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애인 있어요
다온향 / 이지콘텐츠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친구애인' 키워드에 충실한 소설. 내용도 뻔하다. 아닌 척하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너를 좋아했다, 그런데 이제는 참지 못하겠어서 고백하고 말았다, 관계가 어그러지는 게 싫어서 너를 친구 이상으로 대하지 못하겠다, 등등.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떻게 전개될지 눈앞에서 그려진다. 그런 소재의 소설이 가져야 할 무기는 역시, 뻔하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이끌어가는 능력이라고 해야 할까. 안 봐도 이미 결말 다 아는 걸 굳이 계속 읽을 이유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흥미를 떨어트리지 않고 끝까지 밀고 가는 거, 그게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의미로 보면 이 소설은 알면서도 페이지를 넘기게 되지만, 너무 몰입하면서 재미를 느끼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분위기였다. 의외로 등장인물이 많아서 각 커플의 이야기를 듣는 재미도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개취. 등장인물들 모두에게 할애한 분량 때문에 주인공 커플이 더 돈독해질 수 있는 구석구석의 에피소드가 탄탄하지 못한 느낌도 있다.

 

스물셋. 오총사의 집합은 여전했다. 집합의 이유도 똑같았다. 정원의 실연을 위로하기 위한 자리였으나, 모두가 심드렁했다. 정원이 실연당하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더냐. 이번에는 차이는 시간이 좀 빨랐을 뿐이지 뭐, 별다를 게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도 그러려니 하고 술이나 마시고 있던 그때. 늦게 나타난 은표는 그런 정원의 상태를 알면서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다만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뻗어버린 정원을 가만히 데려다줄 뿐이었다. 이때부터 감지가 된다. 아, 은표가 정원을 오래전부터 좋아하고 있었군! 아니나 다를까. 은표는 오래전에 이들이 어린 마음으로 우정을 쌓아갈 때부터 정원을 좋아하고 있던 거다. 그게 성인이 되고 이십 대의 중반을 향해가는 지금 마음을 술렁이게 한다. 고백할까? 말까? 술 취한 정원을 업고 가는데 제정신이 아닌 정원과 제정신인 은표는 이야기한다. 서른이 되어서도 각자 짝이 없으면 서로 애인해주자고. 그리고 7년 후. 오총사는 서른이 된다.

 

서른이 되었다고 오총사가 어디 가랴. 동건만 애인이 생기고 나머지 네 명은 여전히 솔로였다. 그게 그들 사이에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은표의 정원을 향한 갈증만 커가고 있을 뿐이다. 밤바다를 보러 갔던 그때, 정원이 갑작스레 응급실을 찾게 되면서 싹이 튼 은표의 마음은 더는 참을 수 없게 된다. 그날 이후로 은표는 정원을 자기 여자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남들 앞에서도 그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이미 게임 끝인데 뭘 더 가리고 말고 할 거야. 그때부터 정원과 은표 싯구싯구하는 장면들이 빠짐없이 등장하는데, 자고로 어른의 연애란 이런 것이다, 하고 알려주기라고 하고 싶은 건지. 스물셋 그때는 말도 못 하고 가슴앓이 했던 것이, 지금은 노골적으로 표현하면서 누가 봐도 민망한 건 잠시였다. '너네도 알 건 다 알잖아?'라는 눈빛으로 대신 말하며 당당하게 그들의 연애를 즐긴다.

