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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2월
평점 :
‘우리에게는 늘 두 가지 선택의 순간이 존재한다. 그런 까닭에 후회할 가능성 역시 늘 존재한다. 첫 번째 순간은 뷰파인더에서 우리를 노리는 사건이 벌어질 때다. 두 번째 순간은 촬영한 필름을 모두 현상 인화하고 효과가 떨어지는 것들을 버려야 할 때다. 그 두 번째 순간에서 우리는 자신이 어느 지점에서 실패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지만 이미 때늦은 순간이다.’ (본문 중에서)
아마도,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만 하는 것 사이에서 마음이 왔다 갔다 하지만, 결국 해야만 하는 것을 선택하고 책임을 다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그래도 마음 한편에 남은 갈증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해도 불안하거나 무책임하게 여기지 않을 시간이 올 거로 믿는다. 어쩌면 그 믿음이 지금을 살게 하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벤의 현실도 그러하다. 월가의 잘나가는 변호사이고, 아내와 두 아이도 있는, 다른 이가 보기에는 충분히 행복한 삶인 것 같다. 중산층의 여유로움이 그의 일상을 더 풍족하게 해주는 듯하면서도 사회적 지위도 놓치지 않을 날들을 지내고 있다. 그렇게 만족하면서 살면 좋을 것을, 사실 그는 현재 자신의 삶에 구멍이 뚫린 것만 같다. 사진가로 살아가고 싶은 오랜 염원을 이루지 못 했기에, 변호사의 삶이 그의 현실을 풍요롭게 했을지 몰라도 그의 꿈까지 채워주지는 못 했다. 그의 빈 마음은 돈이 채워주었다. 사진을 찍지 못하지만, 언제라도 최상의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사진 장비 마련에 아낌없이 돈을 쓴다. 최신의, 최고급 장비로 그의 암실을 채웠다. 그의 마음을 채워주는 건 그것뿐이었다. 아내와의 불화만 아니라면, 그럭저럭 만족하면서 살아갔을 것 같은데, 아내와 마음을 나눈 지도 오래다. 아내 역시 작가가 꿈이었지만, 결혼과 육아, 부족한 자기 시간으로 꿈을 이루지 못한 불만족이 가득하다. 그래서 자기 마음 읽어주지도 못하는 남편 말고, 앞집 남자 게리와 불륜을 저지른다.
그렇다면 게리는 어떤 인물인가. 부모가 남겨준 신탁으로 겨우 생활을 유지하는 정도의 경제력인데, 그의 태도는 거만하기 이를 데가 없다. 설상가상, 벤이 놓친 사진가의 꿈을 이뤄가는 걸 자랑하느라 입을 다물지 못하는 그가, 벤은 참 꼴도 보기 싫었다. 안 그래도 자랑질에 미쳐 있는 게리가 미웠는데, 불화를 겪는 아내가 불륜을 저지른 상태가 게리라니. 어느 날 게리와의 말다툼 끝에 살인을 저지른 벤은, 이 위기를 벗어나고자 완전범죄를 기도하면서 만반의 준비를 한다.
바로 앞에서 벌어진 살인을 수습하는 게, 완전 범죄로 만들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살아가는 게, 가능한 일인가? 도망을 친다고 해도 언제 잡히느냐 하는 건 시간문제일 텐데, 그가 겁도 없이 이 상황을 이런 식으로 수습할 수 있다는 게 말이 안 되는 듯했다. 그런데 점점 그가 게리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그 자신이 어떻게 이 상황에서 벗어날지 계획하고 준비하면서 보여주는 치밀함은 놀라웠다. 고객의 마음을 돌리고 최선을 선택(변호사가 일을 더욱 원만하게 처리할 수 있는 선택)하게 만드는 그의 영업 기술이 발휘된 걸까. 의외의 행운까지 그의 편이 되어 주었다. 이제는 그는 게리를 죽인 살인자 벤이 아니라, 그가 혐오했던, 아무도 찾아주지 않던 능력 없는 사진가 게리 서머스가 되었다.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의 외모까지 바꾸기를 어려울 테다. 벤이 게리가 되어 살아가기 위해 첫 번째로 지켜야 할 원칙은 얼굴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 적당한 돈과 머물 곳이 있다면, 배가 고플 때 허기를 채울 정도만 된다는 게리로 살아가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다. 그렇게 바라던 사진을 찍으면서 지내는 일상, 누구의 눈에 띄지도 않게 그저 조심히, 조용히 살아가면 죽을 때까지 살인자라는 것을 숨기고 살아갈 수도 있다. 나 역시 벤의 남은 삶이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게리를 죽인 건 이미 벌어진 일,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완전 범죄까지 만들어 놓았으니, 이제 그 완전범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면 될 일이 아닌가. 정처 없이 떠돌면서, 발길 머무는 곳에서 카메라 셔터를 눌러가면서 살아가는, 게리의 이름을 쓰는 벤을 상상하면서 읽었다. 늘 그렇듯, 인생이 어디 내가 바라는 대로만, 계획했던 대로만 흘러가지 않아서 문제였지만.
