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행 기차를 타려고 여행 가방을 꾸리는데 하루가 꼬박 걸렸다. 이걸 넣었다가 저걸 뺐다가. 필요한 건 또 왜 이렇게 많은지, 줄이고 줄여도 캐리어 하나가 꽉 찼다. 여름이라 옷도 가벼울 것이고, 겨우 열흘인 데다가 동생네 집에 가는 것이라 따로 숙박에 필요한 게 필요 없는 데도 이랬다. 사실 예전에 비하면 그래도 돌아다니는 편이지만, 어딘가로 떠나기 위해 여러 가지 준비하고 계획하고 돌아다니는 게 귀찮아서 웬만해서는 여행이란 단어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여름에는 더더욱 그랬다. 그런데 점점 그 귀차니즘을 떨치게 하는 감정이 생겼다. 이제야 어딜 좀 돌아다닐 시간이 생긴 엄마와 조금씩 서로에게 다가가고 싶은 가족의 마음이, 같이 어딘가로 갈 계획을 세우고 얼굴 보고 만나는 일을 많아지게 한다. 몸은 귀찮고 힘들지만, 함께하는 시간과 어딘가로 향하는 마음은 귀찮음과는 다른 뭔가가 꽉 채워지게 한다.

 

아마 이 자매에게도 비슷한 마음이 세계여행을 즐기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현재의 여기서 뭔가를 더 하고 싶은 마음, 항상 갈증이 나듯 마음 한구석에 자리한 세계여행이라는 꿈, 더 넓은 세계의 여러 곳을 가슴에 담아두고 싶은 바람 같은 거 말이다. 그래서 스물다섯, 서른 살의 자매는 떠났다. 24개국 52개의 도시를 누비는 모습이 활자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걷고, 보고, 느끼는 그대로 사진과 문장에 담겼다.

 

역시, 하고 싶던 일을 한다는 건 너무너무 행복한 일이다. 여행을 할수록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체크해가고, 그만큼 새로운 리스트가 생겨난다. 세계로 한발씩 나아갈수록 더 큰 세계로 나아가고 싶은 내가 보였다. 우리는 그렇게 계속 여행을 해야 하는 이유들을 만들고 있었다. (85페이지, 프라하)

 

여행이란 혼자 하는 것도 힘들지만, 마음 맞는 이와 함께하는 건 더욱더 어렵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함께 살지 말라는 말과 비슷하게 들렸다. 더군다나 집 떠나면 마주치게 될 온갖 일들이 몸과 마음을 피곤하게 할 텐데, 일행에게 항상 좋은 모습만 보여줄 수는 없다. 불평과 불만이 쌓이고, 일정의 변경에 일행의 눈치도 봐야 한다. 내 맘대로 결정하고 수정하는 일이 쉽지 않다. 이 자매의 여행도 다르지 않았다. 같이 준비하고 같이 떠나는 것까지는 좋았다. 세계를 누비는 상상에 많이 설레며 여행 준비를 했을 것이다. 첫 챕터로 넣은 '떠나기로 하다'를 읽다 보면 그 설렘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떠나기로 마음먹고, 한국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고,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이 머릿속에서 그려진다. 읽으면서 같이 두근거렸다. '아, 역시 여행은 떠나기 전이 가장 행복해!' 하면서. ^^ 이 자매의 여행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 행복은 조금씩 사그라진다. 낯선 곳을 향하는 마음의 불안과 계획대로 되지 않은 순간들의 당황과 일정을 수정하면서 계속 나아가는 일이 가능할까 싶은 염려 때문에 무슨 추리소설을 읽는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결국 자매의 계획대로 계속 나아가며 도착한 여러 나라와 도시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그런 불안과 걱정쯤은 넣어두어도 좋을 것 같다. 일단 부딪히면 어떻게든 가능해지는구나 싶은 이상한 긍정 마인드가 생기니까 말이다.

 

 

자매의 여행을 지켜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라. 세계여행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누군가는 한 번쯤 꾸어보는 꿈이지만, 노트에 한 번쯤 적어보기도 하지만, 거기서 머무는 경우가 많다. 머릿속과 적어놓은 노트 밖으로 쉽게 튀어나오기 어렵다. 그래서 부러웠다. 막상 기회가 주어지거나 멍석을 깔아주어도 선뜻 그 여행길에 오르기를 주저하게 되겠지만, 스스로 마음먹고 준비하면서 세상에 부딪히는 이 여행의 모든 것이 혹시 꿈은 아닐까 싶어서 계속 들여다보게 된다. 그만큼 이들의 여행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질투였을까? '이거 실화냐?' 싶은 느낌말이다. 아마 조금 더 격하게 부러웠다면, 부러움이 아니라 질투라는 감정이 피어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여행하면서 그 긴 여정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그걸 가능하다고 보여준 자매의 모습도 눈에 담고 싶었다. 낯선 곳에서 부딪히면서 다시 감정 추스르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게 감정적으로 쉽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여행이 주는 성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배려와 양보가 생기는 모습이 괜히 엄마 미소가 지어졌다. 아마 이 경험을 함께하면서 자매는 더 돈독해졌으리라.

 

그리고 대부분 사람이 언젠가 이루고 싶은 바람으로만 넣어둔 계획을 실행했다는 게, 책의 뒷부분에 적어놓은 이들의 여행 경비를 보면서도 부러웠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마음만 먹으면 가능한 계획이고 금액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금액을 넘어서서 시간이라는 제약도 이 여행을 불가능한 버킷리스트로 머물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200일이 넘는 기간이라는 시간과 이들이 사용한 금액은 웬만해서는 쉽게 계획할 수 있는 금액은 아니다. 각자가 모아둔 돈으로 여행길에 나섰겠지만, 현실 속의 우리는 이 금액으로 다른 일을 더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이 자매가 그 기간에 걸은 여러 나라와 도시들이 건네준 많은 경험은 가장 부러운 일이 아닐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고, 오직 머릿속에 저장해둔 사람만이 꺼내어 사용할 수 있는 그 경험, 자기만의 인생에 뭔가 굉장하고 단단한 주춧돌이 다져진 느낌.

