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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털 도둑 - 아름다움과 집착, 그리고 세기의 자연사 도둑
커크 월리스 존슨 지음, 박선영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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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 한정’이라는 말에 혹해서 망설이던 책을 주저하지 않고 책을 산 적이 있다. 초판에 한정하여 양장, 저자 사인본 같은 이유로 예약판매 버튼을 누르고야 마는 일. (가장 최근에 산 초판 한정 책은 뭐였더라...) 아니면 리커버 출간본이거나. 지금 당장 읽고 싶어서가 아니라, 출간을 기다렸던 책이 아니라, 그저 나중에 사는 사람과 다른 책을 받는다는 이유로 말이다. 이것도 책을 향한 욕망이라면 욕망일까. 그럼 인간의 욕망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정확히 알 수 없다. 말할 수 있는 건, 지금 인간의 욕망은 언제 어디서든 나타나며, 채우고 만족해하는 삶의 일부분이라는 거다. 그저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게 하고 급기야 나의 것이 되어야만 만족에 이르는 것. 하지만 이런 욕망은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이뤄져야 할 것임에도, 어느 순간 그 선을 넘어 범죄가 되기도 한다. 이 책은 개인의 욕망이 지켜야 할 그 선을 넘어 범죄자가 되어버린 깃털 도둑에 관한 이야기다.

 

에드윈 리스트는 플루티스트다. 어렸을 적 배운 플라이 타잉에 흠뻑 빠져들어, 어느 순간 그 세계에서 압도적인 재능을 발휘한 청년이 되었다. 세계 여러 곳에서 행해지는 플라이 타잉 행사에도 참여하면서, 온라인상에서 그가 배운 그대로 플라이 타잉 비법을 전수하기도 하는, 어리지만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재능을 흠뻑 뽐낼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취미든 돈이 들게 마련이다. 플라이 타잉에 필요한 건 여러 가지였지만, 그중에서도 깃털은 모든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통은 염색하거나 깃털 비슷한 재료로 장식해도 좋을 테지만, 마니아층 사이에서 플라이 타잉의 매력은 진짜 깃털 그것도 ‘아름다운 깃털’로 만든 것이어야만 했다. 희귀한 새의 깃털이나 19세기 깃털 모자의 유행으로 사용되었던 깃털 같은 거 말이다. 에드윈은 음악에 필요한 플루트도 좋은 것을 마련하고 싶었지만, 플라이 타잉에 최고점을 찍기 위해 아름다운 새의 깃털에 욕망을 버리지 못했다. 2009년 영국의 트링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된 새 가죽을 훔쳤다.

 

 

 

처음에 박물관은 도난 사실을 몰랐다. 500여일이 지나서야 도난 사실을 알고 수사를 의뢰했으나 범인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수사가 길어지는 동안 에드윈은 자기의 범죄를 들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점점 사라졌다. 훔쳐 온 새의 가죽과 깃털을 온라인 커뮤니티에 팔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왕립음악원에 다니고, 플루트를 연주하고, 플라이 타잉에 빠져 지냈다. 여기까지만 보면 에드윈이 저지른 일은 완전범죄가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책으로 들려오는 이야기와 세상에 알려진 것을 보면 그의 완전범죄는 실패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에드윈이 희귀한 새의 깃털을 신나게 팔아댈 때 그에게 깃털을 사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깃털의 출처를 의심하는 이도 있었던 것. 그렇게 단서를 잡은 경찰은 에드윈을 찾아갔고 그도 순순히 자백했다. 남은 것은 그의 범죄를 낱낱이 밝히는 일과 그에 맞는 처벌을 내리는 것인데...