이미 오래전 출간된 책이라 입소문은 익히 들어왔지만, 쉽게 읽게 되지 않아서 미뤄두었던 책이다. 페이지 수가 상당한 소설인데, 의외로 잘 읽힌다. 벤의 시선에서 보이는 여러 상황이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생생하다. 아내와의 불화에 불편한 집안 공기, 아내가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육아 상황,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를 때 목격한 아내의 불륜, 모른 척하면서 한방 먹이고 싶어서 대면한 아내의 불륜 상대를 죽이게 된 일 등, 어느 것 하나 벤의 마음처럼 되는 게 없어서 안타깝기만 했다. 그러다가 기어코 벌어지고야 만 살인에, 벤이 앞으로의 항로를 어떻게 설정할지 궁금해서 계속 지켜보게 된다. 한동안 숨어 살 수 있겠지만, 언젠가는 살인자로 붙잡힐지도 모르지. 벤이 붙잡히는 게 맞는 건지, 그래도 다른 사람 이름으로 살아가게 내버려둬야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겠더라. 내가 심판할 것도 아니면서, 이상하게 와 닿는 벤의 간절함이 읽혔다고 해야 하나. 이왕 이렇게 된 거, 남은 시간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마음.
남은 건 단 하나, 벤이 그의 살인 사실을 철저하게 숨기고 살아가는 것뿐이다. 알겠지만,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살인자가 조용히 살아가게 만들지 않는다. 꿈을 이루지 못해서 갈증을 안고 살아가던 삶, 부유했지만 만족스럽지 못한 시간, 살인자가 되어 비로소 그 꿈을 이루게 되었던 남자. 하지만 결코 그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었기에, 또다시 불안한 날들을 감당해야 했던 그의 인생이었다. 이제 또 어디로 흘러가려나.
한편으로는 이 소설이 혹시 코미디는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매 순간 이 남자가 잡히지는 않을지 걱정하면서 읽게 되는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면서, 그때마다 우연처럼 행운(?)이 따른다. 누군가 그의 정체를 알고 신고할 것 같은데, 그의 살인을 혐오하면서 다시는 안 볼 것 같은데,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어떤 손이라도 잡을 수 있다는 듯이 보이는 설정에 웃음이 나는 건 왜인지. 아마도 작가가 벤을 통해 많은 사람의 간절함을 대신 이뤄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벤의 잃어버린 꿈, 가족이 있지만 여전히 느끼는 고독, 현실에 안주하면 편안하긴 하겠지만 가슴 속 간절함까지 놓고 살지 못하고 망설이는 나날들. 어느 곳에서도 완전한 나로 살아갈 수 없고, 내가 바라는 만족을 포기한 채로 살아가야만 하는 이들에게 소설로 전하는 일탈이라고 해야 하나. 언제나 우리 삶은 현실과 로망 사이에서 왔다가 갔다가, 간절히 바랐다가 포기했다가. 결국 ‘나’를 잃어버리고 나니 ‘꿈’이 실현되는 아이러니를 어쩌면 좋을까.
꿈을 꾸는 삶도 좋지만, 잃어버리고 나서야 아는 주어진 삶의 소중함도 잊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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