 

 

이러한 경험이 쌓이고 쌓여 위기를 극복하는 나만의 노하우가 생긴다. 예를 들면, 길을 헤매지 않기 위해 교통수단과 티켓 사는 방식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다음 나라로 출발하는 것, 구글 지도를 이용하여 버스 시간을 체크하고 빠르게 이동하는 것. 이렇게 미리 준비하면 길에서 보내는 시간을 단축하고 체력 소모도 줄일 수 있다. 그럼에도 여행에는 언제나 변수가 따르기 마련이라 순조롭지만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경험을 통해 나 자신이 더 단단해질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163페이지, 취리히)

 

세계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녀야 알찬 여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종종거리며 돌아다니지 않고 하루를 몽땅 쉬는 데 쓰거나 특별한 일정 없이 시장 안을 어슬렁거리며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나도 모르는 새 그 나라에 스며들듯 느리게 여행하는 법을 알아가고 있었다. 바쁘게만 살아온 나에게는 큰 변화이지만, 난 이 변화가 아주 마음에 든다. (281페이지, 쿠스코)

 

여행지에서의 첫날이 아니라, 처음 여행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과정부터 들려준다. 왜 이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어떤 준비와 계획으로 이 여행을 더 완벽하게 해냈는지 알 수 있는 시작이었다. 러시아를 시작으로 동유럽, 영국, 미국, 남아메리카, 아시아 등 자매가 다닌 곳곳에서 마주친 세상의 모습은 앞으로 이 자매가 살아갈 세상의 많은 일에 엄청난 힘이 될 것 같다. 여행이 왜 필요한지 우리가 왜 세상의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살아가야 하는지 증명하는 것처럼, 자매가 누빈 세계의 풍광들이 설렘으로 다가온다. 여행을 떠나기 전의 설렘과는 다른 크기의 두근거림이었다. 어떤 사진들은 마치 그려놓은 것처럼, 너무 아름다워서 현실적이지 않을 정도였다. 세상에 이렇게 상상하지 못한 곳이, 아직 보지 못한 아름다운 곳이 너무 많구나 싶어서 슬퍼지기도 했다. 어쩌면 많은 사람이 이 슬픔을 없애려고 세상의 곳곳을 찾아다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책 속에 담긴 사진을 보면서 여행의 이유와 필요성을 하나 더 찾았다. 특히 저자의 취미인 카페 투어는 여행의 목적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는데, 가는 곳곳마다 카페의 분위기와 커피는 아마 저자의 또 다른 보물 1호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여행 준비부터 여행을 떠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까지 거의 400여 일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방문한 나라와 도시에서 실수하기 쉬운 여행 팁과 조금 더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는 여행 루트, 교통과 비용까지 해서 마지막 장에 잘 정리해두었다. 나도 처음 듣는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었는데, 언젠가 그 나라로 떠나지 않더라도 그 나라의 특징을 이해하는 내용이 될 것 같다.

 

 

넓은 세상으로 당차게 나아가는, 하지만 돌아오는 여행의 끝에는 자기만의 세상을 하나 만들었을 이야기다. 부러움마저 즐거워지는 여행기다.

 

문득 이 감사함을 느끼고 싶어서 여행을 택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대단한 무언가를 이뤄야만 만족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행을 떠나온 지금은 이렇게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사람들의 웃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꽉 찬다. 이렇게 변해가는 내 모습이 좋다. (139페이지, 차브타트)

 

세계여행이 끝나고 현실로 돌아오자 나를 둘러싼 외부적인 요인은 여전했다. 바뀐 건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나의 인생이 얼마나 행복해졌느냐' 하는 내부적인 요인을 생각해본다면 굉장한 변화가 있다. 엄마가 요리해주시는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따뜻하고 깨끗한 침대에서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음에 감사하다. 사소한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나 자신으로 변화된 것이다. (417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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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변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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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 보면 내 심장이 뛰어...”

어느 드라마나 영화, 혹은 소설에서 흔히 보이던 로맨스였다. 누군가의 심장을 이식받은 여자(남자)가 어느 이성을 보고 갑자기 심장이 뛴다는 설정. 알고 보니 그 이성은 이식받은 심장의 원래 주인과 상당한 인연을 맺고 있었다는 것. 사실 그런 설정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보면서도, 어쩌면 과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한다고 해도, 살아가면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인간이라는 게 참 신비한 존재이기도 하니까. 누군가의 심장이 내 몸 안으로 들어와 그 사람이 살아있을 때와 같은 감각을 느끼고 성향을 지니는 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성립되기도 할 것 같다. 하지만 그게 심장이었을 때 이야기다. 하트 모양을 닮았다는 심장이 사랑을 바탕으로 일어나는 일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우리 머릿속의 뇌를 이식해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까? 누군가와 마주쳤을 때 어디선가 본 것 같고, 기억이 날 것 같은 이상한 느낌말이다.

 

청년 나루세는 어느 날 부동산에 갔다가 강도에게 총을 맞는다. 사경을 헤매다 깨어난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그는 자기가 살아있음에 놀라워한다. 머리에 총을 맞고 살아난 사람이 과연 있을까? 알고 보니 그는 의료진에 의해 뇌의 일부분을 이식받았다. 공여자가 누구인지 알 수는 없다. 그가 총상으로 잃은 뇌의 일부분을 공여자의 뇌에서 꺼내와 이식받은 것만 안다. 사경을 헤매다 살아났고, 잃어버린 뇌의 일부분도 채워졌다. 그는 사고가 나기 전의 상태와 똑같아졌다. 이제 몸을 추스르고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면 된다.

 

생각해본 적이 없다. 뇌를 이식한다? 신체의 다른 부분도 아니고 뇌가 이식 가능한 대상이었던가? 의료나 과학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어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뇌는 인간의 심장보다 더 어려운 존재라고 생각했다. 작은 시경 하나도 건드리는 게 어려워서 웬만한 뇌수술은 피해 가는 진단이 내려지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런 뇌의 일부분을 이식받은 환자는 어떻게 될까? 나루세의 몸은 전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조금씩 그의 감정적인 부분이 변화한다. 좋아하던 그림은 점점 멀리한다. 연인 메구미의 품에서도 안정되지 못한다. 소심하다고 할 정도로 차분했던 그의 성격은 점점 하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폭력적으로 된다. 그리고 천재적인 음감을 나타낸다. 피아노 근처에도 가본 적 없던 그가 피아노의 조율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음감에 뛰어나다.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는 일에도 주저하지 않고 말한다. 타인과의 융화가 아니라, 자기 자신만의 기준으로 세상과 사람을 보면서 자꾸만 어긋난다. 자꾸만 과거의 자기 모습을 잃어가는 나루세는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하루하루 변하는 자기 모습을 기록한다. 오늘은 어제와 얼마나 달라졌는지, 내일 다시 이 일기를 보면 또 무엇이 달라져 있을지 두렵다.

