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유산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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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떡하지?’

정말 심각한 고민에 빠진 적이 있다. 영화 보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어 계속하던 것이, 영화 관람은 오랜 세월 나의 취미이자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러던 영화 보기를 잠시나마 고민했던 적이 있다. 언제였던가, 기다리던 영화의 개봉 날짜를 기다리며 보러 가려고 계획했던 순간. 주연 배우의 스캔들이 터졌다. 그 배우의 이런저런 이야깃거리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한 개인의 사생활이려니 하면서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렸던 게 여러 번이었으니 뭐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도저히 못 들은 척하기가 어려운 스케일의 이야기가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그 영화를 볼까, 말까? 영화를 보면서 자꾸 그 스캔들이 배우의 얼굴에 겹쳐 보일 것 같아서 망설이다가, 결국은 보고야 말았다. 영화가 다 끝나고 상영관을 나오면서 나도 모르게 혼자 중얼거렸다. ‘에이, 더럽게 연기 잘하네.’ 어쩔 수 없는 미움 앞에서도 배우의 연기를 훌륭했고, 캐릭터와 한 몸인 것처럼 보였으며, 영화도 재밌었다. 무엇 하나 만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로도 그 배우를 떠올리면 지나간 시간의 모든 이야기가 생각날 것이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또 한 번 과거의 스캔들을 소환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연기에 있어서만큼은 믿고 보는 배우가 되어버렸다. 나는 이제 그를 미워하면서 그가 출연한 영화를 보지 않는다. 미워할 때 미워하고, 영화는 영화로 본다. 이 마음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몰라서 당황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정말 궁금하다. 이 마음이 뭐란 말인가.

 

작가가 소설에 담아낸 벽수산장이 그랬다. 아름다운 건축물이지만, 적산이라 불리며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를 잊을 수 없게 하는 존재. 지나간 시간의 흔적을 기억하게 하면서 아픔도 동시에 소환하는 그곳을 어떻게 해야 옳은 건지 언제나 고민하게 될 터였다. 한때 한양 아방궁이라 불렸던 벽수산장은 친일파 윤덕영이 3년여에 걸쳐 지었다. 친일파 중에서도 악명이 높았다고 하니, 그가 나라를 팔아서 번 돈으로 지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면적이 옥인동 일대의 거의 절반이라고 한다. 위치 또한 기가 막히고, 인왕산 중턱에 자리하며 경성을 내려다보는 프랑스식으로 호화로움까지 갖췄단다. 소설 속 문장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상상해보는 순간에도 그려지는, 뻣뻣하게 목을 세우고 세상의 주인이고 중심인 것처럼 내려다보는 시선은 끔찍하기까지 하다. 해동이 윤원섭을 만나는 순간부터 솟아나던 그 갈증과 답답함을 문장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1966, 해방 후 20여 년이 지난 현재, 이십 대 청년 이해동은 언커크(유엔 산하 한국통일부흥위원회)에서 호주 대표 애커넌의 통역 비서로 일한다. 현재 벽수산장은 언커크의 사무실로 쓰인다. 어느 날 해동 앞에 나타난 윤원섭은 친일파 윤덕영의 막내딸로, 이제 막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했다. 그런 그녀가 애커넌을 만나러 벽수산장으로 돌아왔고, 그녀만 알던 벽수산장 비밀의 방을 보여주며 그곳의 신비로움을 피력한다. 마치 오래된 고성의 비밀의 방을 여는 것처럼, 누구도 몰랐지만 누구나 들어가 보고 싶은 공간으로 포장한다. 옛 주인은 자기만이 그 방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듯, 벽수산장이 그냥 평범한 건물이 아니고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품고 있다고 말하며 그녀의 위치를 각인시킨다. 만약 이 소설이 추리소설이었다면, 나는 이미 윤원섭의 모든 것을 알아봤다고 말할 수 있다. 그녀가 그곳에 발을 들인 순간, 벽수산장은 더는 언커크 사무실로 쓰이지 않을 것이며, 그녀가 돌아온 이유가 한 번에 보일 만큼 적나라했다. 그건 언커크 사무실로 쓰는 사람들이 아니라, 대한민국 사람들만이 바로 알아챌 수 있는 무언의 연대 같은 느낌일 것이다. 해동은 윤원섭의 말을 통역하면서도 구역질이 난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쩜 저렇게 뻔뻔하고 염치가 없을까. 밥벌이를 이어가자니 가슴이 터질 것 같고, 이것도 못 참고 뛰쳐나가자니 일상이 위태로워지는 순간이다. 해동의 갈등은 윤원섭과 함께하면서 계속된다.