 

 

원래 플라이 타잉은 강에서 송어를 잡기 위해 인조 미끼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플라이 타잉을 무슨 예술 작품처럼 만들기 시작했다. 더 아름답게, 더 멋지게 만들어 자기만의 플라이 타잉을 구축하는 것.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게 새의 깃털을 사용하게 되는 건데, 보통은 일반적인 새의 깃털에 아름다운 색으로 염색해서 사용해도 되는 일이다. 하지만 인공적으로 만든 아름다움이 처음부터 아름답게 만들어진 것과 같을 수 있었겠는가. 아니면 이 분야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속설이나 가진 자의 우월감을 뽐내려고 희귀한 새의 깃털을 소장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시작된 구하기 힘든 새의 깃털을 사용하는 방식이 이들의 갈증을 심하게 만들었고, 고가로 거래되는 깃털을 구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급기야 박물관에 전시된 새를 훔치게까지 한 것이다.

 

 

 

혹시 누구나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저 박물관의 저 새들을 가져올 방법이 없을까? 아무도 없을 때 그냥 훔쳐 올까? 아니야, 불가능할 거야... 상상으로만 멈춘 일을 에드윈이 해낸 것일 뿐, 그래서 박물관의 전시품을 훔친 에드윈을 욕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에드윈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이 마음은 나중에 수사 과정이나 저자가 인터뷰를 시도하려고 했을 때 보이던 커뮤니티 회원들의 태도만 봐도 알 수 있다. ‘멸종되어 더는 알아야 할 가치가 없는 새들, 더는 연구할 게 없어진 대상을 좀 가져갔다는데 그게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라고 생각하는 이들의 말에 놀랄 수밖에 없다. 박물관에 전시된 것들이 단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무언가를 연구하는데 당장의 성과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라져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플라이 낚시는 수온, 유속, 날씨, 물고기의 활동성, 플라이의 정확도, 깔끔한 캐스팅이 전부였다. (351페이지)

도대체가 궁금하다. 송어 낚시를 하는데 새의 화려한 깃털이 왜 필요한가? 희귀한 새의 깃털은 송어 낚시에 필요한 도구가 아니다. 아무래도 이 분야에 심취한 이들의 은근한 경쟁 심리 같은 게 작용해서 시작된 대결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 흡사 요즘에도 어느 덕후들의 세계에서 보는 일반적인 모습 같다. 희귀템을 먼저 손에 넣어야 하고, 이런 희귀템은 중고시장에서도 상당히 고가로 거래가 되며, 마침내 그런 제품들이 내 손에 들어왔을 때 채워지는 이 충만감이란! 덕질은 개인의 취향이지만, 그 개인의 취향에 인류 역사의 연구를 위해 존재해야 할 것들이 훼손되어서는 안 되는 거 아니겠나.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때로 자기 이외의 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에드윈의 이런 기이한 행동도 인간이 내재한 욕망을 거스르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기에, 여러 방면의 학자들과 박물관은 그들의 집착과 욕망에 맞서 싸워야 했다.

 

 

에르메스 가방과 크리스찬 루부탱 구두가 나오기 전까지 신분을 표현하는 최고의 수단은 죽은 새였다. 더 이국적이고 더 비쌀수록 더 높은 신분을 상징했다. 동물과 인간 사이에 특이한 공통점이 있다면 아마 새의 깃털일 것이다. 수컷 새는 암컷 새의 눈길을 끌기 위해 자신의 깃털을 더 아름답고 화려하게 만들어왔지만, 인간 세계에서는 그 깃털을 이용해 여성이 남성을 유혹하고, 사회적 신분을 과시했기 때문이다. 새들은 수백만 년 동안 자기들끼리만 지내면서 너무 아름답게 변해버렸다. (70페이지)

 