 

이상하다. 수술 이후로 전에 없던 성향이 나타나는 자기 몸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 없을 거다.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가 어려워지기까지 하니, 이건 사회에 해를 끼치는 괴물을 격리하거나 사살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런 변화를 누구보다 자기가 더 잘 알게 되니 두려움을 점점 커질 수밖에.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뇌의 이식은 앞으로의 인생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칠까? 이대로 변하는 것을 받아들여도 괜찮은 걸까?

 

소설의 중간에 등장하는 기록들은 이 소설을 더 궁금해하고 빠져들게 한다. 아직 다 드러나지 못한 기록의 실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파헤쳐보고 싶어진다. 그만큼 페이지가 빨리 넘어가서 결말에 다다르기도 한다. 작가의 인터뷰에서 이 소설의 플롯이 거의 15분 만에 완성되었다는 걸 듣고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읽히는 이유가 이해되기도 했다. 그만큼 작가 자신도 15분 만에 완성된 플롯에 푹 빠져서 미친 듯이 소설을 완성했으리라는 예상 때문이다. 그러면서 평소에도 가끔 궁금했던 그 질문을 떠올린다.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심장일까, 뇌일까. 감정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일에는 심장이 주관하겠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일에는 뇌가 주관하는 일일 텐데, 인간의 일상과 세상이 어떻게 그 둘 중의 하나로만 판단하면서 나아갈 수 있겠는가. 그래서 가슴과 뇌는 하나인 것처럼 세트로 묶여 인간사를 주관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이 소설에서 마주하는 나루세의 변화는 인간이 추구하는 완벽함이 어디까지 가능한지 묻고 싶게 만들기도 한다. 인간의 부족한 부분, 결여된 부분을 채워 넣는 일이 필요한 일인지, 그렇게 채워 넣고 만족할 수 있는지를. 인간이 살면서 한 번쯤 마주치는 죽음이란 순간을 받아들이는 건 어떤 결정에 의해서일까 계속 묻게 된다. 정말로 뇌 이식이 가능해진다면, 나는 나의 뇌가 온전하지 못할 때 이식을 선택할 수 있을까? 타인의 뇌가 일부분이라도 내 안으로 들어온다면, 그때부터 살아가는 나는 진짜 나일까 아닐까? 나루세에게 이식된 뇌는 극히 적은 부분이었다. 총상으로 소실된 뇌의 한 부분을 이식한 것뿐인데, 수술 이후의 나루세는 점점 원래의 자기 모습을 잃어간다. 이식된 뇌의 주인에게 지배당한다. 그럼 나루세는 이제 나루세가 아닌 게 되는 건가?

 

"당신은 몰라. 뇌를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고 지껄이는 당신은 말이야. 뇌는 특별한 거야. 당신이 상상이나 할 수 있어? 오늘의 나와 어제의 내가 달라. 내일 눈을 뜨면 거기 있는 건 오늘의 내가 아니지. 먼 과거의 추억은 전혀 다른 사람 것이 되고 말지. 그렇게밖에 느껴지지 않아. 오랜 시간을 들여 남겨온 것들이 모두 사라져버려. 그게 어떤 건지 아나? 가르쳐줄까? 그건……" 나는 도겐의 코 바로 앞에 검지를 들이댔다. "그건 죽음이야. 살이 있다는 건 그저 숨이나 쉬고 심장이 뛰는 게 아니야. 뇌파가 나온다고 살아 있는 게 아니라고. 산다는 건 발자국을 남기는 거지. 뒤에 남은 발자국을 보며 저건 분명히 내가 낸 거라고 알 수 있어야 살아 있는 거야. 하지만 지금 나는 예전에 남긴 발자국을 봐도 내 것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 이십 년 이상 살아온 나루세 준이치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고." (270페이지)

 

범인을 찾아야 하는 추리 소설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마주하는 인간의 모습과 변화, 도덕과 윤리적인 문제와 상충하는 의료의 연구는 어디서 그 중심을 잡아야 하는지 고민하게 한다. 사소한 부분의 더하기 빼기로 이루어진 일의 결과는 절대 사소하지 않았다. 한 사람의 인생을 쥐고 흔들며, 나아가 세상의 선과 악을 논하는 사고의 존재로 남게 되었다. 내가 나로 살아가는데 무엇이 우선되어야 하는지 묻게 하는 소설이다. 신체의 부족한 부분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하는지, 그 부족한 부분을 타인의 것으로라도 채워 넣어서 원래의 모습으로 만들어 살아가야 하는지. 그렇게 만들어진 나는, 나일까 아닐까.

 

솔직히 지금이야 이런 설정이 그럴 수도 있는 일 중의 하나로 여길 수도 있지만, 작가가 이 작품을 거의 이십 년쯤 전에 썼다고 하니 아마 그때 이 소설을 마주했다면 굉장히 놀랍고 신선한 작품으로 기억할 것이다. (사실 출간 때 읽었는데 기억이 안 나서 잠깐 헤매기도 했음. ㅠㅠ) 다양한 소재와 시도로 언제나 독자에게 즐거움을 주는 작가로 기억될 것 같아서 이 작가의 작품을 계속 찾아서 읽게 된다. 요즘 나오는 작품들은 개정판이 많지만, 영화가 리메이크되면서 지금 세대가 몰랐던 이야기를 다시 전하는 것처럼 소설도 마찬가지일 거로 생각한다. 십 년을 훌쩍 넘어 다시 태어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이 요즘의 독자에게도 사랑받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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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하고 게으르게
문소영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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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 방 하나를 그려봤다. 방안의 한 면에는 책장에 책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고, 다른 한 면에는 많은 영화의 DVD가 진열되어 있다. 나머지 한 면에는 그림과 영화와 공연 포스터가 차지하고 있는 방이 될 거다. 그 방 안에 들어가면 심심할 시간이 없겠지. 책 한 권 꺼내 읽다가, 그 책의 한 문장에 꽂혀 연상되는 영화 한 편을 꺼내 보고, 영화의 한 장면에서 떠오르는 그림을 보기도 하는 어떤 시간. 생각하는 많은 일과 누군가와 함께 얘기하고 싶은 온갖 주제가 그 방안에서 터져 나올 것만 같다. 누군가의 이야기에 불합리한 상황을 문제 삼고, 친구의 고민에 같이 고민하게 되는 공감의 순간을 떠올리고, 역사의 한순간을 그려낸 화가의 일생을 생각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쉽게 바뀌지 않는 일들에 여전히 한 손을 얹어놓고 애쓰는 다짐들을 굳건히 하게 되는 공간. 아마도 그 방은 현실과 상상 그 사이에서 삶의 모든 것을 생각하게 되는 공간일 것 같다. 저자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 방을 계속 그리게 된다.