 

윤 자작의 일족이 일본 지배 시절의 행적으로 비난받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지금의 대한민국과 그때의 조선은 다른 세상이 아닌가? 나는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의 형편은 그때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97페이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의 결정이나 판단이 쉽다면 얼마나 좋을까. 주인공 이해동의 갈등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친일파의 후손 윤원섭과 국제사회의 시선을 담은 애커넌의 말에서 상황을 읽을 수 있다. 해동은 상사에게 윤원섭이 어떤 인물이고 그 가문이 대한민국에 저지른 죄를 말하지만, 애커넌은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의 형편은 그때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며 지금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음을 시사한다. 윤원섭은 마치 그 시선을 이용하는 것처럼 당당하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지 않은 과거 따위 무시하고 현재 벽수산장의 아름다움을 호소하며 문화적 가치를 앞세운다. 정말 그럴까? 지나간 시간의 일은 과거와 같이 묻어두고 현재의 것만 다루면 그만인 것일까? 해동의 혼란이 커질수록 독자의 마음도 같이 흔들린다. 무엇을 따라야 옳은 것인지 계속 고민해봐도 답을 알 수가 없다. 특히 해동의 마음은 더 복잡했으리라.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했지만,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발각되어 목숨을 잃은 아버지였다. 해동에게 고아라는 이름을 물려주게 했던 그 시절의 아픔은 친일파의 후손인 윤원섭에게도 책임이 있다. 단지 가해자의 후손이니까? 아니다. 피해자의 피와 눈물로 착취한 재산으로 배를 불리고 대대손손 그 부유함을 누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게 문제가 되는 거 아닐까? 해동이 윤원섭에게 느끼는 감정도 비슷할 거다. ‘당신의 아버지가 저지른 일들이 나를 고아로 만들었고, 성장하는 동안 힘들지 않은 순간이 없었는데, 당신은 왜 지금 이곳으로 돌아와 주인 행세를 하며 차지하려 드는가?’

 

해동의 혼란은 사무실로만 쓰던 벽수산장이 아니라, 알지 못했던 그곳의 곳곳을 들여다보면서 커진다. 섬세하고 튼튼하게 지어진 건물의 면면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말하는 그 순간, 그는 적산이라 부르며 혐오하던 그곳에 마음을 빼앗긴다. 동시에 적산이니까 사라져야 할 존재라는 마음도 커진다. 상처와 고통을 주면서도 바라보고 싶은 아름다움에 흔들리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이 아름다움을 말로 표현하는 순간 부끄럽고 죄스러웠으며, 저택이 그곳에 뿌리내리듯 존재하는 이상 그가 느낀 아름다움 역시 사라지지 않을 거로 여겼다. 누군가에게는 적산이고 누군가에게는 유산이 되는 그곳의 존재는 곧 사라진다. 벽수산장에 불길이 치솟고, 몇 년 후 철거된다.

 

작가는, 윤덕영의 옛 별장 벽수산장이 한때 언커크에서 사무실로 사용했으며 화재로 소실되어 몇 년 후 철거되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소설의 내용 대부분은 허구라고 말했다. 많은 부분을 자료 조사가 바탕이 된 상상이라고. 그런데도 상상으로 그려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마도 우리 마음속에 그 시대의 아픔과 고통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테다. 과거이지만 지워지지 않고, 지워서도 안 되는 그 시간의 흔적이라고 말이다. 거기에 적산과 유산의 구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일도 끝나지 않았다. 친일파의 적산가옥으로 생활 좀 편해지고 싶어 하는 소시민의 마음과 친일파의 흔적이니 사라져야 한다는 마음의 갈등은 계속된다. 독립운동에 가담해서 일찍 죽은 아버지를 원망하는 고아 인생을 이해하면서도, 그 아버지의 장한 행동으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품고 살아가는 일. 해동이 윤원섭을 보고 느끼며 변화하는 과정이 그가 원망하듯 살아온 아버지의 인생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지는 않았을까. 불타는 벽수산장을 뒤로 하고 그 언덕을 걸어 내려가는 그의 마음을 가늠해본다. 적산이 사라지는 것을 기뻐할 수도 없고,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할 수도 없는 마음을 안고 돌아가는 그 길에서 이제 그는 무엇을 향해가고 있을지 궁금하다. 어쩌면 해동의 마음은 이 소설을 읽는, 우리의 과거 속에서 마주하는 비슷한 상황들에서 공감하는 마음이고 질문이겠지.

 

해동이 가진 것은 온통 미미한 것들뿐이었다. 아버지가 돼지막에 숨겼던 인쇄기, 생전에 고모가 쌓은 덕과 인정, 애커넌 씨와 개인 간 고용으로 만들어진 언커크의 일자리. 그런 미미한 것들은 길가의 거미줄처럼 금세 더럽혀지고 아무 발길에나 찢어지고 제일 먼저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런 것이 존재했다고 증언해줄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져 그것이 실제 있었다고 말할 근거조차 희박해지는 것들뿐이었다. 그에 비하면 윤덕영은, 벽수산장은, 언커크는 얼마나 확실하고 단단하고 부인할 수 없이 존재하는가. (중략) 이 세상에는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흔들리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것들. 지난 석 달 동안 그것의 질긴 생명력을 경험하면서 해동은 그것이 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세상에는 부정할 수 없는 강력한 힘들이 있었다. 그것을 가지지 못한 입장에서는 분하고 고까울지언정 그것이 아예 없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248~249페이지)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는 것들로 기억될 갈등은 이분법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을 인정하게 한다. 분하고 화가 나지만 다른 시선으로 보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감정을 알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 속 모든 상황과 인물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그들이 겪어온 상황과 혼란, 여러 가지 마음을 안다고 말하고 싶다. 씻은 듯이 모든 감정을 없앨 수도 없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일. 우리 역사 속에서 이런 순간과 공간이 또 얼마나 많을까 싶다. 작가의 말처럼, ‘이념의 밀물과 썰물 속에서 정직과 존엄을 지키려 애썼던 평범한 사람들을 기억해야 할 이야기지만, 자기의 가치관과 삶을 지키려고 나아가는 사람들의 선택을 함께 지켜보는 시간이었다. 여전히 사라짐과 지킴의 묘한 겨루기를 주관하는 힘을 고민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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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1월의 마지막 날인 것을 몰랐다.

