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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인류 2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1권에서 그 실험 과정의 세세한 묘사는 과감히 생략한 채, 베르베르는 다비드-오로르-나탈리아 들의 이후 성공담으로 시원스레 치닫습니다. 한 세기(아니, 두 세기인가요?) 전 자기 나라가 배출한 세계적 지성 쥘 베른이 강박적으로 디테일에 집착한 걸 고려하면(어찌나 그 정도가 심했는지, 베른의 세부 묘사의 대부분은 160여년 지난 지금도 거뜬히 타당성을 유지할 만큼이죠), 이 재기넘치는 프랑스인은 미션의 자체완결성보다는, 그를 접하는 대중의 엔터테인먼트적 효용을 더 중시하는지도 모릅니다. 그 점에서 어찌 보면 이 책이 주장하는 초시대적 가이아의 항존성과는 묘한 역설적 대비를 보이구요. 만약 오로르들이 그처럼 "대충대충"의 직업 마인드를 지녔다면, 아마 대단히 운이 좋거나 초월적 존재의 개입(deus ex machina)이 없는 이상에는 그런 기막힌 업적("제3인류의 창조")를 이루기가 어렵겠다는 점 말씀 드리고 싶네요. 하찮은 실험이라도 목숨을 걸다시피한 집요함과 정밀성이 결여되면, 백이면 백 실패하는 게 냉정한 현실입니다.
수시로 잘도 결정적 국면에 끼어들며, (스포일러라서 말할 수는 없으나) 중반부에서 반칙성 무대 출연을 하기에 이르는 가이아의 경우, 대단히 특이한 개성을 지닌 의식체입니다. 가이아가 신이 아님은 이미 제가 앞 리뷰에서 언급한 바 있고, 자신도 거의 투정 어린 한 대사에서 이를 분명히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를 신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귀를 열고 뇌를 작동시키면서도 듣지 못해.." 어쩌구) 신은 아니지만 그 엄청난 사이즈 때문에 타 생명체에 끼칠 영향 범위가 지대한 그녀(일단 여성이라고 하죠. 가이아는 본디 신화 체계에서 gender가 여성인 신이었고, 이 책에서도 그 주제가 인류의 살 길이 여성성의 증가에 있다는데 말입니다)는, 눈과 귀와 (결정적으로 중요한) 손과 팔이 없는 불구의(?) 존재지만, 신체 세부 부위에 대해 대단히 미세한 범위로 튜닝 조작이 가능한가 봅니다. 그녀가 소설 곳곳에서 일으키는 자연재해(의 응보)야 그렇다고 쳐도, 어떻게 남극 특정 지점에서 특정 대상(그녀가 "미니 인류"라고 부르는 우리 종의 몇몇 인사)를 향해 정확한 크레바스를 유발할 수 있을까요? (역자 이세옥 선생은 "동티"라고 표현합니다) 예컨대 우리 인류 중 누구라도, 간질간질 괴롭히는 모기 한 마리의 뺨을 향해, 정확히 터럭 한 올만 곤두세워서 그 싸대기를 후려 칠 능력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소설에서 가이아가 여러 번 선뵈는 묘기는 딱 그 수준입니다. 그런 서커스 자질의 보유자이긴 하나, 그렇다고 신은 아닙니다. 신은 고사하고, "저들 인간이 설마 나에게 모종의 복수심에서 저런 짓(석유 시추를 위한 굴착, 지하 핵실험)을 할까?" 하는 소심함마저 내비치는 게 가이아입니다. 우리하고는 세계와 자연을 바라보는 스케일부터가 다르므로, 가령 종의 개체 중 20%를 그저 경고 차원에서 쓸어버리고도 별 가책을 느끼지 못합니다. 구약성서의 신은 그러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이 2권의 초반부에서 가장 시니컬하니 멋진 개성을 드러내 보이는 굴바하르 모카담 장군입니다. 그의 손윗누이는 의사를 꿈꾸던 재원이었으나, "차도르를 입지 못하게 하는" 샤 팔라비("팔레비"가 정확하겠습니다만)의 압제에 맞서 저항의 선두에 나섭니다. 모크 장군은 (자신의 말에 따르면), 고작 "늙은이들에게 어린 신붓감을 대어 주는 행위의 합리화나, 술이나 배꼽춤을 단속하여 줄이는 일에 정력을 쏟는 신세"로 자신을 희화화합니다. 모크 장군의 말을 빌리면, "누님은 이제 그 쓴 차도를 벗을 자유가 없게 된 채, 일개 부엌데기 신세로 전락하여 매형과 매일 부부싸움이나 하는 처지"로 떨어졌죠. 사실 이것도 말이 안 되는 게, 샤 팔레비를 축출할 무렵 대학생이었다면 지금 이 여성이 몇 살이란 뜻입니까? 아무리 상대적 시간의 배경이라고는 하나 구체적 타당성이 결여된 창작의 방종이라는 비판을 들어 마땅합니다. 여튼 페미니즘과 정치적 진보 사조의 모순적 충돌은, 이 책 1권에서도 오로르의 모친과 한 모슬렘 여성 사이의 난투극으로 우스꽝스럽게 드러난 바 있죠.