 

사실 미술과 디자인 같은 분야에 많은 이력을 가진 저자의 이름에서 이런 책을 만날 줄은 몰랐다. 그림에는 워낙 문외한이라, 아무리 조금씩 알아가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누군가가 전문적인 지식으로 풀어놓은 글을 읽는다는 게 아직 힘들다. 저자가 들려주는 대부분의 이야기가 그런 쪽은 아닐까 싶어서, 끝까지 이 책을 읽을 수나 있을까 걱정부터 했다. 기우였다. 조금 과장해서 말해도 된다면, 요즘 이렇게 재미있게 읽은 책 드물었다. 배달된 작은 상자 하나를 열었더니 온갖 것이 튀어나오는데, 그렇게 튀어나오는 게 끝이 없다. 이야기가 다양해서 지루할 틈이 없었다는 말이다. 현실에서 마주하는, 세상을 보는 많은 시선을 다양하게 들려준다. 상상 조금 보태서 세상을 향한 새로운 시선을 만드는 것도 즐거웠다. 스스로 게으른 사람이라고 칭하면서, 저자가 보는 많은 것이 게으름과는 거리가 멀더라. 정말 게으른 사람은 이렇게 많은 책, 영화, 그림 등을 접하지도 못할뿐더러, 그렇게 바라보는 많은 것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꺼낼 수조차 없으리라.

 

게으르게, 불편하게, 엉뚱하게, 자유롭게, 광대하게, 행복하게. 총 6개의 챕터로 나뉜 이야기들에 저자가 바라보는 예술 작품, 작가들, 주변 사람, 작가의 경험이 녹아들어 있다. 처음에는 늦게 꽃핀 대가들의 소개에서 대기만성 위대한 인물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그런 인물들이 있으니 우리도 언젠가 '늦게 꽃핀' 무언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에 웃으면서도 골똘히 생각하게 되더라. 뭐랄까. 무엇이든 꾸준히 하다 보면 어떤 결과를 마주하게 되기도 하는 순간이 오지 않는가. 미쳐야 미친다고, 바라던 일을 계속하다가 다다른 어떤 목적지가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기대가 생기는 이상한 심리가 발동한다. 물론 저자도 자신의 게으름을 미워하지 않고 '늦게 꽃핀' 이들을 생각하면서 앞으로의 인생에서 뭐가 더 채워질지 상상하고 있지 않을까? 그저 늦게 이름을 알린 예술가와 작품들의 이름 정도로만 알고 있던 대상에서 다른 시선을 읽게 된다는 게 이런 재미구나 싶다. '그래, 이런 사람들도 있었는데, 혹시 나도?' 하는 인간의 묘한 심리 말이다. ^^ 허무맹랑한 시도와 도전이 아니라, 간절히 바라는 것들을 떠올리며 계속 나아가고 싶은 이들에게 이보다 더한 응원과 위로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읽다가 더 마음에 들었던 건, 우리가 오해하는 작품의 해석을 다시 해주는 부분이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 나는 이 시의 완전체를 몰랐다. 그저 유명한 구절 몇 부분만 기억하는 정도다. 나도 저자의 지적처럼 이 시의 흐름을 오해했던 거다. '가지 않은 길'이 다른 사람이 가지 않은 길을 내가 가야 한다고 '으쌰으쌰'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내가 가지 않은 길이었던 거다. 타인과 비교하면서, 그들이 가지 않을 길을 내가 가서 정복하는 성공의 과정이나 목적지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 시는 타인의 시선 따위 상관없이, 오직 자기 자신과의 문제였다. 갈라진 두 길 앞에서 우리는 오직 한길로만 갈 수 있으며, 내가 가지 않은 길은 언제나 궁금하고 미련이 남기 마련이라는. 그러니 우리가 어떤 길로 가더라도, 가지 않은 다른 길에 대해 아쉬움은 항상 품고 살아간다는 말 아닐까 싶다. 타인과 연결하여 비교 대상이 되는 게 아니라, 그냥 나 자신만 바라보고 원하는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저자는 조지 이네스의 그림 <몬트클레어, 11월>을 시와 함께 떠올린다. 마치 숲속의 두 갈래 길에 서서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망설이는 듯하다고.

 

조지 이네스 / 몬트클레어, 11월 (1893)

 

우리의 인생도 이런 망설임과 선택의 연속일 것이다. 그리고 어느 길을 택하든, 가지 않은 길은 그 미지로 인한 신비와 아쉬움을 황홀한 안개처럼 두르고 저 멀리에 있을 것이다. (51페이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오해)

 

'내가 가진 것들'이 있다고 해서 '내가 갖지 못한 것들'에 대해 그저 입을 다무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자 혼자 안심하고 돌아다닐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비유럽계 인종들이 인종차별 받지 않고 돌아다닐 세계를 만들기 위해, 나는 내 불편함을 말해야 한다. 비록 그 변화가 산을 숟가락으로 떠서 옮기는 일 같더라도……. (59페이지, 프로불편러가 될 수밖에)

 

