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 3
쓰루타니 가오리 지음, 현승희 옮김 / 북폴리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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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된 내 모습을 상상한 적이 있다. 아마 '이렇게 늙어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에 가까운 마음이었을 것이다. 주변의 어르신들과 내 부모의 나이 듦을 생각하면, 그런 바람들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늘어난다. 집 근처 노인복지회관에서도 여러 강좌를 개설하고 회원들은 열심히 참여하고 즐긴다. 신나는 음악 소리, 시원하게 북을 두드리는 소리, 기합을 넣어가며 체조하는 소리, 조용히 인문학 수업을 진행하는 소리. 시골인데도 다양하다면 다양한 수업으로 의외로 참여자가 많다는 걸 알았다. 엄마는 난타 수업을 받으러 가다가 지금은 다른 일 때문에 수업에 참여하지 못하지만, 일주일에 두 번, 가서 사람들 만나서 어울리고 뭔가 힘껏 두드리다가 오니 속이 시원해진다고 했다. 물론 박자 맞춰서 따라가려니 연습이 많이 필요해서 힘들다고는 하는데, 그마저도 즐거운 투정인 것 같다. 솔직히 아직은 그 안에서 내가 즐기고 싶은 강좌는 없다는 생각에, 문득 걱정이 앞선다. 내가 노인이 된 후에 즐길만한 것을 찾지 못한다면, 너무 외롭거나 심심하지 않을까? 괜한 우울함에 몸과 마음의 노화 속도가 빨라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벌써 심란해진다.

 

 

예상하지 못한 만화 한 편에서 그 시간을 미리 만났다. 등장하는 두 사람 역시 예상하지 못한 조합이었다. 이치노이 유키는 75세의 할머니다. 3년 전에 남편이 하늘나라로 먼저 떠나고 혼자 남았다. 서예 교실을 운영하면서 개구쟁이 아이들을 만나는 시간이 유일한 교류의 모습처럼 보인다. 거기에 요리가 취미인, 주변에서 평범하게 볼 수 있는 노인의 모습이다. 어느 날 서점에 갔다가 요리책 대신 눈에 들어온 한 권에 책에 푹 빠진다. 표지가 너무 예쁜 만화여서 덜컥 집어 들고 왔는데, 이런. BL(Boy's Love)만화였다. 예쁘다는 이유로 표지만 보고 아무런 정보 없이 들고 온 책이 이랬다. 어쩜 좋아. 그런데 이상하다. 읽을수록 빠져든다. 이 젊은 소년들의 사랑에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면서 다음 권이 궁금해서 그냥 있을 수가 없다. 바로 2권을 사러 갔다. 유키 할머니가 BL의 세계로 흡수되는 순간이다.

 

서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17세의 사야마 우라라. 소심한 성격에 주변에 친구도 없는, 그렇다고 왕따도 아닌데 사람들 사이에 잘 섞이지 못하는 아이. 아무도 모르지만 우라라는 BL 마니아다. 집안에서도 몰래 감춰두고 혼자만 읽는다. 누가 볼까 봐 신경 쓰여 책장에 꽂아두지도 않는다. 그런 우라라의 눈에 띈 유키 할머니는 단 한 번도 예상하지 못한 독자였을 것이다. 70대의 할머니가 BL 만화를 사러 온다? 재고 부족으로 할머니와 대화를 하던 중, 두 사람은 서점 밖의 만남이 시작된다. 마치 속마음을 들킨 것처럼, 58세의 나이 차는 저리 던져두고 빠져들어 버린 만화에 대해 열렬한 대화를 펼친다. 주변의 이상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사람만의 세계를 즐긴다. 만화 속 주인공의 사랑과 갈등, 속마음에 관해 이야기한다. 읽으면서 느낀 여러 가지 생각과 감정도 허심탄회하게 쏟아낸다. 십 대 여학생과 칠십 대 노인의 우정이 이렇게 싹튼다.