 

이 와중에 어렸을 적에 은표에게 고백했다 거절당한 하정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를 주혁의 관계가 화기애애해지는데, 한번 말 꺼내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말을 하고 나면 직선적이고 적나라해지는 게 이들 오총사의 매력인가 보다. ^^ 애들이 거침이 없어. 망설이고, 아프고 슬퍼하고, 후회도 하는 이들이지만, 결국 자기가 한 선택 앞에서는 거리낄 게 없어지잖아. 그에 따른 책임도 알고. 그러니 당연하게 당당해도 되고. 남들 앞에서 '나, 애인 있어요!'라고 우쭐하며 말하는 이들의 표정이 저절로 그려진다. 그래도, 니들 애인 있어요. 그래서 뭐, 어쩌라고? (좋겠다... 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일러스트 파이 이야기 (특별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토미슬라프 토르야나크 그림 / 작가정신 / 2017년 9월
평점 :
품절


 

소설이 문장으로 풀어내는 장면을 독자가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물론, 그 문장만으로도 소화 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일 테지만, 이렇게 일러스트와 함께하는 소설을 읽을 때면 상상하기만 했던 장면을 눈앞에서 마주함으로써 이야기의 이해가 훨씬 빨라진다.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흥미로움은 배가 된다. 실제로 『파이 이야기』는 이미 영화화되어 관객의 사랑을 받은 적도 있어서인지, 이번 일러스트 특별판은 소설과 영화의 만남처럼 문장과 장면이 함께 만들어낸 애니메이션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처럼 장면을 다 그리지 못해 이야기의 흐름을 놓칠까 겁이 나는 독자에게 안성맞춤인 형태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아직 소설로도 영화로도 만나지 못한 나에게 이 책을 만난 지금이 행운인 것을.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는 가족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형, 그리고 주인공인 파인 파텔. 계속 인도에서 지내는 것의 불안함 때문이었을까. 이 가족은 캐나다로 이민을 위해 동물원 일부를 정리한다. 그렇게 남은 동물 몇몇과 캐나다행 화물선에 오른다. 하지만 이들이 캐나다에 무사히 도착하는 것을 신이 허락하지 않았나 보다. 그들이 탄 배는 태평양 한가운데에 침몰하고 살아남은 이는 파이와 동물뿐이다. 하이에나, 얼룩말, 오랑우탄, 벵골 호랑이와 함께 구명보트에 오른 파이는 생존의 잔인한 현장을 목도한다. 다리를 다친 얼룩말을 하이에나가 잡아먹고, 두 동물의 싸움을 저지하던 오랑우탄을 하이에나가 또 잡아먹는다. 결국, 가장 힘이 센 벵골 호랑이가 하이에나를 처치하기에 이르고, 구명보트에는 파이와 벵골 호랑이만 남았다. 비상식량은 한정되어 있고, 잔인한 호랑이와 인간의 동거는 계속될 수 없었다. 망망대해에서 구조를 바라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고, 모든 것을 잃은 파이는 오직 이 순간에 살아남아야 한다는 다짐뿐이다. 호랑이는 같이 구명보트에 타고 있던 동물들을 다 잡아먹었는데, 이제 남은 건 파이뿐인데, 결국 파이도 호랑이의 밥이 되어버리고 마는 걸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파이는 227일간을 표류하며 살아남았다. 호랑이와 대치하며, 긴장하며, 배고픔을 참으면서 말이다. 그게 가능했을까? 일반적으로 생각해보면, 육지도 아니고 표류하는 바다 위에서 인간이 호랑이에게 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게 있을 수 없는 일로 보인다. 불가능했다. 호랑이가 없었어도 그 위기를 벗어나는 건 어려웠을 일이다. 그런데도 2백여 일이 넘는 시간을 버티며 육지에 도달한 파이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전달하려는 것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소설은 처음부터 긴장하게 했는데, 파이가 신을 언급하면서부터였다. 보통 하나의 종교를 가지는 게 일반적이었다면, 파이는 여러 신에 대한 존중을 표했다. 그가 아는 많은 신에게 기도했다. 그게 안 될 일이었을까? 각 종교의 사제들은 자기가 섬기는 신을 파이도 섬기기를 바라면서 이끌고자 했으나, 파이는 그러지 않았다. 우리나라식으로 하자면, 교회, 성당, 절 모든 곳에 의미를 두고 그 모든 신에 기도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언급된 신으로 파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을 이야기하려나 싶은 찰나, 그들이 오른 배의 침몰과 파이의 표류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어쩌면 이 소설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모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우리의 인생이 한 편의 소설에 가까운, '만들어지는 이야기'라거나. 그렇게 듣게 된 이 소설의 2부에 해당하는, 거의 3백여 페이지에 달하는 태평양 한가운데의 파이 이야기는 생존에 관한 문제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본능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2부에 해당하는 태평양 표류기는 모든 시간이 바다 위에서 진행된다. 하나씩 죽어가는 동물들, 결국 살아남은 호랑이와 파이가 어떻게 그 시간을 견뎌오는지 들려주면서, 생존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러니까 이런 것. 우리 삶은 보편적으로 흐르는 것과 동시에, 이성이란 것이 탑재되어 본성이 먼저 나아가려는 것을 막는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늘 이성적인 판단을 앞세우고 사는 것일 테다. 그러한 일상을 보내는 게 우리의 평소 삶이라면, 파이가 벵골 호랑이 리처트 파커와 함께한 생존기는 수시로 찾아오는 절망과 위기의 순간에 본능이 이성을 누르고 튀어나오는 순간을 증명한다. (이 소설의 3부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유추하자면 인간에게 내재한 생존을 위한 본능의 잔인함이 어떠한지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신에게 갈구해도, 누군가 나를 구해줄 거라 희망을 품으려고 애쓰는 와중에도 이성이 우리를 살게 하지는 않는다. 위기에 빠지는 순간마다, 특히 그 위기가 생존과 관련 있을 때는 더더욱 본능이 이성을 앞선다. 하이에나, 얼룩말, 오랑우탄, 호랑이가 살아남기 위해 싸우듯이 상대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그러한 생존과 본능을 위한 일이었다. (3부에서 이 동물들의 의미가 더 깊게 드러난다) 이 동물들이 파이와 공존하면서, 자기 존재를 위해 어떻게 행동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공포의 대상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지를. 강인해지고 잔혹해질 수밖에 없다. 목숨을 앞에 둔 우리는 그렇게 된다.