깃털을 처음 장식으로 이용한 건 19세기였다고 한다. 19세기의 거의 마지막 30년 동안 수억 마리의 새가 인간에 의해 살해당했다. 오늘날의 명품을 만나기 전까지, 사람들은 신분을 표현하는 최고 수단으로 새의 아름다운 깃털을 선택했다. 깃털은 희귀하고 비싸게 거래될수록 높은 신분을 상징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왜가리 깃털을 올림머리에 꽂아 넣은 후, 100년이 지나지 않아 새의 깃털은 전 세계 여성의 모자를 장식하는 패션 아이템이 되었다. 당연하게도 모자 산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했음은 물론이다. 이런 현상을 두고 볼 수 없던 이들은 깃털 사용을 막으려고 했고, 깃털 관련 업체들은 경제 위기를 들먹이며 반대했다. 법으로 막을수록, 지하에서 거래되는 깃털은 더 귀한 게 되었고 부르는 게 값이 되었을 테지. 가벼운 깃털 하나에 묵직한 인간의 역사가 빼곡하게 담긴 것도 모르고 말이다. 보존해야 할 것들로 찾아낼 수 있는, 지구와 우주의 역사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이들의 욕망은 집어넣어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범죄 실화라고 알고 있어서 그런지 이 이야기를 서술하는 저자의 능력인지 모르겠지만, 그 어떤 추리소설보다 더한 가독성이 있다. 절도와 범인, 범인을 추적하는 이의 구도를 넘어서서 범죄의 시작을 우리 역사의 한 부분에서 찾기도 하는 내용이 너무 흥미롭다. 그 바탕에는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금지되는 것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있었다. 당신에게도 수없이 나타날 수 있는 욕망, 그 욕망이 춤을 출 때마다 인류 역사의 귀한 자료들은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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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2-06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이런 책이었어요? 저는 깃털 도둑이라고 해서 은유적으로 말한 미스테리 소설일거라고 생각했어요. 와..

구단씨 2019-12-07 15:41   좋아요 0 | URL
네. 그렇답니다. ㅡ.ㅡ;;
실화라는 게 더 놀랍더라고요.

반유행열반인 2019-12-06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팔할 쯤 읽고나서야 아 논픽션이네 했어요 ㅎㅎ그만큼 재미있고 유익하더라구요.

구단씨 2019-12-07 15:41   좋아요 1 | URL
ㅋㅋㅋ
저도 위의 다락방님처럼 소설일 줄 알았어요.
한참 읽다가 보면, 진짜 놀랍기만 하더라고요.
 
방랑자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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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귀퉁이에서 바라보는 것. 그건 세상을 그저 파편으로 본다는 뜻이다. 거기에 다른 세상은 없다. (280페이지)

 

이성을 만나면서 가장 좋을 때는, 그 사람을 만나면서 성장하는 자신을 바라볼 때다. 내가 알지 못했던 내 모습까지 꺼내 어제보다 조금 더 괜찮은 나로 살아가게 하는 상대를 보는 일은 설렌다. 호르몬의 작용으로 일으키는 연애를 넘어선 일이면서도, 내 인생을 발전하게 하는 게 바로 이런 거 아닐까? 여행도 그렇다. 내가 모르던 세상을 마주하고, 물리적인 이동이든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든, 지금의 내 모습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변화하고 나아가게 한다. 그 움직임 끝에서 마주하는 나는 분명 어제와는 다른 ‘나’일 것이다. 겉모습은 같지만, 내면에는 좀 더 풍성하게 채워지는 나. 하지만 이런 수확을 얻으려면 한 가지 조건이 붙는다. 떠나야 한다. 내가 직접 움직이고 느껴야 내 것이 된다.

 

직접 부딪혀야만 얻는 것들을 생각하면 부담스러운데, 작가가 들려주는 방랑의 시간은 너무 자유로웠다. 형식에 얽매이거나 강요하지도 않았다. 시선과 마음의 움직임까지 여행이라 말하면서, 그 길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많은 사람과 장소, 상황들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곳을 떠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던 그곳의 일들을 보여주면서도, 나와 다르지 않은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내가 알지 못했던 세상의 한 조각을 확인하는 것 같은 여행이었다가도, 누구에게나 비슷하게 쌓여가는 시간의 모습이었다. 떠나고, 직접 보면서 알게 되는 세상의 많은 단면에 삶의 경험치가 하나 더 채워지고 있었다.

