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 제19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문미순 지음 / 나무옆의자 / 2023년 5월
평점 :
품절



우리 형제들은 요양병원에 모셨어. 매달 돈 걷어 병원비 내고 시간표 짜서 주말마다 들르고. 간병이란 게 그렇잖아. 해도 해도 티도 안 나고. 누가 혼자 독박 쓰다간 화병 나고 말지. 화병뿐이야? 집안이 다 작살나는데. 그래서 우린 딱 엔분의 일로 해.”

예순 살 반장이 똑 부러지게 말했다. 명주는 협동이 잘되는 반장 형제들이 부러웠다.

말이 그렇지. 그렇게 할 수 있는 집이 몇이나 되겠어요. 다 자기들 먹고살기 힘들다고 부모고 형제고 외면하는 세상에.”

맞아. 병원비는 별도로 하고 하루 간병인 쓰는 것만도 10만 원, 11만 원 하는데, 거기에 기저귓값 삼사십 들지, 잘 봐달라고 간병인한테 몇만 원씩 찔러줘야지. 웬만한 벌이로는 요양병원도 못 보내요.” (87페이지)


이 책을 읽다가 본문의 이 문장에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가족을 돌보는 일, 그것도 부모를 돌보는 일이 당연하면서도 피하고 싶은 일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이었다. 몸도 힘들고 내 시간이 없고, 무엇보다 끝을 모를 일에 마음이 더 지쳐갔다. 사람이 뭔가를 할 때 결과를 기대하면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어떤 결과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더군다나, 도대체 어떤 결과를 기대해야 옳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도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게 있다. 내 몸이 그래도 좀 쉬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것. 꼬박꼬박 병원비가 나가고, 시간 내서 병원에 가봐야 하고, 환자가 아니라 돌보는 이들을 위한 간식도 들고 가고. 마음은 여전히 지친 상태였는데, 돈까지 들어가는 시간을 견디기 힘든 게, 어쩌면 너무 당연한 거 아닌가?


겪어보기 전에는 몰랐다. 주변에 아픈 가족을 돌보는 이들도 있었고,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돌보는 친구네는 집안에 가스레인지 사용도 안 하고 있던 정도였다. 가족을 돌본다는 건 이런 불편함이 있구나 하는 정도로 여겼다가 금방 후회했다. 머지않은 시간에 그 돌봄의 역할을 내가 하고 있었으니까. 오래된 아파트에 살면서 치매에 걸린 친정엄마를 돌보는 50대의 명주와 비슷한 상황을 맞닥뜨린 20대 청년 준성의 현재에 미래를 생각하는 건 사치였다. 그런데도 다가올 내일을 기다리고 싶은 건, 오늘의 절망이 절망으로만 남아 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준성이 치매 걸린 아버지를 돌보며 야간에 대리운전하고,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물리치료 자격증을 준비하는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이대로 머물러 있기에는 인생이 너무 아까웠다. 아버지를 돌보는 게 준성의 몫이라면, 더 안정된 환경에서 아버지와 준성 둘 모두가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만드는 게 좋을 테니까. 그래서 최선을 다했다. 지금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오늘을 살았다. 문제는 돈이었다.


언제나 돈이 필요했다. 먹고 자는 일상을 유지하는 것도, 아픈 부모를 돌보는 일에도 돈을 필수인데, 돌봄을 하고 있으면 돈을 누가 버나?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최소한의 일상을 유지하는데 연금이 있었다. 명주에게는 엄마의 연금이 엄마의 병원비며 이들의 생활비가 되었고, 준성에게는 대리운전과 아버지의 연금이 생활비를 채워줬다. 외출에서 돌아온 명주가 죽은 엄마를 발견했을 때, 간병의 고단함과 함께 그녀의 삶도 더 유지할 이유를 찾지 못했으니 끝내려고 했다. 그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을 때, 그녀는 삶을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죽은 엄마를 미라로 만들고, 엄마의 공식적인 삶을 끝내지 않은 채로 연금을 받는다. 화상 때문에 통증을 이기지 못하는 그녀가 일하기는 어려웠으니까. 이 비밀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싶었던 그때, 옆집 청년 준성에게도 명주에게 일어났던 것과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명주와 준성, 이들은 같은 경험과 고통에 공감할 수밖에 없던 관계이기도 하지만, 이제라도 자기 인생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 이들이었다.


언젠가 뉴스에서도 봤던 이야기가 이 소설에 등장한다. 부모가 죽은 것을 숨긴 채로 부모의 연금을 꾸준히 받아왔던 자녀의 이야기 말이다. 글쎄, 그 뉴스의 주인공과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 얼마나 같은 상황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이상하게도 이들이 부모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부모의 연금을 계속 받아야만 했던 순간의 선택이 이해가 된다고 해야 하나. 모든 건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었고, 돌봄이 남겨진 누군가의 몫이 되었던 것처럼, 그렇게 남겨진 이가 살아가고자 발버둥을 치던 모습이 눈에 그려질 정도다. 간병은 누구도 예상하지 않은 순간에 시작되고, 끝이 없는 터널을 통과하는 시간이 되고, 그 터널의 끝에서 마주하는 게 행복만이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돌봄의 대상이 되었던 이가 죽거나, 이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생계를 위해 불법적인 선택을 하거나, 오랜 시간 빚에 시달리다가 인생이 끝나거나. , 그런 결말이 저절로 그려지는 게, 나만의 생각은 아닐 테다.


현대 사회의 문제를 개인에게만 부담하는 구조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선뜻 한꺼번에 바꾸지 못하는 것도 모르지 않기에 답답하게 읽히기도 했다. 그렇게 두 주인공에게 한없이 감정을 이입하며 읽다가도, 심장 쫄깃해지는 긴장감 또한 놓치지 않게 그려내는 소설이기도 하다. 명주가 관을 사다가 엄마의 시신을 숨기기 시작했을 때, 한겨울에도 에어컨을 틀어 공기를 건조하게 하고 수시로 방을 소독하며 시신의 부패를 늦추려는 노력을 볼 때마다 가슴이 떨렸다. 누군가는 알아채지 않을까? 생활 흔적이 없으면 의심하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생기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들이 있다. 명주도 몰랐던 엄마의 남자친구 진천할아버지, 오랜 세월 연락도 없이 살다가 엄마의 인생을 갉아먹으려 나타난 딸 은진. 수시로 엄마의 안부를 묻는 진천할아버지는 호의가 가득했지만, 명주의 딸 은진은 이 소설의 빌런이다. 어쨌거나 명주에게 이들은 이 순간 예상하지 않았던 복병들이다. 방법은 하나, 방안에 둔 엄마의 시신을 이제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야만 한다. 옳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 마음이 어땠으리라는 건 짐작되기에, 명주와 준성의 행동과 선택에 누가 돌을 던지며 욕할 수 있을까 싶다만.


눈이 쏟아지던 고속도로를 지나는 이들의 내일은 어떨까. 겨울이 이렇게 지나고 있으니 좀 괜찮아지지는 않을까 궁금하고 기대가 된다. 그다지 밝아 보이지만은 않지만, 그런대로 또 살아가면서 오늘 행복하기를 바라는 건 욕심일까? 명주와 준성이 연대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간병도 각자의 몫이고, 남겨진 이의 삶도 다 자기가 꾸려나가야 하니까. 그런데도 이들이 느끼는 공포나 죄책감이 더는 이들을 감싸지 않기를 소망한다. 하루를 살더라도 오늘 즐거웠으면 좋겠다. 간병을 단순하게 돌보는 일로 여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읽게 되는 이 소설에 많은 이가 관심 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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