 

"지금 우리가 들러보지 않은 동물들도 위험하단다. 그것들이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는 생각은 하지 마. 생명이 있는 것은 아무리 작아도 방어를 한단다. 동물은 뭐든 사납고 위험해. 죽이지 않을지는 몰라도 다치게는 하지. 사람을 긁고 물어서, 상처가 붓고 곪지. 고열이 나고 열흘씩 입원해야 되기도 하고." (69페이지)

 

모든 생물은 광기가 있어서, 때론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방식으로 행동한다. 이런 미치광이 기질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것이 적응의 원천이기도 하니까. 그런 기질이 없으면 어떤 종도 생존하지 못할 것이다. (72~73페이지)

 

내 목숨이 위협 받을 때는, 생존을 향한 이기적이고 무시무시한 갈망도 동정심도 가려져버린다. (189페이지)

 

동시에, 수많은 선택에 관한 고민을 안겨주기도 한다. 앞서 말한, 어떤 순간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생존이 달라진다. 파이(동물들)가 이성을 앞세웠다면 평소의 모습대로 했다면 상대의 강인함에 고개 한 번 들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고, 본능을 앞세웠다면 자기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치열하게 싸웠을 것이다. 파이의 아버지가 누누이 말했던 동물의 방어기제, 본성을 이미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신에게 간절히 바라는 기도를 하면서도, 실제로 응용하게 되는 건 목숨을 건 사투, 본능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본능을 누르고 살면서 세상의 이치에 순응해야 할지, 나를 시험하듯 모험 속에 내던져야 할지 항상 선택의 길에 서게 될 것이다.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던 절망을 생존의 희망으로 바꾼 파이처럼 살아가기 위해, 수없이 많은 내적 갈등을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또 고민한다. 무엇이 이성과 본능, 무엇이 나를 살게 할 것인지를.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에요.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죠, 안 그래요? 그리고 뭔가를 이해한다고 할 때, 우리는 뭔가를 갖다 붙이지요. 아닌가요? 그게 인생을 이야기로 만드는 게 아닌가요?" (459~460페이지)