한달 내내 여기저기 왔다갔다, 다시 병원으로 왔다갔다 하느라 한달이 통째로 날아간 것 같은 기분.

다시 돌아올 2021년의 1월은 아니겠지만,

어느 날 돌이켜보면 정말 많은 기억을 남겨줄 한달이 되지 않을까 싶다는...

아직도 다 끝나지 않은 일들에 1월의 혼란은 2월로 이어져 가겠지만,

누군가의 소중함과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끼며 

내 옆의 사람들에게 참 많은 감정을 품게 되는 시간으로 기억하고 싶다.


1월에 마지막으로 주문한 책은 <스웨덴 기사>다.

잠깐의 소개글 읽고 그냥 주문하게 되어버렸다.

이상하게 동화 한편 읽는 기분이 아닐까 싶어서 책이 도착하기도 전에 은근한 기대를 품고 있는 중.











도서관 희망도서는 아무래도 봄이나 되어야 비치가 시작될 것 같다.

작년 말부터 정지된 희망도서 비치 작업이 올해 다시 시작하면 

다시 업체 선정부터 시작하기에 좀 더디게 입고될 거라는 말을 들었다.

어찌되었든, 일단은 신청하고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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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1-31 22: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떤 일인지는 모르지만 2월에는 정리가 좀 죄고 안정되시길 기원합니다. 스웨덴 기사는 저도 관심이 가는 책인데 리뷰를 기다리겠습니다. ^^

구단씨 2021-02-01 21:13   좋아요 1 | URL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 막 터져서 당황하고 힘들고 그랬네요...
좋아지겠죠. ^^
스웨덴 기사는 출간 소식 들었을 때 궁금했거든요. 이제야 생각이 나서 주문했어요.
기대만큼 만족스러웠으면 좋겠어요!
밤부터 다시 쌀쌀해진다네요. 건강 조심하세요. ^^
 
엄마의 엄마 다산책방 청소년문학 9
스즈키 루리카 지음, 이소담 옮김 / 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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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의 기준은 무엇일까. 우리가 사는 거의 모든 상황에서 정상이란 기준이 존재한다. 인간관계는 물론이고 어떤 환경에서도 마찬가지. 보통 부모와 자녀가 있는 가족을 정상이라고 한다면, 부모 중 한 명이 없거나 하는 상황은 정상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게 비정상일까? 아주 어렸을 적의 나라면 불편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라면서 보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떠올려보면, 이건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아니라 그냥 다름의 시선이었다. 누구나 같을 수 없는 형태, 저마다의 사정이 있고 가족의 개념도 변화한다. 있는 그대로 보면서 인정해주면 될 일이다.


작가는 전작에서도 그 다양한 시선과 다름을 인정하게 하는 이야기로 모녀의 일상을 보여주더니, 이번에는 그동안 돌아가신 줄로 알던 할머니의 등장으로 이 가족의 새로운 이야기를 펼친다. 마치 연작소설처럼 「태양은 외톨이」, 「신이시여, 헬프」, 「오 마이 브라더」 세 편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청소년기를 지나는 하나미의 또 다른 일상을 보여준다.


「태양은 외톨이」는 집에서 자기 자리가 없다고 말하는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다가, 이런 가족도 있구나 싶은 마음으로 이해하는 하나미. 그 집에서 나올 시기를 보면서 돈을 마련하겠다는 친구의 말에 하나미는 현실적이지 못한 일로 생각한다. 그러다가 하나미 모녀에게 돈 때문에 생긴 일을 보고 친구의 의견에 동조한다. 하교하고 돌아오던 어느 날, 하나미는 집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있던 노인을 본다. 엄마도 정확히 말해주지 않았던 노인은 하나미의 할머니, 그러니까 엄마의 엄마였다. 돌아가신 줄 알던 할머니가 갑자기 등장하고, 엄마와 할머니는 데면데면, 게다가 할머니는 못 받은 돈을 받으러 왔다는 뻔뻔함까지 발휘한다. 알고 보니 엄마가 매달 얼마씩 할머니에게 송금하고 있었던 것. 하나미의 중학교 입학 때문에 돈이 많이 들어서 할머니에게 돈을 보내지 못하자 냉큼 돈 받으러 오신 할머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무엇보다 엄마와 할머니는 보통의 모녀 사이 같지가 않았다. 서로 모른 척 원망의 눈빛으로, 세상 나 혼자 산다는 느낌으로.