명절에 대한 기원을 듣고 심하게 놀랐다. 지금까지 알던 명절은 가족이 모여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는 날이라고 알았다. 열심히 명절 음식 만들고 먹으면서 연휴를 보내고, 귀경길에는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와야 하는 날. 그러니 명절이 재미있고 즐거울 수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저자를 통해 듣게 된 명절의 기원은 차례 음식 준비하면서 보내는 오늘날의 명절과 달랐다. 기록에 따르면, 사월 초파일에는 연등 행사로 볼거리가 풍성했고, 구경꾼들이 온 거리를 채우는 광경이었다고 한다. 추석도 본래는 축제일이었다고, 닭 잡고 술 빚어 온 동네가 취하고 배부르게 먹는 날이었지, 조상의 제사상 차리는 게 주된 행사가 아니었다고. 차례상도 몇 가지 음식이 올리고 간소했다고 한다. 다 함께 먹고 놀고 즐기는 날이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거한 차례 음식 만드느라고 허리 한번 펴지 못하는 날이 되었을까? 명절의 의미가 어떻게 왜 변했는지까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의 모습대로 명절이 계속된다면 아마 '다 함께 먹고 놀고 즐기는' 순간은 절대 오지 않을 것 같다.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누군가는 편하게 먹고 놀고 쉬는 날이 된다면, 언젠가는 파국에 이를 것이다. (차 파국을 불러와~) 거기에 안부를 묻는다면서 계속되는 말과 또 한 번 타인의 시선에 공격당한다면, 더는 명절의 의미는 사라질 것 같다.

 

안중식 / 평생도 과거 급제 부분 (조선 후기)

 

안중식의 그림 <평생도>와 김홍도의 <평생도>로 한국인의 비교 강박의 기원을 찾기도 한다. 몇 폭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것은 탄생부터 결혼, 과거 급제, 고관이 되어 행차, 회혼례로 이어지는 인간의 생애였다. 마치 성공한 삶은 이런 것이라고 증명이라도 하듯, 모든 인간의 삶과 성공이 이렇게 흘러가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생김새부터 태어나서 자라는 환경까지 제각각인데, 세상이 증명하고 판단하는 삶의 흐름은 왜 이렇게 한 가지로 통일되어야만 하는 걸까. 이렇게 살아가는 것만이 최상의 생애라는 거라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 불편하다. 그렇게 탄생한 '엄친아'라는 단어는 오랜 세월 우리 사회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지금도 디테일한 내용만 조금 첨가되고 변화되었을 뿐이지 여전히 우리 곁에서 비교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통해 어머니의 정의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나는 소설로 이 내용을 접했는데, 이들의 감정을 다 이해할 수 없어서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소시오패스 아들과 그 아들이 저지른 범죄의 결과를 책임져야 하는 부모의 처지를 생각했다. 그러면서 자꾸만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는 어때야만 하는지 묻게 된다. 그런데 저자는 아들보다는 엄마의 이야기로 이 영화를 해석한다. 엄마는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어떤 엄마가 가장 보편적이고 평균적인 모습인지 되묻는 것만 같다. 이제까지 우리가 상징하는 엄마는 어떤 모습이었던가? 자식에게 희생하고, 당신 인생보다 아내와 엄마의 역할이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순간 없었던가? 대개 그렇게 생각하는 엄마의 모습이 많았을 거다. 무조건 자식 뒤에서 자식의 수호신처럼 보호해야 하는 존재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엄마는 다르다. 원하지 않은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의 성장에 무관심하지 않다. 케빈이 죄를 저질렀을 때도 맹목적으로 아들 편을 들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아들의 죄에 관한 부모의 책임을 다한다. 케빈의 엄마는 감정이 없는 사람일까? 아니다. 그녀에게도 자식에 대한 개념이 있다. 단지 우리가 그동안 고정관념처럼 쌓아왔던, 자식에게 맹목적이고 희생이 우선시되었던 엄마의 모습이 아니었을 뿐이다. 조금은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엄마와 아들 사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태도였다. 이런 케빈의 엄마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저자도 이 부분에서 엄마의 존재와 의미에 대해 생각한 듯하다. 남자에게 엄마의 심장을 가져다 달라고 하는 여자 이야기('어머니의 심장이야기'가 싫다)를 들려주는 부분과 닮았다. 어머니를 살해하고 그 심장을 여자에게 갖다주려고 뛰면서 떨어진 어머니의 심장이 말한다. "얘야, 괜찮으냐. 다치지 않았니." 듣다 보면 억지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동을 뿜어냈다. 이런 엄마가 어디 있느냐며, 엄마는 죽어서까지 자식을 위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저자는 이 이야기 듣기 불편하다고 했다. 나도 그렇다. 내가 아무리 엄마를 사랑해도 나의 모든 것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엄마에게도 자식을 위해 양보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라는 게 있을 것이다. 그게 사람이다. 그게 인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는, 엄마이기 전에 한 인간일 뿐이다.

 

엄마와 자식의 관계는 가장 원초적인 인간관계다. 설령 미래에 결혼제도가 사라진다 해도 존속될 것이다. 그래서 모성의 진화와 그에 대한 탐구는 계속되어야 한다. (117페이지, 새로운 어머니에 대하여)

 

저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제각각의 인생을 걸어온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어떤 결말로 도착할지 궁금해지곤 했다. 이렇게 누군가의 이야기만 들려주면서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전달하려는 걸까? 저자는 '광대하고 게으르게'라는 모순되게 들리는 삶의 자세로 어디에 도착하고 싶은 걸까? 차근차근 듣다 보면,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은 저자의 말은 우리가 일상에서 매일 마주하는 일들과 다르지 않았다. 한쪽에서 굶어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먹방의 인기는 무엇을 더 생각해야 하는지 묻기도 하고, 욕을 먹으면서까지 셀럽이 되어야만 하는 요즘 세상의 흐름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저출산의 문제를 다양한 시선으로 계산하는 이들이 범하는 오류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흥미롭게 들려준다. 사실 이 저출산 문제는 어느 한 사람의 문제로 시작된 것도 아니고, 누구 한 사람의 노력으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낮은 혼인율과 저출산의 문제는 개인의 선택이기도 하겠지만, 사회적 문제라는 게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거 아닐까. 결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개인의 만족이 미혼일 때보다 크다는 계산이 있어야 결혼과 출산이라는 인생 계획을 생각할 텐데, 가사와 육아 같은 돌봄 노동이 저평가되는 현실에 발생하는 문제도 심각하다. 저자의 말처럼 뼈있는 경제학 농담으로 저출산 문제의 심각성을 들여다보는 방법도 의미가 있다.

