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 3
쓰루타니 가오리 지음, 현승희 옮김 / 북폴리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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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된 내 모습을 상상한 적이 있다. 아마 '이렇게 늙어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에 가까운 마음이었을 것이다. 주변의 어르신들과 내 부모의 나이 듦을 생각하면, 그런 바람들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늘어난다. 집 근처 노인복지회관에서도 여러 강좌를 개설하고 회원들은 열심히 참여하고 즐긴다. 신나는 음악 소리, 시원하게 북을 두드리는 소리, 기합을 넣어가며 체조하는 소리, 조용히 인문학 수업을 진행하는 소리. 시골인데도 다양하다면 다양한 수업으로 의외로 참여자가 많다는 걸 알았다. 엄마는 난타 수업을 받으러 가다가 지금은 다른 일 때문에 수업에 참여하지 못하지만, 일주일에 두 번, 가서 사람들 만나서 어울리고 뭔가 힘껏 두드리다가 오니 속이 시원해진다고 했다. 물론 박자 맞춰서 따라가려니 연습이 많이 필요해서 힘들다고는 하는데, 그마저도 즐거운 투정인 것 같다. 솔직히 아직은 그 안에서 내가 즐기고 싶은 강좌는 없다는 생각에, 문득 걱정이 앞선다. 내가 노인이 된 후에 즐길만한 것을 찾지 못한다면, 너무 외롭거나 심심하지 않을까? 괜한 우울함에 몸과 마음의 노화 속도가 빨라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벌써 심란해진다.

 

 

예상하지 못한 만화 한 편에서 그 시간을 미리 만났다. 등장하는 두 사람 역시 예상하지 못한 조합이었다. 이치노이 유키는 75세의 할머니다. 3년 전에 남편이 하늘나라로 먼저 떠나고 혼자 남았다. 서예 교실을 운영하면서 개구쟁이 아이들을 만나는 시간이 유일한 교류의 모습처럼 보인다. 거기에 요리가 취미인, 주변에서 평범하게 볼 수 있는 노인의 모습이다. 어느 날 서점에 갔다가 요리책 대신 눈에 들어온 한 권에 책에 푹 빠진다. 표지가 너무 예쁜 만화여서 덜컥 집어 들고 왔는데, 이런. BL(Boy's Love)만화였다. 예쁘다는 이유로 표지만 보고 아무런 정보 없이 들고 온 책이 이랬다. 어쩜 좋아. 그런데 이상하다. 읽을수록 빠져든다. 이 젊은 소년들의 사랑에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면서 다음 권이 궁금해서 그냥 있을 수가 없다. 바로 2권을 사러 갔다. 유키 할머니가 BL의 세계로 흡수되는 순간이다.

 

서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17세의 사야마 우라라. 소심한 성격에 주변에 친구도 없는, 그렇다고 왕따도 아닌데 사람들 사이에 잘 섞이지 못하는 아이. 아무도 모르지만 우라라는 BL 마니아다. 집안에서도 몰래 감춰두고 혼자만 읽는다. 누가 볼까 봐 신경 쓰여 책장에 꽂아두지도 않는다. 그런 우라라의 눈에 띈 유키 할머니는 단 한 번도 예상하지 못한 독자였을 것이다. 70대의 할머니가 BL 만화를 사러 온다? 재고 부족으로 할머니와 대화를 하던 중, 두 사람은 서점 밖의 만남이 시작된다. 마치 속마음을 들킨 것처럼, 58세의 나이 차는 저리 던져두고 빠져들어 버린 만화에 대해 열렬한 대화를 펼친다. 주변의 이상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사람만의 세계를 즐긴다. 만화 속 주인공의 사랑과 갈등, 속마음에 관해 이야기한다. 읽으면서 느낀 여러 가지 생각과 감정도 허심탄회하게 쏟아낸다. 십 대 여학생과 칠십 대 노인의 우정이 이렇게 싹튼다.

 

지금은 조금 소원해졌는데, 그런데도 꾸준히 로맨스 소설을 즐긴다. 처음 로맨스소설을 만났을 때와 같은 마음은 아니지만, 어느 날 갑자기 BL 만화에 빠진 유키 할머니처럼 나도 나이 들어도 책을 읽는 노인이 되고 싶었다. 엄마가 돋보기를 쓰고 성경을 읽으시는 것처럼, 내 눈이 허락하는 동안에 로맨스 소설을 즐기는 노년의 삶을 상상했었다. 그런 상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누군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서점의 서가에서 로맨스 소설을 꺼내 와서 계산대에 올려놓는 손님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언제나 상상에 머무르곤 했다. 밖에서 책을 읽을 때는 선뜻 로맨스소설을 꺼내놓지 못한다.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누가 볼까 신경이 쓰인다. 그러니까 나에게 로맨스소설은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에, 다른 사람은 모르게 나만 즐기는 책으로 머물러 있다. 그 나이에 무슨 로맨스 소설이냐고, 현실의 로맨스에 빠져야지 뭐하고 있느냐고, 현실과 로맨스 소설을 구분도 못 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그런 건 애들이나 보는 거 아니냐고 한마디씩 꺼낼까 봐. 내가 즐기는 장르의 소설을 하찮게 여길까 봐. 싫은 소리 듣는 게 싫어서.