 

지금은 조금 소원해졌는데, 그런데도 꾸준히 로맨스 소설을 즐긴다. 처음 로맨스소설을 만났을 때와 같은 마음은 아니지만, 어느 날 갑자기 BL 만화에 빠진 유키 할머니처럼 나도 나이 들어도 책을 읽는 노인이 되고 싶었다. 엄마가 돋보기를 쓰고 성경을 읽으시는 것처럼, 내 눈이 허락하는 동안에 로맨스 소설을 즐기는 노년의 삶을 상상했었다. 그런 상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누군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서점의 서가에서 로맨스 소설을 꺼내 와서 계산대에 올려놓는 손님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언제나 상상에 머무르곤 했다. 밖에서 책을 읽을 때는 선뜻 로맨스소설을 꺼내놓지 못한다.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누가 볼까 신경이 쓰인다. 그러니까 나에게 로맨스소설은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에, 다른 사람은 모르게 나만 즐기는 책으로 머물러 있다. 그 나이에 무슨 로맨스 소설이냐고, 현실의 로맨스에 빠져야지 뭐하고 있느냐고, 현실과 로맨스 소설을 구분도 못 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그런 건 애들이나 보는 거 아니냐고 한마디씩 꺼낼까 봐. 내가 즐기는 장르의 소설을 하찮게 여길까 봐. 싫은 소리 듣는 게 싫어서.

 

하지만 누구나 각자가 빠져드는 거 하나쯤 있지 않나? 영화든 배우든 가수든, 피규어를 모으든지 밤낚시를 즐기든지. 그게 무엇이든 마음이 끌리는 자기만의 관심사가 있다. 좋아하는 드라마나 좋아하는 연예인이 있을 때, 온라인 속의 온갖 정보를 흡수하고 그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어진다. 드라마의 다음 전개,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의 사소한 것까지 궁금하다. 그래서 팬 카페에 가입하고 검색의 홍수 속에서 다양한 정보를 찾아다닌다. 유키 할머니가 처음 BL에 빠져들었을 때, 단순히 만화를 즐기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마음이 저절로 흐르고 있었던 거다. 이 마음을 누구랑 나누고 싶은데, 두 주인공의 갈등을 이야기하고 싶은데, 혹시 이런 마음은 아닐까 하는 토론도 하고 싶은데. 유키 할머니는 찾아보면 알 수 있는 그 방법을 몰랐다. 휴대폰의 문자도 돋보기를 쓰고 하나씩 쳐야 하는 할머니의 육체적 노화는 21세기의 젊음이 즐기는 방식에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우라라와 공통 관심사인 BL을 이야기할 때 삶의 활력소를 찾는다. 좋아하는 것을 읽는 즐거움을 확장한, 마음에 담아둔 것을 꺼내어놓는 것까지 알아간다. 어쩌면 그런 마음의 확장은 당연한 흐름인지도 모르는데, 나는 왜 그 확장의 방식에 나이라는 제한을 걸어두었을까. 이런 선입견과 편견을 가진 게 나뿐이었을까?

 

 

