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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ㅣ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루이스 스카파티 그림 / 문학동네 / 2005년 7월
평점 :
어느 정도 내용을 알고 있지만 정작 읽어본 적이 없는 유명한 이야기 중의 하나가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었다. 항상 다짐하면서도 정작 읽을 시간이 없다고 밀어두었던 책을 이제야 읽었다. 그레고르 잠자는 갑자기 왜 곤충으로 변했는지, 그의 변신 후 가족들은 또 어떻게 ‘변신’했는지 궁금했던 것도 컸지만,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그 질문’ 때문이기도 하다. 요즘 아이들이 자기 부모에게, 자기가 아침에 일어났는데 곤충으로 변해있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한 번쯤은 묻는다고 한다. 아마 이 책의 내용에서 시작된 질문인 듯하다. 갑자기 내 아이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봤는데, 순간 말문이 막히고 버벅거리지 않을까 싶더라. 솔직하게 말해야 할지, 사랑을 가득 담아 가족이란 이름의 따뜻함만을 말해야 할지 몰라서 말이다. 내 가족이 곤충으로 변했을 때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의 한계를, 이미 한 번쯤은 작게나마 경험한 것 같아서 그 순간에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자신의 몸이 갑충으로 변한 것을 알게 된다. (후반부에 하녀의 말로 판단하자면, 아마도 말똥구리?)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옆으로 돌아눕는 것도 힘들다. 병가를 내고 하루 쉬지 그러냐고 생각하던 찰나, 출장영업사원으로 일하는 그는 그날 아침에 시간 맞춰 기차를 타야 했다. 월급쟁이의 비애가 이런 건가. 아프거나 사정이 생겨도 마음대로 쉬지도 못하고, 몇 분의 지각에도 밥줄이 흔들릴 수 있는 현실이여. 출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가 방에서 나오지 않자 식구들은 돌아가면서 그의 방문을 두드린다. 그가 잠긴 문을 열지 않고 알겠다며 대답만 하자, 식구들은 그 대답(?)을 듣고 돌아간다. 잠시 후, 지배인이 그의 집을 찾아온다. 그가 기차를 타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왔겠지. 잠긴 방문 사이로 그가 아무리 말을 해도 그의 가족들과 지배인은 알아듣지 못하고, 어쩌다 열린 방문을 사이에 두고 모두가 얼어붙는다. 인간 그레고르 잠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상하게 생긴 벌레 같은 존재가 있을 뿐이었다. 놀란 지배인은 뒷걸음질 치면서 그의 집을 떠났고, 가족들은 이 사태에 대해 놀랄 사이도 없이 적응해야만 했다.
그가 벌레의 외모로 변한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열심히 말한다고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가족의 말을 들을 수 있지만, 가족들에게 그가 하는 말은 그저 동물의 소리로 들렸다. 소통이 안 되는 건 당연했다. 그는 힘껏 그의 사정, 마음,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받고 싶었으나, 가족들은 변한 그의 존재를 두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기만 했다. 가장 중요한 건, 이 가족의 수입원인 그가 일을 못 하게 되었으니, 당장 이들의 생계를 해결하는 일이었다. 그도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벌레의 몸으로 그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자기 방 안에서 열심히 걷고 매달리고 움직이는 게 전부였다. 그의 방문은 처음 그가 벌레로 변한 날부터 꽉 닫혀 있었다. 그가 방 밖으로 나와 할 수 있는 게 없었을뿐더러, 가족들은 아직도 그의 변한 외모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동생이 그의 방안으로 그의 음식을 갖다 주거나, 그의 방을 청소해주는 게 전부였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쉽다. 그가 돈을 벌지 못하니 다른 가족이 생계에 뛰어들면 된다. 하지만 이들이 일하지 못하는 나름대로 이유는 있다. 아버지는 과거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던 은행의 제복을 입은 채로 앉아 있기만 하고, 어머니는 천식으로 건강 때문에 일을 못 하고, 여동생은 뭐, 그냥 처음부터 일을 안 해서? 어쨌든,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었던 그는 가족의 돌봄이 필요한 대상이 되었다. 거기에 누가 볼까 두렵고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존재로 남았을 뿐이고. 누군가를 돌보는 일도 갑작스럽게 생계를 걱정하게 되는 것도, 지치고 막막할 테다. 이 과정에서 왜 이 말이 생각났는지 모르겠지만, ‘오래된 병 앞에 효자 없다’라는…. 아픈 가족을 돌보는 일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힘들지만 누군가는 해야 했고, 좋게든 나쁘게든 언젠가는 끝이 있을 테니 지금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지치는 건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일이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 일인지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고, 이게 내 인생에서 꼭 해야만 하는 일인지 답을 찾고 싶기도 했다.