 

100편이 넘는 짧은 이야기 속에서 화자들은 방랑했다. 그들을 따라간 이야기에서 어쩌면 작가 본인이 느낀 여행에 대한 단상까지 포착한다. ‘기차와 호텔, 대기실이나 비행기의 접이식 테이블에서 글 쓰는 법을 익혔다’는 작가의 경험은, 소설 속 화자들이 머무는 곳에 반영한다. 공항에서 대기 중이거나 비행기를 타고 있거나, 지하철을 타고 이동 중이거나. 어딘가에 멈춰있지 않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생이란 여행이 끝나기라도 할 것처럼 계속 분주하다. 화자들을 왜 그렇게 그려야만 했을까 하는 궁금증은 금방 사라졌다. 작가는 하고 싶은 말을 이미 적나라하게 제목에서 꺼내놓지 않았던가. 머물지 않고 방랑하는 이들이야말로, 세상을 조각이 아닌 전체를 맞춰가면서 보고 있는 거라고 이 소설 속 이야기 전체에 뿌려놓았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이 바라보는 세상은 우리와 다를 것 없는 또 다른 하루였다. 그곳에서 온갖 일들이 소소하게 펼쳐지고, 때로는 무거운 이야기로 가슴에 한참 동안 머물기도 한다. 왜 그랬을까 생각하면서, 어쩌면 그 답을 찾아가는 새로운 여행 계획이라도 세워야 할 것처럼 생각을 멈추기도 했다. 그 모든 순간이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하나씩 발견하는 재미와 만족을 주면서, 그 길에서 부딪힌 어떤 경험으로 또 하나의 지식이 내 머릿속으로 들어와 채워지는 뿌듯함까지 느끼게 한다.

 

읽기 전에는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부담스러웠다. 여행이라는 단어가 주는 설렘보다 떠나기 전까지의 무거움이 먼저 떠오를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방랑의 의미를 세상에서 낙오되고 섞이지 못하는 이들의 모습으로 판단하곤 했던 선입견도 불러왔다. 하지만 이 소설로 만난 많은 이의 여행과 방랑은 낙오된 자의 하루가 아니었다. 세상과 섞이지 못한 자의 부유도 아니었다. 삶을 채워가는 과정이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배우는 하나의 모습이었을 뿐이다. 우리에게 여행은 그런 것일 뿐이었다. 직접 움직이고 부딪혀서 내 것으로 채워지는, 나의 삶을 나 스스로 끌어가게 하는 방법이자 수단이자 세상 속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열정이었다. 우리가 삶을 채우고자 매일 걷는 발걸음이 이런 자유로움이라면 얼마든지 걷겠다. 움직이겠다.

 

보는 것이 아는 것이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순례객 모두가 가장 열광한 대상은 횡단면으로 자른 표본들이었다.

그렇게 여러 조각으로 잘린 한 인간의 몸이 지금 눈앞에 놓여 있다. 덕분에 우리는 인체에 대해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597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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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19-12-01 0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고 싶게 만든 글이네요. 더불어 어디로 움직여 가야 할 것도 같은...좋은 글 감사합니다.

구단씨 2019-12-06 12:36   좋아요 1 | URL
짧은 글에 강렬한 뭔가가 있어요. 작가가 중간중간 드러내는 속마음이 문장에 그대로 실린 듯해요.
 

펭수... 난리났네...

예약판매 어마어마하다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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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해 기억해 모중석 스릴러 클럽 48
섀넌 커크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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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괴나 납치가 소재인 기존의 추리소설을 떠올려보면, 보통은 납치된 아이를 찾는 형사나 부모의 시선을 중심으로 써진 소설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의 몸부림, 절대 물러설 수 없는 모성의 최대치, 유괴 사건 해결을 위해 등장한 형사나 전문가들. 이들이 나서면 곧 범인을 추적하게 되고, 중간에 유괴 이유가 서서히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결말에 이르곤 했다. 섀넌 커크의 소설 『복수해 기억해』는 열여섯 소녀 리사가 납치되면서 시작되는데, 납치 이후의 전개가 제법 특이하다. 납치된 소녀의 두려움이나 약함이 아니라, 납치된 소녀의 복수극이라는 게 매력적인 소설이다.