유키 할머니와 우라라.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지켜보게 되는 건, 늙음이 보여준 연륜과 경험, 따뜻한 조언 때문이다. BL을 즐기고 이벤트에 찾아다니기까지 하는 우라라를 보면서 유키 할머니는 조용히 읊조린다. 우라라도 그림을 그리면 좋겠다고. 그 말을 우라라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냥 세상 좀 더 오래 살아온 분이 어떤 아쉬움에 하는 얘기라고 생각했을까? 소심하고 외톨이인 우라라가 몰입하고 즐길 수 있을 것을 발견하고 그걸 발전시킴으로써 생길 인생의 변화를, 유키 할머니는 알고 있었을까? 아마도 우라라의 젊음이 해낼 수 있는 가능성과 시간의 힘을 믿었을 것이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면서 청춘을 겪어보는 일, 그러다가 보면 어느 순간 자기가 더 행복해지는 일을 발견하게 되는 기쁨을 알게 되고, 삶의 만족을 겸손하게 배우면서 또 남은 시간을 이어가는 인생의 법칙을 알고 있기 때문 아니었을까. 유키 할머니가 일상에서 유일하게 즐기던 요리 때문에, 요리책을 사러 갔다가 발견한 한 권의 책 때문에, 그 책 때문에 십 대 소녀와 친구가 되고 요즘 세상의 한 모습을 보게 되는 일 때문에, 인생의 또 다른 즐거움을 느끼면서 갈증 내는 자신을 보는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죽을 때까지 알아갈 세상의 즐거움을 유키 할머니는 이미 알았다. 유키 할머니가 아는 그 즐거움을 우라라가 놓치지 않고 찾아가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거로 생각한다. 나이라는 물리적인 단점을 가진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을 우라라는 할 수 있으니까. 뭔가를 오래 기다릴 시간이 없다는 아쉬움에 절망할지도 모를 자기보다, 언제나 시도하고 기다릴 수 있는 우라라가 그 도전의 즐거움을 알아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서로를 발전시키는 관계에 나이와 성별이 무슨 상관인가 싶은 의미를 남기는 이야기다. 사실 나는 이 관계의 법칙을 이성 사이에서만 적용하는 거로 여겼다. 어떤 이성을 만나야 하느냐 하는 물음이 생길 때마다, 그 사람을 만나면서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드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즐겁고, 그 사람과 함께하면서 내가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갈 수 있게 시너지효과를 일으키는 관계. 좋은 게 좋은 것으로 새끼를 치듯, 발전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 유키 할머니와 우라라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 관계가 꼭 이성 사이에서만 적용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나이를 초월하여 이어가는 관계에서도 그 '좋음'과 '발전'의 효과는 똑같이 적용된다. 유키 할머니를 만나면서 점점 서점의 아르바이트와 집순이에서 벗어나는 우라라의 변화, 나이 든 노년의 틀에 박힌 모습이 아니라 자기와 다른 청춘의 시절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유키 할머니. 그리고 둘 사이에 있는 BL. 왜 하필이면 BL일까 생각했다. 어쩌면 거기에 작가의 의도가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무언가를 좋아하거나 즐기는 데 나이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키 할머니와 우라라를 통해 보여준 것처럼, 세상의 다양성을 인정하듯 편견을 없애주려는 그 매개로 BL을 함께 넣어놓은 게 아닐까 하고. 세상의 많은 시선이 세운 벽을 깨트려주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편견 없는 사랑 이야기를 즐기고, 공통의 관심사를 이야기하면서 설레는 나이 불문 독자들의 모습이었다. 다만, 다음 이야기를 기다릴 수 있는, 남아 있는 시간이 다르다는 것뿐이다. 그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이므로,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혹시 다음 권, 또 그 다음다음 권까지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분 좋은 기대감으로 살아갈 수 있겠지.

 

 

모든 것은 늙는다. 유키 할머니 딸의 말처럼 집도 늙는다. 지금 청춘을 보내는 우라라도 언젠가는 유키 할머니의 나이가 되겠지. 누구에게도 비껴가지 않는 늙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노년의 즐거움이 달라질 것 같다. 생각해본 적 없던 덕질에 인생의 또 다른 행복을 찾은 것처럼, 무엇이든 열정을 다해 좋아할 수 있다면, 그거면 충분하다. 간절하게 바라는 것들로 오늘 하루가, 기다리는 내일이 즐거울 수 있다. 아마 유키 할머니는 좋아하는 BL 시리즈의 다음 권을 보기 위해서라도, 조금이라도 더 건강에 신경 쓰면서 사실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가 아니라 서서히, 차근차근 다가오는 노년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묻는 이가 있다면 이 책을 보여주고 싶다. 하고 싶은 게 뭔지, 오늘의 즐거움이 뭔지 모르겠다는 청춘이 있다면 이 책을 보여주고 싶다. 누군가의 조용한 한마디에, 늦게나마 찾은 작은 기쁨에 인생의 방향이 확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어떻게 늙어갈지 내 모습이 궁금할 때마다 가장 먼저 종이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내 모습을 떠올린다. 지금도 좋지 않은 시력이니 아마 돋보기를 쓰고 있겠지. 조금은 더디 읽히는 인문서나 과학서보다는 아마 짧은 글을 읽고 있을지도, 몇 컷 만화에 담긴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로맨스 소설 읽는 할머니로 늙어가고 싶다. 연애 세포가 죽어버려 설렘을 잊었어도, 소설 속 주인공들의 달달한 사랑에 지나간 내 젊음을 떠올리고 싶다. 로맨스 소설이 주는 즐거움을 놓치지 않고, 이야기 하나 하나 문장 속의 숨은 소리마저 들을 수 있는 독자로 오래 남고 싶다. 그렇게 좋아하는 거 즐기면서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늙어가고 싶다면 건강을 놓치지 않아야겠지. 그래서 책 읽다가 말고 운동화 꿰어 신고 있다. 운동이라고 부르면서 매일 걷던 그 길을 오늘도 빼놓지 않고 걷는다. 노년을 생각하는 늙은 여자 사람의 소박한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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