 

하지만 누구나 각자가 빠져드는 거 하나쯤 있지 않나? 영화든 배우든 가수든, 피규어를 모으든지 밤낚시를 즐기든지. 그게 무엇이든 마음이 끌리는 자기만의 관심사가 있다. 좋아하는 드라마나 좋아하는 연예인이 있을 때, 온라인 속의 온갖 정보를 흡수하고 그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어진다. 드라마의 다음 전개,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의 사소한 것까지 궁금하다. 그래서 팬 카페에 가입하고 검색의 홍수 속에서 다양한 정보를 찾아다닌다. 유키 할머니가 처음 BL에 빠져들었을 때, 단순히 만화를 즐기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마음이 저절로 흐르고 있었던 거다. 이 마음을 누구랑 나누고 싶은데, 두 주인공의 갈등을 이야기하고 싶은데, 혹시 이런 마음은 아닐까 하는 토론도 하고 싶은데. 유키 할머니는 찾아보면 알 수 있는 그 방법을 몰랐다. 휴대폰의 문자도 돋보기를 쓰고 하나씩 쳐야 하는 할머니의 육체적 노화는 21세기의 젊음이 즐기는 방식에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우라라와 공통 관심사인 BL을 이야기할 때 삶의 활력소를 찾는다. 좋아하는 것을 읽는 즐거움을 확장한, 마음에 담아둔 것을 꺼내어놓는 것까지 알아간다. 어쩌면 그런 마음의 확장은 당연한 흐름인지도 모르는데, 나는 왜 그 확장의 방식에 나이라는 제한을 걸어두었을까. 이런 선입견과 편견을 가진 게 나뿐이었을까?

 

 

유키 할머니와 우라라.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지켜보게 되는 건, 늙음이 보여준 연륜과 경험, 따뜻한 조언 때문이다. BL을 즐기고 이벤트에 찾아다니기까지 하는 우라라를 보면서 유키 할머니는 조용히 읊조린다. 우라라도 그림을 그리면 좋겠다고. 그 말을 우라라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냥 세상 좀 더 오래 살아온 분이 어떤 아쉬움에 하는 얘기라고 생각했을까? 소심하고 외톨이인 우라라가 몰입하고 즐길 수 있을 것을 발견하고 그걸 발전시킴으로써 생길 인생의 변화를, 유키 할머니는 알고 있었을까? 아마도 우라라의 젊음이 해낼 수 있는 가능성과 시간의 힘을 믿었을 것이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면서 청춘을 겪어보는 일, 그러다가 보면 어느 순간 자기가 더 행복해지는 일을 발견하게 되는 기쁨을 알게 되고, 삶의 만족을 겸손하게 배우면서 또 남은 시간을 이어가는 인생의 법칙을 알고 있기 때문 아니었을까. 유키 할머니가 일상에서 유일하게 즐기던 요리 때문에, 요리책을 사러 갔다가 발견한 한 권의 책 때문에, 그 책 때문에 십 대 소녀와 친구가 되고 요즘 세상의 한 모습을 보게 되는 일 때문에, 인생의 또 다른 즐거움을 느끼면서 갈증 내는 자신을 보는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죽을 때까지 알아갈 세상의 즐거움을 유키 할머니는 이미 알았다. 유키 할머니가 아는 그 즐거움을 우라라가 놓치지 않고 찾아가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거로 생각한다. 나이라는 물리적인 단점을 가진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을 우라라는 할 수 있으니까. 뭔가를 오래 기다릴 시간이 없다는 아쉬움에 절망할지도 모를 자기보다, 언제나 시도하고 기다릴 수 있는 우라라가 그 도전의 즐거움을 알아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서로를 발전시키는 관계에 나이와 성별이 무슨 상관인가 싶은 의미를 남기는 이야기다. 사실 나는 이 관계의 법칙을 이성 사이에서만 적용하는 거로 여겼다. 어떤 이성을 만나야 하느냐 하는 물음이 생길 때마다, 그 사람을 만나면서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드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즐겁고, 그 사람과 함께하면서 내가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갈 수 있게 시너지효과를 일으키는 관계. 좋은 게 좋은 것으로 새끼를 치듯, 발전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 유키 할머니와 우라라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 관계가 꼭 이성 사이에서만 적용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나이를 초월하여 이어가는 관계에서도 그 '좋음'과 '발전'의 효과는 똑같이 적용된다. 유키 할머니를 만나면서 점점 서점의 아르바이트와 집순이에서 벗어나는 우라라의 변화, 나이 든 노년의 틀에 박힌 모습이 아니라 자기와 다른 청춘의 시절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유키 할머니. 그리고 둘 사이에 있는 BL. 왜 하필이면 BL일까 생각했다. 어쩌면 거기에 작가의 의도가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무언가를 좋아하거나 즐기는 데 나이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키 할머니와 우라라를 통해 보여준 것처럼, 세상의 다양성을 인정하듯 편견을 없애주려는 그 매개로 BL을 함께 넣어놓은 게 아닐까 하고. 세상의 많은 시선이 세운 벽을 깨트려주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편견 없는 사랑 이야기를 즐기고, 공통의 관심사를 이야기하면서 설레는 나이 불문 독자들의 모습이었다. 다만, 다음 이야기를 기다릴 수 있는, 남아 있는 시간이 다르다는 것뿐이다. 그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이므로,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혹시 다음 권, 또 그 다음다음 권까지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분 좋은 기대감으로 살아갈 수 있겠지.

 

 

