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 강의 - 중국 최초 통일제국을 건설한 진시황과 그의 제국 이야기
왕리췬 지음, 홍순도 외 옮김 / 김영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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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 "평전"이 아니라 진시황 "강의"입니다. "평전"이리고 해도 진(秦)나라의 전사(全史 혹은 前史)가 포함될 필요는 있겠습니다. 대체 어떻게 해서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는가, 그의 통일 이전에는 어떤 상태에 중원(넓은 의미에서의)이 놓여 있었는가, 이를 개략적으로 이해하지 않고는 그의 위대성, 역사적 의의, 한계 등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이 책은 총 6부, 43강 체제로 이뤄져 있습니다. 43장이 아니라 43강인 것은 이 책이 강의체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고, 그런 까닭에 각 강(講)의 내용은 유기적으로 짜여져 있다기보다, 전 강의 끝과 후 강의 시작이 맞물려 있습니다. 마치 일일연속극의 진행 기법, 궁금할 만한 대목에서 끊고 다음 회를 기다리게 하는 수법과 유사합니다.


왕리췬(王立群)의 강의를 케이블을 통해 자주 보는 편입니다. 꼬 장꼬장하니 곱씹는듯 말투에, 한번 터졌다 하면 그 기세로 달의 분화구라도 찌를 듯 열혈의 달변을 토해내는 카리스마 넘치는 분이죠. 그의 강의는 학자의 그것이라기보다 변사의 연기처럼, 아니면 明淸代 능란한 광대의 재주처럼, 이것일까 저것일까 확신이 잘 안 서는 대목에서 확실한 제스처로 자기편을 향해 확 잡아끄는 마력을 발산합니다. 유명한 정치인의 어록이나 연설 녹취록을 보면, (시쳇말로) 음성지원이 이뤄지는듯 박력 있는 템포와 흡인력으로, 청중이 아닌 (그저)독자를 매혹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물론 제가 왕 교수(허난대학 문학원 소속입니다)의 실제 강의 솜씨를 보았던 경험에 기반한 후광효과일 수도 있겠으나, 이 책을 보면 확실히 그는 글과 말의 어떤 매개로든 의사 소통 자체에 능한 자질을 타고난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만 말하면, 왕리췬의 이 책이 그 저 대중적 흥미만을 유발하는 얄팍한 2, 3차 편집문헌류가 아닐까 생각하는 분도 있겠습니다. 실제로 왕리췬의 학문적 천착이 그리 진지하거나 폭이 넓지 않고, 대중과의 교감에 보다 치우친 편이라는 주장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최소한 제가 방송 강의를 듣고, 이제 진시황 편을 다룬 이 책을 읽고 느낀 점은, 그리 쉽게 진단할 수 없는 만만찮은 내공, 단순히 특정 교수직에 오래 머무른 데서 오는 부대효과 이상의 학자적 자질을 갖춘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굳이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대중과의 소통에 능한 분이라 해도, 스스로 애호하는 정해진 내러티브(대체로 이런 것들은 대중, 아마츄어가 소화하기에 달콤합니다)의 우렁찬, 혹은 매력적인 낭송에 강할 뿐, 논리적 엄정성이나 과학적 신빙성은 다소 결여한 분들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왕리췬은 이 "강의" 시리즈를 기획할 때, 명품 고전, 고급지식의 대중화"를 염두에 두었다고 합니다. 확실히 그의 말투, 또 대중(독자)의 반응을 미리 점치고 한 수 앞서 질러 주는 이야기의 가지치기 솜씨가 탁월합니다. 그러나 그의 행보는 또한 신중하기도 합니다. 이 책(강의)만 해도, 전국책, 사기(사기 중에서도 본기, 열전, 세가 등을 두루 오가며, 그의 이동[異同]을 모두 논하고 있습니다), 한서, 후한서, 자치통감, 회남자, 그리고 명대의 잡기, 청대의 고증학 문헌들을 모두 인용하고 있죠. 시원찮은 데마고그라면 책 한두 권의 논지를 그 빈약한 두뇌에 임시 이식하여, 다 닳고 해질 때까지 우려먹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류는 크로스레퍼런스의 필요함을 이해하고, 또 그 번거로운 작업의 정수를 자기 것으로 소화할 능력이 되죠. 왕리췬은 자기 주장을 어느 대목에서건 분명히 펴고 있지만, 일방적인 비약이나 돌출적인 강변이 아닌, 치밀한 논리와 검증을 토대로 설득력 있는 결론을 도출합니다.