 

리사 일랜드는 열여섯 살이다. 그리고 임신했다. 유명한 변호사인 엄마와 과학자인 아빠는 리사의 임신을 나중에 알았다.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부모님과 함께 병원에 다녀오던 날, 리사는 병원의 데스크에 있던 직원의 눈빛과 행동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얼마 후 리사는 배가 부른 상태로 납치된다. 누가 납치했는지, 왜 그랬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로 두 손과 발이 묶인 채로, 눈이 가려진 채로 차에 실렸다. 어딘가에 있는 건물에 도착하고, 어떤 방에 감금되었다. 방문은 밖에서 잠겼고, 리사가 간수라고 불리는 이가 하루 세 번 식사를 가져올 때만 잠깐 문이 열렸다. 리사는 간수가 올 때만 그 문을 열고 나가 화장실을 사용했고 물을 마셨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의 외출(?)인 셈이다. 그 시간 외에는 방에 갇혀 하루를 보냈다. 임신 때문에 무거워진 몸으로 감히 탈출을 시도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버텼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냥 평범한 납치로 보인다. 알 수 없는 공간에 감금하고, 뭔가 때를 기다리는 느낌. 하지만 소설은 처음 전개부터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더니, 점점 리사의 시선과 의도로 흘러간다. 천재적인 두뇌의 소녀 리사.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유명했다. 머릿속 감정의 스위치를 껐다가 켰다가, 그녀의 의도대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 사랑이나 연민의 감정을 차단하고 싶으면 그렇게 했고, 공감과 이해를 불러오고 싶으면 그렇게 했다. 언제 어디서든 그녀는 자기의 감정 조절을 완벽하게 해냈고, 모든 계산이 정확하고 이성적이다. 납치된 후에도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공포에 떨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기 위치를 가늠하면서 감금된 곳의 분위기를 파악했다. 계단을 세 줄 올라왔으니 3층일 것이고, 도로에서 건물까지의 거리를 기억했다. 간수가 식사를 가져오는 시간과 발소리, 간수가 방으로 들어와 서 있는 위치와 머무는 시간까지 정확하게 알아냈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리사는 모든 것을 계산하고 계획했으며, 그녀가 그 방에서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번호를 부여하고 그녀의 탈출과 복수 계획을 완벽하게 준비했다.

 

감금 생활을 하면서 나는 한 가지 재능을 갈고 닦았다. 그 재능이 신의 섭리로 주어진 것인지, 엄마의 강철 같은 세계 안에서 살면서 체득한 것인지, 아빠의 호신술 교육으로 얻은 것인지, 아니면 내 신체 조건에서 비롯된 본능인지는 몰라도, 그건 전쟁터에서 위용을 떨치는 장군들의 자질과 유사했다. 쉽게 흔들리지 않고, 만족하지 않고, 계산에 능하고, 복수심을 품고, 차분하게 행동할 줄 아는 재능. (19페이지)

 