 

사회적 차원에서의 자유와 선택의 공허함에 대한 문제, 자본이 없고 선택을 학습할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유가 주어져 있는데 왜 못해'라고 하는 문제는 사회 제도로 보완하고 해결해야 할 일이다. 『멋진 신세계』를 떠오르게 한 푸념을 했던 경제학 교수 친구는 그런 문제들을 연구한다. 그는 자유의 개인적, 사회적 피로를 잘 알고 있지만, 또한 여전히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있기에, 자유를 지키면서 자유의 피로를 줄일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나도 그렇다. 그러기 위해서 종종 우리는 '멈추어 집중'해야 한다. (192페이지, "뭐든지 될 수 있어"의 피로와 뜻밖의 위로)

 

인생, 삶이, 세상이, 참 아이러니하다. 노력하면 원하는 것만 취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더라는 걸 우리는 안다. 복과 화는 쌍둥이처럼 항상 같이 다니기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화를 피하고 복만 맞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인생에서 어느 순간 마주칠지도 모를 온갖 상황들을 부딪치면서 살아가야 한다. 불평등과 불이익을 마주하고 싸우기도 한다. 불편하다는 말을 소리 내어 해야 하는 순간도 많다. 피해 가지 말아야 한다는 걸 새삼 새기고 싶어지게 하는 저자의 이야기들에 공감하게 된다. 우리 살아가면서 타인과 세상을 질투하고 미워하기도 하지만, 사랑하고 아끼며 함께하고 싶은 순간이 더 많지 않을까? 영화 <코코>의 주인공들이 기억하는 시간은 삶의 의미였고 행복이었을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찾으며 유한의 시간에 행복을 누리라고 했다. 늘 거기 있을 거로 믿었던 소중한 사람이나 장소는 예기치 못한 시간에 사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더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싶은 게 아닐까 싶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영원하지 않기에, 괴로운 것보다 즐거워질 수 있는 것을 찾아다니는 시간이 필요하다. 저자가 보여준 다양한 시선들은 그 즐거움을 채울 수 있는 시간을 만든다.

 

경쟁은 스트레스를 낳는다. 그래서 '행복 경쟁'을 하다 보면 '왜 행복해야 하나?'라는 질문까지 나오게 된다. 물론 불행하고 싶은 사람은 없겠지만, 불행하지 않은 것 이상의 행복을 추구할 필요가 있을까? 무엇보다도, 대체 뭐가 행복일까? (245페이지, 행복도 경쟁해야 하나요)

 

예술과 영화, 문학 작품으로 이렇게 다양하게 쏟아낼 수 있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은데, '게으르다'는 저자는 어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을까? 게을러서는 절대 나오지 못할 내용에 독자로서 한껏 즐기는 시간이었다. 저자가 챕터별로 언급해준 모든 이야기를 여기에 옮기고 싶을 정도로, 이 책 안에서 다양하고 깊은 시선에 곁들인 유쾌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마지막에 배치한 행복에 관한 이야기들에서는, 저자가 게으름(?) 때문에 한껏 행복한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빠르게, 타인보다 먼저, 많이 갖는 인생을 만들어가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 들려서 좋았다. 천천히 가다 보니 어느 순간 도착해 있더라, 하는 완성 같은, 영화 <일일시호일>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아, 부럽네. 이렇게 다양한 것을 보면서 만들어가는 또 다른 시선들. 가끔은 부끄러운 감정을 드러내면서 챙피해 하고, 대가가 되겠다며 게으름을 집어넣고 싶기도 하는, 특히 예술 작품을 보면서 현실에 들여놓은 시각을 읽어내는 방식들이 눈에 들어온다. 평소 음식에서 편식하듯 예술이나 문학, 영화에도 여전히 편식하는 내가, 저자가 들려주는 방식의 행복을 찾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으로 느낀 어떤 감각들이 나를 깨우는 것 같아서, 저자처럼 게으르지만 광대한 시선을 만나보려고 애쓰고 싶다. 어떤 날 마주하는 일상의 모든 이야기를 한꺼번에 들은 것 같아서 배가 부르다. 게으름과 닮은 느림이 어쩌면 행복을 더 가깝게 부르는 손짓일지도. 천천히 가도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 없다. 자기 속도대로,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

 

"계속 끄적거리세요! 뭔가가 일어날 겁니다. (Keep scribbling! Something will happen.)" (20페이지, 늦게 꽃핀 대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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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내가 죽은 집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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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어릴 적의 몇 년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삶이 불편할 것 같지는 않다. 일상이 힘들 것 같지도 않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싶은 기억의 단편이 순간순간 지나가더라도, 그냥 그렇겠거니 할 것 같다. 지금도 흔하게 내 머릿속을 점령하는 건망증 정도로 여기게 될 테니까.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보니, 누군가에게는 그 잃어버린 기억이 언젠가 한번은 정리해야 할 일생의 한 부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앞으로의 삶을 온전히 이어갈 수 없을 것처럼 간절한 뭔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은가. 남들이 볼 때는 별거 아닌 것 같아도, 뭐 그런 것을 그렇게 신경을 쓰느냐고 핀잔을 주더라도, 나는 꼭 그걸 확인해야만 속이 시원해질 것 같은 거. 어쩌면 나에게도 그런 순간 한번쯤 오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화자인 '나'에게 헤어진 여자 친구 사야카의 전화가 걸려온다. 그녀와 헤어진 지 7년이나 되었고, 그녀는 이미 아이와 남편이 있는 유부녀다. 그러니 갑작스러운 그녀의 연락에 놀랄 수밖에. '혹시 내가 그리워진 건 아닐까' 하는 설렘도 잠깐 떠올리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녀의 용건은 의외였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낡은 지도 한 장과 열쇠 하나로 어떤 곳을 같이 찾아가주었으면 한다고. 그 지도와 열쇠에 자기의 잃어버린 기억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면서.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옛 여자 친구와 이 여정을 함께해도 되는지 고민하면서 거절하고 싶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이끌림에 그녀의 탐험에 동참한다. 그렇게 찾아 나선 길에서 도착한 곳은 전기도 수도도 연결되지 않은 집 한 채였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흔적. 이십 몇 년 전에 멈춰있는 실내의 구조와 분위기. 한때 아이와 부모가 살았을 것 같은 집이었다. 사야카의 아버지는 왜 이런 곳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을까? 이곳에 드나들면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여기에서 그녀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을 수 있을까?