학계의 의견이 갈리지 않는 부분에선, 기록들이 살짝은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는 대목들을 대조 교차시켜, 교육적 관점에서 오늘날의 대중이 수용하기에 가장 무난한 견해를 잘 편집, 정리하여 알려 줍니다. 예컨대 합종책의 마스터마인드 소진의 일화를 소개하는 대목에서는, 사기열전의 소진편과 전국책의 서로 미세하게 엇갈리는 부분을 교차 전재하며, 글 속에서 화석화한 캐릭터가 아닌, 생생히 역사 속에 살아 있는 일세의 모사꾼 소진의 진 면모를 전달합니다. 장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기 등 역사서의 기록만 보면, 장의를 발분시키기 위한 소진의 의도, 그리고 이를 이해하면서도 결국 秦의 천하를 위해 자신만의 그랜드플랜, 즉 연횡책을 추진했던 그의 비전과 심산이 잘 납득되지 않기도 했습니다. 시원시원한 왕리췬의 변설은, 이 모든 난점을 특유의 호쾌한 웅변을 통해 극복하게 도와 주더군요.


진시황 이야기를 하는 중에 왜 이렇게 서론이 긴 걸까요? 장양왕(자초), 여불위나 조비, 노애의 이야기라 해도, 본격적인 시황의 스토리에서는 다 서곡일 뿐입니다. 만약 이게 "평전"의 포맷이라면, 아마 예사의 플로팅과 확고한 지식 코르푸스의 뒷받침이 없는 상태로 변죽만 울리다가 주저앉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러나 이 책의 포맷은 앞서 지적한 대로 "강의"입니다. 학술적 정보만 정연히 전달하는 문헌과는 달리, "강의"는 듣는 청중의 입체적, 싫용적 이해를 주된 목적으로 합니다. 왜 시황의 통일이 그토록 중대한 의미를 지녔는가? 서북 변방에 자리한 秦의 통일이 그토록 의의를 지니는 이유를 정확히 알려면, 앞선 시대(소위 先秦期)의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강의의 빼어난 점은, 진시황의 출생의 비밀을 단지 통속적 흥미의 차원으로 격하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진의 통일은, 나머지 육국의 아픔과 눈물을 그 밑거름으로 삼았습니다. 만약 영정(시황)이 조나라 장사치 여불위의 아들이었다면, 진은 통일을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정(조정, 혹은 여정!)의 즉위로 망국을 맞이했다는 소립니다. 대단한 반전이 아닐까요?


이 책의 첫 강 제목을 보십시오. "진시황 암살 프로젝트"입니다. 마치 TV 사극에서, 시간적 순서를 다소 셔플링하여, 가장 극적인 이벤트를 맨 앞에 대뜸 배치하는 파격 수법과도 유사합니다. 암살이라는 그 소재도 충격이지만, 망국의 한을 풀기 위해 자객들이 그처럼이나 끊임 없이, 제 한 목숨 아끼지 않고 몰려들었다는 그 사실도 놀랍습니다. 시황 정은 비록 본인의 암살은 면했지만, (책의 이후 파트에서 보듯) 환관 조고(하필 조씨일까요?)의 전횡, 미숙한 후계자들의 파국적 시정 등으로 그 잔혹한 대가를 대신 치르게 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그처럼이나 힘들여 세운 제국의 창업이, 그처럼 짧은 시간에 붕괴할 수 있었을까요? 왕리친은 이 현상을 패자부활의 신원으로 해석합니다. 그가 이른바 출생의 비밀, 또 연이은 암살 시도("프로젝트"라 불릴 만했습니다)에 대해 긴 분량을 할애하는 이유는, 강압과 무력으로 이룬 통일 제국에 대한 불승복의 한을 표출하는 패잔 육국의 원혼을 달래며, 진정한 중화 제국의 내이션 빌딩이 한 단계 후 한 고조 유방의 대업에서 완성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그는 이 과정에서도 공정함을 잃지 않아, 영정은 분명 영정일 뿐 여정이 아님을 확언하고 있습니다).


강의의 포맷이라는 점 감안하더라도, 예컨대 대기(大期)의 자구를 해석하는 중 10개월설과 12개월설을 논하는 부분은 다소 난잡했습니다. 더 간이한 설명으로 전달이 가능했으리라 봅니다(12개월설은 차라리 여불위부친설의 입장을 반박하는 쪽인데, 왜 그런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면, 제가 알기로 秦의 객경을 지낸 범저는, 이름을 范睢(범수)로 쓰는 게 더 정통입니다. 다만 이 글자가 현재 중국에서는 물수리 저(雎)로 아주 바뀌어 버렸습니다. 쓰기는 물수리 저로 쓰는데(눈목目 변이냐, 버금 차且변이냐에서 차이가 납니다) 읽기로는 격식상 sui, 즉 우리식으로 말하면 물이름 수로 읽는 것으로 압니다(단, 네이버 중국어 사전을 찾아 보면 "범저"에 가깝["판-치에"]다고는 하나, 제가 알기로 이는 대중의 오독이고, 학술적 입장에서는 sui로 발음하는 게 통례입니다). 이런 입장을 떠나서, 한국의 고전 애호가들에 더 익숙한 "범수"라는 독음이 더 바람직하지 않았을까 하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장양왕의 초명을 "이인"이라고 하는데, 한자가 전혀 나와 있지 않아 혼란을 준 점도 다소 눈살이 찌푸려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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