모든 것은 늙는다. 유키 할머니 딸의 말처럼 집도 늙는다. 지금 청춘을 보내는 우라라도 언젠가는 유키 할머니의 나이가 되겠지. 누구에게도 비껴가지 않는 늙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노년의 즐거움이 달라질 것 같다. 생각해본 적 없던 덕질에 인생의 또 다른 행복을 찾은 것처럼, 무엇이든 열정을 다해 좋아할 수 있다면, 그거면 충분하다. 간절하게 바라는 것들로 오늘 하루가, 기다리는 내일이 즐거울 수 있다. 아마 유키 할머니는 좋아하는 BL 시리즈의 다음 권을 보기 위해서라도, 조금이라도 더 건강에 신경 쓰면서 사실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가 아니라 서서히, 차근차근 다가오는 노년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묻는 이가 있다면 이 책을 보여주고 싶다. 하고 싶은 게 뭔지, 오늘의 즐거움이 뭔지 모르겠다는 청춘이 있다면 이 책을 보여주고 싶다. 누군가의 조용한 한마디에, 늦게나마 찾은 작은 기쁨에 인생의 방향이 확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어떻게 늙어갈지 내 모습이 궁금할 때마다 가장 먼저 종이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내 모습을 떠올린다. 지금도 좋지 않은 시력이니 아마 돋보기를 쓰고 있겠지. 조금은 더디 읽히는 인문서나 과학서보다는 아마 짧은 글을 읽고 있을지도, 몇 컷 만화에 담긴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로맨스 소설 읽는 할머니로 늙어가고 싶다. 연애 세포가 죽어버려 설렘을 잊었어도, 소설 속 주인공들의 달달한 사랑에 지나간 내 젊음을 떠올리고 싶다. 로맨스 소설이 주는 즐거움을 놓치지 않고, 이야기 하나 하나 문장 속의 숨은 소리마저 들을 수 있는 독자로 오래 남고 싶다. 그렇게 좋아하는 거 즐기면서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늙어가고 싶다면 건강을 놓치지 않아야겠지. 그래서 책 읽다가 말고 운동화 꿰어 신고 있다. 운동이라고 부르면서 매일 걷던 그 길을 오늘도 빼놓지 않고 걷는다. 노년을 생각하는 늙은 여자 사람의 소박한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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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회의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6
이케이도 준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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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말했다. “일이란 말이지, 돈을 버는 게 아니야. 사람들한테 도움이 되는 거야. 사람들이 기뻐하는 얼굴을 보면 즐겁거든. 그렇게 하면 돈은 나중에 따라와. 손님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장사는 망해.” (365페이지)

 

전문적인 분야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일반 독자가 이야기 속 그 전문성을 소화하기에는 한계를 느낄 때가 있다. 그런데도 기어코 이야기 속 그 전문 분야를 즐기면서 재미와 이해를 만들어버리는 작가가 바로 이케이도 준이 아닌가 싶다. 전작 『한자와 나오키』를 읽으면서도 은행원이라는 전문직의 이면을 보는 것 같았다. 금융권 종사자를 부러워하면서도 그 분야의 민낯을 보는 게 놀라웠다. 사실 가족이 예전에 은행에 다닌 적이 있어서 어느 정도 그 분위기를 예상한 부분도 있지만, 근무 기간이 길지 않았기에 제대로 들은 적은 없었다. 궁금하면서도 일반인은 볼 기회가 없었을 은행의 이야기가 나름 신선하고 무섭고 그랬는데, 이번에는 영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회사가 매출을 올리기 위해 어떤 짓까지 하는지, 직원은 회사의 어떤 부분으로 존재하는지, 큰 문제가 발생했을 때 무엇을 1순위로 고려하면서 해결하려고 하는지 들려준다. 그리고 그 안에서 존재하는 회사원은 같은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한다. 나라면, 모두가 감추려고 하는 사건의 내부고발자가 될 수 있을까?

 

도쿄겐덴의 회의 시간. 말이 회의지 영업 실적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검사받는 시간이다. 누구라도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와중에 졸고 있는 이가 있으니, 그는 만년 계장 핫카쿠다. 이 회사에서 무서운 사람이 없나 보다. 습관처럼 회의 시간에 졸다가 급기야 발표를 망치기까지 했다. 그와 반대로 핫카쿠가 소속된 영업1과의 과장 사카도는 영업부의 에이스다. 회사의 누구에게나 칭찬받고 부러움을 산다. 사카도는 발표도 망치고 영업도 망치는 핫카구에게 폭언을 퍼붓는다. 반면 계속 사카도와 비교가 되는 영업2과장의 하라시마는 고통스럽다. 회사에서 필요 없는 인간이 된 것만 같다. 영업이 쉽지만은 않은데,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매번 완벽하게 해내는 사카도가 부럽다. 실적 압박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게 영업부의 운명이라지만, 이거 어떻게 압박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을지 생각하기도 한다. 며칠 후, 핫카쿠는 사카도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고발한다. 회사가 마냥 사카도 편일 것 같은데, 사카도가 대기발령을 받는 의외의 조치가 내려졌다. 이 결과를 쉽게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용은 돈과 똑같다.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얻기는 힘들지만 잃는 것은 순식간이다. (417페이지)

 

별 볼 일 없는 직원 핫카쿠의 고발에 회사가 쉽게 사카도를 대기발령 시킨다? 누가 봐도 의외의 결과에 다들 의문을 품는다. 특히 사카도 대신 영업1과의 과장으로 발령이 난 하라시마는 이 내막이 더 궁금하다. 매사에 낙오자처럼 보이는 핫카쿠가 퇴출당하지 않는 것도, 사카도의 영업 수완이 왜 이런 문제에서 플러스 요인이 되지 않았는지도 궁금하다. 그러다가 발견한 어떤 진실 앞에서 하라시마는 또 다른 임무를 가진다. 사카도가 발굴한 거래처를 바꾸고, 이익만이 목적이 아닌 제대로 된 제품의 보급을 우선으로 하는 태도로 영업에 임한다. 그래도 여전히 하라시마에게는 영업 압박이라는, 영업 일을 하는 이들의 숙명 같은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처음에는 영업하는 회사원들 사이의 암투가 그려지는 건가 했다. 서로 견제하고 질투하면서 저절로 생기는 감정의 골이, 같은 회사 직원들 사이의 존재감 차이를 만들고 노골적인 차별에 노출되어 학대당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물론 그 부분도 맞다. 영업 실적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고, 능력을 인정받으며 회사에서 필요한 인재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그 이면의 것들은 보지 못했다는 걸 나중에서야 안다. 사건이 발생하고 후회하면서. 매출 달성만을 위해 달려가는 동안 어긋난 방식이 끼어들었다는 것을, 그걸 알면서도 그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던 압박을 핑계로 삼을 수 없었다. 이 소설은 처음에 보면 단순히 영업과장이 자기 영업 목표를 채우기 위해 해서는 안 될 일까지 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일을 파헤칠수록 점점 커지는 그림이 두려울 만큼 무서웠다. 사카도가 저지른 일은 개인의 잘못인가 아니면 회사의 묵인인가? 정말 사카도 혼자 개인의 영업 목표를 위해 저지른 일이었던가? 회사는 조직원이 저지른 잘못을 어디까지 책임져줘야 할까? 물음표는 늘어가고 조직은 더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로 남는다.

