을 보여주겠다는 듯이 절망하여 넘어지게 한다. 스토리가 탄탄해서 읽는 재미가 있다. 뭐가 또 나올지, 다음 작품도 저절로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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