처음 이 소설에서 가족들이 벌레로 변한 그를 돌보는 상황 자체가 혼란스러웠지만, 가족이 감당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싶었다. 언젠가 그가 예전 모습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동안 가족을 돌봐왔던 수고를 생각해서라도 그를 돌봐주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의 여동생이 더 참을 수 없다고, 그를 내쫓아야 한다고 외치던 순간, 알았다. 그 어느 것도 당연한 건 없다고, 아픈 가족을 돌보는 일은 해야 하는 일이면서도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물론 그레고르 잠자의 모습이 변하기 전부터 그의 가족이 보여준 행태는 너무 이기적이기도 했다. 가족의 빚을 그 혼자 감당하는 게 맞는 건가 싶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그가 벌어온 돈으로 생활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건가 싶어서. 그의 모습이 변하고, 그가 더는 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없는 상황에 이르니, 이 가족은 변한다. 소파에 앉아 늘어진 뱃살을 보여주기만 했던 아버지는 외모를 말끔하게 갖추고 외출을 한다. 아프다던 어머니는 하숙인을 챙길 정도가 된다. 착하게만 보였던 여동생은 오빠를 챙긴다는 이유로 이 가족의 꼭대기에 군림하려고 한다. 이 가족이 이렇게 활동적인 사람들이었나 싶을 정도로,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음에도 그의 등에 빨대 꽂고 살아왔던 건가.
이 가족에게 그레고리 잠자의 존재는 생계를 책임지는 역할이었을 텐데, 그 역할을 잃자 그의 존재도 사라져간다. 함부로 대해도 되는 존재로까지 추락한다. 여동생에게는 혐오의 대상으로, 어머니에게는 안쓰러운 아들이지만 부담스러움으로, 아버지에게는 이 집안에서 별 쓸모없어 사과를 막 던져도 되는 벌레쯤으로. 도대체 인간은 어떻게 인정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걸까. 그 역할과 능력을 떠나서 기본적으로 가족 안에서 존중받는 건 당연한 게 아니었나 싶었는데,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당연함은 사라졌다. 가족 관계에서도 분명하게 자기가 해야 할 역할이 있고, 그게 함께 살아가야 하는데 필요한 기본 예의였다. 부모가 아이를 낳았으니 키우는 게 당연한 책임이고 역할인 것처럼, 자녀나 다른 구성원에게도 각자의 책임과 역할이 있다. 모두가 함께 자기 자리에서 상호협조했을 때 가족의 이름은 힘을 가진다. 일방적으로 누구 한 사람의 희생이 당연하지 않은 게, 맞는 거였다. 새삼스럽게도, 그걸 이렇게 다시 알게 된다.
별것 아닌 사과 한 알을 맞고 죽어가는 그를 보면서, 인간의 삶이 이렇게 허무할 수 있나 싶어서 우울해지기까지 하더라. 살면서 직업이란 생계와 연결되기도 하지만, 자기 존재를 그리는 일이기도 하다. 변신하고, 직업을 잃고, 자기 기능이 멈춰버린 인간은 존재의 의미를 잃기 쉬웠다. 가족의 생활비를 벌고 있을 때 그의 존재는 인정받지만, 그의 빈자리는 곧 채워지고 그의 존재 의미는 희미해져 버리거나 사라진다. 이 상황이 그레고르 잠자만의 일이 되는 걸까? 바로 1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 채로 살아가는 게 우리 현실인데, 매 순간 불확실한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무엇을 장담하며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삶의 모든 순간 우리는 불안을 함께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으며, 그 불안은 카프카의 ‘변신’과 같은 상황을 만들지도 모른다. 이때의 기회를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기회를 만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그 어떤 것도 완벽하게 확신하며 살아갈 수 없는 게 삶이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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