 

아니다. 사실은 이해하기 어려웠던 게 아니라, 회사의 조직 안에서 내가 어떤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벌어진 일을 이해하거나 해결하기 위한 태도가 달라지는 것 같다. 다 드러내놓고 일을 수습할 것인가, 묵인할 것인가. 가장 궁금하고 의문에 싸인 인물인 핫카쿠가 어떤 활약을 할지 기대되면서도, 막상 뚜껑을 열고 하나씩 확인해갈 때마다 묻고 싶은 게 많아진다. 핫카쿠는 끝까지 도리를 우선에 놓고 회사의 안위보다 정의를 택했지만, 누구라도 그런 선택을 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내부고발이라는 게 현재의 자기 모든 것을 내려놓을 위험을 안고 해야 하는데, 그런 선택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내부고발 비슷한 행동으로 만년 계장으로 살아왔던 핫카쿠였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나 싶다. 이미 한번 해봤기에 더 용기 있게 나설 수 있는 일이었다고, 더 만년 계장이 더 내려놓을 게 뭐가 있겠느냐는 막무가내 정신으로.

 

“나는 대체 회사의 무엇이었을까?” (107페이지)

 

“그런 건 속임수예요.”

하라시마의 가슴속 깊은 곳에 던져진 작은 돌 같은 말이었다. “회사에 필요한 인간 같은 건 없습니다. 그만두면 대신할 누군가가 나와요. 조직이란 그런 거 아닙니까.” (41페이지)

 

출간 반년 만에 일본에서는 드라마로 제작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영화로 개봉했던 소설이라고 한다. (나는 아직 이 드라마도 영화도 못 봤기에 궁금하긴 하다) 영업 매출을 위해 도리도 버릴 수 있는 상황, 내부고발이라는 민감한 주제를 던져놓았기에 더 흥미롭다. 실제 우리가 사회생활 하면서 부딪히는 온갖 일들과 감정이 이 소설 안에 다 들어있다. 사회생활의 희로애락이라고 해야 할까. 생존을 위해 싸워야 하는 우리의 모습을 리얼하게 잘 표현했다. 전작에서도 기가 막히게 적나라하고 공감되는 이야기로 세상의 파도에 휘말리는 인간사를 보는 듯했는데, 이번 작품에서도 그 긴장과 재미, 사회성 짙은 의미를 놓치지 않는다. 추리소설의 새로운 맛을 느끼게 해줄 이케이도 준의 작품 세계에 푹 빠져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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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저녁의 졸림을 이기려고 눈을 부릅뜨면서, 저녁 일일 드라마의 오늘 분량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엄마 얼굴을 보고 있다. 웃음이 난다. 졸리면 그냥 주무시지, 기어코 본방 사수하겠다면서 주인공의 복수를 흥미진진하게 보고 계신다. 일상의 낙이 매일 저녁 방송하는 TV 드라마를 보시는 건데, 그게 그렇게 웃기다. 마치 그걸 보지 않으면 하루를 마무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것인지... 옆에서 조용히 앉아 이 책을 읽고 있다가 가만히 눈을 감고 상상해봤다. 엄마가 돌아가시면 나는 엄마의 무엇을 갖고 싶을까 하고. 저자는 엄마의 유골을 갖고 싶었다는데, 나는 엄마의 무엇을 갖고 싶은지 계속 생각하고 있다.

 

 

제목만 들으면 무슨 스릴러인가 싶겠지만, 유골의 주인이 엄마라는 걸 알게 된다면 놀라움과 궁금증이 먼저 생길 거다.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어야 이런 말이 가능할까. 혹시 경험해본 사람은 조금 알까? 막 화장터에서 나온 유골을 담은 유골함을 손에 들면 따뜻하다. 너무 뜨겁지도 않고 적당한 온도다. 온돌방에 앉아 있는 느낌으로 따뜻하다. 만약 내 엄마의 유골이 그런 느낌이라면, 한 번쯤 그 유골함을 꽉 안고 싶어질 것 같다. 엄마를 안는 기분으로, 이게 마지막이구나 하는 아쉬움을 달래면서 말이다. 사랑하는 엄마를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저자의 저 말을 듣고 나니 궁금해졌다. 얼마나 간절한 마음이어야 엄마의 유골을 먹고 싶다는 생각마저 하게 되는 것일까.

 

저자는 엄마의 유골을 봤을 때 순간적으로 그런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엄마의 유골을 먹고 싶다고. 눈동자가 떨릴 정도로 엽기적인 말로 들리지만, 엄마를 자기 몸의 일부로 만들고 싶었다는 의미를 알게 된다면, 이상하게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문장 그 자체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 순간의 마음이 무엇일지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 된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은 아니지만, 이 강렬한 감정이 부르는 아픔을 알 것 같아서다. 사랑하는 엄마의 부재, 더는 엄마를 볼 수 없다는 슬픔이 어느 정도일지, 한 번쯤은 상상해 보고 싶지 않은가? 상상과 현실의 차이는 어마어마하겠지만,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감정을 알기에는 상상만 한 게 없으니. 나는 저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수시로, 계속 상상한다. 내 엄마와의 마지막을 어떻게 준비하고 맞이해야 하는지를.