낯선 할머니의 등장으로 혼란스럽던 하나미는 엄마에게 과거 이야기를 조금씩 듣는다. 할머니와 엄마의 관계, 엄마가 할머니를 왜 원망하는지, 할머니는 또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그 많은 얘기를 들었다고 해서 하나미가 엄마나 할머니를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그들만의 역사가 있고 사정이 있다. 할머니를 외면하고 살아왔던 엄마에게는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고, 할머니 역시 마찬가지.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니, 원망도 미움도 애정도 다 제각각일 테다. 어쨌든 엄마는 할머니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힘들다. 하나미는 돈만 있다면 할머니한테 드리고 나가라고 하면 될 것 같아서 친구와 함께 돈을 벌기 위한 계획을 한다. 그게 잘될까 싶다만...


하나미를 좋아했던 미카미의 이야기인 「신이시여, 헬프」는 집안에서 머물지 못하고 쫓겨나다시피 해서 신학교로 진학한 그가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며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면서 시작된다.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그에게는 이제 신밖에 없으며, 신과 함께 살아가는 게 행복이라고 믿는다. 그러다가 다시 마주친 하나미 때문에 그의 의지는 순간적이지만 흔들린다. 신만 바라보겠다던 그는 하나미를 다시 만난 이후로도 여전히 신과 함께일까.


이어지는 「오 마이 브라더」는 의외의 내용에 조금 놀랐다. 하나미의 초등학교 담임이었던 기도 선생님의 이야기다.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내던 형이 어느 날 사라지고, 오랜 세월 동안 가족들은 사라진 형을 찾으러 다닌다. 처음처럼 적극적으로 다니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형을 찾고 있으며 형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형이 사라진 것을 두고 그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떠올리고 파고든다. 차원을 건너 어딘가로 갔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사라졌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있다고, 어떻게 사라졌든 형이 다시 돌아올 거로 믿으며 패러렐 월드에 심취한다. 병행해서 존재하는 여러 세계,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에 똑같이 존재하는 우리를 상상한다. 그런 상상으로 우리는 무언가를 계속 꿈꾸기도 하고, 여기에서 불행하고 해결하지 못하는 삶을 저기에서는 가능하게 될지도 모른다. 여기에서는 평범한 학생이었다가 저기에서는 연예인을 하고 있을지도. 마지막 장면에서 확인한 반전은 놀라웠지만, 사라진 형 역시 자기만의 자리를 찾아간 건지도 모르겠다.


세 작품 모두 가족과 자리에 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하나미의 가족은 가난하고 항상 돈에 쪼들리지만 그들의 자리가 있다. 마음 편히 몸 뉘고 잠들 수 있는 곳. 가족이라고는 엄마뿐이지만, 부족함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엄마는 훌륭했다. 열심히 일하고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 역시 엄마를 존중하고 사랑하고. 하나미의 친구도 여전히 자기만의 자리를 찾으려고 애쓴다. 지금 있는 곳에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한 채로 성장해갈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자기만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지금부터 고민하는 여학생의 고민이 안타깝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지금 이 자리가 나의 몫이 아니라면 내가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한 노력을 누구라도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여건상 지금 당장 무언가를 하지 못해도, 그 언젠가를 위한 고민과 생각은 끊임없이 이어질 테지. 기도 선생님의 사라진 형 역시 그만의 자리를 오랫동안 찾아다녔을 것이다. 아니면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은 자리에서 혼자서 많이 고민하고 있었는지도.


얼핏 들어보면 중학생 하나미와 하나미 주변 사람들 각각의 사연 같지만,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곰곰 생각하면 결국 가족의 이야기다. 어떤 가족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지, 그 가족 구성원 안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이고 어떤 생각으로 머물고 있는지 말이다. 어른으로 향하는 시간에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고 글을 써냈을까 궁금하고 기대되는 작가가 바로 스즈키 루리카다. 가끔은 빨리 철든다는 상황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부모의 고충과 집안 상황에 따라 때로는 포기하고 다른 가족을 배려하는 선택을 하기도 하는 일들, 가슴 아픈 일이지만 조금 더 빨리 어른이 되어가는 걸 보는 것 같은 일들이 떠오른다. 그런 걸 보면 어쩌면 환경이 사람을 성장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조금은 혼란스럽기도 하다. 이렇게 빨리 철드는 상황을 이해하는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어서 말이다. 나머지 두 작품에 대해서도 비슷한 감정이다. 누구나 어떤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기 마련인데, 그 시간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쌓아왔는지도 중요하다. 저마다의 상처일 수도 있지만, 그 상처를 안고 성장해가는 모습이 대견하다. 우리가 어른이 되어가는 게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은, 거울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부모와 자식이라면 사이가 좋으면 좋겠고, 부모와 자식이라면 언젠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싶고, 그렇게 믿고 싶다. (108페이지, 태양은 외톨이)