 

헤어진 후에야 연인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는다. 초등학교 입학 전의 기억이 없다는 그녀의 말을 처음 듣는 '나'는 만나는 동안 그녀와 무슨 관계를 쌓아가고 있었을까. 오랫동안 방치된 이 집을 탐험하면서, 둘이서 하룻밤을 새우면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지나간 세월에 얹어진, 차마 말하지 못한 서로의 진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한 목적으로 향한 발걸음이지만, 막상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그 기억과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타인의 삶의 흔적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의 교과서, 쓰다가 만 일기, 열리지 않는 작은 금고, 옷장에 걸린 오래된 양복, 뜨다가 만 뜨개실이 굴러다니는, 냉장고에는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들, 거실의 먼지 쌓인 피아노... 오래된 열쇠를 열고 들어간 집에서 마주한 작은 흔적들과 단서들은 생각이 날듯말듯하면서 독자의 애를 태운다. 단서가 하나씩 열리는 것 같은데 도무지 그녀와 연관 지어 생각할 수가 없다.

 

소설의 중반 이후로 분위기는 조금씩 전환된다. 그저 탐험하듯, 그려내듯 그 집의 구석구석을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보였던 두 사람의 시선이 하나씩 퍼즐을 맞춘다. 그 집에 살던 소년의 일기장에 등장하는 인물과 이야기들, 집안의 구석구석에 조금씩 흔적을 남겨놓은 단서들, 11시 10분에 맞춰진 집안의 시계들이 말하는 그날의 사건과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들이 서서히 맞춰진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사라진 유년 시절의 기억, 그것도 초등학교 입학 전의 몇 년이 얼마나 중요할까 싶었다. 그녀가 제안한 그 기억 찾기의 여정에 굳이 참여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오래된 그 집에서 찾아 헤매던 것들이 하나의 완전체가 되어 그려졌을 때의 충격은 예상보다 컸다. 설마 이런 일이 있었을까 싶은,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을까 하는 아쉬움, 어쩌면 그 시간에 공존하던 인물들의 선택이 최선이었을 거라는 이해가 따라왔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는 그녀의 아버지가 유품처럼 남겨놓은 지도와 열쇠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그렇게라도 그녀에게 진실을 전달해야만 하는 간절한 마음이었으리라. 평생 간직해야만 했던 비밀이었겠지만, 죽어서까지 가져갈 수는 없었을 거라는 위로를 건네게 된다.

 

상상하지 못했던 기억의 순간과 마주하는 일은 무섭고 놀라웠지만, 기어코 만나야만 하는 순간을 목격한 것 같다. 현재의 삶이 잘못되고 어긋났다고 믿는 그녀가 나아지기 위해 한번은 마주쳐야 할 진실의 장면이 아니었을까. 결핍을 인정하면서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몰라서, 머뭇거리면서 판단하지 못하는 문제를 앞에 두고 그녀가 나아갈 방향을 만들어주는 시간이었다. 주인공 '나'에게도 타인에게 꺼내놓지 못한 기억의 치유의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왔지만, 어쩌면 저마다 가진 상처는 비슷할지 모른다. 그때는 그때의 방식이 옳다고 믿었지만, 지금은 그 방법이 옳았다는 확신을 못하는 일들. 그렇다고 묻어두기만 하기에는 현재의 삶에 자꾸 주저하게 되는 어떤 감정이 생기기도 하는 순간들을 불러와서 토닥이는 느낌이다. 이렇게 한발 나아가는 기억 찾기라면, 누구라도 한번쯤 마주하고 싶은 시간일 것 같다.

 

빛이 바랜 회색집으로의 초대는 사건도 범인도 찾을 필요가 없는, 닫힌 시간 속의 이야기로 퍼즐을 완성해나간다. 한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꿰어 맞춰진다. 과거를 찾은 현재가 미래를 맞춰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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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방문자들 - 테마소설 페미니즘 다산책방 테마소설
장류진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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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소설은 이제 하나의 장르가 됐다. 그만큼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는 것이기도 하다. 『현남오빠에게』의 후속작으로 기획된 이 책이 조금 더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마도 시간은 흘렀지만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여성의 목소리, 오히려 더 크게 이야기해야만 하는 또 다른 이야기라 들려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루밍 성폭력, 교사의 성추행, 더 은밀하게 진행되는 성매매 현장들. 드러나는 사건들도 많고 그렇기에 갈수록 이런 이야기들이 덜 들려와야 맞는 것 같은데, 사실 매체에서 들려오는 이야기가 더 줄어들었다는 건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더 다양해졌다면 모를까. 너무 자주 들어서 익숙해졌다는 게 슬플 뿐이다.

 

「새벽의 방문자들」의 '나'는 포털 사이트에서 음란성 댓글 블라인드 처리 업무를 한다. 음란성 글로 홍보를 하거나 검색하는 이들의 지능은 점점 발달하고, 화자의 업무는 더 복잡하고 다양해진다. 화자는 애인과 헤어지고 낡은 오피스텔로 이사를 했는데, 어느 날 새벽부터 초인종 벨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수상한 남자들이 벨을 한참 누르다가 돌아간다. 왜 그들은 그 시간에 남의 집 벨을 누르는 걸까? 화자는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성매매 현장의 방식을 본다. 낯설지만 또 익숙한 그들의 모습에 공포를 인다. 현관문 렌즈에 눈을 들이대면 보이는 상대방의 눈썹이 마치 나를 공격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게, 그동안 혼자 사는 여성은 일상의 모든 순간에 얼마나 많은 공포를 안고 살아와야 했을까 생각해본다.

 

소설로 써졌지만 소설로 머물 수 없는 여섯 편의 이야기는 어느 순간 우리 삶에 깊이 박힌 참고서가 된다. 이런 일이 생겼을 때는 이렇게, 저런 일이 생겼을 때는 저렇게 해도 괜찮겠다는 매뉴얼처럼 들린다. 성을 사기 위해 새벽의 방문자들이 초인종을 누를 때 그들의 얼굴을 찍어 전시(?)해 놓은 주인공을 보면서, 혹시 언젠가 저 사진들이 무기가 되지 않을까 싶은 엉뚱한 상상도 했다. 더는 그들이 초인종을 누르지 않도록 현관 문 앞에 저 사진들을 붙여놓으면 어떨까? 혹시나 성을 사러 온 다른 이들이 초인종을 누르지도 못하고 식겁한 가슴을 부여잡고 돌아가지는 않을까? 그러다가도 이어지는 또 다른 생각들. 아니다. 이렇게 하면 나는 남의 얼굴을 마음대로 찍어서 붙여놨다는 이유로 법의 처벌을 받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한다. 아, 어떤 식으로든 새벽의 벨소리 공포에서 벗어나는 완전한 방법은 없는 거였구나. 주인공이 마지막에 선택한 것은 이사였다. 더는 그 공포에서 시달리지 않도록 그 공간을 벗어나는 일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는 게 절망적이다.