 

이렇게 유명하고 사랑받은 작품을 이제라도 읽게 된 게 다행이다. 문장과 일러스트가 함께 보여준 재미도 영화를 보는 것 같아서 흥미로웠다. 특히 색채가 강해서인지 동물들과 바다의 장면들이 더 생생한 느낌이다. 사진 한 장으로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움직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생동감이 넘친다. 문장에서 보이는, 동물과의 대치에서 흐르는 긴장감, 이대로 생존할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되는 심각함, 낯설고 생소한 바다의 분위기까지 일러스트가 그대로 전한다. 마치 읽는 이가 파이가 되어 그 바다 위에서 표류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말이다. 올컬러 일러스트 40여 점이 수록된 이번 특별판이, 아직 파이 이야기를 만나지 못한 독자와 관객에게 호기심을 더해줄 것 같다. 문장과 장면 속으로 빠져들어, 힘껏 싸우고 헤엄쳐 육지에 도달할 그 순간까지의 모험을 피부로 느끼게 될지도 모르지.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2017-10-17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18 15: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자책] SALTY SALTY SALTY(솔티 솔티 솔티)
하얀어둠 / 스칼렛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런 책이 있다. 읽기가 망설여져서 미루고 미루다가, 가끔 궁금하긴 하지만 책 선택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아주 완벽히 잊히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기억될 자리의 불안함을 남겨놓는 책. 하얀어둠의 <솔티 솔티 솔티>는 내게 그런 책이었다. 종이책 출간 당시의 입소문에 내 취향이 아닌 듯하여 저기 멀리 미뤄둔 책이면서, 궁금함은 늘 남아있는 책. 호불호가 심하게 나뉘는 것 같아서 내내 망설였다. 종열이의 걸쭉한 욕사포가 거슬리면 읽기 어려울 것이고, 이 짠내나는 남자를 이해하면 한없이 소중한 책이 될 거라고, 누군가가 그랬다. 그 말이 맞더라. 속내를 들여다보고 나니, 순간순간 치고 들어오는 먹먹함이 문장 곳곳에 스며들더라. 여전히 종열이가 쏟아내는 욕이나 막말은 거북하지만, 그가 진심과는 다르게 거칠게 말하는 걸 알게 된 순간 괜히 눈물이 날 것만 같다는 걸...

 

처음부터 등장하는 종열이의 '씨발' 라임은 많이 거슬렸다. 어디 그것뿐이랴. 종열이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욕 아니면 거친 말이었다. 그냥 모르는 사이로 지내도 옆에 지나가는 것조차 싫은 사람. 나에게 종열이의 첫인상은 그랬다. 중국집 운영하는 종열이는 모든 것을 아끼는 남자였다. 최소한의 생필품을 제외하고는, 그에게 소비라는 건 없었다. 한겨울의 맹추위마저도 그에게는 별것 아닌 일상이었다. 뭐 하러 난방을 돌리냐, 뭐 하러 핸드로션을 따로 사는 거냐, 뭐 하러 오래 씻으면서 낭비를 하냐, 등등. 그의 생활은 아끼고, 안 쓰고, 또 아끼고 안 쓰는 것이다. 내가 힘들게 번 돈 남의 아가리에 처넣어주는 건 죄악이라 여기는 사람 같았다. 그런 종열이 앞에 나타난 정지안은 그의 절약 개념을 서서히 무너뜨리는 여자였다.