일상에서 마주하는 여러 죽음을 볼 때마다, 그 죽음의 대상이 엄마가 될 때를 생각해 본 적이 많다. 특히 언젠가부터 엄마의 병원행이 잦아질 때마다 생각은 극단적인 쪽으로 기운다. 작가 자신이 20대에 겪은 혈액 질환 때문에 엄마의 애정 어린 보살핌을 받았기에, 그 이후로도 엄마의 존재는 남달랐을 것 같다. 저자의 엄마는 위암 말기 선고를 받는다. 아들을 사랑하고, 한없는 애정과 격려를 보내며 아들의 삶을 응원했다. 그런 엄마가 암이라니, 더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의 말기 선고를 받고 나니 이제 엄마의 병을 고치기보다는 엄마의 남은 시간을 행복하게 해드려야 하는 숙제가 남았다. 저자와 애인은 엄마의 병간호를 하고, 긴 시간 엄마를 돌보면서 지쳐갈 때쯤 엄마와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다. 이 글은 저자가 의사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메모해 두던 것이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어떤 순간의 기록이라고 생각하면 그 기록을 읽는 것에서 그만이겠지만, 그 대상이 엄마라면, 부모라면 의미가 달라진다. 더는 볼 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보고 싶은데 볼 수 없다는 게 얼마나 큰 슬픔인지 아는 사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개를 끄덕이면 슬픔에 공감하는 이들, 참 많을 것 같다.

 

늘 함께일 거로 생각했던,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헤어질 시간은 누구에게나 다가온다. 떠나간 이를 기억하며 살아야 하는 게 고통일지 기쁨일지 모르겠다, 아직은. 주변 많은 이의 죽음을 애도했고, 지금도 가까운 이의 백혈병 투병을 지켜보고 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소식을 들을 때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지만, 아직은 그 슬픔을 100% 공감할 그릇을 갖지 못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아니었기에, 그저 누군가의 죽음 때문인 이별을 모르지 않을 것 같은 마음에 가까울 것이다. 그때마다 상상의 시간은 길어진다. 엄마의 죽음을 생각한다. 아마 그들도 이런 마음이겠지 하는 심정을 이해 하고자, 언제가 내가 마주할 엄마의 죽음을 마주하며 가슴을 단단하게 만들고자. 평소 엄마와 얘기하면서도 엄마의 죽음을 빼놓지는 않는다. 작년 말에는 엄마가 죽으면 가고 싶다는 봉안당에 미리 다녀왔다. 조건이 맞으면 좋은 자리에 계약해놓을까 했는데, 아쉽게도 엄마의 종교를 바꿔야만 갈 수 있는 곳이라 포기했다. 외삼촌(엄마의 오빠)이 계셔서 더 마음이 가는 곳이었는데, 종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엄마가 종교를 바꾸지 않는 이상 그곳으로 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은 다른 곳을 찾아보자고 얘기한다. 그곳에서 쉴 주인공인 엄마와 함께 말이다.

 

저자의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저자의 아버지는 뜻밖에 담담해 보였다. 아내의 죽음이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마는, 세상 이치가 다 그렇다는 표정으로 아내를 보내는 모습이 의연했다. 그런 아버지가 술이 늘고, 집안이 지저분해질 정도로 치우지 않고, 일상이 흐트러져 있었다. 겉으로는 자식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는데, 진심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을 보낸 슬픔은 누구나 똑같은 거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슬프지 않은 건 아니었는데 말이다. 저자 형의 모습도 비슷했다. 가장 눈물을 많이 흘리고 슬퍼하는 것으로 보였던 저자에게 시선이 쏠리곤 했는데, 정작 그 주변 사람들의 슬픔을 헤아리지 못했다. 장례식을 치르고 이런저런 정리를 하면서, 남겨진 이들이 감당해야 할 일을 처리하는 것이 먼저 보였는데, 그 이면의 표정을 미처 다 읽지 못했던 거다. 가족을 잃고 슬프지 않은 사람 없고, 엄마의 돌봄에 감사하지 않은 자식 없다. 그러니 엄마와의 영원한 이별은 생애 가장 큰 슬픔일 것이다.

 

 

엄마를 보내고 난 후의 이야기들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여기저기서 발견하는 엄마의 메모들, 엄마가 가꾸던 정원이 시들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의 빈자리를 느낀다. 그러면서도 남겨진 이들은 또다시 주어진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 한 번씩 떠오르는 기억들을 마주해야 하고, 울고 웃으면서 그 시간을 추억해야 한다. 엄마의 강요로 남겨두었던 정자를 꺼내 아이를 낳게 되면서 또 한 번 엄마의 고마움을 느끼고,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해 저마다의 의미를 쌓아간다. 머리로 이해할 수 없더라도, 말론 분명하게 표현할 수 없더라도, 마음이 알고 느끼는 것들을 그렇게 적립하는 시간이었다.

 

몇 십 년을 엄마가 해주시는 밥 먹고 살다가, 이제는 조금씩 엄마와 떨어져서 지내는 연습을 해야 한다. 엄마가 지금보다 덜 늙었을 때 따로 살아볼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 요즘이다. 언젠가 혼자서 지낼 엄마를 생각하니, 작년보다 한 살 더 나이 드신 엄마가 부쩍 더 늙어 보이는 건 왜일까. 같이 살 집을 알아보자고 해도 싫다고 하시고, 따로 살 집을 알아본다고 하니까 투덜투덜 서운해하시고. 하루에도 열두 번씩 변덕을 부리는 엄마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마음이 복잡한 요즘이다. 같이 살자니 자식에게 부담이 될까 봐 싫어하시는 것인지, 따로 살자니 갑자기 혼자 지내는 일상이 겁이 나는 것인지. (사실 나도 많이 무서운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겁이 많아지고, 본인 스스로 결정하는 것보다 자식에게 물어보고 의지하는 모습이 늘어간다. 한때는 이 집의 가장이었던 당신. 이제는 본인이 돌봄을 받는 위치가 되었다는 게 슬프면서도 안도하는 걸 볼 때마다, 그동안 살면서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와 힘듦을 겪었을지 새삼 알겠더라. 그래서 엄마의 지금 변덕을 다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홀가분함과 두려움 사이에서 서성이는 엄마, 당신의 두려움과 떨림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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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신의 평온을 깼다면
패티 유미 코트렐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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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묻거나 생각하는 경우는 많았어도, ‘왜 살아야 하는지’ 묻거나 생각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비단 나에게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닌 듯했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어느 화두를 중심에 두고 모여 있을 때도, 세상살이 고달픔을 이야기하면서도, ‘왜’가 아니라 ‘어떻게’를 생각해왔다. 어쩌면 살아가는 일에 ‘왜’라는 의문 자체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서일까? 살아간다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고, 그 이유를 떠올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살아가는 방식과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얘기해왔던 게 아니었을까? 모르겠다.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더 모르겠다. 누군가의 삶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이렇게 어려울 거로 생각하지 못했고, 사실은 그 이해를 반드시 해야 하는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개인의 삶을 들여다볼 때 느껴지는 어떤 것, 누구나 살아가는 이유나 방식이 똑같을 수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고나 할까.