 

이어지는 이야기들도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베이비 그루피」의 화자는 예술고등학교에서 연기를 전공하는 학생이다. 라이브클럽에서 만난 P와 연애 아닌 연애를 하게 되면서 첫 경험을 한다. 마치 예술 세계를 공감하는 선배처럼, 자기 음악에서 뿜어대는 열기가 그녀를 향한 마음인 것처럼 포장되어 들려올 때 그녀에게 다가오는 그의 스킨십은 점점 진해진다. 어른의 연애는 이런 것일까 느끼던 사이 그녀는 그와의 관계를 명확하게 설정하지도 못한 채로 성경험을 한다. 시간이 흐르고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봐도 좋지 않다. 그건 사랑도 아니고 선배와의 관계도 아니다. 그루밍 성폭력의 은근한 전개가 바로 이런 게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예의 바른 악당」 역시 비슷한 느낌이다. 지나와 보라는 함께 일하고 함께 사는 사이다. 보라의 애인은 지나와 보내는 시간이 더 많다. 일을 하면서 여러 가지로 엮여 있다 보니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 보라를 애인으로 생각하고 존중했다면 그녀의 애인은 지나와 함께하는 시간을 만들지 말거나 줄여야 했다. 지나 역시 보라를 친구로 여기며 동거인으로 존중했다면 친구 역할만 충실해 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들이 추구했던 정치의 올바름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잊게 하는 거였나 보다.

 

「룰루와 랄라」는, 생계를 위해 취직한 곳에서 만난 나이 어린 남자 상사의 무례함은 주인공을 참지 못하게 한다. 더는 머물 곳이 아니라는 생각에 뛰쳐나온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서 만난 한 여인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누군가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어쩌면 일상의 한 부분처럼 누구나에게 새겨질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 타인의 아픔을 공감한다는 것은 어쩌면 작은 눈빛과 이야기 몇 마디에서 시작되는 연대일지도 모르겠다. 「유미의 기분」은 서로 다른 입장이지만 결국은 서로 닮은 입장이 되고야 마는, 여고생과 성소수자 선생의 이야기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남자 선생은 여자를 비하하는 말을 여고생 앞에서 한다. 그에 반기를 든 유미의 말에 당황하지만, 사실 선생은 자기의 말 어디가 잘못된 부분인지 잘 알지 못한다. 선생들의 성추행을 고발하기 시작한 유미의 시도는 결국 학교 안에서 해결하고 덮어야 할 문제로 치부된다.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날 수 있는 일, 하지만 아무도 모르게 덮이기 쉬운 일이 바로 학교 안에서의 일이 아닐까 싶다. 어른들의 방식으로, 각자가 취한 자리의 이기심으로 드러내지 않는 게 좋은 해결이 되어버린 문제들. 혹시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뀐다면 닫힌 교문이 활짝 열리고 모든 것이 드러날 수 있을까?

 

가장 화가 나고 황당했던 건 「누구세요?」다. 오랜 연애과정에서 남자와 여자는 데이트 통장을 만든다. 같이 돈을 넣고 그 돈으로 데이트비용을 결제한다. 같이 할 미래의 시작으로 데이트 통장이 나쁘지는 않다. 다만, 두 사람이 미래를 함께할 수 없을 때 발생하는 찜찜한 처리 과정이 걸린다. 상사의 성추행에 반기를 들고 회사를 그만두게 된 여자에게 남자는 화를 낸다. 먹고 사는 일인데 그 정도도 못 참느냐, 어디 가서 다시 취직을 하겠느냐, 직장이 장난인 줄 아느냐 등등. 여자는 자기의 고통을 남자가 이해해주기 바랐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느냐고, 견디느라 애썼다고... 하지만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이해하기는커녕 자기 인생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면서 화를 낸다. 그리고 두 사람은 헤어진다. 그때야 여자는 데이트 통장이 생각난다. 남자보다 더 많이 저축한 그녀다. 하지만 데이트 통장은 남자의 명의였고, 남자가 관리하면서 이용했다. 남은 돈의 자기 몫을 되돌려달라는 여자의 말에 남자는 오히려 위자료 운운한다. 하아. 전 남친에게 돈도 털리고 멘탈까지 털리는 경험, 누구 해 본 사람 있지?

 

장류진 작가의 작가 노트에 있던 마지막 문장이 강렬하다.

“응, 이거 네 얘기야.

이 글을 읽고 있는 너, 바로 당신” (43페이지)

언젠가, 누군가. 이 이야기를 읽고 혹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면, 이건 당신의 이야기다. 당신의 손짓 발짓 말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여섯 편의 이야기 속에서 마주한 감정은 '낯설지 않다'는 거다. 어디선가 들어봤고, 언젠가 겪어봤던 이야기들에, 주변에서 본 적 있는 이 이야기들의 가해자와 피해자들에, 언제나 불분명하게 정리되었던 결말들에 정신이 피폐해지는 순간들. 누가 책임져야 하지? 누가 사과를 해야 하는 거지? 또렷하게 구분할 수 없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립에 애매해져서 흐지부지 소멸되고야 말았던 일들. 물리적으로는 소멸되었을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죽을 때까지 머물러 있을 일들이 이 안에 있다. 그런 일들이 문장이 되어 우리 곁에 다시 머물고 되새김 된다. 굳이 잊을 필요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침묵할 수 없어서 꺼내놓아야 하는 순간이 맞이하는 일이다.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제기되는 문제들이 단순이 여성과 남성의 구분에 의해 생기는 건 아니라는 것을 이 소설집을 통해 듣는다. 연애나 결혼은 물론이고 또 다른 개념들이 삶의 과정을 채우면서 보이는 인간의 존중과 윤리 같은 것을 말하고 있음을 인지하게 된다. 침묵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삶의 기본이 되는 조건들을 지키기 위해, 이제는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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