 

왕따 당하던 남동생의 죽음. 남동생의 죽음을 시작으로 지안의 가정은 무너진다. 곧 어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지안 홀로 남았다. 그런 그녀의 삶이 편할 리 없다. 아르바이트로 대학 생활을 이어가던 중, 호프집에서 운명을 맞이한다. 남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한 무리, 죄는 무거운데 형벌은 너무 가벼워 일상을 누리는 자들. 그들을 눈앞에서 본 지안은, 그들이 자기 남동생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것을 보고,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호프집 주방에서 가져온 칼로 그 무리의 주동자를 찔렀다. 다행히 그의 목숨은 건졌으나 하반신 마비의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안은 징역 6년을 선고받고 담담하게 형을 치른다. 그리고 6년이 흘렀다. 교도소 문을 열고 나온 그녀에게 남은 건, 몇십만 원의 돈과 작은 가방 하나. 그녀의 작은 몸 하나 뉠 곳이 없다. 일할 곳도 없었다. 그때 종열이 지안의 앞에 나타난다. 무작정 끌고 그의 집으로 간다. 잠잘 곳, 먹을 것, 누군가의 그늘 같은 안도를 내놓은 종열은 왜 지안에게 손을 내밀었을까.

 

이해가 안 되는 시작이었다. 그렇게 끌고 갔다고 순순히 종열을 따르던 지안이나, 욕과 거친 말을 쏟아내면서도 지안을 놓지 않고 끝까지 데리고 간 종열이나... 생판 모르던 사이였던 두 사람이 왜 그렇게 만나야만 했을까. 알 수 없다고,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읽어 가는데, 문득문득 울컥해져서 혼났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도무지 내 취향이 아닌 이 글을, 이 주인공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데, 왜 자꾸 이들의 삶을 엿보고 싶은지 모르겠다. 종열이의 짠내는 그럴 수밖에 없는 역사를 가졌다. 지안이의 현재는 종열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 돈 때문에 서글펐고, 돈이 분노하게 했고, 돈을 아끼며 살아야 했던 종열의 시간을 이해하고 싶어졌다. 그런 기억을 가진 누구나 종열과 비슷한 생활을 만들지 않았을까. 돈이 없이는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한 세상에서, 그 순간 종열이 선택한 게 죽음이 아니라 짠돌이 생활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 그래서 오랜 시간이 흘러 지안이를 만나게 된 게 마치 운명처럼, 서로를 보듬고 살 수밖에 없는 사이가 된 거라고 말이다.

 

가방끈 짧은 남자와 전과자 여자가 세상을 살 방법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범한 삶을 이뤄낼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사회의 사각지대에 머문 두 사람을 한가운데로 끌어내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착각이 들 만큼, 절망에서 삶의 의지를 불러오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그렸다. 그들이라고 남들처럼 살고 싶지 않았을까? 예쁘고 멋있게 차려입고, 맛있는 음식 먹으면서, 보기에 그럴싸한 집에, 한겨울에도 반소매를 입고 다닐 정도로 난방을 켜고, 구멍 난 운동화를 버리고 새 신발을 사는 일들. 매일 웃고 사는 일상이 그렇게 갖춰진 것들 때문이라면 못할 것도 없겠지.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삶의 목적은 그런 물질적인 것들이 아니었다. 살아야 하는 일, 살아내는 일이 우선이었던 거다. 누군가가 행하는 소비의 일상이, 그들에게는 삶의 우선순위가 아니었던 거다.

 

세상의 바닥을 살던 두 사람이 만난 오늘이, 점점 내일을 그리는 일상이 되어가는 기적을 본 것만 같다. 꼭 돈 때문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지금 가장 울고 싶은 순간에 이 책을 펼쳐 든다면 어김없이 빠져들고 말 것만 같다. 그들의 간절함을 엿보면서 위로받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다만, 종열이의 지독한 츤데레를 예뻐해 줄 수 있다면 말이지.) 종열이의 말투나 지안이에게서 볼 수 없는 자존감에 화가 나다가도,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들과 같은 삶을 이어온 이들이 겪는 현실이 그대로 묻어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불러올 때면 침묵하게 된다. 전혀 알지 못했던 누군가의 삶을 확인하는 기분이 이런 걸까 싶을지도... 혹시 종열이의 욕이, 거친 말이 그의 삶을 대신 표현하는 걸 알게 되면 그나마 조금은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진심을 드러내는 방식이 그러하여 거슬리더라도 이 소설을 끝까지 읽어줄 아량이 저절로 생길지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 세사르 바예호 시선집
세사르 바예호 지음, 고혜선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읽는 게 어려운 건 아니지만, 읽은 시에 관해 이야기하는 건 꽤 어렵다. 늘 그랬다. 무언가 알 것 같으면서도 결국은 다 알지 못한 채로 시집을 덮는 일이 다반사였다. 특히 이번 시집은 더욱 그랬다. 나에게 세사르 바예호는, 유명하지만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시인이었다. 오랜 시간 절판이었다가 다시 세상에 나온 시들, 여러 시인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시인을 만난다는 게 설레기까지 했다.