소설은 납치된 아이를 찾기 위해 투입된 FBI 요원 리우와 납치된 소녀 리사의 시선이 교차로 진행된다. 리사가 탈출보다 복수를 위해 세우는 계획의 놀라움과 리우의 추적과정이 계속되면서, 어느 순간 이 소설의 결말에 다다르면 어떻게 될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특이하지 않은가. 납치된 소녀가 목숨의 위협을 느껴도 모자랄 판에, 이대로는 억울해서 안 되겠다, 반드시 복수하고 탈출하겠다는 계획에 전념하는 모습. 상상이 되는가? 아마 리사여서 가능했을 것이다. 간혹 소시오패스라고 불릴 정도로 감정 조절에 탁월한 재능을 지닌 아이, 그러니 적재적소에 자기가 가진 재능을 발휘하면서 아버지에게 배운 과학의 응용은 이 납치의 탈출극에 특화된 주인공이 아니었을까 싶다. 한마디로, 이 납치범들은 똥 밟았다는 거다. 건드려서는 안 되는 아이를 건드려놓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납치된 인질의 끝내주는 복수극에 소설은 시종일관 활기차다. 게다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소녀의 앞뒤 볼 것 없는 복수를 보다가도, 점점 만삭이 되어가는 몸을 보면서 이 소녀가 엄마가 되어가는 감정을 엿본다. 그러니까 그전까지는 언제나 자기 의도대로 감정을 조절하며 자기 일상을 지휘하던 소녀가 배 속의 아이가 생기자 그녀의 감정 조절이 가끔 실패하거나 의도하지 않은 감정에 당황하게 된다. '이게 뭐지?' 싶은 의문. 하지만 그런 감동도 잠시. 리사는 독자에게 처음부터 보여주었던 그 냉정함과 완벽함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끌고 간다. 그리고 마침내 범인들에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를 선사한다. 그 복수극에 조금이나마 지분을 보탠 FBI 수사관 리우와의 조합은 어쩌면 이 소설의 후속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남긴다. 리사와 리우 콤비가 마지막에 납치범에게 보여주었던 모습은 통쾌하다 못해 복수의 정석을 세운 듯하다. 복수는 이렇게 하는 것이야. 나쁜 놈들을 죽이는 게 끝이 아니야. 그들이 죽는 게 벌이 아니야. 끔찍하고 끈질기게 괴롭혀 주는 거야.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야.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되나?

 

리사의 감정 스위치 조절은 특이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리사의 그런 특징은 그녀의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전자와 후천적인 교육과 노력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싶다. 맡은 변호는 거의 다 이기는 승률 좋은 변호사인 엄마와 과학적인 두뇌를 계속 발전시키는 아빠의 존재가 그녀의 성장 과정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타고난 냉정함이 바탕이 되고, 거기에 변호사 엄마가 가진 이성과 단호함, 과학의 원리를 이용한 온갖 도구의 활용이 가능하게 했던 아빠. 이 정도면 완벽한 가족 아니던가.

 

나는 분노를 삼키며 하릴없이 배를 문질렀다. 그러다 문득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내 아기에게 위험이 닥쳐올 때마다 내 안에서 공포를 담당하는 스위치가 저절로 켜진다는 것. 임신하기 전에는 이런 문제로 애를 먹은 적이 없었다. 나는 계속 걸음을 옮기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나 자신이 더욱 선명하게 인식되었고, 반갑지 않은, 더 나아가 쓸모없는 감정인 공포를 억누르는 게 한결 쉽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흥미롭기도 했다. 심리학적으로도, 의학적으로도, 심지어는 철학적으로도 생각해볼 만한 문제였다. 아기가 느끼는 공포가 나에게 전이되는 건 아닐까. 나는 아기에게 생명을 주고 있지만, 아기는 나에게 과연 생명을 주고 있을까. (127~128페이지)

 

감정조절에 능숙한 소녀가 임신한 채로 납치되고, 알고 보니 납치범들은 리사처럼 임신한 소녀들을 납치하고 아이를 낳은 후 아이는 팔고 소녀들은 죽이는 이들이었다. 이야기의 구조나 짜임이 잘 어우러진 느낌은 이런 설정에서부터 시작된 듯하다. 자기의 감정 절제력이 뛰어나고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리사가, 이 납치극의 위험에서 자기 방식대로 탈출하고 범인들에게 복수하면서, 사소하고 묘하게 변화하는 감정을 그린다. 언제나 완벽하게 감정 스위치를 작동했던 그녀에게도 그 감정조절이 완벽해지지 않는 게 아이에 관해서다. 배 속에 아이가 있을 때도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면서도, 그 아이 앞에서만은 리사의 감정 조절 능력은 떨어진다. 그게 바로 엄마, 모성애가 가진 힘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 소설은 이런 감동만큼이나 추리소설의 매력도 절대 놓치지 않는다. 그것도 아주 특이한 설정으로 추리소설을 즐기는 독자의 눈을 즐겁게 만든다. 납치 스릴러의 공식을 깨버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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