 

내가 존재한다. 다른 사람 세상에 내가 존재한다. 나는 공원을 뛰어다니거나 언덕마루로 올라가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었다. 동생의 삶에 내가 있었어! 중요한 존재였단 말이야, 개새끼들아! (225~226페이지)

 

한국에서 입양된 헬렌은 오래전에 양부모의 집을 떠나 뉴욕에서 산다. 양부모의 집에 남아 있던, 입양아인 남동생의 죽음을 전해 듣고 그녀는 양부모의 집으로 향한다. 솔직히 헬렌의 방향이 의외였다. 나는 그녀가 남동생의 죽음 소식을 듣고도 무심할 거로 생각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녀의 성격이 냉정하다고 지레짐작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래전에 떠난 양부모의 집, 그 후로 연락 한번 한 적이 없는 그녀가 남동생이 죽었다고, 그것도 입양된 아이의 죽음에 그렇게 쉽게 마음이 흔들릴 거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굳이 양부모의 집으로 향하려는 의도가 궁금했다. 혹시 남동생의 죽음에 양부모의 역할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 왜 고요하던 그 아이가 자살을 선택했을까 하는 호기심에, 그 죽음의 비밀을 밝히려는 시도가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된 건 아닐 거라고.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내가 쉽게 생각하는 것만큼 따라오지 않았다. 헬렌이 마주한 남동생 죽음의 진실과 그동안 부정적인 마음으로 자리했던 양부모의 모습이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는 게 충격이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은 그대로였다. 넓지만 으스스한 유령의 집 같은 느낌. 구석구석 자리를 차지했던 벌레들과 칙칙함. 검소하다 못해 자린고비 같은 양부모의 성향에 딱 맞는 집의 분위기가 여전한 그 집에서 얼마나 머물 수 있을까 싶었지만, 헬렌은 남동생의 죽음을 밝히기 전까지는 그곳을 떠나지 않으리라 마음먹는다. 그렇게 눈에 들어오는 단서를 하나씩 추적하면서 서른 즈음에 다다른 한 남자의 인생을 재구성한다. 그녀가 알고 있었지만 몰랐을 남동생의 모습을 하나씩 마주할 때마다 더 혼란에 빠진다. 그 녀석은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지내왔던 걸까. 그렇게나 그곳을 떠나고 싶었던 그녀와는 달리 남동생은 그곳밖에 머물 곳이 없었다. 미래에 대해 생각할 수도 없었고, 그 스스로 밖으로 나와 활발한 인생을 살아가지도 못했다. 고여 있는 물처럼, 그곳에서 머문 온갖 벌레들처럼, 그 집의 방 한 칸을 벗어나지 못한 삶이었다. 그런 사람의 죽음이 쉽게 이해가 될 리 없다. 그런 생각으로 시작된 탐정 놀이는 의외의 과정과 결말을 맞이하면서 정리되는 게 더 당황스러웠다. 어느 날 마주한 진실 앞에서 드는 이런 생각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 내가 알던 사람은 누구였지?’ 싶은 놀라움 같은 거. 그때마다 더 절망에 빠지기도 하지 않았던가. 누군가를 안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라는 걸 깨달으면서 말이다.

 

기어코 찾아낼 거로 믿었다. 한 사람의 죽음이 이렇게 흐지부지, 그 이유로 모른 채로 잊히는 게 읽는 나도 싫었다. 부모에게 버려지고 멀리 보내지는,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온갖 차별까지 받아오면서 자랐을 한 인생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는데, 그 이유조차 모른다면 그가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 그러니 온전하게 보내주기 위해서라도 그 죽음의 시작과 끝을 찾아내야 했다. 그 임무를 헬렌이 수행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헬렌 역시 그 역할에 충실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무언가 알지 못했던, 모른 채로 흘러왔던 남동생의 이야기가 조각을 맞춰가면서 더 알 수 없는 상태가 됐다. 그동안 다 안다고 믿어왔던 남동생의 삶은 무엇이었던가.

 

좌절하는 시기에 윤리의 나침반은 흔들릴 수 있으며, 사실 극단적으로 윤리적 자세가 바뀔 수도 있다. 윤리적 자세는 콘크리트 안에 고정돼서는 안 되며, 가끔은 윤리의 나침반을 흔들 필요가 있고, 때로는 파괴해야만 한다. (165페이지)

 