끝나지 않을 고민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것 같지만, 어떤 상처도 한 번에 쉽게 치유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그거로도 충분하다. 여전히 우리는 살아가고 있고, 어떤 일이 생겨도 살아갈 것이고, 또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삶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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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제도에 대한 책을 읽었다. 소설이든 비소설이든 상관없었다. 집에 있는 책 중에서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다 싶은 책은 모조리 읽었다. 심지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까지 읽었다. 다 읽지는 못했다. 부드러운 사랑의 유대로 이어진 행복한 유색인들이라는 각색만은 참아낼 수 없었다. (킨 221페이지)


시간여행이란 화두를 떠올리면 참 낭만적인데, 이 소설이 보여주는 시간여행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설레지도 않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오히려 불안하다. 두근거리면서 상상하는 즐거움은 저기 밀어두고, 혹시나 그 시간에서 내가 현재로 돌아오지 못하는 건 아닐까 싶은 두려움이 앞선다. 즐거운 여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이 소설처럼 한번 시간여행을 할 때마다 공포에 떨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976년의 LA. 작가이지만 가난한 흑인 여성 다나는 일하면서 백인 남자 케빈을 만나고 결혼한다. 흑인과 백인의 구분이나 차별이 없어진 시대였지만, 둘은 주변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여전히 그들끼리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두 사람은 사랑했고, 같이 살기로 하면서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고 짐을 풀기 시작한다. 그때, 다나는 현기증을 느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1815년 미국 메릴랜드의 어느 숲속이었다. 붉은 머리의 백인 소년 루퍼스가 물에 빠져 있었고, 다나는 살려달라는 루퍼스의 목소리를 듣고 그 시대로 간 것이다. 어떻게 된 건지? 어쨌든 다나는 눈앞의 소년을 살리고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이 상황을 누구에게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바로 눈앞에서 본 케빈을 제외하고는.


처음 다나가 루퍼스를 구하러 가서 1800년대에 머물렀던 시간은 불과 몇 분이었다. 그 시간이 현재에서는 단 몇 초였다고 케빈은 말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두 번째 시간 여행. 루퍼스는 조금 더 자란 소년이었고, 불을 낼 뻔한 상태에서 다나를 불렀던 것. 그렇게 몇 번씩 다나는 루퍼스가 죽을 위험에 처할 때마다 불려온다. 시간을 거슬러 1800년대로 말이다. 흑인 여성 다나가 루퍼스의 시대에 적응할 수 없던 이유는 너무도 많았다. 미국의 남부, 흑인을 노예로 부리던 시대였다. 농장주들은 돈으로 노예를 매매했고, 한 인간이 아니라 자기 소유물로 여기며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오직 자기를 위해 일을 하고 돈을 벌어주는 용도로 이용하는 도구로만 대했다. 여전히 인종의 벽은 높았지만, 현재의 미국 사회에서 흑인과 백인의 결혼을 이루어낸 다나가 어떻게 루퍼스의 시간을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다나는 한 가지를 염두에 두고 루퍼스의 부름이 올 때마다 1800년대로 돌아간다. 다나의 조상이 루퍼스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시간을 잘 건너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루퍼스의 성장을 돕는다.


부유한 백인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나고 자라는 루퍼스는 어떤 사람으로 자랄까 궁금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다나의 시간 여행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며, 흑인 여성 다나를 노예가 아닌 친구로 대하려고 했다. 물론 자기 기분 내킬 때만. 아니길 바랐지만, 루퍼스는 무자비한 아버지를 닮은 면도 있었다. 갖고 싶은 것에 모든 것을 걸을 수 있는 남자가 되어갔다. 어릴 적부터 마음에 두었던 흑인 앨리스를 사랑했고, 폭력과 잔인한 행동으로 결국 앨리스를 옆에 둔다. 어쩌면 루퍼스가 다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자기 아버지와 똑같은 잔인한 농장주로 자랐을지도 모르지. 루퍼스는 앨리스를 사랑한다고 믿으며, 그 자신은 아버지와 조금은 다른 너그러운 백인이라고 착각하고 살아왔는지도. 그는 다나 역시 친구라고 여기며 자기와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애정을 쏟는다. 앨리스와는 다른 의미로 다나를 사랑하지만, 상대의 마음이나 간절함 따위는 마음에 두지 않는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이기적이고 잔인한 백인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이다.


흥미로운 시간 여행 소설이지만, 왜 시간적 배경을 1800년대로 정했는지 궁금했다. 그러면서 작가에 대해 찾아보니, 이 소설은 작가가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옮겨놓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생생한 장면을 상상하게 했다. 1800년대는 노예제도가 가장 혹독했던 시대라고 한다. 그 중심으로 흑인 여성 다나를 보내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달하는 거다. 1900년대의 엘리트 여성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이 갑자기 책에서나 봤던 위험한 시간으로 들어가는 게 어떻게 보일지. 작가의 삶을 이루기 위해 일용직도 마다하지 않는 그녀의 열정이, 1800년대에서는 위험에 처한 상황일 뿐이다. 흑인 노예가 그것도 여성이 글을 쓰고 읽을 줄 알고, 아는 게 많고 때로는 건방져 보이기까지 한다면 어떨까. 고용주에게는 골치 아픈, 노예들 틈에 두면 위험한 노예일 뿐이다. 소설 속 다나는 옥타비아 버틀러가 소설을 쓸 수밖에 없던 현실을 담은 인물이기도 하다. 1960년대는 미국의 흑인민권운동이 꽃을 피우던 시가라고 한다. 노예로 살았던 선조들에게 격분하면서 부모 세대를 원망하고 저주했다고.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것도 있다. 그들은 부모 세대가 버텨온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는 거 아니겠는가. 사는 것처럼 살지 못했지만, 때로는 의지를 불태우다가 죽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들은 주어 방식으로 삶을 이어왔으며 투쟁을 계속해왔던 거다.