 

있는 그대로 읽었다. 문장 그대로 읽힌다. 그러다가 어느 부분에서는 어떤 의미를 감춰둔 단어가 자리하기도 했다. 그의 생각이 엿보이는 부분에서는 각주로 설명되는 배경까지 읽어야 했다. 어느 밤을 기억하고, 어느 계절을 보낸다. 누군가의 일상 같은 인생을 이야기하고, 죽음을 언급한다. 때로는 어둡고, 때로는 화기애애한 형제애를 떠올리게 한다. 그에게는 죽은 형이 그립고, 시대의 배경이 아프다. 특히 인간에 대해 고민하는 그의 시어들은 고통을 느끼게도 하지만, 결국은 희망을 노래하고 싶었던가 보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렇게 오랜 시간 독자들에게 회자할 리 없겠지. 하지만 내가 느낀 그의 시들은 희망보다는 다른 게 더 많이 보이는 듯하다. 어둠, 우울, 괴로움 같은 거. 그 마음을 뭔가 더 표현하고 싶은데,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은근 한발 뒤로 숨기는 것 같은. 하지만 그가 진심으로 하는 말들은 희망과 반대되는 말들을 늘어놓음으로써 고통을 마주하게 하려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런 시간을 마주하면서 건너가는 고통의 순간들이 곧 희망에 닿을 거라는 기대라도 품게 하려는 걸까.

 

피할 수 없는 선을 따라

내가 멀리 아주 멀리

저 신비의 세계로 들어가는 아침,

당신의 발들은 묘지를 향해 굴러가겠지.

(중략)

청동이 우는 동안

당신의 괴로운 마음속으로

한 무리 회한이 지나가겠지.

(부재(不在) 중에서)

 

존재하지 않을 어느 순간을 떠올리기라도 한 걸까. 이 세상에서 사라진 형을 기억해내려 애쓰기도 하면서 그 부재의 시간을 견디기라도 하는 걸까. 그냥 일기처럼 써 내려갔다고 생각하면 평범하게 흘러갔을 문장들이, 젊은 나이에 요절한 시인의 시라고 생각하니 문장 하나하나에서 의미를 찾게 한다. 이런 느낌이겠지, 이런 고통을 담아놨겠지, 그의 사색의 깊이가 이러하겠지, 하는 기대감이 시어에 저절로 묻어난다. 물론 누가 강요하지 않은, 읽는 독자의 느낌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어렵다면, 그냥 문장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의 시간을 상상해보는 것도 괜찮겠다.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그러나 뜨거운 가슴에 들뜨는 존재.

그저 하는 일이라곤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음습한 포유동물, 빗질할 줄 아는

존재라고

공평하고 냉정하게 생각해볼 때…

(중략)

인간이 때로 생각에 잠겨

울고 싶어 하며, 자신을 하나의 물건처럼

쉽사리 내팽개치고,

훌륭한 목수도 되고, 땀 흘리고, 죽이고,

그러고도 노래하고, 밥 먹고, 단추 채운다는 것을

어렵잖게 이해한다고 할 때…

(중략)

내가 사랑함을 알고,

사랑하기에 미워하는데도,

인간은 내게 무관심하다는 것을 이해한다고 할 때…

 

인간의 모든 서류를 살펴볼 때,

아주 조그맣게 태어났음을 증명하는 서류까지

안경을 써가며 볼 때…

 

손짓을 하자 내게

온다.

