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인류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제3"이란, 보통은, 미지의, "너"와 "나"가 아닌 낯선 존재를 지칭합니다. 아직 그를 향한 구체적인 관계맺음이 이뤄지지 않은, 그 타인성조차도 정도가 불확실한 대상이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제목에서의 "제3"이란 수식어는, 그런 의미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주인공들(다비드, 오로르, 그리고 프랑스 제 5공화국 대통령, 심지어 이란 대통령 자파르 등)을 제외한 "나머지 인류"에게는, 이 제3인류는 말그대로 "당혹스러운 제 3자성"을 지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디까지나 주인공들의 시선으로 작품을 여행하는 것이므로, 에마슈라는 "미래의 희망(2권 이후에서는 그 반전이 암시됩니다만)"이 제 3자일 수 없습니다. 이 선량하고 유능한 미니어처들에 대해 마치 자식과 같은 따뜻한 시선을 보내게 되고, 때로는 그 창조주들의 이상하리만치 무심한 처신들을 향해 따가운 눈초리를 보낼 정도로 정을 갖게 되는 건 저만의 경험이 아니지 싶습니다.


작디작은 모습으로 미래의 지구 운명을 책임지게 되는 "제3인류"가 한쪽 지점에 놓인 반면, 저 멀리 심층의 구석에는 거대한 사이즈를 한 또다른 인격체가 존재합니다. 우리가 종래 일종의 신으로 착각(....)해 왔던 가이아가 그것입니다. 베르베르가 상정한 가이아는, 종래 일부 과학저술가들이 즐겨 논하던 바로 그 인격체적 사고와 감정, 호흡 특성을 지닌, 대단히 "인간적인" 가이아의 모습을 그대로 따 왔습니다. 가이아는 분명 인간(이른바 "제1인류")의 창조주이기는 하나, 원초의 생명을 빚은 신적 존재는 아닙니다. 그 역시 우연의 물리 작용으로 자신의 형체를 갖게 되었고, 어떤 까닭인지는 모르나 의식을 지니고 있습니다(이 가이아는 지난 내력을 구체적으로 기억하며, 아픔을 느끼고 자기 보존의 본능이 있으나, 시각과 청각을 지니지 못합니다. 반면, 하찮은 미물인 우리 인류[제2인류]도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존재 근원의 의문에 대해서는, 자기 자신을 향한 형태로 떠올리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제 거죽에 기생하는 뭇 생명체를 두고는 냉소와 자비의 심기를 동시에 띨 줄 알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존재적 의문을 갖지 않는 모습도 특이한데요, 이로써 우리는 그가 신이 아님을 확인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what I am의 근원적 속성을 지님을 추론할 수도 있지만, 대체로 전자 쪽의 결론이 합당한 듯합니다).


총명하고 창의적이나, 튀는 개성과 독특한 기질로 무난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두 젊은 지성이 있는데, 다비드와 오로르가 그들입니다. 이 중 다비드는, 놀랍게도, 한 세대 전(이라고는 하나, 작가의 말대로 이 작품에서의 시간 진행은 "상대적"입니다),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올랐던[!] <상대적이고 절대적인...>의 저자 에드몽 웰즈[헉!]의 증손자입니다(이러니 벌써 물리적으로는 앞뒤가 안 맞는 설정이죠. 하지만 넘어가겠습니다). 그의 부친은 용감하게도 남극의 극한 지점을 찾던 중, 뜻밖의 과학적 발견(이런 발견이 실제로 이뤄진다면, 그건 이미 "과학적" 발견에 국한되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변의 우려처럼, 학계와 미디어, 이 개명한 시대의 검증력은, 엄연한 진실과 실증을 두고 무지와 편견, 혹은 교활한 이해관계의 변수에 압도될 만만한 수준이 결코 아니구요[뒤에 나오는 "더 결정적인 증거"의 발굴 아닌, 최초의 그 발견만으로도 쓰나미와 같은 파장을 몰고 올 것입니다]. 베르베르는 지나치게 비관적인 세계관을 이 대목에서 노출하는데, 단언하지만 이는 큰 설득력이 없습니다)


이 책에는 억울하게 사기꾼으로 몰린 과학자의 사례로 파울 캄메러(오로르 캐머러의 증조부라고 합니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자살로 비극적인 생을 마감한 건 맞습니다만, 그의 주장이 명백한 진리였음에도 모종의 음모에 의해 오명, 누명을 쓰고 죽은 건 아닙니다. 베르베르의 이 부분 서술은, 어느 정도 토마스 쿤의 이른바 "패러다임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획득형질(라마르크의)론이 시대의 더께를 떨고 다시 이론의 중심으로 부상하려면, 아직 먼 세월과 검증의 지원을 기다려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세대는 이미 라마르크의 오류의 낙인을, 다윈의 입장에 진리의 공증을 해 준 셈이나 마찬가지인데, 일부 진보적인 시각에서는 가까운 장래에 극적인 반전을 기대할 수도 있다고 하는군요. 이 책에서는 상어 따위의 단성 생식 사례 등 충격적인 팩트를, <상대적이고...>로부터의 재인용 형식을 통해 독자에게 제시합니다. 베스트셀러가 많은 작가, 상상력과 지식이 풍부한 작가만이 누릴 수 있는 흐뭇한 특권이라 하겠습니다. 저도 간만에 열린책들에서 번역되어 나온 그 두툼한 책을 곁에 끌어다 놓고, 이 책 저 책 왔다갔다 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가졌죠.