베르베르는 소설 곳곳에서, 이른바 진보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적 풍자를 서슴지 않고 드러냅니다. 미 제국주의의 착취와 기만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대대적 환영을 안고 등장한 이란 이슬람 혁명이지만(호메이니는 바로 프랑스 정부가 마련해 준 망명처에서 고국의 혁명을 원격 지원했습니다. 프랑스의 톨레랑스가 아니었으면 오늘의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존재할 수 없었죠), 그 혁명의 과실은 가장 날카롭고 위협적인 비수로 바뀌어 오늘날의 서구 문명 일반을 겨누고 있습니다. 이 현실은 이 2권에서 "800여기의 핵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기지"로 묘사되어, 이슬람 근본주의의 villain적 스탠스를 의심 없이 분명히합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악마의 시":를 쓴 살만 루시디처럼 베르베르도 아야툴라의 심판 대상이 되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살만 루시디는 "예언자"에 대한 직접 모독의 서술을 썼고, 인종적 배경상 미움을 살 만한 다른 이유가 있었으며, 이슬람 율법의 사형 선고가 그리 단순한 절차에 따라 집행, 적용이 되지는 않겠습니다만)
1권에서 신종 독감 백신 구입을 위한 예산의 방만한 적용으로 고위 공직자들이 탄핵 대상이 되는 대목이 잠시 나옵니다. 그런데 그 대목은, 바로 이 2권에서의 전폭적 장면 전환을 위한 복선이었던 셈입니다. 다만 이해가 안 되는 건, 재앙적 전염병이 전 지구를 휩쓸었다고 해도, 어찌 그리 단시일에 글로벌한 무정부상태가 빚어질 수 있을까, 또 그 은폐된 과학 기지에서, 다비드 들이 그처럼 쉽게 인간적 품위와 절제를 잃을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마치 영화 에일리언 2편에서, 리플리의 무리가 여아, 고양이, 그리고 자신들의 목숨을 지키려드는 그 씬을 연상케 했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 소설에서 악력이 센 나탈리아는 영화 X-men 2(2003)에서 레이디 데쓰스트라이크(켈리 후 분)를 떠올리는 바 강합니다(신장은 비록 큰 차이가 나지만).
테헤란발 핵무기의 궁극적 겨냥이 이스라엘이 아닌, 바로 수니파 총본산인 리야드를 겨냥하고 있다는 말은 근거 없는 억측이 아닙니다. 시야가 좁은 근본주의자들은, 궁극의 적이 아닌 눈 앞의 원수를 더 못견뎌하는 법이니까요. 그런 통찰은 옳습니다만, 그렇다고 이슬람을 싸잡아 테러러스트, 세계 평화의 적으로 몰고, 반대로 서구 민주주의, 반전체주의의 협력 대상으로 유태인을 설정함은 단순하고 위험한 발상입니다. UN 사무총장이 지나치게 정치적 비중이 커진 점도 현실감이 떨어지고, EU라는 국제 정치 단위는 실종되어 보이질 않으며, 러시아와 중국을 그저 이슬람 후원 세력으로 묘사하는 점도 타당성이 결여되었습니다. 설사 "외계인 시나리오"가 사기로 드러나더라도, 국제 정치계나 대중의 여론이 그런 방향으로 선회하진 않을 것입니다. 다만 독감에 걸려 몰살하는 아야툴라 페라지 들의 운명이 대단히 코믹했던 건 분명합니다.
이 책은 1부의 마무리라고 합니다. 아직 완결된 소설이 아니므로, 제 2부(한국판으로는 3권, 4권)의 속간을 기다려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