나는 감동에 겨워 그를 얼싸안는다.

어쩌겠는가? 그저 감동, 감동에 겨울 뿐…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중에서)

 

122편의 시가 수록된 이번 시선집은 세사르 바예호를 만나고 싶었던 독자의 목마름을 충분히 해소해주는 듯하다. 이 시집에 수록된 모든 시를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의 일기를 읽는 느낌으로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그가 세계문학에 남긴 궤적이 대단하고, 중남미 시단의 거장이라고 해도, 아직은 우리에게 낯선 시인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마주함으로써 또 한 명의 시인에게 다가가려는 시도가 그와 만남에 신중하게 한다. 그가 바라보는 인간, 고통에 관한 시선을 같이 보는 시간이 나쁘지 않다. 아직은 내가 다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분도 있기에 충분한 공감을 이룰 수는 없지만, 시 한편 한편에서 보이는 그의 고백 같은 진심은, 그가 세상을 보는 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특히 예상하지 못했던 『스페인이여! 나에게서 이 잔을 거두어다오』 부분에서는 그가 스페인 내전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그대로 담겼다. 스페인의 시련이라고 말하며 아파했다. 특히 전쟁 속에 던져진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어떤 전쟁이든 가장 아프게 보이는 건 아이들일 테니까 말이다.

 

얘들아,

전사들의 아이들아, 그동안에라도

목소리를 낮추렴. 스페인은 지금 이 순간에도

동물의 왕국, 꽃, 연, 인간 사이에서

힘을 쪼개고 있단다.

목소리를 낮추렴. 스페인은

커다란 시련을 겪고 있단다. 어찌할 바도

모르는데, 손에 있는

해골들은 말을 한다, 말을 해.

저 머리 땋은 해골,

저 살아 있는 해골.

(「스페인이여! 나에게서 이 잔을 거두어다오」 중에서)

 

시인의 삶과 닮았다는, 그의 시에서 느껴지는 비극적인 시각이 그의 시어를 더 집중해서 읽게 한다. 그는 형제 많은 집의 막내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가족을 떠나 살았으며, 도망자로 살기도 했다고 한다. 평생의 가난이 불러온 고통과 병 앞에서 그가 표현한 내면의 말들은 그대로 들려온다. 희망에 대해 말하겠다면서 아프다고 그대로 드러낸다. 아픈 원인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그 원인이 아니라고, 어느 것도 원인이 아닌 것 또한 없다면서, 고통의 원인을 또렷하게 한 가지로 말하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시로 마음을 이야기하고, 시로 전쟁의 참상까지 토로하는 일. 세사르 바예호의 시를 만나는 즐거움을 그대로 확인하는 시간이다. 그의 시가 보는 범위가 넓고, 하는 말의 깊이가 다양하다. 결국은 인간 내면의 소리를 내려고 애쓰는 게, 그가 시를 통해서 하고자 하는 말의 모든 것이겠지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syo 2017-09-25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 시 읽었으니 시에 대해 써 보자! 하고 시작했는데, 끝내고 읽어보면 항상 뭔가 읽은 시랑 완전히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더라구요.... 그럼 걍 냅둡니다. 에라이, 모르겠다, 이러면서 ㅎㅎㅎ

자꾸 그래서 아직도 시를 모르나봐요.....

구단씨 2017-09-26 10:49   좋아요 0 | URL
아... ㅠㅠ
당분간, 시는 그냥 읽는 것에서 만족하는 걸로...

stella.K 2017-09-29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구단님,
덕분에 공연 잘 보고 왔습니다.
평소 보고 싶었던 공연이었는데 이렇게 구단님을 통해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이 은혜를 뭘로 갚아야 할지...ㅠ