그녀는 처음으로 그의 삶을 알아간다.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한 실패한 삶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아이가 아니라, 그 스스로는 충분히 만족한 삶이었다는 것을 안다. 누군가가 읽어주기를 바라기라도 한듯, PC 휴지통 폴더에서 꺼낸 편지 한 장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양부모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그를 사랑했다. 뿌리를 찾고 싶던 그는 한국의 어머니를 찾기도 했다. 하지만 온전하지 못한 삶은 여전했으며, 그는 그 자체로 자기 인생의 만족을 느끼며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불행하지 않았다. 쓸모 있는 인간으로 남고 싶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삶을 온전히 이루고 떠났다. 그가 가장 바라는 삶이었고, 그가 이룬 삶이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헬렌은 남동생의 삶을 완전히 재구성하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싸우듯이 얻어낸 삶의 평온은 사실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삶의 완전함과 평온을 위해 투쟁하듯 살아가고 있지만, 결국은 누구도 삶의 그 불완전함에서 쉽게 벗어나지는 못한다는 것을. 그 불완전함 속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평온을 얻으며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가 가진 불안을 장착한 채로, 그녀가 애쓰면서 얻으려고 했던 평온을 내려놓으니, 그때 비로소 남동생의 삶이 보였다. 스스로 선택한, 그 자신이 원하는 것을 준비하면서 얻은 죽음이야말로 어른의 선택이라고 믿은 남동생의 방식에 한발 다가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저 불완전하고 지속하는 삶을 마주할 뿐이다.

 

작가 자신의 실제 경험이 있기도 했겠지만, 완전하게 자전적인 이야기는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디까지나 실제에 바탕이 된 감정이 더 큰 이야기를 끌어낸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느 순간의 기억이 기어코 어떤 이야기를 꺼내야만 하게 만들었을지도, 그 순간의 이야기를 한 번쯤은 꺼내야 인생의 다음 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남동생 삶의 재구성을 완결할 수 없던 헬렌의 시도는 그렇게 미완성인 채로 남겨두어도 괜찮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결말이 아니라 어떤 마음을 꺼내놓는 것 자체였을 테니. 남동생의 죽음으로 헤집어놓은 그의 평온을 이제 다시 다독여주리라. 그의 죽음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것이 사실은 아무 의미가 아닌 채로 그의 주변에 있었다고. 그에게는 아름답다고 여긴 그의 삶이 존재했으며 사랑했다. 그것뿐이다. 그가 받아들이고, 이어왔으며, 만족했고, 스스로 꾸렸을 그 삶이 거기 있었을 뿐이다.

 

'내가 당신의 평온을 깼다면 미안해요'는 내가 사과를 할 때 쓰는 말이다. 직장에서는 늘 이 말을 썼는데, 사람마다 아주 다양한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사과 말이다. 미안해요, 제 실수예요, 라는 뜻일 수도 있다. 내가 널 망쳐주겠어, 나쁜 년, 이런 듯을 수도 있다. (117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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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 미지의 땅에서 들려오는 삶에 대한 울림
강인욱 지음 / 흐름출판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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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가까운 곳에 박물관이 생겼다. 기존에 박물관 비슷한 전시실 정도로 운영하던 곳에 국립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을 한 거다. 조금씩, 그 시대의 유물과 생활 흔적을 마주하는 기분은 묘했다. '저걸로 고기를 잘랐다고? 이런 옷을 입고 살았다고? 그 시대의 무덤은 이랬구나.' 싶은 눈앞의 것들은 새로운 이야기로 탄생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찾아내고 그 시대를 확인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는데, 보면 볼수록 그 시대의 생활이 궁금해졌다. 인간의 생활이 진화하고 있음을 느끼면서도, 하나씩 찾아가는 생활의 지혜가 놀라울 뿐이었다. 어쩌면 그 시대에 살아갈 수 없음을 알면서도(이미 문명의 맛을 알아버렸으니...), 한 번쯤은 모험하듯 여행하듯 다녀오고 싶은 마음도 든다. 영화에서 보던 시간 여행 같은 거 말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영화이니까 가능한 설렘과 모험일 테고, 현실의 시대 발굴은 굉장히 섬세하고 예민한 작업이라는 것을 이 책으로 알게 됐다.

 

저자는 고고학이란 학문을 경건하게 대하면서도, 그 유물들의 발굴에서 느끼는 시대의 흔적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발굴 과정에서 직접 겪은 체험을 이야기하듯 들려주면서, 그것들을 바라보며 확인하는 그 시대 삶의 지혜를 받아들이는 감정이 인간미 넘쳤다. 때로는 슬픈 현실을, 때로는 즐거운 한때를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인류의 과정이 그대로 담긴 흔적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동안 박물관이나 전시관에서 봐왔던 많은 것이 새삼 더 다르고 깊게 다가온다. 생활의 흔적들이기도 하지만, 그 흔적들의 발전은 오늘의 우리에 이르게 되었다는 게, 구석구석 삶의 지혜들이 쌓여있다는 게 보인다. 사용하다 보니 불편한 것들은 점점 생활에 편리하게 업그레이드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차근차근 인류의 생활은 더욱 편하게 발전해왔을 거라는 사실의 증명 같은 거. 그러니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유물들은 단순하게 화석이나 골동품 바라보듯 신기함으로만 느끼면 안 될 것 같다. 인류가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발자취이고 흔적들일 테니까.

 

 

 

고고학자를 '시간여행을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유물을 찾고 과거를 경험하면서 보이는 것들에 많은 상상과 실제를 더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우리가 역사책이나 수업 시간에 간략하게 배우던 과거의 이야기를 좀 더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색을 입힌다. 어떻게 보면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20여 년의 시간을 고고학자로 활동하면서 돌아다니던 곳, 중앙아시아와 중국, 몽골과 시베리아 등의 발굴에 참여하고 거기서 발견한 유물들에서 본 것들을 말하는데 느껴지는 놀라움과 자부심 같은 게 있다. 본인이 택한 학문에 대한 존경, 경험으로 확인한 시간여행에 대한 흥미로움, 인류 역사의 흔적들이 만들어낸 현실의 모습까지 보면서 죽은 자와 산 자의 시간을 연결한다. 특히 고고학 자료의 절반 이상이 무덤이라면서, 무덤은 죽은 이를 묻은 곳이면서 남은 이들을 위로하는 곳이라는 게 인상적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치르는 장례식 자체가 남은 이들에게도 필요한 시간이지만 죽은 이를 잘 보내기 위한 방식이 아닐까? 누군가의 죽음을 보면서 느끼는, 언젠가 나에게도 다가올 죽음을 생각하는 방식이기도 할 듯하다.