나는 그날 책을 한 권 훔쳐 나이절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어떻게 케빈과 내가 이 시대에 수월하게 끼어들어갔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는 정말로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우리는 쇼를 바라보는 관찰자였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역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배우였다. 집에 갈 날을 기다리는 동안에 그들과 비슷한 척하면서 주위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형편없는 배우였다. 우리는 실제로 역할 속에 녹아든 적이 없었다.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었다. (킨 184~185페이지)


이해하지 못하는 시절에 관해 함부로 판단하고 욕할 수 없음을 다나는 보여줬다. 처음 그녀가 흑인 노예가 있던 곳으로 시간 여행을 했을 때는 감당할 수 없었을 거다. 자유와 의지는 언제나 우리 안에 있기에 당연한 거였는데, 그 시절의 흑인은 노예로 살아가면서 그 삶을 이어가는 모습이 당연했다. 설마, 그들의 가슴 속에서도 노예의 삶이 당연하다고만 여겼을까? 아니면, 그들 나름대로 버티는 삶을 이어가면서 피 끓는 투쟁을 멈추지 못했을 거로 생각한다. 다나는 루퍼스와 대화하고 그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읽어주면서 여느 노예와 다른 일상을 보낸다. 그녀가 다른 시대에서 왔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그녀를 자기와 다른 존재로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다나 역시 스스로 자기가 그곳에서 노예로 있는 흑인들과 다르다고 여기지는 않았을까? 그녀가 현재를 살면서 배웠던 지식과 당연한 것들이 그녀를 당당하게 만들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가 한번 두 번 채찍질을 당하면서 얻은 건 공포였다. 두려움 앞에서 의지를 꺾고 수긍하는 자세였다. 루퍼스의 말을 어긴 벌로 밭으로 나가서 일하고 쓰러졌던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배운 것은 현실에 수긍하는 법이었다. 권력을 가진 이의 말을 어기면 이렇게 매질을 당하고, 힘든 일을 해야 하고, 언제 돌아갈지 모를 상황에 절망하며 쓰러지는 일. 이게 그녀가 배운 현실과의 타협이면서 권력자의 통제 안에서 살아가는 방법이었으며, 노예 시대의 폭력에 길드는 모습이었다. 조금씩 다나의 태도가 변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두려웠다. 그녀는 현대로, 처음 왔던 모습 그대로 멀쩡하게 돌아갈 수 있을까.


현재를 아우르는 여러 가지가 시간 여행을 하는 다나의 이야기 속에 있다. 아니라고 할 수 없게 지금도 여전히 보이는 인종 차별과 폭력, 노예라고 직접 부르지는 않아도 권력자들이 휘두르는 힘에 고통받는 사람들, 여성이기에 이중적으로 가해지는 인종차별과 성폭력 등 인간 사회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문제들이 1800년대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물론 이 소설은 단순히 그런 배경뿐만 아니라, 작가가 다나에게 반영한 애증이라는 인간 감정도 눈여겨 볼만 하다. 다나는 루퍼스가 살려달라고 할 때마다 시간을 초월해 그에게 간다. 그 소년을 위기에서 구해야만 한다는 생각도 있지만, 그의 아버지와 다른 백인 남자로 성장하는 것을 보고 싶기도 했다. 어쩌면 그녀의 조상이 될 사람이기도 하기에 말이다. 그러면서도 루퍼스를 지켜볼 때마다 조금씩 변하는, 점점 그의 아버지와 닮아가면서 노예를 대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증오한다. 불안하고 위태로운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이해하면서도 그녀에게까지 위험을 가할 때마다 그를 증오하고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한다. 현재로 돌아와서 안도하면서도 루퍼스와 있던 곳을 집으로 여길 정도로 그리워하고 안도하기도 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그 애증의 감정이 어떤 결말을 만들어냈을지 생각하면...


처음에는 그저 상상과 판타지로 만날 자세를 가졌었는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다나가 시공간을 초월한 순간들이 무엇을 바꿔놓을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읽게 됐다. 그때의 노예제도가 다나의 등장으로 얼마나 다른 길을 걸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루퍼스가 있던 와일린 가의 흑인 노예들은 다나의 존재로 자기 의지와 자유에 대해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바라본다. 현실의 불안과 불평등에 고민하고 투쟁할 자극이 되는 존재. 한 세기를 거슬렀던 다나의 시간 여행은, 여행 그 이상의 의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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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1-06 0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간여행은 보편의 관점에서 봤을 때 노예제라는게 얼마나 공포스러운 제도인가를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잘 보여주는것 같았어요. 저도 이 책 참 좋아하는데 구단씨님 리뷰 읽으니 더 좋아지네요. 😁

구단씨 2021-01-06 01:45   좋아요 1 | URL
오랫동안 미루다가 이제야 읽었어요.
읽기를 잘 한 것 같아요. 너무 좋네요. ^^

psyche 2021-01-06 0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좋았어요. 주인공이 느끼는 공포가 어찌나 생생했던지 책을 읽은 날 악몽에 시달렸다는...