p99에 보면, 우리 현생 인류(이른바 제 2인류)의 그 모든 메저먼트 수치에 10을 곱한 수를 지닌 거인들(제 1인류)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그런데, 과연 17m의 키를 가진, 우리 인류와 비슷한 신체 구조를 지닌 거인의 몸무게가, 우리 인류 성인의 평균 몸무게 70kg에 10을 곱한 수치, 0.7t밖에 나가지 않을까요? 책에도 나오듯, 17m면 건물 한 채의 높이입니다. 황소 한 마리 몸무게도 평균 500kg입니다. 구조가 닮음꼴이라는 가정 아래, 길이가 10배이면 넓이는 그의 제곱인 100배, 부피나 몸무게는 그의 세제곱으로 커지는 게 원칙이죠. 다만 유기체의 여러 특성상, 몸무게가 세제곱으로 불어나지는 않음을 감안하더라도, 700kg은 너무 작은 수치입니다. 추정하건대 티라노사우루스의 경우 10t을 보통 이야기합니다. 인류가 타 척추동물에 비해 그닥 날렵한 구조는 아니므로, 대략 7t 정도는 생각해야 얼추 균형이 맞겠습니다. 2권에 보면 13cm의 키를 가진 에마슈가 700g의 몸무게라고 하므로(베르베르도 스스로 모순을 인정한 셈입니다), 최소한 체중에 있어서는 100배수의 원칙이 적용되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이 책에는 모럴로부터 자유로운 세계관을 지닌 여러 주인공들이 나옵니다. 사실상 오로르의 경우는, 늙은 여교수 크리스틴과 일종의 "스폰싱" 관계를 맺은 셈인데, 독자로서 이런 주인공의 입장에 선뜻 제한적 동조라도 해 주기가 몹시 꺼려지더군요. 아직 소설이 미완결이니만큼, 이 캐릭터적 복선이 향후 어떤 구실을 할지는 지켜 봐야 할 일입니다. 실물의 신장이 프랑스인치고 평균에 결코 떨어지지 않을 베르베르가, 이처럼 구체적이고 실감나는 "단신의" 다비드라는 성격의 주인공을 빚어낸 건 대단히 흥미로웠습니다. 프랑스인 대통령 스타니슬라스 드루앵이 미 대통령 프랭크와의 통화에서 그의 과학적 지식이 결코 상대에 못지 않음을 과시하려 한다든가, 오로지 금기 위반에 대한 쾌감을 위해 불륜, 코카인 흡입, 난교에 탐닉하는 모습을 그린 점도 좋았습니다. 베르베르가 그처럼 故 미테랑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지닌 줄은 이 작품을 보고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읽으면서 웃음을 멈출 수가 없더군요.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은 현실 풍자의 기능을 대단히 멋지게 해낸 우화임에 분명합니다.


아프리카의 피그미 부족과 서아시아의 쿠르드 족, 그 기구한 운명에 대해 <상대적...>의 어카운트를 통해 제법 상세한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모잠비크의 독재자가 바추카포를 이용해 코끼리 사냥을 즐기는 행태, 서남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반인도적이라 할 만한 원목 남벌 행위, 이 모든 게 가이아론적 관점에서 성공적인 재해석이 이뤄짐은 이 소설의 분명한 성취 중 하나입니다. 소설은 재미 뿐 아니라 일정의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음을 독자가 스스로 느껴야 그게 성공인 법인데, 이 점에서 베르베르는 지금껏 그래 왔듯 대단히 "잘하고" 있습니다.


p78 에 보면 PACS을 "시민연대협약"으로 옮기고, 이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번역용어가 대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이지만, 이미 국내 학계에서 이리 쓰는 걸로 굳어 버렸으므로 역자 이세욱 선생도 별 방법이 없었을 겁니다. 특히 짐 모리슨의 "디 엔드"가 배경에서 하는 기능을 상세한 역주로 해설 받을 수 있는 체험이란, 우리 독자가 다른 분에게서 쉽게 기대할 수 없는 보람이겠습니다.


p 356
체중 관리를 해도 → 해도

p427
찬찬이 → 찬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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