암튼 고마웠습니다.
행복한 추석되십시오.^^

2017-09-30 2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자책] 심장을 바치다 ㅣ 심장을 바치다 1
찬연 / 동아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와, 이런 집착이 있을까? 사실 나는, 로맨스소설 읽으면서 보이는 집착을 그다지 즐겨하지는 않는다. 내 기준에서 억지스러운 느낌도 강하게 있기도 하고, 그러한 집착이 보이는 광기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걸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예전에 내가 읽은 집착을 강하게 보이는 로맨스소설 몇 권은 그랬다. 그래서인지 강한 소재는 잘 읽게 되지 않았다. 이번에 만난 <심장을 바치다> 역시 그런 느낌이 강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했다. 맥락도 없이 등장하는 집착에, 마치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건 성관계밖에 없다는 듯이, 그게 모든 일의 해결과 마무리를 끌고 올 거로 예상했다. 읽어가다 보니 좀 후회가 되기도 한다. 읽기도 전에 내가 오해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세아가 유현을 자극하는 방법이었다. 억지로 못된 말을 하고, 그가 싫어하는 행동으로 화를 돋우는 일을 자처했다. 마음 속 말들은 그게 아니었는데,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모두 억지스러운 것들이었다. 유현이 듣고 화를 내기에 충분한 말들. 유현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는 세아를 아낀다. 세아의 재능(그림)을 사랑한다. 그녀에게 나는 물감 냄새가 머리를 아프게 하지만, 그것마저 그녀의 일부였으니 싫어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못되게 구는 건 세아나 유현이나 똑같다. 그런데 여기서 좀 다른 점은, 두 사람 각자 과거가 작용하는 현재의 모습이다. 세아는 고아다. 입양과 파양을 거듭 경험하면서 외로움에 싸여있다. 누군가에게 버려진다는 게 세상의 공포였다. 유현이 자기에게 접근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유현에게 버려질 날을 기다리는 게 싫다. 처음부터 악다구니 써가며 단 한 방울의 정도 그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리라 다짐한다. 유현은 세아를 본 순간 돌아가신 친엄마를 떠올린다. 닮았다. 분위기도, 외모도, 표정도. 세아에게 엄마를 봤다. 그가 상처 입은 시간의 흔적을 그대로 느끼게 하는 여자였다. 그러니 그가 필요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세아를 이용하면 된다. 그것뿐이다. 엄마를 닮은 그녀가 그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올 필요는 없다.

 

두 사람은 무슨 관계일까. 세아는 그림을 그리고, 유현은 세아의 그림을 가지기로 한다. 세아의 생활을 유지시켜주는 게 그림의 대가이고. 그렇게 두 사람의 관계를 이어가던 중, 세아는 변한다. 그녀를 둘러싼 외로움을 표현한다. 유현에게 더는 현재의 관계를 이어갈 수 없다는 걸 느낀다. 그가 주는 마음을 보는 순간, 일방적으로 누가 누구를 보살피며(구체적으로는 돈으로 생활을 영위하게 해주는) 이어가는 지금이 싫다. 그와 어떤 관계로 이어가지 못할 지라도 현재의 모습으로 남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묻는다. 자기가 그린 그림 값이 어떻게 계산되어야 하는지를. 그녀가 가진 것이라고는 그림 그리는 재주밖에 없으니, 그 그림으로 그의 욕망을 채워주고 있으니, 이제 그녀에게 가진 것을 전제로 새로운 계산법이 필요했던 거다. 아, 그 순간. 이 여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 읽게 된다. 이 남자가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고 그녀를 봤으면 하고 기도하게 된다. 집착으로, 구속하듯 묶어놓는 게 아니라, 좀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는 두 사람이 되기를 말이다. 실제로 조금씩 변하는 모습으로 소설은 결말을 맞는다. 세아는 새로운 학교, 새로운 친구들로 삶에 웃음을 불어넣는다. 유현은 여전히 세아를 구속하지만, 그 구속의 모습이 피식거리게 할 만큼 힘을 잃었다는 게 안타깝지만, 뭐, 어때. 그렇게 좋아지는 두 사람의 표정을 보면 해피엔딩인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