구단씨 2021-01-09 20:40   좋아요 0 | URL
진짜 생생했어요. 만약 그 상황에 있는 사람이 나라면? 이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면서 읽게 되더라고요.

scott 2021-02-10 15: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나의 시간여행은 21세기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구단님 이달의 당선 축하합니다.^.^

구단씨 2021-02-19 21:4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어느 한 시대에, 시간에 머물러 있는 소설은 아닌 것 같아요.
 
라이팅 클럽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2
강영숙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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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처럼 책을 읽고 그 기록을 남긴다. 단순한 내용 정리가 되기도 하고 너무 와 닿아서 내 감정과 이야기가 많이 섞이기도 한다. 책을 읽어온 시간이 길어지면서 소박한 바람은 점점 커졌다. 그저 후기를 남겨야겠다는 다짐은 후기를 잘 쓰고 싶다는 바람으로 남았다. 작가가 될 것도 아니면서, 책을 읽었다고 누가 후기를 남기라고 등 떠미는 것도 아닌데 언젠가부터 그런다. 이왕이면 다홍치마, 잘 쓴 글에 눈길이 가는 건 당연하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 느낀 그대로 잘 표현되면 기분도 좋다. 어쩌면 책을 읽고 그 후기를 잘 쓰고 싶다는 나의 바람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잘 표현되었는지 하는 만족의 문제인 듯하다. 이 소설의 모녀, 계동의 글쓰기 모임의 사람들, 해컨색의 라이팅 클럽 사람들은 자기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다. 책을 쓰느냐 아니냐, 전문적인 글쓰기를 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에 앞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 그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영인의 엄마 '김 작가'는 작가 지망생이면서 동네 글쓰기 교실을 운영한다. 좀 거창하게 들리는 글쓰기 교실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딸 영인이 보기에 그냥 동네 수다방이다. 그런데도 그곳에 모인 여성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쏟아내면서 세상 진지하다. 영인이라는 이름보다 화자인 '나'로 등장하는 주인공은 계동의 이 글쓰기 교실에서 태어난 글들을 쓰레기로 여겼다. 기껏해야 남편과 아이들 이야기에 일상을 푸념하는 글로 채워진 문장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모임의 대표 격인 김 작가를 한심하게 바라보면서, 영인은 또래 아이들보다 좀 더 빨리 자란다. 김 작가는 우리가 아는 보편적인 엄마의 모습이 없는 엄마였기에 영인은 그에 대한 분노로 글쓰기에 치열해진다. 어린 나이부터 책을 손에 들고 뭔가 그럴싸하게 보일 이미지를 만들며, 정말 필요한 문장을 찾으려 계속 읽고 쓴다. 점점 그녀의 글쓰기는 분노의 쏟아냄은 물론이고 자기 삶에 화해하는 글쓰기에 이른다. 이는 그녀의 오랜 세월이 만든, 어찌 보면 치열하고 파란만장한 생을 거쳐 온 그녀만의 재산이 되는 과정 같다. 만년 작가 지망생인 엄마에게 대항하고자 진짜 작가가 되겠다며 열심히 써댄 그녀 노력의 결과 말이다. 이렇게 쓰는데, 안 써지면 안 되는 거지.


생각해 보면 나는 김 작가와 떨어져 살았던 어린 시절에도 쓰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혼자 놀기 위한 대본이 필요했던 것 같다. 혼자만의 공간, 혼자만의 등장인물, 혼자만의 날씨, 그래서, 그런데, 그랬거든, 그건 아니고 등으로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무궁무진했었다. 이야기만이 시간을 이길 수 있었다. (257~258페이지)


참 특이한 소설이다. 처음에는 저렇게 자식을 방치하는 엄마가 있을까 싶다가도, 누군가 아이를 키우는 방식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작가가 되고 싶은 엄마의 갈증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궁금하기도 했다. 싱글맘으로 아이를 키우는 일상과 본인의 미래가 불안하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현재의 자기 삶에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건 아닐까. 보통의 삶이라고 하기 어려운 김 작가의 현실은 무언가 말하지 않으면 더는 견딜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바랐을 글 쓰는 삶을 계동의 평범한 주부들과 이룬다. 각자 하고 싶은 말을 쓰자고,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라고, 생각만 하지 말고 일단 쓰라고. 매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모여 글을 쓰는 여성들의 모습을 상상한다. 저마다 옆구리에 노트 한 권 끼고 어딘가로 향하는 발걸음을 그려본다. 남편과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꾸리는 일상을 운명처럼 여긴 그녀들의 오늘이 무엇을 만들어낼지 기대되는 건 당연하다.


