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자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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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귀퉁이에서 바라보는 것. 그건 세상을 그저 파편으로 본다는 뜻이다. 거기에 다른 세상은 없다. (280페이지)

 

이성을 만나면서 가장 좋을 때는, 그 사람을 만나면서 성장하는 자신을 바라볼 때다. 내가 알지 못했던 내 모습까지 꺼내 어제보다 조금 더 괜찮은 나로 살아가게 하는 상대를 보는 일은 설렌다. 호르몬의 작용으로 일으키는 연애를 넘어선 일이면서도, 내 인생을 발전하게 하는 게 바로 이런 거 아닐까? 여행도 그렇다. 내가 모르던 세상을 마주하고, 물리적인 이동이든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든, 지금의 내 모습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변화하고 나아가게 한다. 그 움직임 끝에서 마주하는 나는 분명 어제와는 다른 ‘나’일 것이다. 겉모습은 같지만, 내면에는 좀 더 풍성하게 채워지는 나. 하지만 이런 수확을 얻으려면 한 가지 조건이 붙는다. 떠나야 한다. 내가 직접 움직이고 느껴야 내 것이 된다.

 

직접 부딪혀야만 얻는 것들을 생각하면 부담스러운데, 작가가 들려주는 방랑의 시간은 너무 자유로웠다. 형식에 얽매이거나 강요하지도 않았다. 시선과 마음의 움직임까지 여행이라 말하면서, 그 길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많은 사람과 장소, 상황들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곳을 떠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던 그곳의 일들을 보여주면서도, 나와 다르지 않은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내가 알지 못했던 세상의 한 조각을 확인하는 것 같은 여행이었다가도, 누구에게나 비슷하게 쌓여가는 시간의 모습이었다. 떠나고, 직접 보면서 알게 되는 세상의 많은 단면에 삶의 경험치가 하나 더 채워지고 있었다.

 

100편이 넘는 짧은 이야기 속에서 화자들은 방랑했다. 그들을 따라간 이야기에서 어쩌면 작가 본인이 느낀 여행에 대한 단상까지 포착한다. ‘기차와 호텔, 대기실이나 비행기의 접이식 테이블에서 글 쓰는 법을 익혔다’는 작가의 경험은, 소설 속 화자들이 머무는 곳에 반영한다. 공항에서 대기 중이거나 비행기를 타고 있거나, 지하철을 타고 이동 중이거나. 어딘가에 멈춰있지 않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생이란 여행이 끝나기라도 할 것처럼 계속 분주하다. 화자들을 왜 그렇게 그려야만 했을까 하는 궁금증은 금방 사라졌다. 작가는 하고 싶은 말을 이미 적나라하게 제목에서 꺼내놓지 않았던가. 머물지 않고 방랑하는 이들이야말로, 세상을 조각이 아닌 전체를 맞춰가면서 보고 있는 거라고 이 소설 속 이야기 전체에 뿌려놓았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이 바라보는 세상은 우리와 다를 것 없는 또 다른 하루였다. 그곳에서 온갖 일들이 소소하게 펼쳐지고, 때로는 무거운 이야기로 가슴에 한참 동안 머물기도 한다. 왜 그랬을까 생각하면서, 어쩌면 그 답을 찾아가는 새로운 여행 계획이라도 세워야 할 것처럼 생각을 멈추기도 했다. 그 모든 순간이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하나씩 발견하는 재미와 만족을 주면서, 그 길에서 부딪힌 어떤 경험으로 또 하나의 지식이 내 머릿속으로 들어와 채워지는 뿌듯함까지 느끼게 한다.

 

읽기 전에는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부담스러웠다. 여행이라는 단어가 주는 설렘보다 떠나기 전까지의 무거움이 먼저 떠오를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방랑의 의미를 세상에서 낙오되고 섞이지 못하는 이들의 모습으로 판단하곤 했던 선입견도 불러왔다. 하지만 이 소설로 만난 많은 이의 여행과 방랑은 낙오된 자의 하루가 아니었다. 세상과 섞이지 못한 자의 부유도 아니었다. 삶을 채워가는 과정이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배우는 하나의 모습이었을 뿐이다. 우리에게 여행은 그런 것일 뿐이었다. 직접 움직이고 부딪혀서 내 것으로 채워지는, 나의 삶을 나 스스로 끌어가게 하는 방법이자 수단이자 세상 속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열정이었다. 우리가 삶을 채우고자 매일 걷는 발걸음이 이런 자유로움이라면 얼마든지 걷겠다. 움직이겠다.

 

보는 것이 아는 것이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순례객 모두가 가장 열광한 대상은 횡단면으로 자른 표본들이었다.

그렇게 여러 조각으로 잘린 한 인간의 몸이 지금 눈앞에 놓여 있다. 덕분에 우리는 인체에 대해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597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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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19-12-01 0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고 싶게 만든 글이네요. 더불어 어디로 움직여 가야 할 것도 같은...좋은 글 감사합니다.

구단씨 2019-12-06 12:36   좋아요 1 | URL
짧은 글에 강렬한 뭔가가 있어요. 작가가 중간중간 드러내는 속마음이 문장에 그대로 실린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