 

 

고고학 발굴에서 시간의 무게를 가장 견디지 못하는 것이 바로 시각적인 아름다움, 색채이다. 사진이나 책은 가장 먼저 색부터 바랜다. 아무리 아름다운 옷이라고 해도 땅속에 버려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의 색을 잃어버린다. 때문에 색이 잘남아 있는 유물을 발견하면 강렬한 인상으로 남게 된다. (117페이지)

 

지나간 것들, 죽은 이들의 흔적들을 찾아다니면서 그 시대를 읽기도 하지만, 음식이나 냄새 같은 것들의 자취를 찾기도 해야 한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기에 그 흔적을 찾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래서 고대의 악기를 발견했을 때 어느 시대를 규정하면서도 같은 악기가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니 음악의 흐름, 유행 같은 것을 찾아낸다. 사실 유행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과한 것 같긴 한데, 어떤 붐이 일어나는 것처럼 음악의 분위기나 사용하는 악기도 널리 퍼지는 것 아닐까 싶다. 구금이 고대 유라시아 초원의 유목민들이 즐기던 악기였다고 했는데, 발해 유적에서도 구금이 발견된 것을 보고 동아시아 전역에서 발해 음악이 유행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아쉬운 것은 그 당시의 악보나 다른 흔적들이 남아 있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어떤 음악이 유행이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것, 음악의 복원도 할 수 없다는 것도. 깨진 조각을 이어 붙이듯이 유물의 완전한 형태를 예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이렇듯 물리적인 흔적을 다 찾아낼 수 없는 것들이 너무 안타깝다. 어떤 향기나 음식, 맛 같은 것이 궁금해지는 이유다.

 

 

 

우리가 먹는 건 우리 몸속에 쌓인다. 고고학은 살아 있을 때 우리가 먹은 음식을 밝힌다. 거기에는 우리의 이야기가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 아마 수천 년 뒤에 한국의 요릿집이나 정육점 자리를 분석한다면 지금의 한국인들이 좋아했던 고기 부위와 숨겨진 식성도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런 작업은 쉽지 않을 것이다. 고고학자들이 수많은 뼈들을 부위와 종류별로 일일이 분류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이 먹는 것으로 당신을 밝히겠다는 사바랭의 말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고학은 너무도 흥미로운 학문이다. 그러니 한 끼 먹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마시길. (159페이지)

 

토기의 바닥에 곡물의 찌꺼기가 남아 있음을 확인하고 5000년 전에는 중국에서 맥주를 마셨다는 걸 알아내기도 한다. 음식의 흔적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 하던 우려는 이렇게 뭔가를 찾아냄으로써 그 기우를 덜어낸다. 특히 보리가 섞여 있던 곡물이었음을 알았을 때는 보리가 중국에서 자생하는 곡물이 아니었다는 것, 그래서 동서의 교류가 만들어낸 곡물의 이동이라는 것까지 알아낸다. 생각해보면 굉장히 단순하고 쉬운 방식의 '흔적 찾기' 같은데, 신기하면서도 하나하나 그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한 시대의 모습을 찾아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고고학이란 학문은 흥미롭기도 하지만 인간의 호기심에서 시작되는 건 아닐까 싶다. 알고 싶은 것, 찾아가고 싶은 곳의 이야기를 듣고 싶기에 계속 활동하고 발굴하면서 그 흔적들을 찾아내는 희열을 느끼고 하는 거 말이다. 발굴된 유물을 통해 인류가 이뤄낸 삶의 지혜를 발견하면서도, 어떤 흐름으로 현재에 이르렀는지 파악하면서, 조금 더 나아가서는 인류의 미래를 예측할 수도 있지 않을까? 지나온 과정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찾아내고 유추할 수 있는 어떤 것들을 상상하는 재미까지 더해진다. 인류의 진화에 관한 욕망은 '직립보행이 목숨을 건 진화'였다고 말하는 것에서 느낄 수 있듯이, 인류의 두뇌는 더 커지고 지식을 얻으면서 동물적인 장점은 서서히 퇴화했듯이. 과거의 인류에서 시작된 인간 세상의 흐름은 앞으로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흘러갈지 기대된다. 그 기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고고학이란 학문과 고고학자의 역할이 클 것 같다. 비록 고된 하루의 끝이 시원한 맥주 한 잔으로 마무리되는 게 소박하지만, 그 맥주 한 잔의 힘으로 또다시 인류의 흔적을 찾아가는 모험을 마다할 수 없다. ^^

 

 

어렵게 우연처럼 찾아낸 작은 흔적들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로 확인하게 되는 것들을 마주한 것 같다. 마음으로 보이는 것들이 불러오는 감정이 대단했다. 발굴에서 시작된 인류 역사를 확인하게 되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누구나 쉽게 읽으면서 고고학을 만나는 재미를 만드는 책이기도 하다. 실제 발굴의 이야기에서는 흥미진진한 모험을 하는 듯하면서도, 발굴 이후의 시간 추적 같은 이야기는 신비롭다. '아, 우리가 이렇게 발전해왔구나. 인간이 이렇게 진화해왔구나. 너무 다른, 때로는 너무 비슷한 생활에 인간미가 여기서 나오는구나.' 싶은 공감과 감동까지 만든다. 유물을 통해 과거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과 문화를 밝히는 과정인 고고학이, 이 책에서 들려주는 것처럼 인류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시간을 계속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 지식을 전달하면서도 즐거움을 놓치지 않았고, 하나의 학문을 알아가는 흥미로운 과정이었다. 과거의 유물이 우리가 미래를 열어 가는데 더 현명해질 수 있도록 거울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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