김 작가와 대조적이면서도 비슷하게 흐르는 영인의 인생은 또 어떠한가. 글쓰기가 전부라고 해도 좋을 이 모녀는 각자의 삶에 치열하다. 문인들과 어울려 술판을 벌이는 것 같으면서도 계속 뭔가를 쓰는 김 작가, 아무 배경도 없고 부모의 사랑도 없이 세상에 소리치는 방법으로 글쓰기를 하는 영인. 처음에는 읽는 것으로 가슴을 채우고 계속 쓰면서 분노를 잠재웠다면 점점 글쓰기의 욕심은 진짜 좋은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은 거였다. 영인의 글쓰기는 결국, 이 소설은 영인의 글쓰기 성장 과정이다. 영인이 작가가 되었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글쓰기의 진짜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그 과정에서 보는 것들, 그런 영인의 시선을 우리가 따라가면서 같은 것을 알게 된다는 게 중요하다. 혹시 글쓰기는 경험으로 채워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경험한 게 많은 사람이 쓰고 싶은 게 많은 거로 여겼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다양하게 보고 겪는 사람이 아는 것도 많은 거 아니겠나. 보이는 게 많을수록 하고 싶은 말도 많을 거로 생각한다. 그러니 영인의 경험은 쓸 수 있는 무궁무진하다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


평범하지 않은 그녀의 성장이 글쓰기의 길을 열어준다. 동성애를 겪고, 외모와 환경에 주눅 들고, 무작정 고백하는 짝사랑에 거절당하는 게 쉬운 인생일 수 없다. 성인이 되었다고 그녀의 인생이 크게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친구의 죽음이나 사회생활, 이상하게 시작된 결혼과 이혼을 겪으며 내면의 경험까지 꽉꽉 채워간다. 영인은 그 모든 순간에 글을 썼다. 그녀가 처음부터 글쓰기의 의미를 찾았던 건 아니다. 삶이 혹독해질수록 글쓰기는 치열해졌고, 그렇게 자기와의 싸움처럼 이어진 글쓰기가 습관처럼, 당연한 일상처럼 된다. 이제는 무엇을 쓰는가 하는 게 아니라 글쓰기 그 자체에 삶의 의미가 생긴 거다. 그렇다고 그녀가 글쓰기의 의미를 모른 채 아무거나 쓰지는 않는다.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작가 J의 가르침대로 묘사를 위한 관찰을 습득한다. 사람과 사물의 모습, 표정과 보이지 않는 것까지 들여다보는 시선을 가다듬고,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동안에는 관심 없고 몰랐던, 무시하기까지 했던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면서 엄마인 김 작가의 인생에도 관심이 생긴다. 자기가 기억하는 모든 순간에 무엇이든 써왔던 엄마, 동네 아줌마들의 수다로만 보였던 계동 글쓰기 교실 사람들의 이야기가 글이 되고 인생이 되는 거였다. 그들이 글을 쓰는 목표가 등단이나 출판이 아니라, 쓰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고 그 문장에 담긴 삶을 보는 거라는 걸 이제야 안다. 보통의 사람들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게 전부일지 모른다. 그냥 쓰고, 그냥 읽고, 소박한 서로의 문장 속 이야기를 듣는 것. 글쓰기의 즐거움, 그거면 충분하다.


나는 그때 뭔가를 자세히 들여다본다는 것,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을 탐구하는 것이 글을 쓰는 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공간을 제대로 설정하라, 그러면 글은 생각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게 써지고 훨씬 더 힘 있게 진행된다! (216페이지)


"학생은 왜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다고 생각해?"

J 작가가 물었다.

"글쎄요 모르겠어요. 그냥 재미있어서 보는 게 아닐까요?"

오히려 내가 J 작가에게 되물었다.

"그래, 재미있어서 그래. 재미라는 게 뭘까. 아마 사람들이 소설을 재미있어하는 건 사람들 사는 모습이랑 소설이 제일 비슷하기 때문일 거야. 안 그래?"

"네 맞아요."

생각을 안 해 봐도 J 작가의 말이 다 맞는 것 같았다. (101페이지)


이쯤 되니 독자인 나는 소설을 왜 읽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쓰는 존재 이전에 읽는 존재였던 영인처럼, 나도 소설을 즐긴다. 그 이야기 속 세상에 빠져 허우적대다가도, 허구의 세상에서 틈새로 끼어든 현실의 한 자락을 마주할 때면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다. 현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이야기에서는 눈을 떼지 못하고 집중한다. 이야기가 이야기로만 머물지 않는 고통을 마주한다. 누군가의 이야기에서 시작되었을 온갖 세상, 많은 사람의 삶, 세상 구석구석의 감정을 읽는다. 혹자는 그런 소설을 읽으면서 무슨 발전을 하겠느냐고, 뭐가 변하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소설이 없다면 우리는 또 어디서 세상의 다른 시선을 보고 누군가의 인생에 공감하고 위로받을 수 있을까? 가끔은 말도 안 되는 세상을 경험하고 가끔은 너무 알 것 같아서 우울한 기억을 꺼내기도 하지만, 그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또 배우고 성장하는 시간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쓰기 위해 모이고 애쓰는 이들의 이야기에서 나는 읽기 위한 의미를 계속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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